449 신위 획득 (2)
“와우.”
로칸의 노림수는 제대로 통했다.
해신이란 작자도 이런 식으로 신성을 쌓은 것이 아닐까 생각 될 만큼, 막대한 신성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이 지배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신성이 소모되겠지만 그저 단발적으로, 아주 잠시만 유지하는 것이라면 마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때문에 로칸은 바다를 돌며 광범위하게 지배의 힘을 발휘했고, 어마어마한 신성을 쓸어 담았다.
범위가 넓고 지배해야 하는 해양 생물의 수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기에, 고작 마나의 소모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로칸에게는 사기적인 스킬이 하나 있었다.
바로 버서크. 혹은 그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폭력의 왕을 사용할 때는 무한의 마나를 자랑하기에 부담 없이 지배의 힘을 팍팍 퍼트릴 수 있던 것이다.
애초에 유지가 목적이 아니라 한순간 그를 믿도록 만들어 신성을 뽑아 먹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각 지역당 많은 시간을 할애할 필요도 없다.
스치듯 지나가는 것만으로 주변의 해양 생물들이 감화되어 그에게 신성을 꺼내 바쳤다.
생명과 신성을 거두는 것은 아니기에 대부분 그 하나하나의 크기가 작게는 1~10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수가 수천, 수억 마리에 이르니 고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여유 신성 확보 7,731,324,676 / 10,000,000,000]
무려 77억! 천상의 바다를 샅샅이 훑고 다닌 것만으로 단숨에 77억에 이르는 신성이 모였다.
물론 그사이 이곳저곳에서 생산된 신성도 포함된 것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훌륭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한 바퀴 돈다고 또 주진 않겠지?”
생각 같아서는 다시 한번 천상 전역의 바다를 훑고 다니고 싶을 정도.
그만큼 단숨에, 막대한 신성을 모은 것은 기뻤지만 나머지 23억을 모을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일단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보겠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 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정령계 정도라면 상생이 가능하지.”
다음 타깃이 누가 되어야 할지는 명확했다.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진 사이가 하나 남아 있었으니까.
바로 유명계의 왕들이다.
로칸에게 두 왕을 잃은 뒤, 정령계의 공격까지 받아 제법 영토가 축소된 그들이라면 몽땅 잡아 죽인다고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틀어진 사이였고, 든든한 우군인 정령계가 지척에서 버티고 있으니까.
더욱이 마계와는 거리도 멀어서 역공을 당한다거나 할 우려도 없었다.
유명계의 왕들은 로칸으로서는 무조건 잡고 가야 할 존재들이라는 뜻이다.
이미 더 큰 세계인 마계를 통합하면서 지위상으로는 그들 왕보다도 우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로칸이지만, 그 어떤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물론 그런 것이 왔다 해도 모르는 척, 못 받은 척했겠지만 말이다.
“여럿을 끌고 갈 것도 없지. 나 먹을 것도 부족한데.”
하지만 로칸은 마계의 힘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천계와 함께 천상에서도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였으니 반신 몇을 대동하고 움직인다 해도 마계의 총전력에는 큰 차이가 없겠지만, 그들과 나눠 먹을 신성이 아까운 것이다.
기존의 원한이야 어찌됐든 그가 유명계를 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신성의 획득 때문이니까.
그렇게 다음으로 먹어 치울 만한 자유 도시들을 물색하며 가뿐한 마음으로 이동을 시작한 로칸은 유명계에 들르기 전, 먼저 정령계를 찾았다.
대정령 중 하나를 만나 긴밀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왕의 위에 올랐다지? 축하하네.”
그는 로칸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지만 사실 그들이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며 웃을 형편은 아니었다.
정령계가 순리를 거스르는 유명계를 싫어하는 만큼이나 마계와도 사이가 안 좋은 것이다.
그나마 인간이라는 종족을 유지한 채 마왕의 자리에 올랐고, 또 그 이전부터 정령계와 친분을 다져 놓은 덕분에 대화가 가능한 것이지 아니었다면 정령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정령들에게 공격을 받았을 터였다.
“감사합니다.”
“그래, 이번에는 어떤 일로 찾아왔나?”
지난번에는 하멜을 소개하기 위해 잠깐 들렀을 뿐이지만 이번에는 다르다는 사실을 대정령 역시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물었고, 로칸도 말을 돌리는 대신 자신의 용건을 털어놓았다.
유명계의 왕들을 처치할 것이라는.
그리고 그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를 때, 혹은 치르고 난 뒤 정령계가 개입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왕들이 사라지면 무주공산이 되는 만큼 정령계가 욕심을 부릴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본디 땅이나 힘에 욕심을 부리는 놈들은 아니지만 유명계를 정화하여 없애 버리겠다는 생각은 충분히 품을 수 있으니까.
“그럼 자네가 취할 텐가?”
“일단은 그렇겠죠. 하지만 영토를 확장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적당한 수준을 유지할 테고, 영혼을 다루는 마족 반신이 이곳을 대신 관리할 겁니다.”
“마족이?”
그 말에 대정령의 기운이 흔들렸다.
유명계의 왕도 거슬리지만 영혼을 다루는 마족 반신 역시 그들의 입장에서는 다르지 않은 불쾌한 존재인 것이다.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로칸이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환마계를 경계하셔야죠.”
“흐음.”
“유명계가 완전히 사라지면 그다음은 환마계와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물론 정령계야 대정령들께서 합심하여 방어가 가능하다지만, 저들이라고 뭉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요. 유명계를 남겨 두는 것은 그저 견제와 균형의 의미입니다. 제가 보장하지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유명계와 환마계, 정령계는 서로를 견제하는 입장이니까.
