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
천족과 마족 (1)
“엇, 저자는?”
“찾았다!”
수색이 시작되고 잠시 후, 로칸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찾는 이가 정말 자신이 맞는지도 궁금했고 이미 포위망이 굳건해 도망치기는 글렀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타이틀 만인살 덕분에 머더러 카운트도 오르지 않은 상태이지 않은가?
꿀릴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포박하라!”
그러나 상대는 말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존재였다.
대뜸 천족들을 부려 로칸을 포박하려 들었다.
“흥, 어딜?”
하지만 순순히 묶여 줄 로칸이 아니다. 슬쩍 눈치를 보며 다가오는 자들을 밀쳐 내고 눈을 부라리자 놈들도 감히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묶어라!”
“유니콘 소환.”
놈이 다시 한 번 윽박지르자 슬금슬금 다가왔지만 로칸은 유니콘을 소환해 오르는 것으로 대항했다.
신수 유니콘.
그는 순수 혈통인 천족들에게도 경외의 대상이 아니던가?
그런 만큼 유니콘의 주인이라면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여차하면 튀어야겠군.’
물론 수틀리면 도망가지 위한 방책이기도 했다.
“아니, 인간 따위가 어찌 유니콘을!”
그러자 역시 바로 반응이 왔다.
무려 신수의 주인. 순수 혈통의 천족이라 한들 유니콘이 인정한 주인을 하부로 대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일단 유니콘을 만나는 조건 자체가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니 무작정 죄인으로 몰기도 어려웠다.
“왜 그러는 겁니까?”
로칸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들과 싸우든, 도망치든 이유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자 놈은 눈빛이 흔들리며 입을 열었다.
“천신의 사제를 살해한 죄이다.”
“글쎄, 무슨 말인지?”
하지만 그런 도발에 넘어갈 로칸이 아니다. 얼굴색 하나,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능청스레 말을 받아쳤다.
“네놈이 천신의 사제 미타엘과 시비가 붙어 사라진 것을 알고 있다. 이래도 발뺌할 셈인가?”
“아, 그거? 그건 좀 투닥거리긴 했지만 잘 화해하고 끝났는데 무슨 말인지……? 그가 죽었습니까?”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 그 모습에 더 열불이 나는지 놈은 붉어진 얼굴로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시치미를 떼도 소용없다! 그는 천신의 축복을 받은 자, 그의 죽음은 그대와 나간 직후 일어났고 목격자들이 한결같이 너를 흉수로 지목하고 있으니. 무슨 수작을 부려 신수 유니콘을 길들였는지는 모르지만 내 너를 징벌하고 유니콘에게 씌워진 사악한 술수를 벗겨 낼 것이다.”
“흐음.”
이미 머더러 카운트 따위의 증거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 말과 행동에 로칸의 이마가 씰룩거렸다.
한판 붙는 거야 붙는 건데 유니콘까지 빼앗겠다고? 안 될 말이지. 차라리 녀석을 죽이고 퀘스트를 완료해 버리고 말 거다.
정말 테이밍된 탈것을 빼앗거나 해방시키는 방법이 따로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로칸의 심기가 극도로 불편해졌다.
‘그냥 선빵을 날릴까?’
이미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까닭에 사고를 치기 직전까지 달아올랐다.
“순순히 포박되지 않는다면 강제로 꿇릴 수밖에!”
거기에 도화선을 당긴 것은 바로 놈이었다.
[천신의 대사제 히라엘][Lv 400]
퍽이나 기고만장하더니 아무래도 그랜드 마스터에 갓 오른 놈이기 때문인 듯싶었다.
‘감히 그 정도로?’
로칸의 눈에 불똥이 튀고 금방이라도 튀어나가려는 순간, 유니콘을 의식한 것인지 놈도 무언가를 소환해 냈다.
‘뭐지?’
[신수 기린][Lv 412]
그 역시 신수였다. 천족 중에 지위가 높은 이들은 신수를 부린다더니 녀석 역시 신수를 탈것으로 불러냈다.
사슴의 몸, 소의 꼬리, 발의 발굽과 갈기, 그리고 우뚝 솟은 커다란 뿔.
유니콘에 비해 지저분해 보이는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레벨은 오히려 412로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높았다.
때문에 로칸의 눈도 날카롭게 빛이 났다.
‘신수 기린이란 말이지?’
겁을 먹어서? 그럴 리가. 오히려 로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로칸이 이곳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다음 신수의 위치를 수소문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런 찰나에 신수가 제 발로 걸어 나와 주니 로칸으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광풍 현신, 전신 무쌍, 전설을 타는 자, 폭주 전차, 투지의 발걸음, 급가속, 광기의 시간!”
