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4
화이트 드래곤 (2)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스스로 날뛰는 것 이외에도 하위 등록된 용병들이 사냥하고 얻는 경험치의 일부를 획득한 덕분에 로칸은 빠르게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정상적으로 사냥했다면 며칠, 몇 달이 걸렸을지 모를 레벨 업을 순식간에 이루었고, 온몸에 피 칠갑을 할 만큼 치열하게 싸우면서 놈들의 피와 신성을 흡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443레벨을 달성했을 때 화이트 드래곤의 레어로 향하는 본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빌어먹을 몬스터들 같으니.”
“멍청한 새끼! 겨우 그딴 놈들한테 뒈지고 난리야.”
용병으로 함께 따라온 이들 중 몇몇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침을 퉤 뱉었다.
애초에 각오를 하긴 했지만 레어까지 직선으로 오지 않고 주변의 모든 몬스터들을 사냥하면서 부득의하게 희생자가 생긴 것이다.
아무리 목숨을 내놓고 사는 용병들이라지만 동료의 죽음을 덤덤하게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죽은 자들에게 감정을 담아 한바탕 욕지거리를 내뱉어 준 뒤 다시 전면을 주시했다.
지금까지의 길도 험난했지만 어쩌면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으으으, 춥다.”
만년설이 가득 낀 산의 상층부에 올라야 했으니까.
“망토 나눠 줬잖아, 헛소리 말고 얼른 장비 교체해!”
한 발 내딛는 것만으로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자연 발생한 한기가 아니다. 빙결의 힘을 관장하는 화이트 드래곤이 서식하는 것만으로 지형이 바뀐 것이다.
기존까지는 조금 쌀쌀한 정도라 더 옵션이 좋은 장비를 착용하고 있던 용병들이 얼른 장비를 교체했다.
“그워어어!”
그뿐만이 아니다. 드래곤의 마력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생명체도 탄생했다.
아이스 골렘. 얼음으로 몸체가 이루어진 마법 병기가 눈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순다!”
콰앙!
놈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타이탄이 즉시 움직였다.
몽둥이에 가까운 둔기를 휘두르며 몸을 일으키는 아이스 골렘을 찍어 눌렀다. 마구 후려쳐 파괴해 버렸다.
쩌저저적. 후두두둑!
얼음 조각들이 튀고 아이스 골렘의 거체가 산산이 쪼개졌다.
“흠.”
힘이라면 그 어떤 종족에도 뒤지지 않는 타이탄의 괴력이 아이스 골렘을 처참하게 파괴시켰다.
하지만 로칸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타이탄이 놈에게 일격을 가한 순간부터 상태 창을 열어 경험치 바를 확인하고 있던 것이다.
처음에는 이곳의 몬스터들이 어느 정도의 경험치를 주는지 파악하기 위함이었으나 지금은 쓰임이 달랐다.
“진짜였나.”
쩌저저적.
바로 확인을 위함이었다. 아이스 골렘이 그대로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인.
아이스 골렘의 투명한 몸체 안에 ‘핵’이 비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가고일처럼 얼음과 마력으로 형상만을 빚어 놓은 것이라면 파괴되는 것으로 끝이겠지만, 얼음의 마나가 놈에게 몰려들었다. 다시 재생시키기 시작했다.
“으……워……! 춥, 다! 느, 리, 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이스 골렘은 파괴되는 순간 극한의 한기를 내뿜어 주변을 얼려 버렸다. 가까이에서 놈을 두들기던 타이탄도 예외는 아니었다.
분명 냉기 저항 옵션이 달린 망토를 두르고 있건만, 순간적으로 몸속까지 파고든 한기는 타이탄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까지 느리게 만들었다.
빙결에 의한 둔화 효과가 일어난 것이다.
쩌저저적!
그래 놓고는 다시 원상태로 몸을 되돌렸다.
상대도 되지 않았던 녀석이 이제는 타이탄을 위협하려 하고 있었다.
“지원해!”
로칸은 즉시 병력을 지휘해 놈들을 떨어뜨려 놓았다.
다만 섣부른 파괴는 금물.
놈을 부수면 또다시 주변이 얼어 버리고 폐 속까지 한기가 치밀 것을 우려해 떨어뜨리고, 산 아래로 굴려 버리는 것을 최선으로 삼았다.
“역시 한 놈뿐일 리가 없지.”
