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5
마왕 (3)
“흐흐흐, 포기해라. 로칸, 이번엔 내 것이다!”
로칸이 즉시 몸을 움직여 저지하려 들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심장이 터진 여파이기도 했지만 이불리안이 신성을 부려 그의 몸을 제약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이 정도는 배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놈은 자유롭게 움직였고, 로칸보다 먼저 캬루파의 신성을 취했다.
“정수 약탈.”
약탈의 신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유실되는 신성을 최소화시키고 캬루파가 남긴 모든 것을 제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분노와 약탈.
따져 보면 어떻게든 세계를 얻어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것도 괜찮아 보이지만, 녀석은 즉시 그것을 신성으로 치환했다.
마계 대공이 지닌 신성이 유실 없이 온전히 그의 것으로 변하며 급격한 신성의 증폭을 일으켰다.
[정수 약탈자 이불리안][Lv 498]
491레벨이었던 이불리안의 레벨이 498까지 껑충 뛰었다.
당장 그가 흡수했던 캬루파의 레벨이 타락 전에는 497, 타락 후에는 498이었음을 생각하면 거의 온전하게 그의 신성을 집어삼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이 녀석이 다른 마계 대공의 신성을 하나라도 더 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499레벨을 단숨에 찍을 수 있지 않았을까?
놀라움도 잠시, 로칸은 그에게서 슬쩍 거리를 벌리며 상태를 파악했다.
“이불리안…… 괜찮나?”
“뭘 말이지? 이처럼 기분이 좋을 수가 없군. 이제 마계는 우리의 것이다! 흐흐흐!”
기우였던 것일까?
조금 기분이 업되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이불리안의 상태는 썩 괜찮아 보였다.
어쩌면 분노의 캬루파처럼 타락보다 더 큰 신성으로 그 힘을 억누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제길, 어떻게 해야 하지.’
때문에 로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계약에 따라 로칸 역시 이불리안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놈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걸까?
이제 마계의 왕이 되었으니 감히 덤벼들 이가 없을 테고, 어쩌면 영영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 건 아닐까?
사실 괜찮다면 잠시 두는 것도 괜찮을 수 있었다.
???의 기운이 전염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사이 자신이 강해진다면, 499레벨을 달성하거나 그조차 넘어 신위의 힘을 가진다면 능히 처리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로칸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그를 의식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직 남은 타락한 반신들의 쪽으로 움직이려 했다.
“이놈들도 내가 맡지. 마침 새로 얻은 힘도 시험해 보아야 하니.”
서걱!
그러나 그보다 빨리 이불리안이 움직였다.
아무래도 그들이 가진 신성이 탐났던 듯, 남은 1레벨을 채우고 반신의 끝에 오르기 위함인지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들어 놈들을 베어 낸 것이다.
“젠장.”
그리고 놈들의 신성을 마저 흡수했다.
타락의 기운이 섞인 그것을.
“으음?”
꿀렁 꿀렁.
그 순간 이불리안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무언가 내부에서 터져 나오듯 이질적인 기운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무슨…….”
부글. 부글. 부글. 부글.
그것이 무엇인지 미처 인식할 새도 없이 전신에 수포 같은 무언가가 부풀어 올랐다.
“크아아악!”
이불리안에게 고통을 안겨 주며 그의 신성을 좀먹기 시작했다.
타락한 반신들의 신성을 흡수하며 그들이 지닌 타락의 기운까지 흡수해 버린 것이다.
어느 정도 유실된 상태였다면 모를까, 약탈의 신성이 한 줌의 신성도 놓치지 않기 위해 게걸스레 신성을 탐식한 결과였다.
“모두 전투 준비!”
로칸은 급히 다른 반신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휘하뿐 아니라 이불리안 휘하의 반신들마저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자신들의 주인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498레벨에 이른 반신의 타락.
과연 이불리안에게 신성을 갈취당한 반신들을 데리고 상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지 않으려면 죽일 수밖에.
필사의 각오를 다지며 신성을 끌어올렸다.
“……모두 내 것이다. 내 것이란 말이다!”
콰과과광!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타락에 잠식당한 이불리안은 곧 폭주를 시작했다.
아직 골수까지 완전히 잠식당한 것은 아닌 듯 그의 욕망과 파괴 본능이 어우러진 상태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를 공격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가 먼저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니까.
“뭉쳐!”
로칸은 아까와 같은 지시를 내리며 가장 먼저 그에게 달려들었다.
부하였던 반신의 피로 물들인 검을 핥고 있는 이불리안에게 파괴의 신성을 담은 배틀 액스를 거칠게 휘둘렀다.
까강!
그러나 녀석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 온 케이스였으니까.
심지어 태어날 때부터 반신이었던 것도 아니고, 약탈의 힘을 이용해 일개 마족의 위치에서부터 남을 짓밟고 힘을 강탈해 온 존재였다.
로칸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그에 저항할 정도는 되었다.
“제길.”
문제는 놈의 신성이 너무나 커졌다는 것.
타락의 증거이긴 했지만 499레벨에 오른 녀석은 압도적인 파괴력을 자랑하며 로칸의 공격을 받아 내었다.
자신의 속도를 이용해 반격까지 가하는 한편, 신성을 뿜어내며 주변의 신성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모두 떨어져!”
다른 반신들이 저항하고, 원거리 포격을 뿜어 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이불리안은 범위 내에 존재하는 모든 신성을 집어삼켰다.
자신의 덩치를 부풀리고, 로칸에게 가하는 공격에 더 큰 신성을 쏟아 넣었다.
“미치겠군.”
신성을 약탈당하는 것은 로칸 역시 마찬가지.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 저항 할 수 없는 신성의 약탈이 일어났다.