마음을 정하자 몸이 저절로 따라갔다. 그래도 몇 번 해 봤다는 것인지 스킬 발동이 이전보다 빨라진 것 같았다.
“헉? 점멸!”
그리고 이어진 초고속의 돌진!
예비 동작 따위 없이 발동한 스킬 연계에 히라엘이 화들짝 놀라며 탈출기를 사용했다.
점멸!
형제이기 때문인지 천족의 공통 스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몇 번 봤던 스킬이다.
로칸은 당황하지 않고 몸을 돌리며 손도끼들을 쏘아 냈다.
“폭격!”
열 자루의 손도끼가 정확히 놈이 나타난 자리를 때렸다.
이번만큼은 피할 수 없었는지 몸으로 막아 내는 히라엘.
로칸은 즉시 유니콘을 돌려 다시 돌진할 자세를 취했다.
“막아라, 아니 죽여라! 놈을 잡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겠다!”
그러나 놈은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따라온 천족들이 일제히 로칸의 앞을 가로막으며 저항했다.
상대가 천족이기 때문인지 경비병은 나타나지 않았고, 1 대 수십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흥! 돌격!”
주요 돌진기가 아직 쿨 타임 중이었지만 상관없다. 고작 하이 마스터들을 상대로는 이걸로도 충분하다.
포상에 눈이 돌아간 녀석들은 자신이 가진 주력 스킬들을 쏘아 냈지만 로칸은 몸으로 버티며 적의 장벽을 허물어뜨렸다.
“크핫하하!”
그러면서도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같은 하이 마스터급인데 전혀 위협적이지가 않다. 그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에게는 아직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었다.
“무혼 각성!”
“저, 저건!”
황금 사자의 힘이 로칸에게 깃들었다. 이번에는 드록쉬처럼 그 힘을 알아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놈! 사자왕과는 무슨 관계냐!”
히라엘은 아예 직접적으로 사자왕에 대해 묻기까지 했다.
‘사이가 좋지는 않나 보군?’
하지만 대답해 줄 의무는 없다. 로칸은 말 대신 배틀 액스를 휘두르며 자신을 막아선 이들을 기마 돌격 상태로 쓸어버렸고 히라엘이 타고 있는 신수 기린도 적의를 드러내며 울부짖었다.
[신수 기린의 울음에 노출되었습니다.]
[광기 전염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그와 함께 로칸의 유일한 디버프 스킬인 광기 전염이 사라졌다. 신수 기린의 울음은 삿된 것을 물리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디버프는 로칸의 주된 힘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보다 강한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는 종류이기도 했고.
크허허헝!
시간 차를 두고 광기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광기 전염 때문에 공포에 젖어 있던 적들이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사지가 뻣뻣해지고 능력치가 크게 떨어졌다.
그런 상태로 과연 로칸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로칸이 일격을 선사할 때마다 머리가 깨지고, 가슴에서 배까지 갈라지는 치명상이 속출했다.
아예 로칸이 돌진을 멈추고 놈들의 틈으로 뛰어들었다.
“흐흐, 걸어 다니는 보너스군!”
애초에 힘의 차이가 분명한데 능력치 다운, 행동 불능까지 더해졌으니 상대가 될 리가 없다.
로칸이 배틀 액스를 휘두를 때마다 전투 불능 또는 사망에 이른 이들이 속출했다.
“저 하등한 종자가!”
그 모습에 히라엘이 발끈하며 덤벼 왔다.
처음에는 힘을 좀 빼 놓으려 했지만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천족들의 모습에 분개하며 달려든 것이다.
놈이 데려온 천족들 중에는 이종족도 있었지만 순수 혈통의 천족 또한 있었으니까.
‘걸렸군.’
하지만 그 역시 로칸이 노리던 바였다.
“유니콘!”
히잉! 퍼억!
무작정 달려드는 놈의 측면에서 유니콘이 나타났다.
신수 기린이 급히 고개를 틀어 뿔은 막았지만 충격까지 막는 것은 무리였다.
대번에 히라엘과 기린이 함께 나가떨어지며 바닥에 뒹굴었다.
“투지의 발걸음!”
콰앙!
폭발과 같은 돌진과 함께 로칸이 놈에게로 쏘아졌다.
“광살! 사자난무!”
“천신의 방패!”
쩌저저적!
히라엘이 황급히 마스터 스킬인 보호막을 펼쳤지만 하나가 아닌 두 스킬의 중첩에 얼마 버티지 못했다. 이미 로칸의 공격력이 그랜드 마스터의 수준을 웃돌고 있는 것이다.
