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2
새로운 무기 (6)
하나도 아닌 둘이었다.
설마 유명계가 이렇게까지 전력을 투입할 것이라고는 로칸도 생각지 못했지만 파워 업을 한 직후이기 때문일까, 묘하게도 그리 큰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 그 사갈 같은 주둥아리로 또 개수작을 부리려는 것이냐!”
로칸의 반가운 인사를 독살맞게 받은 것은 다름 아닌 백염왕이었다.
로칸과 처음 접촉을 했고 퀘스트까지 주어 영혼의 구슬을 모을 수 있게 해 주었으나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한 이이니, 그처럼 불같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몰랐다.
하지만 로칸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연막인가?’
유명계의 다른 왕들은 어느 정도 이해한다.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 있던 영혼들을 빼앗기고, 경매라는 이름으로 농락을 당했으니까.
그러나 백염왕도 그럴까? 아니다. 그는 오히려 이득을 취했다.
수준이 비슷한 유명계의 왕들이니 경매에 농락당하고 영혼의 구슬을 고루 잃은 것은 서로에게 큰 의미가 없지만 그에게는 백혼탑이 있었다.
지상의 거점이자 안테나가 되어 지상의 영혼들을 수집하는 장소.
비록 지상의 수준이 천상에 비해 낮다 해도 300~350레벨급의 존재들은 제법 있었으니 그가 뒤로 취한 이득은 상당할 터였다.
“섭섭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이게 다 서로 친하게 지내라는 뜻이었습니다. 누구 한 명에게 몰아줬다가 전쟁 날 일 있습니까?”
“닥쳐라!”
로칸이 농담 아닌 농담을 던져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흉악한 일갈뿐이었다.
그에 어깨를 으쓱여 답을 하는 로칸.
로칸도 직감했지만 이미 대화로 풀기에는 글렀다.
이곳까지 쫓아온 것도 로칸을 응징하기 위해서이지 영혼의 구슬을 돌려받기 위함은 아니지 않던가?
그들이라고 로칸이 영혼의 구슬과 힘의 정수를 모두 써 버렸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츠즈즈즈즈즈즛!
문답무용.
이렇게 되면 그들이 노리는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로칸의 신성.
고작해야 이제 막 세계를 구축한 이에 불과했지만 로칸을 죽이고 얼마간의 신성이라도 회수할 속셈으로 각자 힘을 일으켰다.
무한히 부활할 수 있는 유저의 특성상, 기존까지 죽으면 경험치를 떨어뜨리듯 400레벨부터는 신성의 일부를 드롭하게 되니까. 사도라는 작자들이 그러했듯 말이다.
심지어 450레벨부터는 그 수준이 달랐다.
가지고 있는 신성의 10분지 1이 사라져 버리니 한 번의 죽음도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 : 백귀야행.”
“세계 : 악귀천하.”
그렇기에 놈들은 로칸을 몇 번이고 다시 죽일 작정으로 힘을 일으켰다.
그 증거가 그들이 사용한 힘이다.
처음부터 신성을, 세계의 힘을 사용한 놈들은 전력으로 로칸을 압박해 왔다.
“오호?”
[세계 : 백귀야행을 확인했습니다.]
[세계 : 악귀천하를 확인했습니다.]
스스로의 세계를 드러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만큼 로칸이 기존에 보여 주었던 힘이 만만치 않게 느껴진 것이리라.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세계의 힘을 끌어다 쓰는 싸움으로 번진다면, 혹여 로칸이 조급한 마음에 자신의 세계를 드러낸다면 짓밟고 침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로칸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폭군의 배틀 액스.
로칸에게는 그것 한 자루만으로도 능히 그들을 상대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로칸은 그조차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원권, 사용.”
“……?”
“……!”
흑염왕은 물음표를, 백염왕은 느낌표를 띄웠다.
소원권.
그것은 백지의 계약서와도 같은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와 관련된 내용이거나, 신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로칸의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하는 명령권과도 같은 것이다.
