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7
드래곤 사냥 (6)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는 베르단.
일견하기에는 스타를 만나 흥분한 팬과 같은 모습이지만 로칸은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그의 의도를 대충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렇기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커흠, 저는 그저 앞으로 천상에서 함께 활동할 같은 유저로서…….”
“그런 실없는 소리라면 듣지 않도록 하죠. 겪어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천상은 친목질이나 할 만큼 그리 호락호락한 동네가 아닙니다. 이럴 시간에 레벨 업이나 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아, 로칸 님! 잠깐만요!”
휙 하고 몸을 돌리는 로칸을 베르단이 다시 불러 세웠다. 그러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목소리를 낮게 깔고 소리를 내었다.
“저희 길드를 이끌어 주십시오.”
“길드를?”
이건 로칸으로서도 좀 의외였다. 길드를 이끌어 달라.그건 길드 마스터 자리를 내놓겠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처럼 빠르게 천상에 진입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 버틸 수만 있어도 급격한 성장을 보일 수 있는 길드라는 뜻인데.
물론 그런 귀찮은 짓을 맡을 생각은 없지만 놈이 하는 짓이 귀여워 잠시 멈칫거렸다.
“길드 마스터의 자리를 내놓겠다고요?”
“……예. 로칸 님이 오신다면 마땅히 그러겠습니다.”
“흐음, 놀라운 결정이긴 하지만 관심 없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혼자 활동한다는 것쯤은 아실 텐데요.”
그 대답에 놈이 안도의 빛을 띤 것 같아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로칸이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거절하자 이번엔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저와 겨루어 주십시오.”
“겨루어 보자?”
‘네가 감히?’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에 베르단이 움찔 몸을 떨었지만 녀석도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예. 로칸 님의 위명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아직 천상에 도달하지도 못한 걸 보면 한국 유저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낮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군요. 우리 미국과 한국의 플레이 스타일도 다르기도 하니 한번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같잖은 도발이었다. ‘시험’이라는 도발적인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감은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겠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래도 충분히 로칸을 불쾌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문제는, 로칸이 놈의 의중을 이미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뭐, 죽고 싶다면 얼마든지.”
“아, 아니, 죽고 죽일 필요까지야……. PK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대련을…….”
그럼에도 로칸은 그의 도발을 받아 주었다. 이렇게 되자 당황하는 것은 베르단이었다. 그가 뭐라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로칸은 단호했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나와 싸우겠다고 한 건가?”
“크흠, 좋습니다.”
단호한 그 말에 놈의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끝까지 대련 따위를 주장했다가는 로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흐흐. 그래야지. 그럼 갈까?”
“자, 잠시만. 참관을 원하는 길드원들이 있어서…….”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참관하고 싶으면 당장 튀어 오든가, 아니면 동영상이라도 찍어서 보여 줘.”
베르단은 끝까지 질척거렸지만 로칸은 놈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당황한 기색을 즐기듯 성큼성큼 앞장서서 마을 밖으로 향했다.
물론 로칸은 만인살의 타이틀 덕분에 마을 내에서도 PK를 할 수 있지만 만약 그랬다가는 비겁하니 어쩌니 뒷말이 많을 테니까.
“끄응.”
그렇게 되자 베르단도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내는지 슬쩍 돌아보니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는 모습이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로칸이 자리를 잡았으니까.
“그럼 시작하지.”
“후우,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빙결 지옥!”
선공은 베르단의 몫이었다.
시작부터 발현된 놈의 첫 번째 마스터 스킬은 바로 빙결 지옥.
일대를 얼음 속성의 대지로 바꾸어 자신에게는 버프를, 상대에게는 둔화 효과를 거는 지형 변환 스킬이다.
“흥.”
그러나 로칸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아직 자가 수복의 마지막 단계였지만 광풍의 날개는 기온과 관련된 디버프 효과를 무시할 수 있게 만들어 주니까.
그럼에도 어찌나 강력한 스킬인지 몸에 얼음이 맺히기 시작했지만 살짝 힘을 주자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프로즌 나이트!”
그사이 놈은 조합 스킬 한 가지를 더했다. 거울처럼 반질반질한 얼음덩이가 주변에 뚝 떨어지는가 싶더니 놈의 모습을 반사해 새로운 존재들을 만들어 냈다.
베르단과 똑같이 생긴 얼음 기사들.
단순히 허상이 아니라 거의 유사한 능력치를 지닌 분신들이 로칸을 향해 짓쳐 왔다.
“재미있는 짓을 하는군.”
그러나 단순히 쪽수가 많아지는 정도로는 자신을 무너뜨리기 어렵다.
놈의 능력을 가늠해 본 로칸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이스 댄싱!”
그 순간, 본체를 포함해 무려 열이나 되는 존재들이 미끄러지듯 고속 이동을 시작했다. 스케이트를 타듯, 바닥을 미끄러지며 속도를 놀린 것이다.
속도도 속도지만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예술에 가까웠다.
“읏차!”
휘익.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로칸은 특유의 힘을 이용해 훌쩍 뒤로 공중제비를 넘더니 놈이 소환해 낸 얼음덩이의 뒤로 돌아갔다.
콰앙!
그리고 부숴 버렸다.
“역시인가?”
후두두둑.
그와 함께 분신 중 하나가 파괴되어 얼음덩이로 변해 바닥에 흩어졌다.
놈의 스킬이 가진 맹점을 단번에 꿰뚫어 본 것이다.
능력치 복사가 거의 본체에 가깝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커다란 단점도 있었다.
“제길!”
놈이 당황했는지 눈빛이 떨렸지만 포기한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얼음이 파괴되기 전, 승부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로칸을 향해 짓쳐 들었다.
