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7
세계수 (1)
[나무의 대정령 멜로든][Lv 481]
“치코리타?”
“……그게 무슨 말인가?”
“아, 아닙니다.”
짐짓 근엄한 척 말을 하는 대정령의 모습은 언젠가 만화에서 봤던 캐릭터의 그것이었다.
저작권이 걱정될 만큼 똑 닮아서 로칸은 웃음을 참기 위해 움찔거렸다.
“환마계를 한바탕 뒤집어 놓았더군.”
“음? 아……. 그렇습니다. 소란이 좀 있었죠.”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군. 간단하다. 환마계라고 식물들이 없는 것은 아니니. 먼 곳이라면 모를까 환마계의 상황 정도라면 얼마든지 들여다볼 수 있지.”
놀랍게도 나무의 대정령은 환마계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다.
로칸이 교감을 사용해 카이로 정찰을 보내듯 식물을 통해 그것들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듯싶었다.
의식적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 해도 놀라운 정찰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복종의 구슬을 만지작거리게 만든달까.
“그래,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지?”
“예. 지고한 존재를 만나 보는 것만으로도 개안이 될 것 같았습니다.”
“흘흘, 그렇게 아부 떨어도 소용없네.”
팔랑팔랑.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머리카락처럼 달린 나뭇잎이 세차게 팔랑거리고 있었지만, 아무튼 그런 걸로 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해야 할까? 정보를 얻을까, 아니면 퀘스트? 그것도 아니면 동맹 구축이라도 요청해 봐?
“방문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부탁이라더군. 정확히는 그에 따른 보상이던가? 아무튼.”
결국 나무의 대정령이 먼저 화두를 던졌다.
“그렇다면 나도 그대에게 부탁을 하나 하지.”
[세계수의 가지 전달][퀘스트]
나무의 대정령 멜로든이 당신에게 세계수를 일으킬 것을 부탁했다. 그가 전해 주는 세계수의 가지를 지상에 심어 세계수를 부활시키자.
-성공 조건 : 하프엘프들에게 세계수의 가지 전달
-성공 보상 : 극대량의 경험치, 대정령의 축복
“이건…….”
그의 부탁과 함께 생성된 퀘스트. 한데 그 내용이 범상치가 않았다.
세계수의 부활이라니?
하프엘프의 종족 퀘스트로까지 설정될 만큼 대단한 업적이 그저 세계수의 가지를 심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이곳에 진짜 세계수가 있다고는 하나, 세계수의 가지라면 이들에게도 어마어마한 보물일 텐데.
‘그런 건가?’
얼마전까지였다면 얼씨구나 하고 퀘스트를 받았겠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있었다.
나무의 대정령도 세계수를 통해 통치 범위를 넓히려는 것이 아닐까? 정령계와 자신의 세계에 국한되어 있던 범위를 지상으로까지 넓히려는 것이다.
그리만 된다면 정령들의 신성과 영향력은 기존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해질 테고, 유명계나 환마계가 무슨 수작을 부려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힘을 갖추게 될 터였다.
게다가 이미 480레벨이 넘는 강력한 신성을 갖춘 상태였으니, 어쩌면 500레벨을 채우고 ‘정령신’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세계수의 가지 전달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속내가 있다는 것쯤은 간파했지만 로칸은 당연히 퀘스트를 수락했다.
속이 시커먼 다른 놈들이라면 모를까, 정령들이라면 제법 믿을 만하지 않은가?
호전적인 성격도 아니니 다른 세계를 상대로 싸움을 걸 확률도 낮고, 자신의 뒤통수를 칠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대비야 하겠지만 이를 통해 극대량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면 무조건 남는 장사인 것이다.
‘퀘스트의 경험치 보상은 대상자의 현재 상태에 따라 표기되기 마련이니까.’
로칸의 현재 레벨은 421이다.
