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랭커 회귀하다-425화 (425/500)

# 425

마계의 왕 (4)

척 보기에도 이불리안의 군대는 피의 길을 걸어왔다.

로칸처럼 정예가 몰아쳐 적의 수장부터 꺾은 것이 아니라 아주 정공법으로 밀고 들어온 것 같았다.

사실 일이 잘됐을 때야 문제없는 것이지 로칸의 방법은 실패하면 오히려 적에게 포위를 당하기 십상이었으니까.

때문에 몰골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번엔 그 상태가 매우 온전했다.

신성을 사용해서라도 치료를 마치고 온 것이다.

이 이상 힘들어하는 몰골을 보였다가는 얕보일 수 있기 때문인 듯싶었다.

“힘들어 보이는데?”

“그저 좀 거칠게 다뤘을 뿐이다.”

그 속을 간파한 로칸이 슬쩍 속을 긁었지만 놈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이제 시작이군.”

“이제 시작이지.”

원 주인인 자킬을 내쫓고 둘만 자리한 방에서 그들은 이후의 계획을 세웠다. 결과적으로는 마계 일통이 목표이긴 하지만 마계는 넓었고 강자도 넘쳐났다.

당장 그들이 맞상대를 한다 해도 장담하기 어려운 수준의 괴물들이 수도 없이 있으며 퍼거스나 얀켄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지내는 노괴물들도 짐작키 어려울 만큼 많을 터였다.

“정석대로라면 약한 놈들과 인접한 영지들부터 처리를 해야겠지만…….”

때문에 정공법으로 가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전략.

로칸은 이미 그 전략을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는 상태였다.

“적들이 이쪽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

바로 적들의 반목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아직 로칸과 이불리안의 연합은 작은 변화에 불과하니까.

크고 견고한 세력을 구축한 이들에게 고작해야 두 집단의 연합쯤은 아직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인 것이다.

그렇기에 작은 불씨만 만들어 둔다면 자신들이 아니라 저들끼리 치고받고 정신이 없어질 터였다.

로칸이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것.

그리고 흔쾌히 그 역할을 제가 맡겠노라 이야기했다.

“정말 괜찮겠나? 그들의 세력도 세력이지만 보유한 반신들의 수준도 보통이 아닌데.”

이불리안이 걱정 아닌 걱정을 늘어놓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로칸이 감당할 몫이다. 자신은 그동안 박 터지게 쌈질이나 하면 되는 것이고.

“걱정 마라. 다 생각이 있으니까.”

로칸이 음흉하게 웃자 이불리안도 더는 말을 늘어놓지 못했다. 그들은 수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파트너였으니까.

결국 역할이 결정되었다.

로칸은 후방으로 돌아가 그들을 교란하고 싸움을 붙이는 역할이었고, 이불리안은 전면에서 전투를 치르며 세력의 영역을 넓혀 가는 일을 맡은 것이다.

물론 그렇게 획득한 영토의 절반은 로칸의 것이었다.

싸움을 하고 피해를 입는 것은 놈이지만 영토는 반반.

그러나 무작정 공정하지 않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만약 로칸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면 놈의 성향상 진격을 잠시 멈추고 대기할 테니까.

다른 파벌로부터 과도하게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제가 손해를 보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로칸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제가 말한 역할은 다할 생각이었다.

“남을 부려 먹을 생각을 했으면 제가 부림을 당할 줄도 알아야지.”

로칸은 이불리안과 흩어졌다.

각자가 맡은 역할을 다하기 위해.

폐쇄적인 마계 영지 내로 무지개 전송기를 사용해 이동할 수는 없었지만 카이가 있으니 거리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폴리모프.”

모종의 영역까지 들어간 로칸은 즉시 폴리모프를 사용해 제 외형을 바꾸었다.

신성을 사용해 대놓고 탐지하지 않는 이상 정체를 알 수 없는 특별한 변신 능력이기에 마음껏 활보해도 누군가 알아볼 걱정은 없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파벌의 수장으로 변신하여 난동을 부리는 것이겠지만, 이 음흉한 마족 놈들이 그런 간단한 수에 넘어가 줄 리 없다.

즉시 행동을 취하는 대신, 사태를 파악하고 진상을 조사하겠지. 파벌 간의 전쟁이란 그만큼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까.

때문에 로칸은 다른 이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바로 라푸제.

1급 천족의 위를 쟁취한 그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유니콘을 소환해 타고 이동하자 마계 영지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그들의 숙적이자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신성의 정점이 나타난 것이니까.

“이곳에는 웬일이냐!”

해당 영지의 영주이자 마계에서 가장 유력한 파벌의 수장인 자가 부하들을 잔뜩 거느리고 찾아온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섣불리 힘을 쓸 수도 없다. 그를 공격하는 순간, 천족들과의 전면전이 일어날 테니까.

잔뜩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 대화를 시도했다.

“여기서 이야기할 셈인가?”

“흥,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것치고는 겁이 많구나.”

놈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즉시 신성를 떨쳐 자리를 이동했다.

다른 마족들의 입과 기억은 수하들이 봉인할 터이기에 일단 둘만 이동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래, 그 잘나신 천족들의 왕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제안을 하기 위해 왔다.”

“제안?”

날카로운 놈의 말투에도 로칸은 편안하게 대꾸했다.

지금이라도 놈이 신성으로 자신의 몸을 훑는다면 뭔가 다름을 알아차릴 테지만 눈앞의 모습에 현혹된 까닭인지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상대의 동의 없이 신성을 쬐는 것이 아주 무례한 일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상대를 스캔하던 신성이 언제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파고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 너를 마계의 왕으로 만들어 주지.”

