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
가오칸 (2)
“그는 아마도…… 학살의 신인 것 같군. 그가 신위를 얻기 전 거인 사냥꾼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학살의…… 신요? 그 신?”
“그래. 전지전능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천신이니 마신이니 하는 족속들과 같은 신.”
“이런 젠장…….”
갑자기 신이라니.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난감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광풍을 찾는 이유가 바로 퀘스트를 완료하기 위함이니까.
그런데 신이라면 대체 어떻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인가? 그의 말대로라면 당장 이 구역의 신이라고 볼 수 있는 천신조차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한참이라고 하는데.
그런 로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오칸은 히죽 웃었다.
“신이라고는 하지만 생각만큼 거창하지는 않아. 굳이 따지자면 그랜드 마스터 다음의 경지일 뿐이니까. 아니, 정확히는 다다음이긴 하지. 신성을 얻느냐 마느냐에 따라 한 번 더 경지가 갈리기는 하니까.”
“아……?”
알 듯 모를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랜드 마스터 다음 경지.
그랜드 마스터와 신 사이에 하나의 경지가 더 있다고는 하지만 적당히 레벨을 올려 얻을 수 있는 종류는 아닌 듯싶었지만 어쨌든 따지고 보면 그렇다는 거다.
이제 로칸이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기까지 남은 레벨은 고작 스무 개 정도. 그렇다면 생각보다 쉽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를 하는 사이, 가오칸이 한 가지 희소식을 더 알려 왔다.
“그리고 만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
“뭡니까, 그게?”
꼭 같은 신위를 얻는 단계가 아니라도 광풍을 만날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타이탄 사냥.”
“……!”
“흔히 신위를 가진 존재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제물이 필요하다고 하지. 그런 의미에서 학살의 신을 사냥하려면 타이탄을 죽이고 그 심장을 갈아 제물로 바치면 될 거다. 아마 하나로는 모자랄 테고……. 한 세 개나 다섯 개쯤 되면 되지 않을까?”
“타이탄이라…….”
그 말에 로칸의 눈이 가늘어졌다.
천상에도 서리의 타이탄처럼 여러 속성과 특성을 지닌 타이탄들이 서식하고 있다는 것은 들은 바가 있지만 그들을 사냥해야 한다고? 쉽지는 않은 일이다.
물론 타이탄에 한해 무기의 봉인을 풀 수 있고, 광풍의 배틀 액스가 가진 무혼도 각성시킬 수 있다지만 그렇다 해도 타이탄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더구나 오랜 세월 빙하 속에 잠들어 있느라 약할 대로 약해진 타이탄을 꺼내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타이탄을 사냥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위험하다.
‘방법이 없군.’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해 보는 수밖에.
지금이야 봉인된 상태로도 충분한 공격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봉인된 광풍의 배틀 액스보다도 우수한 위력을 내는 무기는 천상에 얼마든지 있었고, 오랜 시간 어렵게 여기까지 끌고 온 광풍 퀘스트를 이대로 끝내는 것도 너무나 아쉬웠으니까.
그리고 그를 만난다면 성장에 대한 또 다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로칸은 마음을 굳혔다.
타이탄 사냥.
까짓것 해 보기로 했다.
“아 참, 자네도 그거 얻었지?”
“그거요?”
“그래. 일단 검은용을 함께 잡았으니까 생겼을 것 같은데.”
“아…….”
그때, 가오칸이 잠시 잊고 있던 다른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일곱 속성의 드래곤을 모두 잡아 완성시킬 수 있는 그것의 존재는 로칸에게 또 다른 돌파구를 열어 주었다.
“예. 드래곤 슬레이어 말씀이시죠? 혹시, 가오칸 님은 얼마나 더 수행하셨습니까?”
“나? 흐흐흐! 난 거의 다 끝냈지. 아직 관문이 하나 남긴 했지만, 곧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점에서 자네는 운이 참 좋아. 내가 거사를 치른 후였다면 이곳에 나타날 일이 없었을 테니까. 그랬다면 대충 ‘용살의 신’쯤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의 자랑 아닌 자랑에 로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 후 다섯 마리쯤 더 사냥을 마친 모양이다.
마지막 한 마리만 더 잡고 나면 퀘스트가 완료되겠지.
물론 그것만으로 신격에 오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때가 되면 또 다른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잠깐 시간이 남는데, 좀 도와줄까?”
