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1
공허 (2)
[최초][공허 사냥꾼][에픽]
공허의 마수들 중에서도 강대한 존재를 단신으로 쓰러뜨린 당신의 위업에 경의를 표합니다.
공허에 대항한 당신의 무위에 그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 타이틀의 최초 획득자입니다.
[보유 효과]
-공허의 존재를 대상으로 공격력, 방어력 20% 증가
-신성을 지닌 존재들의 인정
[최초][공허를 품은 자][레전드]
공허의 힘을 몸 안에 품은 당신! 공허를 곁에 두는 것은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무척 위험한 일입니다.
공허가 당신의 존재를 노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당신은 이 타이틀의 최초 획득자입니다.
[보유 효과]
-공허의 침식으로부터 면역
-공허의 존재들로부터 비선공 효과
-공허의 존재를 상대 시 전투 페널티 삭제
-[공허의 힘] 사용 가능
“허…….”
레벨 업도 레벨 업이지만 무려 에픽 등급과 레전드 등급 타이틀이 하나씩이다.
언뜻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등급이 등급인 만큼 언젠가는 크게 쓰일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후우!”
쿠구구구구구구궁.
소란 때문일까, 아니면 초극의 흔적 때문일까. 저 멀리서부터 공허의 존재들이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로칸은 간신히 고통에서 벗어난 몸뚱이를 움직여 버둥거리는 팬더를 즉시 사살하고 놈의 심장을 마저 탐식했다.
[심장을 먹는 아귀가 공허의 팬더왕의 심장을 탐식합니다.]
[대상의 심장과 영혼에 깃든 힘을 흡수합니다.]
[공허 팬더왕의 단단함을 흡수합니다.]
[당신의 몸속에 단단한 힘이 깃듭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팬더가 가진 힘과 체력, 방어력이 흡수되었다.
로칸의 일격에도 흠집이 나는 것이 고작이던 방어력은 물론, 강대한 힘과 생명력이 복합적으로 스며들었다.
체감이 가능할 정도로 강해진 육체 스펙.
하지만 그것에 만족하고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적들이 수도 없이 몰려들고 있었으니까.
“……?”
그러나 무언가를 찾아 달려온 놈들은 로칸을 본 체 만 체 했다.
이전처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눈길을 주었으나 놀랍게도 선공을 가하지 않았다.
“그런 건가?”
잠시 조금 전 획득한 타이틀의 효능을 떠올리던 로칸은 곧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놈들이 로칸 자신을 공허의 존재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비선공 몬스터들.
지금 놈들의 모습은 딱 그것과 같았다.
‘아깝지만…….’
생각 같아서는 마저 놈들을 사냥하고 싶지만 스킬의 지속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이제는 공허의 침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니 여기서 죽치고 사냥을 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만약 이곳에서 죽을 경우 영혼이 저장된 장소로 이동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으니까.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자칫 영혼이 공허에 침식되어 후유증을 겪을 수도 있다고 했다.
게다가 이곳에 들어오는 방법은 이제 알고 있지 않은가?
준비물도 딱히 더 준비할 필요가 없으니 차원 괴조의 발톱과 힘의 정수만 있다면 언제든 드나들 수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로칸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며 서로를 경계하는 공허의 존재들과 멀어져 욕망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응?”
핑그르르.
그리고 어떤 지점에 닿았을 때, 욕망의 나침반이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는 딱 두 가지.
목표가 정해지지 않았거나, 목표에 도달했을 때뿐이다.
“여기군.”
로칸은 즉시 인벤토리에서 차원 괴조의 발톱을 꺼내 휘둘렀다.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하게.
그러자 금세 결과가 드러났다.
살갗을 베인 것처럼 차원의 틈이 찢기더니 반대편으로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지체할 이유는 없다. 로칸은 계속해서 차원의 틈을 베어 가면서 몸을 날렸고, 공허를 벗어날 수 있었다.
[정령계에 진입하셨습니다.]
“어? 정령계라고?”
파츠츠츠츠츳!
