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4
유명계 (2)
유명계에서의 사냥은 무척 쉬웠다.
일단 등장하는 몬스터가 대부분 실체가 없는 영혼 계열이었기에 치명타가 터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로칸의 공격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압도적인 파괴력은 놈들의 영혼을 흩어 버렸고, 일부 영혼들은 ‘관통’ 속성의 힘을 이용해 공격해 왔지만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신성한 힘에 가로막혀 심장을 터트리지 못했다.
그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하이 마스터급이든 그랜드 마스터급이든 로칸의 상대가 아니었다.
일부 피해는 어쩔 수 없지만 치명적인 수준은 되지 못했다.
“좋구먼.”
그런 놈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니 경험치가 쭉쭉 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이 마스터급을 학살해도 일반적인 놈들보다 1.2배쯤은 족히 경험치가 오르는 데다 유명계에 진입한 유저는 오직 로칸뿐이니 사냥감도 넘쳐났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덕분에 아예 진득하게 자리를 잡고 며칠 사냥을 하자 레벨이 하나 더 올랐다.
벌써 432레벨. 검은 산에서 레벨 업을 한 번 한 덕분에 이제 449레벨까지는 17레벨이 남았을 뿐이다.
이곳이 더욱 마음에 드는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유령들을 사냥해도 평판이 하락하지 않는다는 것.
누가 음흉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 아니랄까 봐 동족들의 죽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흠, 이놈들은 하나의 종족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환수들의 경우 같은 종족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환상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개인의 특성이나 형태 따위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 마법사 형태의 환수와 늑대 형태의 환수를 같은 종으로 볼 수 있을까? 그건 아니었다. 공통적으로 가진 특징이 단 하나도 없으니까.
그저 같은 세계에 사는 놈들일 뿐 같은 종족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유령들이라면 어떨까? 이들 역시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영혼체’라는 특징은 공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의 종족이라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대적자 설정. 유령.”
로칸은 확인해 보기로 했다. 바로 대적자 설정을 통해서.
[대적자가 설정되었습니다.]
[대적자 : 유령이 확인되었습니다. 대적자는 168시간 후 변경이 가능합니다.]
[유령을 대상으로 모든 공격력과 방어력이 30%만큼 증가합니다.]
“좋았어.”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유령의 경우 생김은 다르더라도 종족으로 묶을 수 있을 만큼의 근원적 공통점이 있음을 시스템이 인정한 것이다.
덕분에 놈들에 대한 공격력과 방어력이 30%나 증가했다.
이미 상대가 되질 않던 놈들에게 재앙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흐흐흐흐, 다 죽었다고 복창해라.”
아니, 이미 죽어 있던가? 로칸은 유령보다 더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다시 전투를 개시했다.
아예 450레벨까지 죽치고 눌러앉을까 싶을 만큼 넉넉하게 들어오는 경험치에 만족하면서 천천히, 유명계를 관통해 나갔다.
“흠, 도시인가?”
그렇게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나타나는 유령들은 모조리 죽였고 자잘한 마을들을 마주치면 휴식을 취하는 대신 마을 째로 지워 버렸다.
그에 따라 평판이 하락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마을 단위의 평판이었기에 완전히 지워 버리면 의미가 없었다. 그곳을 다시 이용할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파죽지세로 나아가던 중, 대도시라 할 수 있는 꽤 거창한 도시를 마주 할 수 있었다.
“이건 좀 시간이 걸리겠는데.”
이번에도 역시 몰살을 노려 보는 로칸이지만 다짜고짜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이만한 도시라면 유령의 숫자도 무시무시할 테고 무엇보다 마제스티 마스터급의 누군가가 있을 확률이 높은 것이다.
광풍과의 대련을 통해 성장하고, 다시 자신감을 회복한 로칸이지만 상대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시비를 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무기를 집어넣고 도시의 입구로 걸어갔다.
“응? 인간이라고?”
“산 자가 여길 나타났어? 이미 누가 빙의한 건가?”
“주인이 없는 것 같은데? 히힛, 그럼 내 거다!”
그러자 즉각 반응이 나타났다.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 같은 자들이 쑥떡거리더니 음흉한 기세를 피우는 것이다.
“안 꺼져?”
“히끅!”
감히 어디서 개수작이야?
로칸은 즉시 힘을 개방했다.
광풍 현신까지도 필요 없다. 광기의 외침을 은근히 담아 소리를 흘리는 것만으로 다가오던 유령 놈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귀찮게 구는군. 그냥 바로 시작할까?”
하지만 그 탓에 도시 내에 있던 유령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두렵기는 하지만 확실한 산 자의 기운에 본능적으로 이끌린 것이다.
그냥 싸워야 하나 고민이 됐다.
유령들은 죽어서도 영혼을 남겨 떠돌 만큼 집착이 강한 자들이다. 도시를 공격하면 공포를 잊고 몸을 던져 싸울 확률이 높았다.
한번 전투를 개시하면 멈출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몇만, 어쩌면 몇십만쯤 될 법한 대도시의 유령들을 모조리 쳐죽이기 전까지는 도망조차 칠 수 없을지 몰랐다.
덕분에 로칸의 표정에 짜증이 가득 어렸지만 놈들이 선공을 가한다면 피할 생각은 없었다.
묘한 대치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흘흘흘, 재미있는 인간이구나.”
그러던 중, 하얀 카펫처럼 길게 늘어선 유령들이 반으로 갈라졌다. 보다 상위의 존재가 당도한 것이다.
[백염왕 히리칸토][Lv 469]
“나는 이 지역의 주인인 백염왕이다. 네가 며칠 전부터 내 주민들을 해친 자로구나.”
무려 469레벨.