한데 이 레벨을 기준으로도 극대량이라 표현이 되는 경험치라니. 잘하면 레벨 업도 노릴 수 있을 정도였으니 이건 무조건 해야 했다.
그리고 한 가지 꾀를 더 내었다.
“혹시, 세계수의 가지를 좀 더 내어 주실 수 있습니까?”
“왜지?”
로칸의 요구에 멜로든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만큼 세계수의 가지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마르거나 시들지 않아서 세계수의 잎사귀 또는 가지를 얻기 위해서는 강제로 취하거나, 세계수가 직접 내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칸은 당당했다. 이건 거래이니까.
“아시겠지만, 지상의 세계는 한 곳이 아닙니다. 세계수의 가지를 내어 주신다면 무지개 전송기를 이용해 제가 속해 있던 곳 뿐 아니라 다른 지역들에도 세계수의 가지를 전하겠습니다. 물론, 퀘스트는 별도로 생성해 주시겠죠?”
“흐음, 그거 좋은 일이군. 좋다. 그렇게 하지.”
잠시 고민하던 멜로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더 많은 세계에 세계수를 심는다면 그만큼 신성이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로칸이 이것을 가지고 잠적해 버린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지상의 다른 세계에 속한 이들이 이곳에 당도하고 자신을 만날 조건을 충족시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들이라고 로칸보다 믿을 수 있다 여길 수도 없었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로칸처럼 노골적으로 보상을 요구하는 이에게 전달하는 편이 안전할 터였다.
[세계수의 가지 꾸러미를 획득했습니다.]
그렇게 멜로든을 졸라 받아 낸 세계수의 가지만 무려 열 개.
총 열 개의 국가에 세계수를 뿌리내릴 수 있는 양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각 세계당 세계수는 하나뿐이네. 그 이상을 심는다면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어.”
만약 이것을 한 국가에 여러 개 심으면 어떨까 하고 잠깐 생각했던 로칸이 움찔 놀랐지만 곧 평안을 되찾았다.
그도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보니 한국 땅을 발전시킬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사실 하프엘프 놈들 좋은 꼴을 보게 해서 이득 될 것은 별로 없었다. 국뽕이나 차오르고 말겠지.
하지만 그보다는 역시 자신의 이득이 최우선이다.
멜로든의 엄포가 진짜인지 허튼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예방인지는 모르지만 극대량의 경험치와 멜로든과의 호감도를 모두 포기할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가려 하자 멜로든이 잠시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가기 전에 일단 그간의 보상은 해 줘야겠지.”
“아?”
보상을 선불로 지급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살짝 기대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환수들을 처리하기로 했던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퀘스트를 받은 정령 마을에서만 완료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나무의 대정령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무 속성에 대한 저항력이 30% 증가합니다.]
[숲 지형에서 공격력, 방어력, 이동속도가 30% 증가합니다.]
[기적적인 업적! 당신은 방문자 중 최초로 대정령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타이틀 ‘대정령의 축복을 받은’을 획득했습니다.]
[당신은 이 타이틀의 최초 획득자입니다.]
[최초][대정령의 축복을 받은][에픽]
대정령의 축복을 받은 당신은 모든 정령들의 친구입니다.
정령들의 부탁을 받거나 부탁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 타이틀의 최초 획득자입니다.
[보유 효과]
-나무 속성 저항력 + 30%
-숲 지형에서 공격력, 방어력, 이동속도 30% 증가
-정령계의 평판 및 호감도 대폭 증가
-정령들에게 퀘스트 생성 가능
‘오?’
이건 꽤 놀라웠다. 공방력과 이동속도의 증가도 기꺼웠지만 정령들에게 역으로 퀘스트를 생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니.
아직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잘만 활용한다면 그들을 부려 단신으로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성과를 올리고 대정령의 거처를 내려온 로칸은 곧장 카이의 주변에 몰려있는 정령들에게 다가갔다.
