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
초월자 (3)
“전신의 돌격, 점멸!”
콰앙!
로칸과 그몰탄이 충돌했다.
이제 창조 스킬의 지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 그렇다면 어설프게 학살이나 하고 다닐 것이 아니라 가장 곤란한 상대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감히!”
그러나 이미 보았던 방식이라서인지 그몰탄은 호락호락하게 당해 주지 않았다.
거인의 힘까지 끌어 올린 돌진이건만, 놈은 채찍을 소용돌이 모양으로 회전시키며 로칸을 막아 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능숙한 대응. 450레벨이 괜히 450레벨은 아닌 모양이었다.
“네놈만큼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그 순간 그몰탄의 눈빛이 번뜩였다. 광기. 그것은 로칸과 같은 광기의 빛이었다.
“큭.”
로칸을 밀쳐 내자마자 날아드는 채찍 난무.
그 변화무쌍한 공격에 로칸은 몸을 웅크리고 방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한계 이상으로 강화된 상태라지만 놈의 채찍 역시 창조 스킬이기 때문이다.
한 방, 한 방이 몸에 꽂힐 때마다 생명력이 급락했고, 순식간에 생명력이 반 이하로 떨어졌다.
‘나쁠 건 없지.’
하지만 이 정도야 가뿐히 받아 낼 수 있다. 오히려 생명력이 10% 이하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힘을 집중시킨 일격에 머리가 터져 나가지만 않는다면 생명력 하락 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으니까.
[타이틀 불굴의 의지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그리고 이내, 원하는 바가 이루어졌다. 상대로서는 불사 효과를 지닌 로칸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격할 수밖에 없으니까.
휘릭.
“……!”
하지만 그때, 타이밍 좋게 놈의 채찍이 로칸의 발목을 휘감았다.
채찍에 묶이지 않게 방어한다고 했지만 방어하기 어려운 발목을 휘감는 것을 막아 내지 못한 것이다.
“복종하라!”
[만물을 조련하는 채찍에 노출되셨습니다.]
[강력한 세뇌의 힘이 당신에게 작용합니다.]
[타이틀 불굴의 의지 효과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그 찰나를 파고들어 오는 세뇌의 힘.
만약 불굴의 의지가 없었다면 스스로 모든 스킬을 캔슬하고 자살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로칸에게는 천신과 마신의 정신 공격조차 저항해 낸 불굴의 의지가 있었다.
때문에 놈의 정신 공격을 무시하고 빠르게 배틀 액스를 떨쳐 채찍을 잘라 내려 들었다.
후웅! 콰앙!
“큭.”
하지만 그몰탄의 반응이 먼저였다.
세뇌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반동을 줘서 로칸을 땅바닥에 처박은 것이다.
“젠장.”
빠르게 몸을 점검했지만 자신의 힘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모든 능력치는 그대로였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존보다 빠르게 창조 스킬의 지속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로칸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자신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상대의 힘이 강해진 것이라는 것을.
“모기 새끼 같기는!”
놈이 자신의 힘을 흡수 또는 복사해 가져간 것이다.
모든 힘을 온전히 가져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채찍에서 느껴지는 괴력은 자신과 비교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흐흐흐, 계속 발버둥 쳐 보거라!”
휘익 휘이익. 콰앙!
로칸은 얼른 채찍을 풀어 버리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몸의 반응이 먼저였다.
마치 채찍에 신경이 이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로칸이 움직이려 할 때마다 이리저리 채찍을 휘두르며 땅에 처박아 버리는 것이다.
속수무책.
급한 대로 점멸을 사용하려 들었지만 그조차 사용이 불가능했다. 채찍에 깃든 어떤 힘이 탈출을 방해했다.
“거인의 힘!”
때문에 로칸은 최후의 방법을 사용했다.
힘에서 호각이라면 더 큰 힘을 준다!
순간적으로 타이탄의 힘을 이끌어 내며 채찍을 잡아당기자 그몰탄의 거체가 쑥 딸려 왔다. 반대로 로칸은 땅을 박차고 놈에게 날아들었고.
“파동의 채찍!”
부르르르.
그러나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채찍의 길이가 워낙 길었던 탓에, 놈에게 닿기 전 새로운 스킬이 발동한 것이다.
채찍이 잘게 떨리며 무시무시한 파동을 로칸의 몸속에 때려 박았다.
육체의 강건함 따위는 무시할 수 있는 파동이 내부를 흔들었다.