보호막이 산산이 부서지고 배틀 액스가 보호막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
끼약!
그리고 신수 기린의 몸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애초부터 로칸의 목적은 히라엘이 아닌 신수 사냥이었으니까.
기린이 구슬피 울부짖으며 자체 회복을 시도했지만 로칸이 그걸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뼈 부수기, 살육의 일격!”
회복을 한다면 그보다 더한 타격을 주면 그만이다.
굳이 회복을 막는 디버프 따위가 없어도 압도적인 공격력, 그 하나면 충분했다.
“천신의 심판!”
콰광!
덕분에 여유가 생긴 히라엘이 이를 악물며 공격을 퍼부었지만 로칸은 멈추지 않았다. 생명력이 바닥을 치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린을 괴롭혔다.
[타이틀 불굴의 의지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로칸의 머리를 일격에 날려 버리지 못한다면 히라엘의 공격 따위는 오히려 그의 힘을 증폭시켜 줄 뿐이었다.
[퀘스트 마계 입장권을 완료하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 당신은 신수를 연달아 사냥했습니다.]
[타이틀 ‘신수 사냥꾼’을 획득하셨습니다.]
[신수 사냥꾼][유니크]
복수의 신수를 살해한 이에게 주어지는 칭호. 신성을 가진 존재를 살해하고 그 힘을 찬탈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보유 효과]
-???
-???
-???
그리고 잠시 후, 기린이 처참한 몰골로 쓰러졌다.
“이제 네 차례다.”
히라엘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진작 정신을 차리고 공격을 퍼붓고는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전투 방식은 로칸과 상성이 좋지 못했다.
신성이 어린 광선을 쏘아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인데, 따로 폭발력이나 관통력이 좋지 못하다 보니 0이 된 지 오래인 로칸의 생명력만 자꾸 갉아먹을 뿐인 것이다.
[피의 축복 효과로 생명력이 대폭 회복됩니다.]
어디 그뿐인가? 신수 기린의 피까지 뒤집어쓰자 로칸의 생명력은 다시 제법 차올랐다.
다행히 10%는 넘기지 않았지만 회복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겁을 집어먹은 히라엘에게는 공포스럽게 다가온 것이다.
죽는다.
이길 수 없다.
그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자 자연히 힘을 쏘아 내는 몸 또한 정지했다.
히죽 웃으며 악마처럼 다가오는 로칸에게서 간신히 뒷걸음질을 칠 뿐이었다.
“아, 악마…….”
정작 마족은 따로 있던데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로칸은 망설이지 않고 배틀 액스를 내질렀다.
셀프로 무력화된 히라엘의 몸을 간단히 유린했다.
“멈춰라!”
“응?”
퍼억!
그렇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순간, 하늘이 진동하는 고함소리가 그를 옭아매었다.
이미 한발 늦었지만.
“이, 이놈!”
“감히 천신의 대사제를!”
천족들이었다. 놈들이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로칸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곤란하군.’
그 즉시 로칸은 광풍 현신과 무혼 각성의 지속 시간을 체크했다.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두 스킬 모두 지속 시간이 슬슬 다해 가고 있었으니까.
반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족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십여 명. 게다가 하나같이 400레벨을 넘긴 자들이니 이대로 싸우면 필패였다.
‘한 번 죽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제 미타엘의 건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히라엘을 죽인 것은 좀 컸다.
그냥 사제도 아닌 대사제라고 하지 않나? 그들의 성정이나 하는 행동으로 볼 때 정당방위라고 주장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씨익.
하지만 로칸은 웃었다. 미친놈처럼 행동하는 주제에 지금의 대응은 너무 무르고 순진한 것이다.
[천족의 평판이 적대로 변경되었습니다.]
어차피 죽이려면 적대를 할 것이 아니라 공격부터 퍼부어야 할 것이 아닌가?
로칸이 일부러 공격 의사가 없음을 밝히듯 무기를 집어넣자 그들도 ‘적대’ 정도로 그치며 천천히 그가 있는 곳으로 내려앉을 뿐이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감히 천신의 대사제를…….”
“응. 아니야. 천상의 룬 북 사용.”
“아닛!”
그렇게 십여 명의 천족이 로칸을 포위하고 섰을 때, 로칸은 그들을 농락하듯 천상의 룬 북을 꺼내 저장된 두 곳 중 하나를 터치해 바로 이동 능력을 활성화시켰다.
피융.
터치와 함께 빛으로 흩어지는 로칸의 몸.
로칸은 마지막으로 놈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꺼내 보이며 천계의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