로칸이 끌고 온 공허의 기운이 정령계의 기운과 마주치며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정령계에 흐르는 어떤 힘이 공허를 공격해 물리쳤고, 그를 따라 나오던 촉수 같은 기운들은 곧 공허로 물러나 사라져 버렸다.
공허의 문이 닫힌 것도 바로 그때.
하지만 로칸은 그보다 다른 것에 관심을 두었다.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이런…….”
욕망의 나침반을 사용할 때 아무래도 생각을 잘못 품은 모양이다. 꼭 정령계를 오고 싶은 생각은 아니었는데 신맵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만 품었더니 랜덤하게 지정된 것 같았다.
“정령계라…….”
사실 따지고 보면 썩 나쁜 선택만은 아니다. 로칸에게는 정령들이 호감을 갖게 만드는 타이틀이 있었으니까.
바로 정령 해방자.
언젠가 타락한 불의 정령을 처치하고 습득해 둔 타이틀이었다.
보유 효과가 정령들의 호감이라는 내용 하나뿐이라 당시에는 쓸 곳이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로칸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며 걸음을 이어 나갔다.
“욕망의 나침반, 사용.”
로칸이 떨어진 곳은 울창한 숲이었다. 녹음이 푸르고 산들바람이 살랑이는 기분 좋은 공간.
언제까지고 있고 싶은 풍경이지만 일단은 거점으로 삼을 만한 곳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욕망의 나침반을 이용해 가장 가까운 마을을 탐색했다.
“저쪽이군.”
일단은 천상의 룬 북에 위치부터 저장하고 욕망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얼마가 걸릴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목적한 곳에 데려다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로칸의 발걸음은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흠…….”
그렇게 걷기를 한참.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 아까부터 지켜보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 땅의 주인들일까? 아니면 몬스터?
광기를 드러내 그들을 도발해 볼까 생각했지만 일단 참았다. 상대의 수준이 어떤지, 호감일지 적의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행동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로칸은 경계만 강화한 채 차분히 걸었다.
‘이건?’
그러던 어느 순간, 로칸의 감각에 걸려드는 어떤 기운이 있었다. 큰 소란은 없지만 더 없이 강력한 기운이었다.
촤라라락! 끄그그극.
서둘러 움직여 보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영초 사냥꾼 흑랑][Lv 414]
무려 400레벨이 넘는 검은 늑대가 고작 나무줄기에 묶여 옴짝달싹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겨우 그 정도가 아니다. 사지가 결박된 것도 모자라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늑대 계열의 몬스터라면 민첩이 특화이긴 해도 힘 또한 만만치 않을 텐데 전혀 저항이 불가능해 보였다.
“정령?”
그럼 이 일을 벌이고 있는 존재는 대체 누구일까. 빠르게 주위를 살피자 자그마한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의 상급 정령][Lv 422]
나무의 상급 정령. 고작 상급이 400레벨대라니, 역시 천상에서도 수준 높은 동네라는 것일까?
로칸은 절로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움직였다.
푸확!
이미 눈동자를 까뒤집고 거의 반 실신 상태인 흑랑의 머리를 터트렸다.
‘흠, 괜찮은 건가?’
명백한 스틸이지만 눈치를 보니 딱히 화가 난 기색은 아니다.
아니, 나무의 상급 정령은 오히려 로칸의 행동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꺄르르, 고마워, 인간!”
그의 행위를 스틸이 아닌 도움으로 본 것이다.
분명히 경험치의 상당량이 로칸의 몫으로 돌아왔음에도.
“별말씀을.”
그러니 로칸 역시 적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만약 화를 내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둘러댈 말을 생각해 두었지만 그것을 접어 두고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령의 호감. 이건 꽤나 훌륭한 효과였다.
“또 도와줄 일이 있을까?”
“흐흥, 글쎄? 아직은 모르겠어! 하지만 이 숲에 환수들이 간혹 침범하니까 할 일은 있을 거야!”
아쉽게도 공짜 경험치는 더 없었지만 좋은 정보를 얻었다.
‘환마계와 적대 관계인 건가?’
나무의 정령이 흑랑을 ‘환수’라고 지칭한 것이다.
