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2
마계의 왕 (1)
“우욱.”
잠시 세계 : 피의 전당을 들여다 본 로칸은 토악질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이미 잔인함을 비롯한 여러 비위 상하는 모습에 면역이 되었다 자부하는 로칸이지만 그 세계를 들여다본 순간, 본능적인 거부감이 올라온 것이다.
“진짜 미친 새끼였네, 이거.”
그 세계에는 살아 있는 것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숨만 붙어 있는’ 것들이었다.
인간을 비롯해 여러 유사 인종과 몬스터들이 잔뜩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가축처럼 사육을 당하다 못해 모두가 ‘피 주머니’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산 채로 빨대가 꽂혀서 뱀파이어들에게 피를 제공하는 에너지 공급원으로서의 역할만을 할 뿐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꾸준한 세뇌를 통해 ‘이 피 주머니 생활을 한동안 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도 뱀파이어가 되어 영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망상을 심어 놓았다.
그리하여 자신을 증오해야 할 유사 인종과 몬스터들에게마저 그릇된 신성을 뽑아내는 것이다.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야.”
그 모습에 로칸은 세계 : 피의 전당의 인수를 포기했다. 자신의 권능 중 하나인 불굴의 의지를 부여한다면 세뇌를 깨고 뱀파이어들에게 저항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의미가 없었다.
인간뿐 아니라 대부분의 존재가 이미 피를 빨릴 대로 빨려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싸우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그 흉포한 몬스터들마저 말이다.
심지어 그 드래곤마저 붙잡혀 피를 빨리는 중이니 더 말을 해 무엇 하랴.
이건 도무지 가망이 없었다.
뱀파이어들을 원래의 종족으로 돌리는 방법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신성으로 대체하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이 필요했고, 고작 한둘에게 씌워진 피의 저주를 끊어 낸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치밀하기 짝이 없는 샤킬란은 이미 누군가의 배신이나 피 주머니들의 세뇌가 풀릴 때마저 대비해 둔 상태였다.
“신성을 흡수하겠다.”
결국 로칸은 그 세계를 구원하는 것을 포기했다. 아니, 세계를 부수고 쪼개어 자신에게 흡수시키는 것으로 모두를 구원했다.
늦었지만 그들에게 안식을 가져다주었다.
“후우, 499레벨이 대단하긴 하군.”
타락을 봉인한 쇠사슬이 아니었다면 참으로 어려운 싸움이 될 뻔했다.
그림자 이동으로 따라붙는 방법을 찾아내긴 했지만 다시 놈이 전력을 다했다면 참으로 어려운 싸움이 되었을 터였다.
그럴 때를 대비한 전략을 몇 가지 더 세워 두었으니 승산이 없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폭력의 왕 로칸][Lv 481]
어쨌든 덕분에 신성이 크게 증가했다. 무려 11레벨이 오를 정도였으니까.
다른 종족들을 피 주머니로 삼아 만들어 낸 신성이라는 것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그런 것까지 다 따지면 신성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해방에 대한 보상이라 여기며 주변을 수습했다.
“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람 머리통만 한 큼지막한 보석이었다.
이미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기에 로칸은 그것을 얼른 챙겼다.
[뱀파이어 로드의 혈석][데미갓]
반신의 경지에 올라 뱀파이어 사회를 지배하던 뱀파이어 로드의 권능이 담긴 혈석.
본래 뱀파이어 로드가 사망하거나 탈각할 시 다음 로드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힘이나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며 주인을 잃었다.
사용 시 뱀파이어 로드의 권능 및 지배력 획득.
제한 : 뱀파이어 종족 전용
“호오…….”
그것은 뱀파이어 로드의 권능이 담긴 혈석이었다.
피를 통해 지배력을 행사하는 뱀파이어들인 만큼 그가 가진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힘이었다.
