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오크 광전사 크록취 (3)
‘아직 이 정도군.’
아직 이 정도였다. 마스터 스킬에 대한 이해가 낮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본신의 능력치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알 수 없지만 마스터 스킬을 ‘강력한 한 방’ 정도로만 보고 있는 느낌이 강한 것을 볼 때 적어도 마스터 스킬에 대한 이해도는 그리 높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럼 죽어야지.’
크록취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미 적의 마스터 중 하나는 그의 발아래에 깔려 있었다.
붉은 유성에 이어진 도끼질에 투척을 마스터 스킬로 삼던 드워프는 난도질이 된 상태였다.
아무래도 위력을 높이기 위해 힘과 마력 중심으로 캐릭터를 성장시킨 모양이었다. 몇 대 치지도 않았는데 돌멩이에 맞은 개구리처럼 쭉 뻗어 버렸다.
“크허허헝!”
크록취가 승자의 포효를 내질렀다.
산천초목이 떤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그동안 로칸의 곁에서만 싸우느라 광기의 외침을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황금사자 진영의 유저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레벨에 따라, 능력치에 따라 가파르게 곤두박질친 능력치를 보며 기겁을 했다.
크록취의 존재 하나로 전세가 한순간에 기울어져 버렸다.
“크록취! 크록취! 크록취!”
드워프들이 무참히 짓밟히고 노움의 작은 몸이 바닥에 짓뭉개졌다.
전장 가득 새로운 오크 영웅, 크록취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크흥! 모두 돌아가서 재정비를 해라!”
그러나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상대 역시 선발대는 유저 중심의 편성이었으니 빠르면 곧장도 본대가 들이닥칠 수도 있는 일이니까.
크록취의 지휘 덕분에 오크들이 빠르게 진형을 재정비하자 드워프, 노움 연합군은 감히 재전투를 시도할 수 없었다.
드워프 마스터 셋을 베고도 여력이 넘쳤던 오크족의 새로운 마스터 유저, 크록취에 대한 분석이 있기 전에는 함부로 싸움을 걸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 걸론 부족해.’
하지만 정작 로칸은, 크록취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동안 거침없이 밀어붙이던 황금사자 진영의 공세를 멈춰 세웠음에도 탐욕의 빛을 번들거리며 그들의 진영을 훑어보았다.
죽은 것은 대부분 유저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렇다 할 아이템의 드롭도 없었으니 실질적인 피해는 경험치 다운 이외에 없다는 소리다.
아니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닐 터였다.
새로운 강력한 마스터 레벨 유저, 크록취에 대한 공포. 그것을 놈들에게 심은 것 하나만큼은 소득이라 할 수 있었다.
‘일단 거점 한두 개쯤은 밀어야겠군.’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마음 놓긴 어려웠다.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크록취의 그림자를 쫓아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하겠지만, 노움의 입장에서는 혹시나 고대 도시가 잠들어 있을지 모를 장소가 코앞에 다가온 상황이니 포기할 수 없는 유혹과도 같은 터였다.
그러니 확실히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 놈들을 이곳에서 좀 더 떨어뜨려 놓고 나서야 제대로 탐색을 해 볼 수 있을 테니까.
때문에 로칸은 한동안 크록취의 행세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고블린 주술사의 변신 반지가 부여하는 폴리모프 효과는 사흘만 유지될 뿐이지만 그 사흘째에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쿨 타임이 돌아오기에 아주 순간의 시선만 피한다면 계속해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오크 광전사 크록취의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크록취 : 모든 부대원들은 동문으로 집결하라.
전투가 끝나고 잠시간의 평화가 찾아온 그때, 크록취는 힐로스성을 과감하게 떠나 자신에게 소속된 1천 명의 유저들을 통솔하더니 동문을 통해 크게 우회하기 시작했다.
연합군이 결단을 내리기 전, 먼저 흔들려는 것이다.
-니펠로마 : 어디로 가는 겁니까
-크록취 : 따라와라.