하지만 여럿이서 한 놈을 던져 버리는 것은 쉬워도 그 수가 불어나면 어려워지는 법이다.
얼음의 마나에서 태어난 것은 녀석 하나만이 아니라는 듯, 아이스 골렘들이 무수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취미가 조각이라도 되는 거냐…….”
놈들을 바라보는 로칸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처음에 나타난 녀석은 전형적인 ‘골렘’의 모습이지만 그다음부터 나타난 놈들은 생김과 특성까지 독특한 것이었다.
인간 마법사부터 오크, 그렘린, 오우거, 드레이크까지 온갖 몬스터의 형상이 그곳에 있었다.
퍼엉!
“크엉! 또, 느, 리, 다.”
녀석들을 파괴할 때마다 한기가 스미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되자 전력 자체는 우위이더라도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죽여도 되살아나는 불사의 존재가 파괴될 때마다 확정 타격을 남기니 시간을 끌어 봐야 손해일 수밖에 없다.
“싸우지 말고 돌파해! 길은 내가 뚫는다!”
로칸은 즉시 결단을 내렸다.
아이스 골렘들을 처치하기 위해 흩어진 병력을 집결시키고 스스로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다른 놈들이 아이템으로 올린 저항력의 몇 배나 되는 저항력이 보유하고 있는 그이기에 코앞에서 아이스 골렘이 터져 나가도 별 피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한 놈을 작살내 확인해 본 결과였다.
“카이, 엄호해 줘!”
뀨우!
얼음 마법 따위를 써 대며 질철질척 들러붙는 놈들도 있었지만 그런 놈들은 카이가 대신 떨쳐 내 주었다.
속성 저항력만큼은 이미 로칸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인 카이였기에 빙결의 힘 따위 막아서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사이 로칸과 용병들은 빠르게 산을 올랐다.
목적지는 산의 정상.
그곳에 레어의 입구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확률이 높은 곳이었다.
“저기 동굴이!”
“돌파한다!”
그리고 역시나, 정상 부근에 가까워지자 거대한 동굴이 나타났다.
화이트 드래곤이라면 이 눈 속에 파묻혀 잠이 들었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눈사태를 일으키며 몸을 일으킬 수 있겠지만, 무언가 수집하지 좋아하는 드래곤의 특성상 동굴을 파고 그 안에서 동면을 취할 것이라는 예측이 들어맞은 것이다.
쿠구구궁.
동굴에 가까워질수록 아이스 골렘들이 나타나는 속도와 숫자가 증가하는 것도 드래곤의 레어라는 반증이다.
로칸은 더욱 빠르게 길을 뚫어 내며 가장 먼저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살아남은 모든 용병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어울리지 않는 마법을 사용했다.
“파이어 월!”
화르르륵!
붉은 불길이 동굴의 입구를 가로막았다.
오래 가지는 못할 테고 마법 공격력 역시 형편없겠지만, 애초에 타격을 입히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본능을 자극해 잠시 아이스 골렘의 접근을 막는 것이 목표였다.
“바로 진입한다.”
아이스 골렘들이 레어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한다면 다행이지만 들어올 수 있다면 큰일이었다.
때문에 로칸은 가만히 기다려 확인하는 대신, 놈들의 시야에서 멀어지기로 마음먹었다.
이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답이 없는 싸움보다는 낫겠지.
“우으, 여기는 좀 따뜻하군.”
“그래도 망토는 벗지 마. 상대는 화이트 드래곤이다.”
혹시나 함정이 있을까 걱정하며 진입한 화이트 드래곤의 레어 내부였지만, 다행히 한동안 나타나는 것은 없었다.
저 바깥의 만년설에서 튀어나온 아이스 골렘들이 가디언의 전부는 아닐까 생각이 될 만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로칸은 그것이 불안했다.
“진실의 종 소환.”
용병들을 앞세우며 슬쩍 진실의 종을 소환해 물어보았다.
“화이트 드래곤을 만나기 전까지 이 앞으로 함정이 있나?”
[거짓]
“응?”
함정이 없다고?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던진 물음이었기에 로칸의 표정이 묘해졌다.
무한히 재생하는 아이스 골렘들이 까다롭기는 했지만 정말 그게 끝이라니, 혹시 놈들이 레어 안쪽까지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곧 자신들을 뒤쫓아 오는 건?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뒤범벅이 되어 한숨을 푹 내쉰 로칸은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든 망설일 시간도, 이유도 없었다.