이것을 취한다면 뱀파이어들을 통제하고 지배할 힘과 권력을 얻을 수 있게 될 터, 그러나 아쉽게도 뱀파이어 종족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제약이 걸려 있었다.
고작 뱀파이어들 따위를 다루기 위해 이제와 종족 변환을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써먹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잠깐 고민하던 로칸은 일단 그것을 챙기고 뱀파이어 로드의 거성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 갇혀 피 주머니가 되어 있는 이종족들을 구원하고, 그득그득 쌓인 보물들을 몽땅 인벤토리에 챙겨 넣었다.
그 후 여유 있게 성의 꼭대기에 올라 주변을 살피니 꽤 재미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알았나 보군.”
뱀파이어들에게 피가 이어졌다는 것은 곧 영혼의 연결과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슬슬 뱀파이어 로드의 죽음을 알아차린 놈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 강력하고 치밀한 샤킬란이 죽임을 당하다니.
당장 겁을 집어먹은 자도 있었고, 복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었다.
제 목숨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기적인 자들이긴 하지만 혈족에 대한 애정만큼은 상당하기 때문이었다.
로칸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이쪽으로 오지도, 도망가지도 못하는 신세인 놈들을 비웃으며 천천히 몸 상태를 회복시켰다.
“이거 놀랍군. 정말로 샤킬란을 처치하다니. 적어도 몇 번은 죽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
그때, 로칸의 등 뒤에서 어떤 존재가 나타났다.
황급히 몸을 돌리자 익숙한 듯 낯선 이가 서 있었다.
그러나 딱히 위해를 가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누구지? 어디서 봤더라?’
로칸이 긴장했다.
샤킬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놈의 힘 또한 만만치가 않은 것이다.
[정수 약탈자 이불리안][Lv 487]
악마의 날개를 달고 있는 인간과 유사한 외형, 크고 우람한 두 개의 뿔.
순수 마족이라 불리는 이들 중 하나인 녀석의 모습에 로칸이 기억을 떠올리는 것에 성공했다.
“네놈은……!”
마수 조련사 그몰탄의 막타를 친 상급 마족.
그가 로칸의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상급 마족이면 상당한 마계 영토를 가진 귀족일 텐데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뱀파이어 로드가 사라지며 무주공산이 된 뱀파이어들의 영지를 손에 넣기 위해서?
사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지만 로칸은 긴장했다.
상대가 마족인 만큼 영지들을 내어 준다 해도 그냥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하자면 이건 기회였다.
수하들 없이 제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 자리에서 녀석을 잡으면 놈의 영지까지도 홀랑 집어삼킬 수 있지 않을까?
욕심과 경계심이 버무려져 묘한 대치를 이루었다.
“긴장할 것 없다. 난 싸우거나 네게서 무언가를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니니까.”
“……?”
기만전술일까? 두 손을 들어보이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내비치는 녀석의 행동에 로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상대가 마족인 만큼 끝까지 방심할 수 없으니까.
“그럼 왜 나타난 거지?”
“그때 했던 제안을 다시 하기 위해서이다.”
“그때? 제안?”
로칸이 선뜻 떠올리지 못하자 놈은 친절하게도 다시 설명을 해 주었다.
“나와 같이 큰일을 하나 해 보지 않겠나? 내 생각에 우린 아주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군.”
“그 일이라는 게 뭐지?”
능글맞게 웃는 이불리안에게 로칸이 되물었다.
대체 무슨 속셈인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녀석이 은근한 어조로 즉답을 했다.
“마계를 일통하는 것이다. 정확히는 너와 내가 마계 전체를 나누어 갖는 것이지. 그리고 원한다면 저 뱀파이어들과, 뱀파이어들의 영지를 노리는 다른 마족들로부터 당분간 보호해 주겠다. 대공급의 힘을 지닌 내가 나선다면 어지간한 잔챙이들은 함부로 나서지 못할 테니.”
마계 일통.
녀석은 꽤나 거창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마계 전체를 제 손안에 넣고 주무르겠다는 것이다.