“컥!”
이렇게 되자 초조해지는 건 로칸 쪽이었다. 대책을 찾지 못한다면 스킬의 지속 시간이 끝나 패배할 것이 분명했다.
“나이트메어!”
그 순간, 로칸의 입에서 이질적인 이름이 튀어나왔다.
천신의 피를 지키기 위해 마신이 심어 둔 대악마.
검은 말의 형상을 한 놈이 로칸을 떠나 그몰탄에게 짓쳐 들었다.
“아닛!”
자신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는 그 강력한 마기에 그몰탄도 화들짝 놀랐다.
로칸을 붙잡은 채로 나이트메어를 막아낼 수 있을까? 뒤룩뒤룩 눈알을 굴리더니 어쩔 수 없이 채찍을 풀어내 영체화된 나이트메어의 몸을 후려쳤다.
히잉!
물리 공격은 통하지 않는 몸이지만 창조 스킬로 만들어 낸 마기의 채찍은 나이트메어에게도 유효한 타격을 주었다.
서로간의 정신 공격은 통하지 않지만 물리 공격이라면 녀석 쪽이 우위인 듯싶었다.
어쩌면 아직 놈의 몸속에 잠재하는 로칸의 힘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점멸!”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과적으로 나이트메어는 로칸의 속박을 풀어냈고, 놈의 채찍을 다시 짧아지게 만들었으니까.
단숨에 놈의 곁까지 짓쳐 든 로칸은 이를 악물고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까가가가가가강!
로칸의 배틀 액스와 그몰탄의 채찍이 부딪혀 검은 스파크를 만들어 냈다.
분명 능력치는 로칸이 우위일 텐데도 놈이 멀쩡하게 그 공격을 받아 낸 것이다.
“별짓을 다 하는군.”
재빨리 배틀 액스를 회수한 로칸이 놈의 팔에 감겨진 채찍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자신의 팔을 채찍으로 휘감아 능력치를 강화시킨 것이다.
과연 450레벨다운 놀라운 스킬 활용이었다.
‘한 방에 끝낸다.’
그 순간 로칸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대로 시간을 끄는 것은 불리하다. 창조 스킬을 비롯해 광풍 현신의 지속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놈의 무기이자 창조 스킬인 저 채찍을 얼마나 오래 사용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볼 때, 로칸의 창조 스킬보다 오랜 시간 사용이 가능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기에 일격에 모든 것을 걸었다.
채찍을 휘감든, 뭉쳐서 방어를 하든,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는 최강의 일격을 준비했다.
복수자의 갑옷으로 장비를 교체해 특수 스킬 [복수의 시간]을 사용할까도 싶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장비를 체인지하는 순간 황금사자 세트에 적용시킨 무혼 각성이 풀려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확실하게 일격을 먹일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초……!”
퍼억!
모든 힘을 그러모은 일격.
초극을 준비하던 로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스킬을 발동시키려는 순간, 그몰탄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이다.
“너, 너는……!”
놈의 심장을 뽑아낸 것은 다름 아닌 마족이었다.
평범한 마족이 아닌, 그몰탄과 마찬가지로 상급 마족의 지위를 가진 450레벨의 존재.
[정수 약탈자 이불리안][Lv 452]
“이런, 이런. 뒤를 조심했어야지.”
억지로 심장을 뽑아낸 녀석은 악마다운 사악한 미소로 쓰러지는 그몰탄의 시신을 조롱했다.
철푸덕. 우우웅. 파앗.
무시무시했던 그몰탄의 몸이 바닥에 처박히고 초극의 사용을 위해 마지막 한 줌의 힘을 끌어 모았던 로칸의 몸이 초라해졌다. 모든 스킬이 해제되며 후유증이 겹친 까닭이다.
“재미있는 짓을 했더군, 인간.”
그런 가운데 이불리안이 로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흥미롭다는 듯 비릿한 웃음을 피워 올린 채였다.
“타이밍 한번 죽이는군. 보고 있던 건가?”
하지만 로칸은 당당했다.
까짓것, 죽일 테면 죽이라지. 어차피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상태이니 한 번쯤 죽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기에 비굴해질 필요가 없었다.
“그게 그대가 원하던 바가 아니던가?”
그러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능글맞게 웃으며 로칸의 말을 받았다.
씨익.
그의 말에 로칸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처럼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의 의도대로였으니까.
