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9
천상 결계의 보주 (4)
“……어후, 죽겠군.”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 위로 내려앉으며 로칸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초토화.
그 말 이외에 무슨 말이 이 상황을 표현할 수 있을까.
거창하게 내려앉던 건물의 잔해마저 싹 소멸하고, 대도시인 카사락스에서 생활하던 순수 천족과 일반 천족들이 모조리 소멸했다.
소멸.
말 그대로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카신? 400레벨의 순수 천족? 그 누구도 천신과 마신의 힘을 버텨 낼 수 없었다.
폐허 속에 남은 것은 오직 로칸뿐.
하지만 그 역시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카신과 그랜드 마스터들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천족들을 죽인 덕분에 레벨이 오르고, 생명력과 마나가 회복되었지만 온전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누군가 온몸의 근육을 쥐어짜는 것 같았고, 정신마저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육신에 알 수 없는 힘이 깃듭니다.]
[현재의 상태로는 천신과 마신의 힘을 동시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천신의 별빛 건틀렛과 마신의 이빨 건틀렛의 무혼을 동시에 각성시킬 수 없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168시간]
역시나 무리한 힘의 운용이었던지 두 아이템을 동시에 깨우는 것이 금지되었다.
시스템이 오버 밸런스로 판단하고 제약을 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이것이 가능했다면 천계와 마계 모두를 단신으로 파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실없는 생각과 함께 그 자리에 대자로 뻗어 버린 로칸은 한참을 그대로 누운 채 몸을 회복시켰다.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날 수 있게 된 후에야 다시 자신의 영지로 돌아왔다.
“이거, 떼어 내.”
간신히 몸을 추스른 후, 로칸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드록쉬였다. 옥좌에 박힌 천상 결계의 보주를 힘으로 떼어 내려 해 보았으나 후유증에 시달리는 상태로는 무리였던 것.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급의 장인인 그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옥좌를 통째로 그에게 넘긴 뒤, 몸을 회복시키고 자신의 상태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더럽게 짜긴 하군.’
두 단계나 레벨이 오르긴 했지만 마냥 기뻐하기는 어려웠다.
무려 대도시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리고도 2레벨밖에 올리지 못한 것이니까.
물론 그중에 그랜드 마스터 이상의 격을 갖춘 존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지만 하이 마스터급까지 합치면 수만, 어쩌면 수십만쯤 되지 않았을까?
그만한 수를 해치우고도 2레벨 밖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은 필요 경험치가 살벌할 정도로 많아졌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하지만 마냥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천신의 별빛 건틀릿만 깨우더라도 어지간한 천족들은 그에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않았나.
그렇다면 마신의 이빨 허리띠의 효과 역시 비슷할 것이라는 뜻이고, 어쩌면 확장된 맵으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시간을 들이면 이곳에서 충분히 450레벨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확장된 맵으로 나아간다면 더 강한 상대를 많이 만나고 더 빠르게 레벨 업을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한시적인 무적 상태를 확인했으니 레벨 업이 더 빨라지는 것은 당연하겠지.
‘계약을 달성하기도 쉽겠군.’
러시아 유저들과 계약한 내용을 완수하는 것도 더 쉬워질 테고 말이다.
생각보다 천신과 마신의 힘을 동시에 끌어낸 후유증이 컸는지 상태 창이 정상으로 돌아오고도 한동안 제대로 몸을 회복하기 어려웠기에 로칸은 아예 하루를 푹 쉬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이 힘을 사용하고 났을 때의 반동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만 앞으로도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거의 꼬박 반나절이 걸려서야 몸을 움직이는 데 제약이 없음을 확인하고, 로그아웃을 한 뒤 다음 날 러시아 유저들을 맞이했다.
“여기 있습니다.”
다시 로칸을 찾아온 체리셰프는 로칸에게 두 개의 아이템을 건넸다.
하나는 자신들이 보유한 아이템 목록.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상의 룬이었다.
하나에 천만 코인이나 하는 물건이지만 어차피 재사용을 하면 그만이기 때문인지 자신들의 창고 위치를 저장한 뒤 건넨 것이다.