고작해야 인간의 요구라는 생각에 백혼탑의 건설을 조건으로 내어 주었던 그것이 이제 자신에게 비수로 다가오고 있었다.
“백염왕, 흑염왕을 죽여라. 지금 당장. 그것이 내 소원이다.”
“젠장!”
콰과과광!
백염왕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만약 그들의 힘이 완벽히 비등하거나 백염왕의 신성이 더 낮았다면 무효화가 되었겠지만, 백염왕은 백혼탑을 통해 알음알음 신성을 강화한 상태였다.
다른 왕들이 알지 못하도록 숨기고 있었으나 이미 영혼의 구슬이 크게 필요 없을 만큼 신성이 증폭된 것이다.
그가 이번 원정에 자청하여 나선 것도 바로 그런 이유.
자신이 영혼의 구슬을 회수하고 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왕들이 영혼의 구슬을 가질 수 없게 훼방을 놓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백염왕의 세계, 백귀야행이 흑염왕을 노렸다.
영혼 세계에 속한 무수한 혼령들이 불시에 그를 기습하고, 악귀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백염왕, 무슨 짓이냐!”
“나도 어쩔 수 없다, 흑염왕. 내 존재가 흩어져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다는 것치고는 힘의 사용이 거칠었다.
만약 정말로 그를 해할 생각이 없다면 적당히 싸우는 시늉을 하며 흑염왕이 로칸을 공격할 틈이라도 만들어 줄 테지만, 그 역시 이것이 기회라고 여긴 것이다.
여기서 흑염왕을 죽이고 그의 신성과 세계를 취한다면? 영혼의 구슬 따위로는 메울 수 없는 거대한 격차가 벌어진다.
나머지 유명계의 세 왕이 덤빈다 해도 홀로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한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로칸도 이미 소원권을 써 버린 상태.
살려 달라는 소원도, 자신을 공격하지 말라는 소원 따위도 쓸 수 없을 테니 그의 신성마저 먹어 치우고 말리라 마음을 먹었다.
못 이기는 척, 전력을 다해 흑염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아아악!”
그러나 흑염왕의 저항 또한 만만치는 않았다.
신성의 격차는 있으나 본디 서로 암묵적인 불가침을 맺을 만큼 비등한 실력과 서로에 대한 정보를 가진 그들이 아니던가?
소모전으로 가면 필패하겠지만 꽤 오랜 시간 버티고, 도망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신성 결계.”
그때, 전투를 관전하던 로칸이 신성을 발휘했다.
블루 드래곤과 사도들이 사용했던 것을 흉내 내었다. 아니, 그보다는 광풍이 사용한 것에 가까울까.
콜로세움까지는 아니지만 원형의 결계 안에 그들 셋이 갇히고 말았다.
파괴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힘이라 좀 어색하기는 했지만, 적당히 단단하고 장거리 공간 이동을 차단하는 결계가 생성되었다.
“흐흐흐흐, 제 무덤을 파는구나!”
결계의 등장에 긴장하는 것은 흑염왕, 광기를 보이는 것은 백염왕 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놈을 잡아먹고 로칸까지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스스로를 가두는 결계를 설치하다니.
어설프긴 해도 흑염왕과의 전투 여파를 버텨 낼 정도의 결계라면 적지 않은 신성이 소모되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제 막 마제스티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로칸이라면 이것으로 가진 바 신성의 상당량을 소모했을 터였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더는 이빨을 감추지 않고 힘을 드러내었다.
“어떻게 이만한 신성을……! 백염왕, 모두를 속였던 것이냐! 이 인간과 짜고…….”
퍼엉!
백염왕은 아예 힘으로, 신성으로 흑염왕을 몰아붙였다.
힘 싸움으로 가면 절대 밀리지 않는다는 듯, 감춰 둔 신성을 몽땅 드러내며 힘으로 찍어 누른 것이다.
흑염왕과 그가 데려온 수하들은 필사적으로 저항을 했지만 점점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계와 세계가 얽히며 악귀들을 하나둘 빼앗겼고, 빼앗긴 악귀들은 다시 백염왕의 힘이 되었다.