“크허허헝!”
그때, 광기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능력치를 떨어뜨리다 못해 몸이 굳어 떨려 왔다.
그리고 그 위로 떨어지는 로칸의 배틀 액스!
“체, 체인지!”
퍼석.
로칸의 일격이 놈의 머리통을 부숴 놓았지만 본체 또한 얼음으로 변했다.
짧은 순간 본체와 분신의 위치를 바꿔치기한 것이다.
“한파의 일격!”
잠시 멈칫거리는 사이, 나머지 분신들이 로칸에게 제각기 검을 찔러 넣었다.
압도적인 방어력 탓에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한파의 힘이 스며들며 그의 속도를 크게 낮추어 놓았으니까.
“이제 시작입니다!”
그때부터 놈의 움직임이 살아났다. 여덟 명이 한 몸처럼 움직이며 로칸의 사방을 포위하고 들었다.
“살육의 일격!”
퍼억!
얼음덩이로 변해 사라지는 아군을 대신해 빈자리를 메우고, 빈틈을 찾아 검을 찔러 넣었다.
그때마다 로칸은 딱 한 놈만을 노리며 일격을 꽂아 넣었지만, 놈들은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며 상처를 늘려 갔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상처가 하나둘 늘어가기 시작했다.
“갑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놈이 눈을 빛냈다. 일격에 모든 것을 걸었다. 지치지도 않아 보이는 괴물을 상대로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오히려 자신이 더 위험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얼어붙어라!”
쩌저저적!
로칸의 상처를 통해 치명적인 한기를 몰아넣으며 그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마지막 마스터 스킬을 쏟아부으며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 시도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
몸을 뒤틀며 저항하던 로칸의 몸이 굳고 행동이 정지했다.
그 순간 그의 검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달려 나갔다.
“나를 얕본 죗값을 치러라!”
얼음 조각이 된 로칸을 향해 짓쳐 들었다.
버서크나 광풍 현신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을 이만큼이나 몰아붙인 것이 자존심 상했지만 이유와 과정이 어찌 되었든 눈앞의 승리에 집중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최후의 한 방을 내질렀다.
퍼엉!
“……!”
검 끝이 로칸의 심장을 파고드는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로칸의 몸이 풍선처럼 퍼져 버린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그 이유를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제법이네.”
퍼억!
등줄기를 파고드는 일격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생명력이 곤두박질을 쳤지만 이대로 정신을 놓을 수는 없었다.
배틀 액스를 등에 꽂고 간신히 고개를 돌리자 멀쩡한 모습의 로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놀았지?”
퍼억!
끝이었다.
압도적인 공격력이 머리에 집중되자 크리티컬이 터지며 대번에 머리가 터져 나가고 놈의 생명력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어떻……게…….”
허망한 눈빛. 하지만 로칸은 별 반응이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싸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분신.
놈이 싸운 것은 버서크조차 쓰지 않은 상태에서 불러낸 분신에 불과했다. 놈이 소환해 낸 얼음덩이 뒤로 몸을 숨기는 순간 분신을 소환해 대신 싸우도록 한 것이다.
직접 싸우기는 귀찮고 놈의 전투력은 궁금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놈은 그런 사실을 전ㄴ혀 알지 못한 채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이 정도 놀아 줬으면 됐겠지. 프로즌 노바라고 했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느 정도 예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놈과 놈의 길드는 로칸에게 제대로 찍혔다.
놈을 완전히 끝장낸 로칸이 시선이 먼 하늘을 향했다.
아마도 저 먼 곳에서부터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을 일단의 무리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이며 천상의 룬 북을 꺼내 들었다.
“아직은 만날 때가 아니지.”
시작의 마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로칸이 파악한 베르단은 천족의 하수인이었으니까.
천상에 오르기 위해 무수히 죽어 가는 동안 레벨이 떨어졌을 텐데 361레벨씩이나 되는 것도 이상했고, 무엇보다 놈의 장비 중 하나가 천계에서만 구할 수 있는 종류인 것이다.
놈은 로칸이 몰라볼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대부분의 아이템은 눈에 익혀 둔 로칸이었다.
놈이 시간을 끄는 사이 길드원이든 뭐든 되는 놈들이 천족들을 이끌고 올 생각이었겠지.
이대로 한판 붙으며 남은 퀘스트 달성 조건을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로칸이 짜 놓은 판은 이것이 아니었다.
원하는 조건과 상황을 만들기 위해 사전에 뿌려 둔 밑밥을 확인했다.
“좋았어.”
이내 봉인석이 잠들어 있던 광산 마을로 넘어와 정보부터 확인한 로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천마 연합군.
천족 대사제와 상급 마족인 마수 조련사 그몰탄이 손을 잡고 로칸을 척살한다는 소문을 접한 것이다.
비록 한시적일 뿐이었지만 천족과 마족이 만나 싸우지 않고 같은 목표물을 쫓는다는 것은 천상에서도 아주 드물고 의외인 일이었기에 정보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더불어 그들의 위치와 행보 또한 그리 비밀스러운 정보는 아니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둘 중 하나를 상대하는 것도 만만치가 않은데 이제는 마족 병사나 뱀파이어, 웨어울프 따위의 아군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암담할 법했지만 로칸은 일부러 그런 판을 짜 놓은 이답게 자신감이 넘쳤다.
그들의 위치를 다시 한번 파악한 뒤, 가볍게 시동어를 외치며 작전을 시작했다.
“폴리모프.”
환한 빛과 함께 로칸의 종(種)이 바뀌었다.
언젠가 로칸의 손에 죽임을 당했던 거대한 마수의 모습으로.
익숙하지 않은 그 몸을 이끌고 로칸이 천족의 군대가 있는 그곳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