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8
모테론의 원한 (2)
하루, 이틀. 고작 이 정도의 준비로 일이 시작되지는 않았다.
로칸은 순수 천족들에 대해 모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긁어모았다.
집에 숟가락이 몇 개가 있으며 팬티 색깔은 무엇인지까지 알아낼 정도로 깊고 세세한 부분까지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잠시 잊고 있던 것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모테론이라……. 원한의 구슬?”
바로 모테론에 대한 것이다.
사실 까먹고 있던 터라 따로 조사한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 쪽의 파벌과 그에 대항하는 파벌에 대해 조사하던 중 우연히 그 이름이 언급된 것이다.
정확히는 각 파벌에 대한 조사도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순수 천족들의 세력 구조도를 파악하던 중 난데없이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탈루바라고?”
천신의 역사라는 주제의 강의를 도맡고 있는 순수 천족 탈루바.
놈은 일반 천족들에게 천신의 위대함과 특별함 그리고 마족과의 싸움 등에 대해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자였다.
보통의 순수 천족들은 일반 천족들과 말조차 섞기 싫어하지만 이 녀석은 특이하게도 그것을 즐겼다.
정확히는 일반 천족들 앞에서 으스대고, 떠받들어지는 것을 즐긴다고 해야 할까?
일종의 역사학자로, 전투력은 형편없기에 더 그런 것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놈이 모테론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습게도 탈루바라는 놈이 으스대며 늘어놓는 강의의 대부분이 과거 모테론이 하던 것과 일치한다.
자료도, 강의도. 앵무새처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뿐, 자신의 견해나 주장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녀석의 영향력은 제법 강하다고 했다.
일반 천족을 세뇌하듯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니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그 영향력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그게 모테론의 죽음이라 이거지?”
[모테론의 원한2][퀘스트]
억울한 죽음을 당한 천족 고고학자 모테론의 원한을 풀어 주자.
-성공 조건 : 천족 고고학자 모테론의 죽음 조사 0 / 1
-성공 보상 : ???
-실패 페널티 : 없음(저주 무효화)
모테론이 죽은 뒤 그의 모든 자리를 꿰찼을 뿐 아니라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생전의 모테론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딱 봐도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구린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며 퀘스트 창을 살피자 퀘스트 내용이 살짝 갱신되어 있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흠, 이걸 파 봐야 하나?”
하지만 로칸은 고민했다.
의도적으로 알아낸 것이 아니다보니 굳이 이걸 물고 늘어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당장 황제파와 반황제파를 조사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 와중에 보상이 뭔지, 몇 단계나 연계되어 있는지 모르는 퀘스트를 수행한다? 시간 낭비가 될 확률이 높았다.
“……어?”
때문에 잠시 모테론에 대한 생각은 접어 두고 다시 정보 분석에 매진하던 로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모테론이 죽던 그날 밤, 황제의 근위대가 은밀하게 움직였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미묘하게 모테론이 괴한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시간과 일치했다.
게다가 도시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던 모테론이 쥐고 새도 모르게 죽었다는 것도 이상했다.
모테론은 그 자신이 제법 강력한 기사이기도 하지 않았나? 그런 이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죽음을 알리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것은 몇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게 해 준다.
더 강력한 어떤 존재가 개입을 했거나, 알 수 없도록 정보가 조작되고 주변이 통제되었거나.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군.”
여기에 로칸은 흥미를 느꼈다.
황제의 근위대가 직접 출동해 암살할 정도라면 모테론이 가진 무언가가 그들을 위협할 수준이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낸다면 분란을 일으키는 데 분명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물론 손에 넣는 순간 모테론에게 그랬던 것처럼 살해와 협박의 위험이 생기겠지만, 언제 천족들이 자신에게 안 그런 적이 있던가?
로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일단은 그가 쥐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에헴.”
로칸은 즉시 탈루바가 일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일반 천족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기관. 그곳에서 탈루바는 거의 왕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꼭 천족의 역사만을 가르치는 곳도 아니건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며 웬만한 일반 천족들에게는 인사도 받아 주지 않고, 또 예쁘장한 종족은 슬쩍 만지고 희롱하며 제 욕구를 채우기 바빴다.
그 모습이 너무나 한심해서 그냥 잡아다가 쥐어 팰까도 생각했지만 일단은 참았다. 비밀은 집에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은신.”
로칸은 꾹 참고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탈루바를 뒤따랐다.
탈루바와 호위병들의 레벨도 제법이라 은신이 들킬 위험도 있었지만 천상에는 고레벨의 은신 스킬이 붙은 장비가 얼마든지 있었다.
액세서리 중 하나를 ‘그림자 군주의 위엄’으로 바꾸고 내부로 녹아들었다.
‘돈도 많군.’
수도씩이나 되는 곳의 한복판에 이런 대저택이라니? 고작 400레벨도 되지 못한 역사학자가 이룬 것으로 보기에는 과도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에도 값비싼 조각상, 그림 등이 나타났고, 그럴수록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대체 어떤 비밀이 이만한 부를 안겨 준 것일까.
천신의 역사에 대한 것이야 꼭 역사학자가 아니라도 천신의 사제라면 누구나 알고 가르칠 수 있는 종류이기에, 추가적인 무언가가 숨겨진 게 분명했다.
‘어느 쪽이냐…….’
스르륵.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 채 저택의 안쪽으로 잠입한 로칸은 주변을 스캔하며 그가 감추고 있는 비밀을 찾기 시작했다. 침실, 주방, 창고, 서재까지.
‘역시 비밀 통로라고 하면…….’
사라락.
그중에서도 서재에 관심을 기울였다.
