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타락의 정수 (3)
상성.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자 불이 물을 이길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세상의 이치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쪽이 어느 정도는 급이 맞을 때의 이야기다.
맞닿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소멸시키는 화염 앞에 생수 한 통을 뿌려 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화를 돋우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놈들은 로칸의 화를 제대로 돋웠다.
“폭격! 말살의 사슬!”
타락의 힘을 봉인하느라 잠시 사용 불가 되었던 파멸을 봉인한 쇠사슬이 힘을 발휘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며 범위 안에 있는 라그나로크의 모든 적들을 때리고 부순 것이다.
[파멸을 봉인한 쇠사슬의 특수 효과가 발동됩니다.]
[강력한 타락의 힘을 지닌 존재에게 추가 대미지가 적용됩니다.]
“……!”
그리고 그 순간, 로칸의 행동이 잠시 정지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효과 발동에 그조차 놀란 것이다.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
타락의 힘이 왜 유저의 몸에
사실 의문을 가질 것도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주입을 받았으니 있는 거겠지.
“컥!”
“히, 힘이 빠지…….”
그 결과, 놈들은 진정한 로칸의 밥이 되었다.
제아무리 타락의 힘을 통해 강화되었다지만 스펙에서 월등히 차이가 나니 손해를 보는 것은 일방적으로 놈들인 것이다.
아니, 개중 일부의 공격이 로칸에게 닿기도 했지만 의미가 없을 뿐이었다.
강력한 대미지가 들어왔지만 그게 뭐 어쩐단 말인가 어차피 광풍 현신의 지속 시간 동안은 불사의 존재인 것을.
“어떻게든 해치워!”
“잠력 격발!”
다급해진 놈들이 밑천까지 탈탈 털어 보였지만 로칸의 눈은 더 없이 차가워질 뿐이었다.
놈들이 사용하는 스킬들에서 타락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런 거였나.”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로칸은 대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꽤나 많은 아이템과 업적들을 자신에게 빼앗겼음에도 어떻게 이들이 전생만큼이나 빠르게 성장하고,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는지가.
‘허탈하군.’
이들은 바로 ‘타락의 후원’을 받고 성장한 것이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타락을 쫓는 자가 있으면 타락을 추종하는 자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유기적으로 변화하며 퀘스트를 만들어 내는 더 로드에 어느 한 방향만을 강요하는 퀘스트만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게 안일했다.
왜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스스로가 바보 같을 정도였다.
물론 타락의 후원을 받고 성장한 이들이 전면에 나선 적이 없기에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지만 놀라움만큼이나 실망감도 컸다.
‘날 그렇게까지 끌어내린 놈이지만 그 강함만큼은 진짜라고 생각 했건만…….’
그토록 강력했던, 폭력의 왕이라 불리던 자신을 힘으로 찍어 누른 창세의 왕이 알고 보니 치트 키 같은 힘에 의존하는 팔푼이였다니.
그들이 밀어주는 정보와 지원을 받아 아무도 모르는 탄탄대로를 걸었을 뿐이라니.
홀로 가시밭길을 걸으며 성장해 왔고, 그것만이 진짜 강자가 되는 길이라 믿어 왔던 로칸에게는 충격이자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회귀 후 미친 듯이 달려오고, 남들보다 한참을 앞서가면서도 라그나로크의 앞에 나타나 그들을 짓밟으려 하지 않은 것도 혹시나 이전처럼 성장한 창세의 왕과 다시 한 번 붙어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던 로칸의 눈에 분노가 스며들었다.
이제는 놈들을 봐줄 이유가 사라졌다.
“폭주 전차!”
“리프 어택!”
“급가속! 광기의 시간!”
분노한 로칸은 놀랍도록 차가워졌다.
그들을 적수로 보지 않고 허수아비처럼, 경험치 덩어리처럼 보기 시작한 까닭이다.
사용하는 것은 오로지 이동 스킬 뿐. 나머지는 기본기로, 컨트롤만으로 해결했다.
이미 스킬을 쓰지 않아도 쓴 것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몸뚱이를 움직여 때리고, 부수고, 분쇄했다.
난동을 부리는 세계수에게 엘프들을 맡겨 두고 뒤늦게 합류한 다른 라그나로크 팀원들이 합류했음에도 그 기세를 전혀 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놈들의 사이에 항거할 수 없는 공포가 전염병처럼 퍼져갔다.
“이걸 어떻게 이겨…….”