정령계와 더불어 천상을 구성하는 아주 특별한 지역 중 하나인 환마계. 그곳이 이곳에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듯 환수가 침범하기까지 하는 걸 보면.
그러나 대대적인 전쟁 상황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런 자잘한 존재들의 침범이 대수롭지 않게 일어나기는 할지라도.
“도울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혹시 이 근처에 마을 같은 게 있을까?”
“마을? 그거라면 저쪽에 있어! 우리는 딱히 마을을 이루고 살지는 않지만!”
욕망의 나침반이 가리키던 방향이었다.
로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에게 작별을 고했고, 녹빛의 영체 형태인 나무의 상급 정령은 나무줄기 같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인사를 했다.
이후에는 별다른 전투나 위험이 없었다.
중간중간 350레벨대의 중급 정령이나 300레벨대의 하급 정령의 모습이 간혹 보였지만 로칸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경계하는 이들은 없었다.
오히려 오랜 친구를 만나듯 반갑게 인사를 하며 맞이할 뿐이었다.
‘모두한테 이러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군, 쩝.’
너무나 친근하게 굴어 대니 이게 타이틀 효과인지, 종족의 특성인지 알기도 어렵다.
만약 타이틀 효과일 뿐이고, 기본적으로는 경계하고 적대하는 놈들이라면 어딘가 써먹을 데가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저기인가?”
그렇게 도착한 정령들의 마을. 정확히는 마을의 구색만 맞춰 놓은 곳에 불과했지만 나무줄기로 얽어 만든 울타리나 정령 이외의 존재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나무 집들이 어설프게 존재했다.
하지만 그 안을 돌아다니는 것은 대부분 정령들뿐이다.
예외가 있다면 엘프 정도?
‘여기 다 있었군.’
지상에서 엘프와 하이 엘프가 자취를 감추었다더니 몽땅 이곳으로 이주를 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 해도 그 숫자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정령계가 작은 것도 아닐 테니 그 수를 모아 보면 제법 많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흠칫.
그들이 로칸을 보고 경계했다.
정령들의 호감을 얻은 로칸이라지만 엘프와 하이 엘프들에게는 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힐끔힐끔 보는 정도로 그친 것은 아마 하프엘프의 친구라는 타이틀 덕분일 터였다.
이들에 비하면 반푼이들일 뿐이지만 그들에게서 반정령의 축복을 받은 로칸이니까.
그렇기에 당당히 어깨를 폈다.
어차피 정황상 엘프와 하이엘프들은 정령계에 기생하는 존재가 아닌가? 집주인도 아니고 하인, 또는 기생충에게까지 머리를 숙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제법 구색은 갖췄는데?”
외부인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유저들을 위한 것일까?
마을을 슥 둘러보니 외형과 달리 제법 그럴싸했다.
상점 주인이 모두 엘프들이고, 정작 정령들은 상점을 전혀 이용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판매하는 아이템들도 제법 수준급이다.
450레벨을 위한 아이템은 없지만 각종 속성 옵션이 붙은 400레벨급 아이템은 넘쳐났다. 아마도 아직 아무도 이곳에 도달하지 않은 덕일 것이다.
혹시나 화폐가 다르면 어쩌나 생각했지만 다행히 코인이 통용되었기에 로칸은 잔뜩 쇼핑을 마치고 한 곳을 찾았다.
로칸에게도 익숙한 곳이다.
바로 무지개 전송기.
정령계에 있기에는 이질적이었지만 중립지대에 있는 것과 동일한 무지개 전송이가 이곳에도 위치해 있었다.
[무지개 전송 : 정령계를 등록합니다.]
“쳇.”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다른 천상의 확장 맵과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다.
갈 수 있는 곳이 표시되는 것을 살피자 지상과 중립 지대 두 곳뿐이었다.
아무래도 직접 방문해서 등록을 한 곳만 이동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로칸은 미련 없이 돌아 나왔다.
굳이 정령계를 당장 떠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미국과 약속된 기한까지도 아직 시간이 있었으니까.
대신 정령들이 기거하는 유일한 건물을 찾았다.
세계수라 해도 이견이 없을 만큼 거대한 나무. 그곳에서 아주 값진 퀘스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