천족에 의해 그몰탄의 영지가 기습을 당했다는 말과 함께 흘렸던 소문. 그것은 그몰탄이 아닌 다른 상급 마족의 귀에 들어가도록 흘린 것이었다.
천족과 달리 마족들은 동족이라는 개념이 약해, 동급의 상대가 틈을 보인다면 주저 없이 손을 쓸 것이기 때문이다.
초월 각성을 통해 창조 스킬의 힘을, 가능성을 엿본 로칸이지만 가오칸을 보고 450레벨에게는 뭔가 더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자신이 이겨 낼 수 있을지는 불확실한 것. 때문에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상급 마족의 손으로 놈을 처치하도록 의도적인 소문을 흘린 것이다.
로칸에 의해 그몰탄이 많은 힘을 잃었고, 천족과의 전쟁을 통해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의심 많은 마족들이니 믿지 않는 이들이 태반일지 모르지만 이렇게 한 놈이라도 나서 준다면 생각보다 손쉽게 그몰탄을 처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 그 믿음이 현실이 된 것이고.
휘익. 퍼엉!
그 순간, 로칸의 발밑이 터져 나갔다.
직접적인 피해는 크지 않지만 땅이 뒤집어지고 몸이 튕겨 나가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같잖은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이번에는 나도 얻은 것이 있고, 네놈에게서 그분의 기운이 풍기니 봐주지만 이런 무례를 두 번이나 참아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말도록.”
그것은 경고였다.
당장 로칸을 해할 생각은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친절히 감사의 인사를 하고 떠날 일은 아니라는 듯,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주변을 초토화시키며 로칸에게 자신의 무력을 보였다.
확실히, 마수 조련사라는 독특한 스타일을 위해 창조 스킬을 사용한 그몰탄과는 개별 전투력에서 현격한 차이가 느껴졌다.
‘이 새끼…….’
하지만 그것으로 로칸의 기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
로칸은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고, 놈은 그 눈빛이 재미있다는 듯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역시 재미있는 인간이군. 나중에 힘이 회복된다면 내게 들르도록 해라. 너라면 여러 가지 일을 맡길 수 있을 것 같군.”
‘그날이 네 제삿날이 되겠지.’
그 말을 끝으로 이불리안은 손가락을 튕겨 사라졌다.
남은 것은 폐허가 된 대지와 싸늘하게 식어 버린 그몰탄의 사체뿐.
“후우!”
깊은 숨을 내쉰 로칸은 놈이 사라진 허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챙길 것들을 챙겼다.
조련사 계열이기에 그몰탄이 드롭한 아이템들 중 써먹을 만한 것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고등급의 아이템들이기에 팔아먹을 만한 것은 제법 될 테니까.
더불어 천족과 마수들이 남긴 아이템까지 모두 회수한 뒤, 천상의 룬 북을 사용했다.
이불리안이 떠나기 전 들려온 알림을 기억해 낸 것이다.
[상급 마족 마수 조련사 그몰탄을 살해했습니다.]
[상급 마족의 권위를 찬탈했습니다.]
[마계 도시 그로모토의 지배 권한을 획득했습니다.]
투루비를 빼앗기며 회수되었던 마족의 권위가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임시도 아닌 그냥 ‘획득’으로 표시되었다.
아무래도 마신의 피를 흡수한 영향일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가 보유한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관리할 권한 또한 그에게 이양되었다는 것이다.
로칸은 즉시 그로모토로 이동해 영지 관리 창을 열었다.
“개판이군.”
상급 마족의 영토라기에 조금 기대했지만, 그로모토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어차피 상급 마족인 그몰탄의 권위에 도전할 이들은 극히 드물었기에 영지의 성장은 정체되어 있었고, 각 영지의 상태 또한 혼란이나 파괴로 돌아서 있었다.
그몰탄의 죽음과 함께 놈이 행하던 정신 지배가 풀려 강력한 마수들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동안 바쁘겠어.”
아직 후유증이 한참이나 남아 있었지만 로칸은 즉시 각 거점을 돌기 시작했다. 그몰탄의 정신 지배를 대신할 다른 것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히이이잉!
나이트메어.
나이트메어가 그몰탄을 대신해 마수들의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거점이 슬슬 안정화되어 갈 때쯤, 아주 오랜만에 게임사의 전체 공지가 나타났다.
지금껏 겪어 본 적 없는 엄청난 업데이트 패치 소식을 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