저 자신도 고작해야 487레벨인 주제에!
물론 상당한 수준이긴 하지만 그가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자칫하면 마계의 공적으로 몰려 집단 린치를 당할 것이 뻔하기에 로칸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왜 그래야 하지? 내가 네놈의 뭘 믿고? 그리고 그 정도는 시간만 조금 걸릴 뿐, 나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흐흐흐, 대단한 자신감이군. 과연 내 파트너가 될 만한 배포다.”
때문에 다소 삐딱한 말들을 내뱉었지만 놈은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허공에 마기를 뿌려 하나의 스크린을 만들어 냈다.
“음?”
그 위로 새겨지는 것은 마계의 지도.
그리고 붉은 점들이 점멸하며 모여들고 있었다.
뱀파이어 로드의 소멸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챈 주변 영지들이 떡고물이라도 주워 먹을 생각으로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에는 499레벨의 노괴물인 뱀파이어 로드의 위세에 막혀 감히 이곳을 탐내지 못했지만 주인이 바뀌었으니 한판 붙어 볼 만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걸 어떻게 알고?’
그렇다고 해도 뭔가 이상하다. 대체 새로운 주인이 어떤 인물일 줄 알고?
며칠 시간을 끌기는 했지만 499레벨씩이나 되는 존재를 처치했다면 그에 준하는 강함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나?
욕심도 많지만 경계심이 강한 마족들이 이렇게 쉽게 움직인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네놈이로군.”
잠시 지도를 살피던 로칸의 시선이 이불리안에게로 향했다.
저들이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에는 뭔가 정보가 있거나, 든든한 뒷배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눈앞의 존재인 이불리안이었다.
씨익.
로칸의 의심에 녀석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어 보임으로써 이제 알았냐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얕잡아 보였던 것일까? 이대로 놈들을 모조리 갈아 먹고 끝장을 봐?
“조건이나 들어 보지.”
당장이라도 힘을 분출하려던 로칸이 녀석에게 입을 열었다.
싸우는 건 언제든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녀석의 계획을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설령 관계가 틀어져 진짜로 한판 붙는다 해도 계획을 일부나마 안다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겠나?
그 정보 자체가 거짓이고 함정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긴 하겠지만, 로칸에겐 그 정도는 걸러들을 능력이 있었다.
“이제 대화를 나눠 볼 생각이 드나 보군. 협박하려는 건 아니니 오해 없기를. 조건은 간단하다. 나와 네가 힘을 합쳐 마계 영지를 하나씩 정복해 가는 것이다. 조금 신경 쓰이는 파벌들이 있긴 하지만 우리 둘의 힘이라면 능히 깨부술 수 있겠지. 그리하여 마계를 모두 우리 손안에 넣고 나누어 관리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이야기군. 실현 가능성을 떠나서 한 가지 묻지. 우리 둘이 손을 잡는다면 지분은 어떻게 되는 거지?”
“5 대 5다.”
“……5 대 5라고?”
어떻게 마계를 지배할지는 나중의 일이다.
때문에 로칸은 현실적으로 접근했다.
놈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알기 위해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외였다.
5 대 5라니? 정말 공평하게 반반을 나누겠다고?
로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마족답지 않은 그 대답에 의심을 품었다.
물론 땅덩어리를 기준으로 해서 쓸모없는 땅만 잔뜩 밀어 놓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광활한 마계 영지의 절반이다.
그곳에서 적당히 신성을 수급하기만 해도 상당한 수준일 게 분명할 터였다.
그러니 로칸이 어찌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놈은 그런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 나는 딱 절반이면 족하다. 게다가 다른 곳까지 마계 영토를 확장할 생각도 없지. 자유도시와 천족들이 있기에 마계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니까. 대신 나는 영원한 마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네놈은 어차피 지배에는 별 관심이 없지 않은가? 원한다면 불가침조약이라도 맺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