그런데 만약 그 힘의 균형이 깨진다?
대번에 전화의 불길이 치솟을 게다.
무혼의 왕이 실각하며 한바탕 내전을 치른 환마계라지만 먹음직스러운 땅덩어리를 두고도 계속 싸움박질을 이어 갈까? 내부를 통합한 뒤 정령계를 노리려고 할 수도 있지만, 대정령들의 힘이 만만치 않은 만큼 일시 동맹을 맺어 정령계를 나눠 먹고, 그다음 자웅을 겨루는 쪽을 택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조건.
가장 좋은 것은 로칸이 환마계까지 정리하는 것이겠지만 인간이자 마왕인 그이다.
언제 어떤 마음을 먹을지 모르니, 정령계의 입장에서도 그것까지는 찬성하거나 방관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다면 환마계와 손을 잡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
“알겠네. 유명계‘만’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렇게 로칸은 정령계의 협조를 얻어 냈다.
환마계가 날뛰어 댈 수도 있지만 사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그것을 빌미 삼아 환마계까지 먹어 치우면 자신이야 좋은 일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모두 나중의 일.
일단은 눈앞의 상황부터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유명계로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흐음?”
없다. 아무것도 없었다.
유령들이 돌아다니고, 산자의 생기를 빨아먹기 위해 혈안이 되어 달려들어야 할 텐데, 한참이 지나도록 나타나는 유령이 단 한 기조차 없었다.
자신의 방문을 알아차린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딱히 존재감을, 신성을 감추지도 않았으니까.
어딘가에 모여 대비를 하고 있겠지.
“카이!”
이렇게 되면 로칸도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즉시 카이를 소환했고, 대붕의 모습으로 변해 유명계의 하늘을 날았다.
안개처럼 진하게 깔린 영혼의 기류 따위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정령들처럼 진한 속성력을, 조화의 기운을 발하는 카이는 공기청정기처럼 주변을 정화시켰고 시야 확보 역시 전혀 문제가 없었다.
“어랍쇼?”
그리고 놀랍게도, 가장 가까이에 있던 녹염왕 고스미의 거처에 도달했을 때, 로칸은 그곳마저 텅 비어 있음을 확인했다.
“다 토낀 건가?”
충분히 의심해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들이 적대를 선포한 로칸이 유명계의 두 왕을 한꺼번에 잡아 죽이고, 나아가 더욱 강대한 힘을 얻어 마계까지 통일했으니까.
이 정도면 다음은 누구 차례인지 절로 떠올릴 수 있지 않겠나?
유명계를 버린다는 것은 그동안의 기반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지만 그것이 죽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어쨌든 반신의 힘을 가진 그들이라면 작게나마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고, 어쩌면 목 좋은 곳에서 더 크게 영토를 키울 수 있을 터였다.
“일단 가 보자.”
뀨웃!
이상했지만 모두 돌아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함정일 지도 모르니까.
놈들이 어딘가에 숨어 자신에게 치명적 일격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없군.”
다음으로 방문한 청염왕 시리한의 거처 역시 마찬가지다.
왕의 거처가 비워진 것은 물론, 그 영토 내에 단 한 마리의 유령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있었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귀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걸로 보아, 이곳을 떠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닌 듯싶었지만, 어쨌든 새끼 유령 하나 없이 모조리 사라진 것만은 확실했다.
“뭐야, 여기 모여 있었군?”
그리고 마지막, 홍염왕 라이톤의 거처에 이르렀을 때 로칸은 자신을 기다리는 세 명의 왕을 마주 할 수 있었다.
“다른 놈들은 어따 팔아먹었냐?”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건들거리는 로칸과 달리 세 왕의 표정은 무섭기 그지없었다.
“궁금한가? 그럼 보여 주지.”
키아아아아악!
라이톤이 입을 벌리자 가공할 귀곡성이 퍼져 나왔다.
고통 속에 절규하는 수십만, 수백만 영혼의 비명 소리가 심령을 뒤흔들어 놓았다.
[타이틀 불굴의 의지의 효과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그래 봤자 로칸에게는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지만 애초에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백성들을 모조리 먹어 치워야 했던 이유.
그것은 바로 로칸 때문이었다.
어차피 흩어져 있어 봤자 로칸의 힘을 불려 주는 제물이 될 뿐이기에, 차라리 자신들이 흡수하여 로칸에게 일격을 먹여 주겠다는 계획이다.
만약 단 한 번이라도 죽일 수 있다면, 아무리 방문자라 해도 감히 자신들을 상대하는 것을 꺼리게 될 테니까.
로칸이 499레벨에 달성했다 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한 번 죽을 때마다 깎여 나가는 신성의 양이 천문학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 왕들의 표정이 결연했다.
기필코 한 방 먹이리라.
자신들을 범하려는 생각 따위 다시는 떠올리지 못하게 만들어 주리라.
그렇게 각오하며 힘을 일으켰다.
신성을, 세계를 끌어올렸다.
“세계 : 영혼기병!”
“……오?”
가장 먼저 자신의 세계를 선보인 것은 홍염왕 라이톤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세계는 평면이 아니었다.
생태계라기보다는 기계 장치에 가까웠다.
유령들의 영혼을 부품으로 삼아 움직이는 거대한 기갑 병기.
이른바 영혼 기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탑승 로봇이냐.”
그것을 꺼낸 홍염왕은 얼른 그것에 탑승했다.
다른 영혼들이 나사와 볼트라면 그의 역할은 엔진이라고나 할까.
홍염왕의 탑승으로 비로소 완전해진 영혼 기병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머지 두 왕들 역시 자신의 세계를 드러냈다.
“세계 : 영혼 전함.”
“세계 : 영혼의 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