로칸의 거짓된 제안은 간단했다.

마계 파벌 중 가장 강력한 놈들 중 하나를 골라 천족과 손을 잡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들의 욕심과 욕망을 부추기고 그리하여 서로 싸우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마계의 왕이 되기 위해 천족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마족의 자존심상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반대로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과거 천족의 기원이야 어찌되었든 같은 마족을 상대하기에 가장 좋은 힘이 아니던가?

천족과 마족은 서로를 믿지 않았지만 반대로 이해관계만 맞아떨어진다면 믿지 않는 채로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과거 그몰탄이 그러했듯이.

“그렇게 해서 네놈에게 돌아가는 이득은 무엇이지?”

때문에 놈은 꼼꼼히 따져보았다.

자신을 마계의 왕으로 만들어 얻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로칸은 천족과 마족을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이기에 그럴싸한 대답 또한 준비해 둔 상태였다.

“나는 마족과 어떠한 식으로든 얽히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내 손으로 마족의 왕을 만들 필요가 있지. 대답이 되었나?”

“……네놈답군.”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놈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천족의 기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또 자신의 권력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기에 마족과 얽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마족의 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정도 되는 마족이라면 천족의 기원에 대한 정보쯤은 당연히 가지고 있었기에 이야기는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서로의 필요성을 납득했다.

그렇게 라푸제가 알지 못하는 천족과 마족의 결탁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날 어떻게 도울 생각이지?”

사실 천족과 손을 잡든 정령과 손을 잡든 그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로 도움의 방법.

그 문제를 로칸이 쉽게 해결했다.

“병력을 보내 주지.”

“병력? 천족을 말하는 건가?”

“아니, 드러내 놓고 사용해도 문제없을 만한 자이다. 네가 수락한다면 곧바로 이곳에 도착하게 되겠지.”

“흠, 도움이 되려면 최소 반신급일 텐데 그런 자들이 있었나? 천족이 비밀리에 키운 병기라도 되는 모양이지? 좋다. 그 능력이 합당하다면 받아들이도록 하겠다. 그래서 그자들은 수가 몇이나 되나?”

“한 명.”

“한 명?”

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실컷 마계의 왕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아 놓고 고작 한 명을 지원 병력으로 보내 주겠다고?

가당치도 않은 조건에 버럭 성질을 내려는 순간, 라푸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만나 보면 일개 병단 따위보다 훨씬 도움이 될 거라는 것을 알 거다.”

“좋다. 만나 보지. 당장 이곳으로 오라고 해!”

“그럼 협정이 임시 체결된 것을 알지. 이후의 논의는 일이 어느 정도 진척된 이후에 하도록 하겠다. 그때는 네가 내가 있는 곳으로 오도록.”

“흥, 누가 겁을 낼 줄 아느냐.”

그렇게 자리가 파해졌다.

놈이 신성을 회수하며 공간을 돌려놓았고, 라푸제 역시 천상의 룬 북을 사용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가 같은 제안을 다른 파벌에게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겠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꼬리를 밟을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이 모든 것들은 로칸이 자신을 위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판을 짠 것에 불과했으니까.

“폴리모프 캔슬.”

곧 한적한 곳으로 이동해 폴리모프를 캔슬한 로칸은 당당하게 놈의 영지로 재진입했다.

막아서는 마족들에게 태연히 호통을 치고, 놈을 만나는 것에 성공했다.

“네놈은……!”

그렇게 로칸을 마주한 놈의 눈알이 뒤룩뒤룩 굴렀다.

그 역시 들어 알고 있는 것이다.

천족이, 라푸제가 로칸에게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며 1급 천족의 살해자로 지목했다는 것을.

그리고 알았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다 연기였나 보군.”

라푸제와 로칸은 한통속이다.

그리하여 라푸제는 1급 천족의 지위를 얻고, 로칸은 그의 도움으로 천계를 무사히 빠져나와 마계에 터를 잡았다.

최근 뱀파이어 로드를 처치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어 알고 있었기에 의문이 해소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499레벨의 뱀파이어 로드는 그조차 껄끄러워하던 존재가 아니던가? 로칸이 순수한 무력과 신성으로 놈을 잡았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던 터였다.

하지만 천족의, 그것도 1급 천족의 도움이 있었다면?

방문자의 특권인 부활의 권능을 통해 충분히 도모해 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연과 행운이 더해져야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어쨌든 로칸은 해냈고 저 먼 변두리에서부터 세력을 불려 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 알고 있었다.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아.”

그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한 녀석은 제법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 그것으로 어느 정도의 유대를 쌓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천족의 비밀 병기인 로칸을 시험해 볼 기회라는 생각마저 하면서 그를 받아들였다.

아주 오랫동안 꿈꿔 왔던 마계의 지배자로 거듭나기 위한 첫 걸음의 선봉장으로 삼기에 제격이라고 판단했다.

‘병신. 알긴 뭘 알아?’

로칸이 그보다 더 음흉한 속내를 품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크흐흐흐, 내 밑에서 충성할 준비는 되었나?”

“제가 충성하는 건 라푸제 님뿐입니다.”

“크하하, 그렇지, 그렇고말고. 하지만 적어도 내 밑에 있는 동안은 반항과 거부를 불허한다. 라푸제 역시 그렇게 명했겠지?”

“물론입니다.”

로칸과 놈이 마주 웃었다.

동상이몽을 품은 채 마계 전쟁을 시작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