‘죽어 줄까?’
어쩔 수 없이 힘을 뺏기면서도 놈과 겨루던 로칸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바로 계약서의 존재.
놈이 타락하기는 했지만 계약서의 효력이 유효하다면, 자신이 한 번 죽어 주는 것으로 놈을 파멸시킬 수 있지 않을까?
계약을 어길 경우 발동하는 혼멸의 힘은 시스템에 의한 것이니 타락의 힘으로도 저항할 수 없을지 몰랐다.
“하……. 쉽게는 안 된 다는 거냐.”
그러나 즉시 인벤토리를 확인해 본 결과, 그 계획이 틀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타락한 신성 포식자 이불리안][Lv 499]
놈의 이명이 바뀌었을 때 예상하기는 했지만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명이라는 것은 그저 대상을 지칭하기만 하는 용어가 아니니까.
이명은 대상의 본질과 특성 그리고 역사를 종합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존재를 규정하는 힘을 가진 것.
그 말인 즉, 이명이 바뀌었다는 것은 놈의 존재 자체가 변화했음을 의미한다는 뜻이었다.
계약서는 저절로 불타 사라졌고 남은 것은 빈 슬롯뿐이었다.
‘이건?’
하지만 그때, 자신의 몸 한 편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바로 수호자의 펜던트.
수로의 에인션트 골드 드래곤 주리프가 지니고 있던 신물이 그것이었다.
등급은 무려 데미갓.
반신 급의 아이템이었지만 그 특수 능력은 범상치 않았다.
외부의 신성 개입을 차단하는 결계인 수호의 장막.
그리고 일정 범위의 신성을 배제시키는 신성 배척.
‘이거라면…….’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애초에 반신들을 타락시키는 ???들을 가두던 주리프의 물건이니 뭔가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로칸은 망설일 것 없이 즉시 그 힘을 사용했다.
“신성 배척.”
쿠화아아아아.
금빛 광휘가 주변을 뒤덮었다.
그와 함께 로칸을 비롯한 반신들이 사지가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다. 당장 날뛰던 이불리안 역시 행동을 정지한 것을 보면 마냥 잘못된 것만은 아닌 듯싶었다.
“호오라.”
몇몇의 반신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릴 지경이었지만 로칸은 그 효과를 바로 이해했다.
신성의 동결.
일대의 신성이 얼어붙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신성을 제 몸처럼 사용하고, 늘 전신에 두르고 다니는 반신들의 움직임이 이상해진 것이겠지.
몸 상태가 뻣뻣한 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애초에 로칸은 신성 따위 모르고 살았던 인간이었다.
금세 그 어색한 느낌에 적응하며 신성 대신 마나를 전신에 채워 넣었다.
“계급장 떼고 한판 붙어 보라 이거군!”
그거라면 자신 있다.
애초에 신성이 없을 때도 그랜드 마스터며 마제스티 마스터들을 때려잡고 다니던 그가 아니던가?
신성 대신 광기 섞인 피의 힘이 몸속을 세차게 휘돌았고 곧 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투지의 발걸음.”
“큭!”
로칸의 돌진에 이불리안이 급히 검을 들었다.
갑작스런 신성의 동결에 적응하지 못했다지만 그 역시 밑바닥부터 올라온 인물.
어느 정도 적응하고 대응했지만 로칸의 파괴력을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휘익.
대번에 마주친 팔이 꺾이고 몸이 휘청거렸다.
신성을 썼을 때는 로칸의 괴력을 정면으로도 받아 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능력치의 고하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단숨에 끝장낸다.’
그런 놈을 향해 로칸이 깊이 파고들었다.
신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이상, 자신의 스킬 지속 시간을 더 이상 연장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신성의 동결과 함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폭력의 왕과 절대자의 힘.
그것이 끝나기 전에, 놈이 완벽히 이 상황에 적응하기 전에 승부를 봐야만 했다.
“뒤잡기. 뼈 부수기.”
당황한 이불리안의 등 뒤에서 나타난 로칸이 배틀 액스를 철퇴처럼 휘둘렀다.
이래 봬도 방어력을 무시하는 일격. 놈이 자랑하는 데미갓 등급의 방어구도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다.
“커헉!”
“광기의 시간, 급가속, 광살!”
등과 허리를 가격당한 녀석의 몸이 꺾이는 그 순간, 로칸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30초 동안 공격 속도와 이동속도를 2배로 끌어올리는 가속 스킬에 더해 급가속이 펼쳐지고, 한 호흡 만에 십수 번의 난도질을 가하는 연격 스킬이 전신을 난자했다.
“캬아악! 나는, 세계의 왕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파괴해서라도……!”
이쯤되자 이불리안도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신성을 포기하고 잊고 있던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거칠게 스킬을 난사하고, 로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현란한 칼부림을 펼쳐 시간과 거리를 확보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파멸의 일격.”
퍼억!
하지만 지금의 로칸은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터져 나가지 않는다면 불사신이다.
그깟 칼부림에 두려워하며 몸을 사릴 위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제 몸에 칼이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불리안을 향해 뛰어든 로칸은 사슬을 감은 왼손으로 놈의 복부를 후려쳤다.
몸 전체를 날려 버리고, 최후의 일격을 품은 채 놈에게 뛰어내렸다.
“사, 살려……!”
바닥을 구르고 튕기듯 일어난 그의 머리 위로 로칸이 날린 필살의 일격이 떨어졌다.
“초극.”
공허마저 품은 소멸의 일격이 놈의 골통을 부수었다.
콰과과과광!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갔다.
놈이 욕망도, 집념도, 타락의 힘마저도.
모조리 로칸의 배틀 액스에 휩쓸려 먼지 같은 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