“설마, 벌써 하이 마스터가 된 건 아니겠지 ”
“맞든 아니든 이건…… 이미 괴물이야.”
퍼억!
로칸이 배틀 액스를 휘두를 때마다 스킬이 갈라지고 머리통이 박살 났다.
사슬을 휘감은 왼 주먹이 작렬할 때마다 힘의 근원이 깨어지며 품고 있던 타락의 마나가 타 버리고 흩어졌다.
목숨을 건다 한들, 시간을 조금 끄는 것이 고작일 뿐 그 누구도 로칸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지 못했다.
“거의 다 됐다! 조금만 더 버텨!”
“라스트 1분!”
그럼에도 라그나로크는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불나방처럼 로칸에게 몸을 던져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제대로 타격을 입히는 꼴을 보지 못함에도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며 시선을 분산시키고, 시간을 지체시켰다.
“귀여운 놈들.”
처음에는 강력한 한 방 같은 것을 준비하는 줄로만 생각했다. 자신의 목을 날리거나 심장을 터트려 침묵 시킬 최강의 마스터 스킬쯤을 준비해 온 것이라 생각하며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한 명이 캐스팅을 하는 동안 다른 이들이 주변에서 은신이나 방어를 해 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삼라만상을 꿰뚫는 눈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자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놈들이 그저 시간을 끌어 지속 시간을 종료시키겠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그렇기에 더 괴롭히고 싶어졌다. 절망에 빠뜨리고 싶어졌다.
“30초!”
“20초!”
“10! 9! 8! 7……!”
생성, 조합, 마스터 스킬까지.
각종 디버프며 공격 스킬을 몽땅 몸으로 받아 내고도 여력이 넘치는 로칸이었기에 남은 라그나로크의 팀원은 얼마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들은 정말 정예 중의 정예.
오딘을 비롯해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이들만 로칸의 후유증 타이밍을 기다렸다.
나머지는 전멸.
이쯤 되면 로칸이 죽어도 이긴 것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로칸은 그리 관대하게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시간 역행.”
놈들이 마지막 1초를 세는 그 순간, 로칸의 몸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저 멀리 떨어진 하늘에서 광풍 현신을 사용하기 전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절대 놓치지 마라!”
“도망가게 둬선 안 돼!”
그것을 보고 놈들이 착각했다. 탈출기를 사용한 것이라고. 그들이 예상한 대로 광풍 현신의 지속 시간이 끝나 힘이 빠진 상태일 거라고.
[공간 간섭이 발동되었습니다.]
[일정 공간 내에서 공간 계열 주문의 사용이 봉인됩니다.]
그래서일까. 값비싼 공간 간섭 주문서까지 사용했다.
로칸이 스킬 종료 후 도망칠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한발 앞서 사용한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을 줄도 모르고.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다니 넌 죽었어!”
“너 때문에 손해가 얼마나 큰 줄……!”
우스운 일이었다.
“광풍 현신.”
도망치기는 대체 누가
로칸은 다시 한 번 광풍 현신을 발동시켰다.
금빛과 적빛이 뒤섞인 광기의 거인이 되어 그동안 뒷짐 지고 물러나 있던 놈들을 쓸어버렸다.
조금만 다가가도 화들짝 놀다 뒷걸음질 치던 놈들이 코앞까지 다가와 줬으니 이쪽도 성의 표시를 해야 하지 않겠나
난무를 비롯한 스킬 콤보를 알뜰하게 넣어 주며 놈들을 해치웠다.
“정말 괴물이군, 로칸.”
그런 그의 앞을 가로막고 나온 것은 오딘이었다.
피식.
오만함과 긴장감이 버무려진 그 모습에 로칸이 웃었다.
학살에 가까운 일방적인 폭행이 자행되는 가운데 그가 무사할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이들보다 강하기 때문에 로칸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이 있어서
아니다. 전적으로 로칸이 그를 놔두었기 때문이었다.
“뭐 해 덤벼.”
그러나 일대일은 아니었다. 아직은 같은 마스터 레벨이라고 하지만 격의 차이가 있으니까.
오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라그나로크의 가장 핵심 전력인 다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로칸에게 덤벼들었다.
스르르륵.
그들 중 하나가 먼저 모습을 감추었다.
로키.
라그나로크 팀의 모든 팀원들이 그렇듯 거짓과 장난의 신에서 이름과 콘셉트를 따온 자였다.