물론 함정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계약서가 있기도 했고, 설혹 피해를 감수하고 로칸을 죽인다 할지라도 로칸이 되살아나 복수를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과연 누가 더 많은 피해를 보게 될까?
아직 로칸이 아이템으로 자신의 레벨을 감춘 탓에 아직 그랜드 마스터를 달성한 사실을 모르긴 했지만 그를 잠시 멈칫거리게 한다고 그들이 마냥 이득을 볼 수 있다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자신들이 로칸 이상의 피해를 입고 나면 미국이나 중국 등 다른 나라의 유저들이 앞서 나갈 뿐이니까.
그렇기에 로칸은 망설이지 않고 천상의 룬을 사용했다.
그들의 아이템 창고를 찾았다.
“흠, 꽤 많이 모았군.”
“유니크 등급 이상으로만 모아 두었습니다.”
창고에 모인 아이템은 비단 붉은 광장 하나의 수집품이 아니었다. 러시아 길드 전체가 모은 아이템들.
물론 그중에는 뒤로 슬쩍 빼돌린 것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레전드 등급쯤이 아니라면 로칸도 굳이 탐을 낼 이유가 없으니까.
이중에서 레전드 등급만 골라 가진 뒤, 1백 개에서 남은 아이템은 에픽 등급과 아이템 정보를 확인해 골라 가질 생각인 것이다.
어차피 아이템의 수준이야 그들보다 로칸 자신이 모은 것들이 훨씬 더 우월하니 옵션을 보고 고르려는 것이다.
“일단 여기 전부.”
때문에 일단 등급별로 분류된 무더기 중 레전드 등급 전체와 에픽 등급 전체를 골랐다.
그 수만 무려 팔십여 개.
슬쩍 눈치를 보는 것이 빼돌린 것이 몇 개 있는 듯싶었지만 로칸은 적당히 눈감아 주었다.
어차피 마신의 이빨 허리띠에 먹일 것들이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머지는 천천히 골라 보지.”
“예. 편하게 고르십시오.”
수량이 부족한 레전드, 에픽 등급과 달리 유니크 등급은 얼핏 봐도 천 개가 넘을 것 같았다.
드래곤의 보물 창고가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수북이 쌓인 아이템 더미들을 뒤적거리며 빠르게 아이템을 분류했다.
휙, 휙, 휙, 쩡그렁.
로칸이 쌓은 더 로드 짬밥이 얼만가. 어지간한 아이템은 1초만 봐도 대충 답이 나왔다.
분류하는 것은 총 세 종류.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것이 하나였고, 적당히 애매한 것이 또 하나, 마지막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들이었다. 옵션의 효과가 특이하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물품들.
그렇게 분류하자 크고 작은 세 개의 아이템 더미들이 생겨났다.
“흠, 이제 자세히 볼까?”
대충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들어갔지만 체리셰프와 러시아 유저들은 딱히 재촉하지 않았다.
혹여나 로칸의 심기를 거스를까 멀찍이 물러난 채 공손히 기다릴 뿐이었다.
‘어? 이건……?’
자세히 보는 것은 대부분 연구가 필요한 아이템들이었다. 적당히 성능 좋은 아이템이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 않나?
때문에 특이 옵션 아이템들을 중점적으로 살피던 중, 로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이게 여기 있었네.’
러시아 유저들이 보유한 아이템은 한국 유저들의 것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업데이트가 되면서 새로 등장한 아이템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다른 국가의 맵에 나타나게 되어 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생각지도 못한 아이템을 확인한 것이다.
[봉인된 광풍의 흉갑][유니크]
무려 광풍의 아이템!
봉인된 광풍의 배틀 액스를 제외하고 광풍과 관련된 아이템을 찾을 수 없었건만 여기서 발견한 것이다.
로칸은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이렇게 되면…….’
순간, 로칸의 머릿속에 사악한 생각이 떠올랐다. 누군가 알았다면 기겁을 했을 만큼.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단 아이템 더미를 뒤져 쓸 만한 것들을 몇 개나 찾아냈다.
