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
꼼수는 있다 (2)
“지기는 누가! ……근데, 그놈들 실력은 어떤데? 요.”
자존심이 상했는지 버럭 화를 내는 드록쉬였지만 살짝 불안하긴 한 모양이다.
무려 레전드 등급의 장비를 만들어 낸 바 있는 그랜드 마스터급의 장인이고 로칸에게 부려지면서 실력이 일취월장한 그였지만, 따지고 보면 이제 막 경지를 넘었을 뿐이니까.
“적어도 그랜드 마스터급은 없지.”
“흐흐, 그렇다면야…….”
그래도 그랜드 마스터는 그랜드 마스터. 게다가 그에게는 천상의 기술이 있지 않나?
같은 경지라 할지라도 지상에서 만들어 내는 무구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제작물들을 만들어 낼 테니 드워프 왕의 자리를 따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보름 주지. 그 안에 드워프 왕이 되도록.”
때문에 로칸은 넉넉히 시간을 부여했다. 로칸 이외에 지상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그가 드워프 왕의 자리에 오르려면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할 테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보름이라는 시간도 말도 안 되게 짧은 것이지만 드워프이기에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실력이면 당장 좌판만 깔아 놓더라도 주목을 받을 테고, 그 소식이 드워프 장인들에게 닿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일주일 만에도 드워프 왕과 승부를 겨룰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드록쉬에게 지도와 각종 재료, 연장, 그리고 골드를 쥐여 준 로칸은 병사들을 시켜 그를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멀리 돌아갈 것도 없이 드워프 왕국의 수도로 직접 전송시켜 버렸다.
이후의 일은 알아서 잘하겠지.
그가 제작 일만 해 온 어수룩한 장인도 아니고, 한때는 붉은 도끼라 불리던 전투 드워프로 더 이름을 날렸으니까.
“폐하, 기사들이 도착했습니다. 들일까요?”
“빠르군. 들라 해라.”
그사이 로칸은 차례로 기사들을 면담했다. 황제의 명에 따라 재상이 내린 포고령이었기에 충성 경쟁을 하듯 텔레포트 마법진을 사용해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만나는 데만도 어쩌면 보름이 모자랄지 모른다.
“크흠, 이것도 꽤나 시간을 잡아먹는군. 다음부터는 모이는 족족 한 번에 들어오라고 해.”
특히 한 명씩 면담을 하니 시간 부족은 더 심했다.
애초에 면담이랄 것도 없는 충성 맹세일 뿐이었지만 그조차도 예를 차리다 보니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래서 로칸은 결단을 내렸다.
예를 차리지 말 것.
그리고 모아서 한 번에 입장할 것.
무기를 맡기고 찾아가는 번거로운 일 따위도 하지 말 것.
이렇게 하자 시간은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
‘이렇게나 많았던가?’
그럼에도 모여드는 이들이 줄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로칸이 천상에 가 있는 동안 NPC들도 발전을 한 것이다. 제2차 종족 전쟁으로 많은 수가 희생되기는 했지만 영웅이 사라지면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는 법이니까.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정말 장족의 발전이다. 마스터 레벨만 벌써 3천이 넘었고 하이 마스터도 3백이나 되었다.
‘발전, 성장이라기보다는 패치겠지.’
이만한 숫자가 갑자기 동시에 경지 상승을 이루었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건 패치라고 보아야 했다.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유저들의 수준에 맞춰 NPC 강자들의 수준과 숫자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유저들의 국가 전복이 아주 손쉬워지겠지.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유저들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하이 마스터는 몰라도 마스터는 확실히 많아졌지.’
로칸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이제 상위 길드가 아니라도 마스터 레벨을 보유한 경우가 꽤 많다. 그만큼 마스터 레벨까지는 대중화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을 치르며 강해지기도 했겠고, 전쟁이 있는 동안 사냥터에 틀어박혀 레벨 업에 매진한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좋군.”