“예? 물론 저야 좋습니다만…….”
“흐흐, 그래? 좋단 말이지……. 그럼 결정한 거다?”
그렇게 말하는 가오칸의 웃음이 음흉했다.
로칸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지만 어떤 다른 의도가 있든 자신에게 나쁜 것은 아닐 터이니 머뭇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옥 훈……. 아니 특훈을 시작하지!”
“예? 타이탄 사냥을 도와주신다는 게…….”
“내가 그런 귀찮은 짓을 왜?”
다음 순간, 가오칸의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도와준다는 게 사냥을 도와준다는 것이 아니었나?
짧은 순간이지만 이미 과거로 돌아갔을 때 그의 훈련 방식을 겪어 본 로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몸으로 가르치는 타입.
모르면 알 때까지, 못하면 잘할 때까지 쥐어 패고 보는 그의 훈육법을 기억하는 몸이 움찔 떨려 왔다.
“제기랄…….”
“응? 뭐라고?”
“아, 아닙니다.”
“그럼 가지. 따로 챙길 것도 없잖아?”
주춤거리는 로칸을 반 억지로 끌고서 가오칸이 자신의 처소로 이동했다.
무려 세 개나 되는 천상의 룬을 부수어 사용하는 게이트 이동으로 로칸을 이끌고 사라졌다.
* * *
“넌 말이야, 힘도 기술도 좋은데 너무 거기에 의존해.”
“자신감 넘치는 건 좋은데 스킬이란 건 그리 만만한 게 아니란 말이지.”
“지금이야 괜찮을 수 있지. 불사 능력도 있고, 여차하면 상황에 따라 능력이 뻥튀기되기도 하니까.”
“고만고만한 애들을 상대로는 무적처럼 보일 수도 있어. 근데 너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어쩔래? 그것도 까다로운 견제와 이동 능력을 가진 놈들이면? 걔들이라고 너보다 공격력이 약할 것 같아?”
잔소리와 함께 시작된 특훈, 아니 지옥 훈련은 매일매일 로칸을 처참하게 만들었다.
일전의 대련은 봐준 것이었다는 듯, 가오칸이 전투 스타일과 사용 스킬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꿔 가며 로칸을 두들겨 팬 것이다.
힘과 기술, 육체 스펙과 컨트롤이라 불리는 그것으로 어느 정도 커버하기는 했지만 가오칸은 최전방에서 상대를 쓸어버리던 사자왕의 모습과 달리 치졸하고 얍삽하게, 때로는 졸렬하게 그를 괴롭혔다.
‘정말 뒈질 뻔했지.’
그러면서도 딱 죽기 직전까지만이었다. 생명력을 1만 남기고 멈춘 적도 있었다.
물론 ‘힘 조절’이라는 스킬을 썼기 때문이긴 했지만 물 한 방울만 튀어도 죽을 것 같은 극한의 상황까지 로칸을 몰아붙였다.
만약 버서크를 사용했다면? 지속 시간이 끝날 때까지 죽도록 두들겨 맞는 거다.
심지어 어떻게 알았는지 마법 심장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서, 심장이 파괴된 적도 몇 번이었다.
‘실전 같은 훈련 좋아하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훈련이 아니었다. 사디스트. 가학성 변태가 자신의 욕망을 푸는 것만 같았다.
그에 저항하기 위해 로칸은 정말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전략을 바꾸고, 전투 스타일도 변화시키고, 심지어 스킬까지 갈아치웠다.
덕분에 확실히 대인 전투력을 탁월해졌다.
대량 학살을 위해 익혔던 광역 스킬들을 모두 갈아치운 대신 일대일에 특화된 스킬들을 몇 번이나 다시 만들었으니까.
컨트롤만으로 해결하던 부분들을 스킬화시키며 대비하니 마법이든 원거리 공격이든 얼마든지 대응할 능력이 생겼다.
‘그나저나 진짜 왕이었네.’
모두 사자왕의 영토 내에 있는 스킬 상점을 통해 필요한 모든 스킬을 공수할 수 있던 덕분이다.
그 탓에 가지고 있던 소정의 코인마저 몽땅 써 버리기는 했지만 천족과 마족들을 사냥하며 얻은 전리품까지 팔아 치우자 어떻게든 해결은 되었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다 생각했을 때, 가오칸과 작별을 고했다.