“이것들로 하지.”
별것 아니라는 듯 자신이 가질 물품 더미에 툭하고 던져 놓자 러시아 유저들이 남은 아이템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길드의 길드장들을 대상으로, 마지막 계약 조건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체리셰프와 붉은 광장 길드가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이바노스키와 붉은 가시 길드가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타샤 다란과 거울 궁전 길드가 당신에게…….]
바로 그들을 수하로 받아들인 것.
그들이 로칸의 사병으로서 영지에 편입되며 그들 사이에 단단한 결속이 맺어졌다.
“그럼 이주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그 즉시 러시아 유저들은 로칸의 영지로 넘어갔다.
긁어모은 코인을 바탕으로 거점이 될 아지트를 구입하고, 미리 정해 둔 순서와 위치대로 사냥터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벌어들이는 경험치의 일부가 로칸에게 상납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로칸이 미국 유저들을 처리해 주는 것뿐.
하지만 기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몸을 사리고 있으려나.’
아마 지금쯤이면 카사락스의 괴멸 소식이 천족들 사이에 퍼졌을 터였다.
생존자가 없으니 누구의 짓인지는 알 수 없으나 흉흉한 분위기가 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조사 퀘스트를 받았을 터였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몸을 사리고 있겠지.
그런 놈들을 찾아 없애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로칸이 보지 못했을 뿐, 카사락스에 몇 놈쯤 있었을 수도 있었고.
그가 보았던 카사락스는 경계를 철저히 하고 꽤나 배타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으니 그럴 확률은 낮지만 말이다.
때문에 로칸은 마음을 편하게 가졌다.
당장 자신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이지 않은가? 일단 아이템 창고에서 빠져나온 로칸은 새롭게 획득한 광풍의 무구를 확인했다.
[봉인된 광풍의 흉갑의 봉인이 해제됩니다.]
봉인된 광풍의 흉갑. 그것을 꺼내 어루만지자 저절로 봉인이 풀렸다.
레벨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세트라고 할 수 있는 광풍의 배틀 액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광풍의 흉갑이 가진 능력. 그리고 흉갑 이외의 세트 아이템이 존재하는가의 여부가 관건이었다.
[광풍의 흉갑][세트]
광풍이라 불리던 학살의 신이 사용하던 흉갑.
-방어력 : 30,000
-내구도 : 1,000,000 / 1,000,000
-힘 40% 증가
-민첩 40% 증가
-체력 40% 증가
-[대적자] 효과로 지정한 종족에 대한 모든 공격력/방어력 30% 상승. 재지정 대기 시간 168시간
“오!”
광풍의 흉갑의 능력은 실로 엄청났다. 힘, 민첩, 체력이 일정 수치만큼이 아닌 퍼센티지로 상승하는 것이다.
이미 막대한 스텟을 보유한 로칸에게는 몇백이 오르는 것보다도 뛰어난 능력.
만약 이것을 착용할 경우 기존 사자왕의 흉갑이 가진 저항력 상승효과가 사라지겠지만, 생명력이 10% 이하로 떨어질 시 모든 능력치가 2배로 뻥튀기되는 로칸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다 죽었어.”
게다가 추가 옵션으로 붙어 있는 대적자 효과는 실로 무시무시하다.
지정한 종족에 대한 공격력과 방어력이 무려 30%나 상승하다니, 누구를 지정하든 그 종족에게 천적이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일주일만 있으면 다른 종족으로 변경을 하는 것도 가능하니 맘 잡고 한 종족을 학살하고자 한다면 그 누가 당해 낼 수 있을까.
광풍, 아니 학살의 신은 타이탄을 상대하기 위해 이 능력을 사용했겠지만 로칸은 꼭 한 종족에 얽매일 필요도 없으니 활용도는 무궁무진했다.
더구나 로칸의 타이틀인 폭력의 왕과 시너지를 기대할 수도 있으니까.
로칸이 스산하게 눈빛을 빛내며 광풍의 흉갑을 착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