뛰어난 암살자인 동시에 마법사인 만큼 놈이 하려는 것은 뻔했다.
“어디 붙어 보자!”
그리고 가장 먼저 뛰쳐나온 이 또한 눈에 익었다.
토르라는 아이디를 쓰는 자.
이름처럼 강력한 육체 능력을 지닌 데다 타격한 상대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전격 계열의 추가 타격 능력을 콘셉트로 잡는 놈이지만 동시에 단순무식 무대포의 성향을 지녔다.
그런 의미에서 콘셉트에 걸맞다고 할 수 있으나, 로칸을 상대하는 데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콰앙!
배틀 액스와 배틀 해머의 격돌.
이런 격돌에서 우위를 가져가는 것은 보통 타격계 무기인 해머 쪽이지만 그것은 힘이 비등할 때의 일이다.
“쿠억!”
자신 있게 뛰어든 토르는 머리부터 뒤로 떨어지며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굴었다.
순수 근력에서 형편없이 밀린 것이다.
“다음!”
“타이달 웨이브!”
뒤이어 힘을 발현한 것은 포세이돈과 제우스였다.
신화상으로 보자면 ‘오딘’의 북구 신화와 별개인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주신들의 이름이지만 라그나로크는 우습게도 북구 신화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이름을 사용하는 이들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동시에 그들이 감히 주신의 이름을 사용할 만큼 강력한 존재라는 뜻이기도 했다.
쿠오오오오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느닷없이 해일이 밀려왔다.
물이 없는 지형에서 사용하면 그만큼 마나 소모가 극심했지만 놈은 이 한 방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거친 해일의 힘으로 로칸을 덮쳐 갔다.
“폭주 전차.”
거인으로 변한 자신의 키조차 훌쩍 넘는 해일의 습격을 바라보던 로칸이 한순간 힘을 뿜어냈다.
오히려 스스로 돌진하며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광살.”
해일의 파동에 밀려 돌진의 힘이 약해지려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베고 죽이는 필살의 참격이 해일을 갈랐다.
파앙!
해일을 뚫고 놈들의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신벌의 번개!”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포세이돈과 제우스는 하나의 팀이었다.
물 속성, 또는 물에 젖은 상대에게 전격 속성이 잘 통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법칙이다.
제우스가 던진 마스터 스킬이 로칸을 꿰뚫었다.
광풍 현신의 효과를 단숨에 끝내 버릴 기세로 로칸의 목을 꿰뚫고 몸과 머리를 떨어뜨렸다.
“이겼…….”
“급가속, 광기의 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분명 목이 떨어진 것을 확인했는데, 로칸이 멀쩡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짓쳐 오고 있는 것이다.
푸확!
강력한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그만큼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다.
신화 속 존재와 달리 그저 마법 계열 ‘콘셉트충’인 제우스로서는 마스터 스킬까지 소진한 상태에서 로칸을 저지할 수 없었다.
급한 대로 조합 스킬과 생성 스킬을 쏟아부어 보지만 소용없는 일. 폭격까지 내던지며 퇴로를 차단하고 나선 로칸에게 제대로 회피기를 써 보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무리해서 마스터 스킬을 쓰느라 마나가 바닥난 포세이돈은 말할 것도 없다.
순식간에 여섯이 넷으로 변해 버렸다.
“죽음의 축제!”
그때, 가만히 전황을 지켜보던 하데스가 힘을 발현했다.
죽음의 축제.
일정 반경 내의 유저, NPC 사망자를 본래 능력 그대로 영혼체 상태로 일으키는 하데스의 마스터 스킬이 펼쳐진 것이다.
마치 도플갱어처럼 능력과 아이템, 전투 스타일까지 그대로 모방하여 부활하기에, 강한 상대가 많이 죽어 있을수록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스르르릅!
“…… ”
하지만 그 또한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다.
로칸이 힘을 쓴 것은 아니었다.
세계수.
놈이 가진 타락의 열매가 ‘죽음의 힘’인 하데스의 마스터 스킬을 탐욕스레 흡수해 버린 것이다.
덕분에 몸을 일으키려던 영혼체들은 다시 구천을 떠도는 망자가 되었고, 하데스는 세계수의 눈에 띄어 공격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다음 ”
로칸의 눈이 한 사내에게로 향했다.
마지막까지 아껴 놓은 가장 맛있는 먹잇감.
오딘이 입술을 깨물며 로칸을 향해 검을 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