“허접이 가긴 어딜 가?”
물론 그 말을 하고 한두 번은 다시 붙잡혀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지만.
레벨링도 포기하고 시간을 보낸 결과, 가오칸도 인정할 만한 진짜 고수가 될 수 있었다.
“자, 이제 하산하거라! 나도 이제 할 일 좀 하자.”
정말 만족한 건지, 질린 것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였다는 게 찝찝하긴 했지만 그의 성격상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로칸을 놓아주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게, 한층 파워 업 한 로칸은 얼른 사자왕의 영토를 벗어났다. 혹시나 마음이 바뀔까 싶은 것이다.
“그 전에 지상에 좀 다녀와야겠군.”
하지만 곧장 타이탄에 대한 정보를 모으거나 찾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남은 코인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나마 아직 공격받지 않은 마족 영지에서 벌어들인 수입을 인출하여 당장 사용할 코인을 벌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제대로 된 정비를 하기도 버거웠다.
그래서 내린 결정은 바로 지상으로의 강림이었다.
그곳에서 잔뜩 쌓인 영지 보유금은 인출하고 다시 천상으로 돌아와 코인으로 환전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한동안 코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무지개 전송이라고 했었지? 촌스러운 이름이군.”
무지개 전송 타워는 이름과 달리 꽤나 거창했다.
비공정을 탔던 그곳만큼은 아니지만 타워라고 부를 수 있는 건물의 최상층에서 진행된다고 했다.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아서 지상으로 전송하는 데 1천만 코인, 다시 천상으로 오를 수 있는 ‘룬’을 받는 데 5백만 코인이 들었다.
형편이 안 좋아진 로칸으로서는 바닥까지 박박 긁고도 몬스터를 몇 마리 사냥한 뒤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15,000,000코인을 지불하셨습니다.]
[천상 도약의 룬을 획득하셨습니다.]
[무지개 전송이 진행됩니다.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세요.]
그렇게 비용을 지불하자 곧 전송 의식이 시작되었다.
일곱 빛깔의 에너지가 타워로 모여들더니 로칸이 서 있는 마법진 위에 집중되었다.
‘이래서 무지개로군.’
가만히 힘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서서히 중력을 거스르고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천상 대포에 올라탔을 때보다도 빠르게, 대기를 뚫고 날았다.
하늘을 배회하는 와이번 떼? 미스랄즈오름? 그따위 것들은 감히 접근할 수도 없는 강력한 기운이 그를 보호했다.
단지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물수제비 튀기듯 공간을 찢고 넘어 다른 세상으로 그를 인도했다.
[지상에 진입하셨습니다.]
아,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리기까지는 불과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영지 관리.”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로칸은 기계적으로 영지 관리 창을 열었다.
천상에 오르기 전, 황제의 위에 등극한 그였기에 파생되어 열리는 창의 숫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로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것들을 터치해 영지 보유금을 적당히 빼낸 뒤, 일단 황궁으로 향했다.
주된 목적이야 골드를 충당해 코인을 만들려는 것이지만 이왕 시간을 내서 내려온 거, 상황을 살펴봐야 하지 않겠나?
“꼴좋군.”
때문에 가장 먼저 살핀 것은 바로 오딘과 라그나로크 길드에 대한 소식이었다.
타락의 후원을 받아 성장한 이들.
그들은 로칸에게 도륙을 당한 이후에도 여전히 강력했지만, 덕분에 세상이 멸망할 뻔했기에 모든 종족들로부터 추격을 받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모습을 보인지 한참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 어쩌면 캐릭터를 삭제하고 다시 만들었거나, 어쩌면 아예 게임을 접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업자득.
로칸은 그것에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모습을 드러내 놓고 활동한다면 친히 달려가 박살을 내 줄 의향도 있었다.
“이 새끼들이?”
다음은 역시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로칸이 천상으로 이동하며 암묵적인 휴전 상태가 된 각 종족들은 처음 게임이 시작 되었을 때처럼 서로 적당히 싸우고 반목하며 지내고 있었지만 황궁의 첩보에 이상한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한참이 걸려 그 정보들을 꼼꼼히 훑던 로칸의 눈에 그중 어떤 소식이 걸렸다.
로칸이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인지 검은용군단 측에서 슬슬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정보들을 따로 추출해 읽어 나가는 로칸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