그리고 흑염왕의 거체가 짓눌려 뭉개지려는 순간, 한 줄기 빛이 백염왕의 등줄기를 강타했다.
“난 놀 줄 알았냐?”
고오오오오오오오.
어느새 자신의 모든 힘을 각성시킨 로칸이 최초의 일격을 휘두른 것이다.
모든 힘과 스킬 그리고 신성마저 가미해 낸 최강의 일격.
초극의 힘이 백염왕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블랙홀 같은 미지의 힘이 놈의 영혼을, 신성을 살라 먹으며 더욱 힘을 부풀렸다.
“크아아아아악!”
흑염왕에 정신이 팔려서이기도 했지만, 신성은 물론 존재감을 감추는 힘을 사용해 접근한 까닭이었다.
이제 신성의 활용에 대해 감을 잡은 로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빌어먹을 인간 놈!”
백염왕이 고통을 뿌리치며 물러섰다.
그러나 이미 신성에 큰 손상을 입은 상태.
이 상태에서의 2 대 1이라면 그로서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 잘 버티는데? 쳇, 아직 힘 조절이 안 되더라니.”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었지만 로칸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그가 날린 일격은 지극히 시험적인 것이었으니까.
신성의 사용은 자유로워졌지만 얼마만큼을 쏟아부어야 어느 정도의 타격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데이터는 아직 부족했기에 적당량을 찾으려 했건만, 조금 힘이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신성 : 3,000,000을 소모했습니다.]
고작 일격에 3백만이라니, 어이없을 정도로 헤프게 쓰이는 것 같았지만 위력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면 5백만, 1천만을 쓰면 어떨까?
신성에 여유가 있는 만큼 편안한 표정으로 폭군의 배틀 액스를 휘돌리는 로칸의 모습에 백염왕과 흑염왕 모두가 주춤거렸다.
백염왕은 로칸의 역량 파악을 하지 못해서, 흑염왕은 대체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판단하지 못해서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먼저 싸움을 건 건 너다, 백염왕. 난 유명계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고.”
그런 심리를 이용해 로칸이 한마디 말을 던졌다.
그리고 흑염왕의 견제를 도외시한 채 백염왕에게로 달려들었다.
“제길, 일단은 도와주마!”
이렇게 되자 흑염왕도 판단력을 잃었다.
로칸이 백염왕을 이용해 자신을 차도살인하려 한다던 생각이 180도 뒤집혀 사실은 그가 자신을 이용해 백염왕을 죽이려 한다고 착각했다.
그의 말처럼 어쩌면 그는 유명계와 척을 지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에 도주하고, 자신들과 상극의 속성을 지닌 얀켄의 영역에 몸을 의탁한 것이라고 말이다.
사악한 복심으로 유명한 유명계의 왕답지 않은 발상이지만, 그만큼 그들이 강자의 삶을 살아왔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설마 자신들과 싸우고 싶어 하겠냐는 안일하고 오만한 생각.
흑염왕이 둘 다를 공격하는 대신 자신을 서포트하는 입장을 취하자 로칸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놈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한결 편하게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부서져라!”
패도적이고 폭력적인 신성이 백염왕의 영혼을 꿰뚫었다.
세계를 부수고, 신성을 찢어발겼다.
초극의 후유증? 약간의 신성을 투자하자 모든 스킬의 쿨 타임이 돌아왔다.
“크아아아아악!”
백염왕이 급히 신성을 일으켜 보지만 영혼과 정신의 힘을 사용하는 놈의 권능은 로칸에게 통하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
그 만능과 같은 힘에 가로막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속수무책 썰려 나갈 뿐이었다.
한 조각, 한 조각.
깎여 나간 신성들은 모조리 로칸의 몸으로 흡수되었고, 마침내 흑염왕의 그것보다 낮아졌을 때 로칸이 다시 한번 일격을 날렸다.
“컥……! 대체 왜……!”
보조에서 좀 더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하던 흑염왕의 목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