450레벨부터는 레벨이 고작 경험치 조금 더 얻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알기에 로칸도 살짝 긴장을 했다.
저만한 신성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은 것이다.
“주민? 딱히 소속이 없던데.”
“거짓말을 하는군. 마을까지 몇 개나 지우고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내가? 흠, 글쎄.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러나 숙이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여차하면 한판 붙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오리발을 내밀며 모르쇠를 일관했다.
백염왕이 기가 차다는 듯 어이가 없어 했지만 어쩌겠나, 목격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영혼체의 죽음은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기에 의식의 잔재 같은 것을 찾아 증거로 들이밀기도 어려웠다.
“좋아. 그렇다고 하지.”
한데 의외로 히리칸토의 반응이 쿨하다. 뻔한 거짓말이건만 그런 것으로 하고 넘어가 주겠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일까. 로칸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라 그렇다니까.”
어깨를 으쓱여 보이면서도 언제든 배틀 액스를 꺼내 전투를 펼칠 준비를 했다.
“그래. 그런가 보군. 그런 의미에서 내가 제안 하나를 하지.”
“제안?”
[백염왕의 제안][퀘스트]
백염왕 히리칸토가 당신에게 협력 관계를 제안합니다.
수락 시 유령들로부터 비선공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공 조건 : 백혼탑의 건설 및 보호
-성공 보상 : 극대량의 경험치, 타이틀 백염왕의 조력자
-제한 조건 : 1개월 단위 갱신
그와 함께 눈앞으로 나타나는 퀘스트 창.
강제 퀘스트는 아니기에 수락과 거부가 가능했지만 극대량의 경험치라는 것이 로칸을 강하게 유혹했다.
이미 대정령의 퀘스트를 통해 레벨 업의 맛을 본 바가 있지 않던가? 그의 조건을 들어준다면 또다시 공짜 레벨 업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
“백혼탑의 건설이라…….”
하지만 선뜻 수락하기 어려웠다. 백혼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효과를 가지는지 모르지 않은가?
고작 경험치와 타이틀 하나 때문에 시한 폭탄을 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절하지.”
로칸은 단호히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럼 이제 공격을 해오기라도 하려나? 긴장하며 기다리자 히리칸토가 다시 퀘스트를 부여했다.
[백염왕의 제안][퀘스트]
백염왕 히리칸토가 당신에게 협력 관계를 제안합니다.
수락 시 유령들로부터 비선공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공 조건 : 백혼탑의 건설 및 보호
-성공 보상 : 극대량의 경험치, 타이틀 백염왕의 조력자, 50,000,000코인, 백염왕의 선물, 소원권
-제한 조건 : 1개월 단위 갱신
“응?”
보상이 추가되었다. 5천만 코인과 선물 그리고 소원권까지.
소원권의 경우 백염왕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는 백지수표와 다름없었다.
대체 백혼탑이란 게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무조건 거절하려던 로칸의 마음이 움직였다.
“백혼탑이라는 게 대체 뭐지? 나한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뭐야?”
로칸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워낙 음흉한 놈들이다 보니 즉답을 요구하지 않으면 교묘하게 말을 돌려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 가능성이 컸으니까.
“흘흘,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백혼탑은 인간들의 기준으로 그저 상점일 따름이니. 왜 너에게 이런 제안을 하느냐고? 네 영혼의 기록을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네 녀석은 지상에 아주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더군. 그것을 지킬 힘도 있고. 그러니 내가 원하는 것은 백혼탑을 건설할 부지를 제공하고 그것이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를 하는 것이다. 물론 어지간한 성벽보다 단단할 테니 쉽게 부서지지도 않겠지만.”
로칸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고작 상점 하나를 내기 위해 이만한 보상을 내건다? 그것도 천상이 아닌 지상에?
아무리 계산해도 수지가 안 맞는 장사다.
그렇다면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소리인데…….
‘그렇군.’
가만히 그를 히리칸토를 살피던 로칸은 곧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의 말에 교묘히 녹아 있는 허점 또한 파악했다.
“인간의 기준이란 말이지? 그럼 너희들의 기준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지? 그걸로 너의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는 건가?”
“큭, 크하하, 이거 대단하군. 아직 초월자에 불과한 것 같은데 거기까지 알아낸 건가? 그래, 맞다. 백혼탑의 기능 중 하나는 그 세계의 버려진 영혼을 수집하는 것이지. 그것을 통해 유명계의 주민을 늘리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이것 봐라?’
또 교묘하게 말을 돌린다.
백혼탑이 일종의 송신기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세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며 로칸은 놈에 대한 경계심을 더 키웠다.
모든 마제스티 마스터들이 그러는 것이기도 하지만 놈의 음흉함은 이미 드러나지 않았나?
그렇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나도 이곳에 상점을 세우겠다.”
“상점? 그래, 좋다. 허락하지.”
“그리고 또 한 가지. 난 세금을 내지 않겠어. 그리고 백혼탑에는……. 30%의 세금을 부과하지.”
“이거 눈 뜨고 코 베이는 기분이군. 너무하는 것 아닌가?”
강짜를 부리는 것에 가까운 로칸의 요구 사항에 백염왕이 죽는 소리를 했지만 실상 백혼탑에서 발생하는 판매 수익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쯤은 로칸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강하게 나갈 수 있었다.
“싫으면 말든가.”
“좋아. 하지. 인간의 음흉함이 우리 못지않다더니 이거 못 당하겠군.”
그렇게 계약이 성사되었다.
로칸이 꼼꼼히 살피고 수정한 덕분에 퀘스트 보상 부분이 꽤나 바뀌었고 계약서도 하나 추가로 작성을 했지만,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계약이 이행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