로칸은 그것이 아주 기꺼웠다. 며칠이나 걸려 모든 300레벨 이상 인간 NPC들의 충성 맹세를 받았지만 아직도 공짜로 퀘스트 완료 조건을 채워줄 이들이 많다는 뜻이니까.
“퀘스트 발동.”
충성 맹세가 끝나자마자 로칸은 또 하나의 퀘스트를 발동시켰다.
대상은 바로 모든 종족, 모든 길드의 수장들이다.
충성 서약을 한다면 작위를 주거나, 아이템을 내리겠다는 아주 심플한 조건으로 다시 한번 황궁에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단, 작위나 아이템을 받는 것은 길드장 하나뿐이지만 충성 서약은 모든 길드원들이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흐흐흐, 쉽군.”
그 퀘스트 하나에 대륙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미 시간이 지나 작위를 가진 이들도 많고, 무려 백작의 위에 오른 이들도 많았지만 로칸이 내건 아이템은 무척이나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별것 없는데 말이야.”
무려 350레벨 제한의 하이 마스터 전용 아이템들.
천상에서는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한 것들이지만 350레벨 아이템은커녕 350레벨 몬스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지상에서는 부르는 게 값일 만큼 귀중한 것들이었다.
아직까지 천상에 도달한 이들이 나왔다는 소리는 없었고, 그나마 하늘섬에 도달한 이들은 구했을지 모르지만 하늘섬과 천상 간에도 격차는 분명 있었으니까.
또한 초대형 길드들을 위해 몇 점은 드록쉬가 만든 유니크 아이템을 걸어 두었기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도 당연했다.
이 아이템이 있다면 로칸 다음으로 천상에 도달하는 존재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테니까.
그것이 아니더라도 지상에서는 거의 왕처럼 군림하며 세를 불릴 수 있을 터였다.
“이게 독점의 묘미지.”
씨익.
나름 강력한 무기도 있지만 고작 그걸로 자신에게 대항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은 누구보다 로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아이템을 풀었고, 퀘스트 완료 조건은 금세 차올랐다.
[가치 증명 : 폭력의 왕][퀘스트]
초월자의 자격을 갖춘 이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완료 조건
1. 300레벨 이하의 존재 굴복 6,826,436 / 1,000,000
2. 300레벨 이상의 존재 굴복 4,753 / 100,000
3. 350레벨 이상의 존재 굴복 321 / 10,000
4. 400레벨 이상의 존재 굴복 3 / 10
-완료 보상 : 1레벨 상승, 그랜드 마스터로의 승급
하이 마스터쯤 되면 자존심이 세지 않겠냐고? 그럴 리가. 이 아이템들이 가장 필요한 것이 그들이다 보니 오히려 누구보다 앞장서서 머리를 조아렸다.
덕분에 로칸이 다시 전쟁을 일으켜 천하 통일이라도 이루려는 것이 아니냐는 루머가 온라인에 파다하게 돌았지만 알 바 아니다.
로칸이라는 존재가 있는 이상 검은용군단도 섣불리 먼저 움직이지는 않을 테고, 설혹 전쟁을 걸어온다 해도 로칸의 퀘스트만 채워 줄 뿐일 테니까.
“황제가 좋긴 좋구나.”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300레벨 이상의 존재를 굴복시키는 조건이 절반 이상 채워졌다는 것이다.
사실 그건 로칸이 황제의 자리에 앉는 순간 모조리 채워졌다. 인간 종족 NPC라면 누구나 자동적으로 황제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300레벨 이하쯤이야 스쳐도 사망이라지만 몰이사냥으로도 한 번에 몰아 잡는 숫자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퍽이나 달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슬슬 소식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로칸이 지상에 오자마자 드워프 왕국으로 파견한 드록쉬. 그가 소식을 들고 올 때가 된 것이다.
[드워프 왕국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때마침, 전체 알림이 대신 소식을 전했다.