“전속 전진!”
로칸은 즉시 모든 용병들에게 지시를 하달했다.
전속 전진.
편한 척하고는 있어도 내심 드래곤 레어라는 사실에 긴장하고 경계하던 용병들이 잠시 의문을 품었지만, 로칸이 앞서 달리자 지지 않고 따라붙었다.
개중에는 아이스 골렘의 추격을 떠올린 이도 있었고 로칸이 뭔가 알아냈다고 짐작한 이도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로칸을 믿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드래곤 슬레이어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이미 한번 드래곤을 사냥해 본 이를 믿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겠는가.
이미 돌아갈 수도 없는 곳까지 와버렸기에 그들은 악착같이 로칸의 뒤를 따라붙었다.
화아아악.
“……!”
“크아악!”
“어, 얼어붙는……!”
그러던 어느 순간, 강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 로칸조차 싸늘함을 느낄 만큼 강력한 한기를 내포한 바람이었다.
그 냉기에 무방비로 노출된 선두의 인원들이 그대로 얼어붙었고, 얼음 조각이 된 동료들을 본의 아니게 바람막이로 삼은 이들은 가까스로 한기를 견뎌 내며 물러섰다.
‘함정은 없다며?’
진실의 종이 거짓을 말한 것일까?
혼란스러웠지만 로칸은 곧 해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건 함정이 아니다.
그의 질문은 ‘화이트 드래곤을 만나기 전까지 함정이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진실의 종이 오류가 난 것이 아니라면 떠올릴 수 있는 가설은 두 가지였다.
‘이건 함정이 아니다.’
혹은.
‘화이트 드래곤을 만났다?’
로칸을 이를 악물고 발걸음에 힘을 더했다. 세차게 불어오는 한기를 뚫어 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전원 대기하라! 내가 먼저……!”
그러나 그 순간, 바람이 멎었다.
몸을 밀어 낼 만큼의 강풍이 한순간에 멈춰 버렸다.
마치 태풍의 눈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로칸은 곧 그런 낭만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타이틀 드래곤 슬레이어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드래곤 종족과의 관계가 적대로 고정됩니다.]
“이 새끼……!”
극한의 한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은 검은 동굴이었다.
무척이나 까맣고, 음침하며 불쾌한 기운이 드는 동굴.
로칸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콧구멍’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늦지 않게 깨달았다.
쿠르릉. 휘이이잉!
무려 그랜드 마스터를 한순간 얼려 버렸던 그 한기의 정체는 다름 아닌 화이트 드래곤의 콧바람이었다.
놈이 졸면서 내뿜은 콧바람에 저항력이 낮은 존재들은 그대로 얼음 조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마제스티 마스터라지만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믿기 어려워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환상이 아닌 실제였으니까.
오직 빙결의 힘을 극한까지 타고 난 화이트 드래곤이기에 가능한 이적이었다.
딱히 신성을 쓰지 않고도 저절로 일어나는 기운에 몸서리가 쳐졌지만 이대로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잠들어 있다면 지금이 기회.
로칸이 몸을 날렸다. 놈의 역린을 찾아 가장 강력한 일격을 날리기 위해 힘을 일으켰다.
“광풍 현신, 피의 각성, 무혼 각성!”
드래곤 슬레이어의 눈부신 증폭효과가 더해지니 몇 배가 아니라 몇십 배나 능력이 증폭되었다.
마제스티 마스터를 압도할 기운이 솟아올랐다.
“초극!”
이렇게 되면 아낄 것이 무어냐.
로칸은 망설이지 않고 시작부터 자신의 최대 공격을 쏟아부었다.
사용하고 나면 뒤가 없어지는 스킬이지만 만약 이것으로 빈사에 가까운 타격을 입힐 수만 있다면 다음을 기약할 이유도 없다.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파멸의 힘이 역린을 향해 다가갔다.
“어디 침입자 따위가 날뛰는가!”
그때, 화이트 드래곤이 잠에서 깨어났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적의가 로칸을 향해 뿜어졌다.
역린까지 이제 한 발자국.
“모조리 얼어붙어라!”
쩌적 쩌저저적!
그때 화이트 드래곤의 몸에서 강력한 신성이 일어나 세상을 얼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