보통 이런 경우 서재에 비밀의 문 같은 것을 장치해 놓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어떤 책을 뽑아 들거나 집어넣으면 비밀 공간이 나타나는 식으로 말이다.
‘더럽게 많네.’
서재로 들어서자 역사학자답게 방 안에 있는 책이 수백 권은 족히 되는 것이 보였다.
문제는 이 중에 모테론의 죽음과 연관된 책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비밀 공간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어쩌겠나, 일단은 찾아볼 수밖에.
‘응?’
그렇게 집히는 대로 책장을 넘기다가, 로칸은 모테론의 흔적을 발견했다.
바로 그의 이름이 적힌 책들.
탈루바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 중 대부분이 원래는 모테론이 소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로써 둘 사이의 연관성은 확실해졌다.
‘이거 오늘 안에는 끝나려나?’
빠르게 책장을 넘겨가던 로칸은 슬슬 짜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이 많은 책들을 언제 다 살핀단 말인가?
사실 다 살핀다 해도 찾던 것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처럼 중요한 것을 책장에 아무렇게나 둘 리 없지 않나?
물론 가끔 중요한 것을 비슷한 것들 사이에 섞어 의심을 피하는 경우도 있어 뒤지고는 있지만 지켜본 결과, 탈루바가 그 정도로 치밀한 인물은 되지 못했다.
‘아?’
그때 문득,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애초에 이렇게 고생을 해 가며 헤맬 필요가 없었다.
핑그르르.
“젠장. 여기가 아니었네?”
바로 욕망의 나침반. 그것을 쥐고 모테론의 죽음과 연관된 단서를 갈망하자 나침반의 바늘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일단 서재는 아니었다.
‘흐음…….’
오직 방향만을 알려 주는 욕망의 나침반으로 세밀한 탐색을 하는 것은 어려웠다. 1층이든, 2층이든 같은 위치에만 있다면 핑그르르 제자리에서 회전할 뿐이니 확인이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만약 비밀 통로를 이용해 움직여야 하는 곳에 있더라도 최종 목표물이 있는 위치에서 제자리 회전을 해 버리니 어려움이 있었다.
‘이거 혹시…….’
그런데, 이 경우는 뭔가 이상했다. 보통 한 위치에 고정되어 있어야 할 목표가 자꾸 움직이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이동하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있을 때도 수시로 방향이 바뀌는 것을 보고 로칸은 이상함을 느꼈다.
모테론의 죽음에 대한 단서가 살아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어……. 그러네?’
갸웃거리며 계속해서 이동하던 로칸은 어느 순간 욕망의 나침반이 휙 도는 것을 보며 확신했다.
나침반이 움직인 순간, 탈루바가 자신의 곁을 스쳐 간 것이다.
그 말인 즉, 놈이 단서를 가지고 있거나 놈 자체가 단서라는 뜻이다.
“차라리 이러면 간단하지.”
촤르륵.
그 순간, 로칸에게서 굵은 사슬이 뻗어 나갔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탈루바의 몸과 입을 감싸며 제압해 버렸다. 그리고 방으로 집어 던지듯 내동댕이쳤다.
“나이트메어.”
입이 틀어 막혔기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하지만 놈의 몸을 수색하기 위해 풀어 주면 언제든 비명을 질러 대겠지.
고작해야 400레벨도 이루지 못한 놈이니 제 스스로 로칸에게서 벗어나거나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테고, 어떻게든 구원을 요청하려 들 터였다.
그렇기에 로칸은 다른 수를 내었다.
바로 나이트메어의 활용.
나이트메어가 만들어 내는 악몽과 환상이 넘을 감싸자 눈알에 흰자가 가득해지고 입이 헤 벌려졌다.
나이트메어 역시 400레벨을 넘기다 보니 저항 따위를 할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촤라락.
그제야 로칸은 놈을 제압하던 사슬을 풀었다.
남자 놈의 몸을 구경하는 취미는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멍하니 선 놈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흠, 이건가?”
옷부터 반지,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까지. 그밖에 소지품 등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리고 가장 유력해 보이는 어떤 것을 집어 들었다.
[고대의 문양 반지][유니크]
고대의 문양이 새겨진 알 수 없는 반지.
-???
딱 봐도 수상하지 않은가?
온통 물음표뿐인 수상하기 짝이 없는 옵션 하나만 덜렁 붙은 장비를 그처럼 치장하기 좋아하는 놈이 차고 다닌다?
나머지 아이템들이 모두 자기 방어를 위한 종류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히익! 난 아니야. 내가 죽인 게 아니라고! 난 그저 신고만……. 아니, 네가 잘못한 거야! 알아선 안 될……. 그러니까 네가 잘못한 거라고!”
그때, 탈루바가 돌연 소리를 꽥 하고 질렀다. 악몽 같은 환상을 보던 중 겁에 질린 듯 자기 항변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빌다가, 나중에는 상대방을 탓했다.
그가 보고 있는 악몽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모테론의 죽음과 관련된 어떤 것.
그렇기에 로칸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가 하는 말들을 담아 두었다.
이 반지가 무엇의 열쇠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힌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탈루바 님!”
그때, 경비병들이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탈루바의 고함에 놀라 황급히 달려온 것이다.
“거, 거긴 안 돼!”
“……여기서 주무시는 건가?”
드르렁, 푸우!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것은 노곤한 듯 몸을 기대고 잠에 빠져 있는 탈루바의 모습이었다.
그 시각, 은신을 사용해 저택을 빠져나온 로칸은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욕망의 나침반이 새로 가리키기 시작한 방향.
그곳에 이 인장을 사용해 열 수 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