유저는 아니지만 왕국의 주인이 바뀐 사실은 모든 종족에게 중요한 일이기에 시스템이 전체 공지를 날린 것이다.
“결국 해냈군.”
그리고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드록쉬는 로칸의 노예 신세였다. 아직 계약 기간이 한 달쯤은 남았으니 그에게 소속된 드워프 NPC들 역시 로칸에게 복종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1. 300레벨 이하의 존재 굴복 1,000,000 / 1,000,000(완료)]
그것을 증명하듯 퀘스트의 수치가 실시간으로 변경되었다.
첫 번째 조건에 완료 표시가 나타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드워프 왕국으로 쳐들어가 다른 드워프 NPC들의 굴복도 받아 내고 싶지만 일반 신민들과 마스터 이상의 강자들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애초에 종족이 다르기에 그들의 인정이라면 모를까, 굴복을 받아 내는 것은 종족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기에 굳이 그런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것보단 차라리 사냥이 빠르지.”
그리고 어설프게 그들의 복종을 받는 것보다는 300레벨 이상의 존재가 넘쳐나는 천상에서 사냥을 하는 것이 더 빨랐다.
“그럼 슬슬 돌아가 볼까?”
그렇기에 로칸은 지상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세 달이라는 계약 기간이 끝나면 드록쉬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 뻔하기에, 남은 약 1개월 남짓의 기간 동안 그랜드 마스터 퀘스트를 완료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엇? 어떻게 벌써…….”
그렇다고 드록쉬를 지상에 버려두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제 역할을 다했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무려 그랜드 마스터의 훌륭한 재원이 아니던가?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놈이기에 드워프 왕국에서 그를 끌어낸 로칸은 다시 그와 함께 천상으로 향했다.
“저, 저기, 난 여기에 있으면 안 될까……요?”
짧은 왕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는지 약간의 저항은 있었지만 계약서의 힘이 작용하는 이상 거부는 허용되지 않았다.
다시 천상으로 돌아온 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다름 아닌 천신의 군대였다.
“오? 기다린 건가?”
꽤 긴 기다림이었을 텐데도 중립 지역, 경계의 마을을 가득 메운 것은 다름 아닌 천족들이었다.
로칸에게 피해 입을 것을 고려한 까닭인지 순수 천족도 섞여 있지만, 천족 진영으로 이적한 타 종족들이 대부분이다.
“놈이 나타났다!”
“신전에 알려라!”
얼핏 보기에도 수백, 수천은 되어 보이지만 그마저도 전력은 아닌지 로칸이 나타나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소식을 전파했고, 로칸은 여유로운 눈빛으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지상에서는 올리기 어려운 퀘스트 조건들을 올려 줄 존재였으니 도망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얼마나 오려나?”
“이, 이거 도망쳐야 하는 건…….”
그랜드 마스터씩이나 되어 놓고도 겁에 질린 모습인 드록쉬가 슬쩍 로칸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그마저도 금세 봉쇄되었다.
[복수의 창조자 드록쉬가 천족의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억!”
이미 몇 번이나 로칸과 함께 다닌 덕분에 함께 의심을 받고 있던 그에게서 천족의 자격을 발탁해 간 것이다.
천족을 상징하는 천사의 날개가 단숨에 말라비틀어지며 제 효용을 잃고 막심한 고통과 함께 드록쉬의 등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 이런……!”
당황하는 드록쉬. 하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노예 계약에 따라 함께 다니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 따위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니까.
계약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로칸이 한 무더기의 장비들을 그에게 쏟아 냈다.
“입어. 맨몸으로 싸울 수는 없잖아?”
드록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말처럼 억울하긴 해도 그냥 죽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랜드 마스터씩이나 된 장인이라면 살아남기만 해도 어딘가에 몸을 의탁할 수 있으리라.
천족과 마족의 위세가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중립 지역에도 사자왕 가오칸처럼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들은 분명 존재했으니까.
장비를 챙겨 입는 드록쉬의 눈빛에 각오가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