“정령계에 있는 영초들을 모아서 내 상점에 팔아 줘. 그럼 다음에 카이랑 하루 종일 놀게 해 줄게!”
“꺄앗! 진짜?”
“와아아아! 하루 종일이래!”
“할래! 할래!”
자리를 비우는 막간을 이용해 정령들에게 할 일을 부여했다.
코인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정령들이기에 돈으로 유혹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카이와 노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은가?
하루 종일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에 정령들이 환호했고, 몇몇은 ‘내가 먼저 찾을 거야!’라며 벌써 영초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끼, 끼유?
그 사이에서 카이가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 왔지만 로칸은 애써 모른 척을 했다.
한창 활발히 뛰어다닐 애들을 보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는 것처럼 카이가 정령들과 놀아 주는 것도 힘든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어쩌겠나, 그것으로 취할 수 있는 이득이 막대한 데다 그것이 카이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을.
그래도 일단은 풀어 주기 위해 카이를 역소환하고 천상의 룬 북을 사용했다.
다시 지상으로!
그러나 멜로든이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을 터였다.
***
“그러니까…… 얼마라고요?”
지상으로 돌아온 로칸은 늘 하던 대로 세금을 거둬들이고, 정세를 살폈다.
이전처럼 황금사자 진영 대 검은용군단의 대립 구도는 그리 치열하지 않지만 여전히 국지적인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고, 그보다는 아무래도 새로운 맵과 천상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새로운 맵에는 새로운 것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것이 업적이든 아이템이든 말이다.
그것들을 모두 회수한 뒤에는 다시 대립이 격화되겠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아닐 듯싶었다.
더구나 이미 하이 마스터급의 유저들이 다수 등장한 상황에서 종족 퀘스트도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했으니, 각 종족의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도 빛이 바랬다.
그것은 하프엘프들도 마찬가지.
세계수를 복원하고 싶은 하프엘프 NPC들의 열망은 그대로건만, 유저들이 그리 협조적이지 않으니 제법 난항을 겪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 가뭄의 단비처럼 나타난 것 바로 로칸이었다.
“제시.”
그런데, 황당하게도 로칸은 지금 세계수의 가지를 가지고 하프엘프들과 흥정을 벌이는 중이었다.
‘내가 공짜로 받았다고 남에게도 공짜로 줄 필요는 없지!’
나무의 대정령 멜로든의 부탁을 받아 지상에 세계수를 전파하기 위해 내려온 그였지만 퀘스트 어디에도 ‘무상으로 제공’하라는 소리는 없었다.
그러니 숙원을 이루는 입장인 하프엘프들이 합당한 대가를 내놓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본래 쉽게 얻으면 쉽게 생각하는 법이거든.’
진정한 참 교육, 참 배움을 내리고 있는 자신을 대견스러워하며 로칸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하프엘프들의 원로들이 움찔 몸을 떤 것처럼 보인 것은 아마도 착각일 것이다.
대놓고 장사를 하겠다고 드는 로칸의 뻔뻔함에 잠시 자기들끼리 회의를 하던 하프엘프 원로들과 림주들은 곧 결과를 가져왔다.
세계수를 확실하게 되살려 낼 수 있는 것이라면 숲 전체를 팔아서라고 구해야 하니까.
그들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거래였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잠시 후, 거래가 성사되었다.
막대한 양의 골드와 하프엘프들의 보물창고에 잠들어 있던 아이템 다수 그리고 그가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따르겠다는 계약서 한 장으로 말이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쿨 거래’의 종료를 더욱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은 역시 레벨 업 알림.
굳이 다시 보고를 하러 가지 않아도 즉시 종료되는 퀘스트인 덕에 로칸은 가뿐히 레벨을 하나 올렸다.
이제 남은 세계수의 가지는 아홉 개.
이걸로 무엇을 더 얻어 낼 수 있을까?
로칸이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무지개 전송기에 올랐다.
이제는 다른 나라들로 떠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