딱히 목적지를 고지하지도 않았다. 유저들로 이루어진 부대인 만큼 스파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
꼭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친구나 길드원들에게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새어나갈 수 있었기에 크록취는 카리스마 있는 통솔력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부대원들은 감히 더 묻지 못하고 잠자코 따라 이동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크록취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시반 : 뒤치기 가즈아!
그리고 환호했다. 크록취가 선택한 공격 지점은 힐로스성과 마주하고 있는 키탄로성이 아닌, 그보다 뒤쪽에 위치한 니힐만성인 것이다.
적과 대치하고 있는 지점에 병력을 집결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인 만큼, 그 뒤편에는 수비 병력이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고작 마스터 레벨 유저 하나와 클래스 익스퍼트 끝자락에 있는 유저 1천을 가지고서는 함락을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크록취는 과감하게 돌진했다.
“크르릉!”
인간에게 천골마가 있다면 오크에게는 천골랑이 있다.
크록취는 이 순간을 위해 거금 1천 골드를 들여 오크의 탈것인 늑대를 구입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성문을 향해 돌격할 수 있었다.
“폭격!”
콰광 쾅 쾅 쾅!
달리는 와중 전신을 휘둘러 무기를 투척했음에도 강인한 늑대의 중심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속도에서만큼은 천골마보다 조금 뒤지지만 순발력과 힘, 그리고 전투력만큼은 더 우위에 있는 것이 오크족의 탈것, 늑대였으니까.
그리고 천골마가 아닌 천골랑이기에 가능한 것이 또 있었다.
“전설을 타는 자.”
이미 유저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대붕이나 적토마 모드는 사용 할 수 없지만 늑대를 진화시키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다.
로칸의 영향을 받은 유저들이 탈것에 적용시키는 강화형 조합 스킬을 만들어 낸 사례가 몇이나 있기에 크록취는 당당히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펜릴]
늑대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전신이 검게 물들고 극에 이른 야성이 이빨을 드러냈다.
늑대는 신을 삼켰다는 펜릴의 그림자가 되어 더욱 빠르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광풍 현신. 폭주 전차.”
거기에, 광풍 현신으로 크록취도 보조를 맞추었다.
돌진 속도를 400%나 증가시키는 스킬의 힘까지 내려앉자 둘은 마침내 하나가 되어 그 자체로 막을 수 없는 포탄이 되었다.
콰앙!
큰 소란도 필요 없었다.
전방에 속하기는 했지만 여러 전투를 치르며 약해질 대로 약해진 성문 따위는 일격이면 충분했다.
더구나 사자왕의 봉인된 견갑에서 발휘된 [사자의 결의] 효과가 돌진 스킬의 효과를 50%나 다시 증가시킨 상태였다.
일격. 단 일격에 성문이 박살 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황금사자 진영의 유저와 NPC들은 일단 기세에서 밀렸다. 악귀 같은 모습으로 날뛰어 대는 크록취를 보고 오줌을 싸지나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가로막는 것은 베었고, 부쉈다. 도망치는 자는 뒤통수와 등짝에 손도끼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 쓰러졌다.
자비가 없는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유저들 중에는 최근 마스터 레벨에 올라 기세가 등등하던 이들도 있었지만, 감히 크록취와 손을 섞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혹시 마스터 스킬을 발동시키면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할까 두려워하며 빠르게, 니힐만성을 탈출했다.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서.
그런 핑계로 일단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
‘자, 어서 오너라.’
니힐만성이 빠르게 비워지고 반대로 키탄로성은 분주해졌다.
뒤늦게 습격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부대를 꾸리는 것이다.
아무리 전력이 강하다 한들 고립되어서는 위험했다.
상대 역시 만만한 전력은 아니니까.
급한 대로 유저들에게 퀘스트를 내려 봤지만 그 또한 여의치는 않을 터였다.
새로 나타난 오크 영웅 크록취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이들도 있겠지만 그와 붙어 본 자라면, 혹은 가까이에서 그를 본 적 있는 자라면 나서서 지원할 리가 없었다.
‘늦는군.’
그 탓에 니힐만성으로 향하는 병력의 숫자가 영 시원찮았다.
도저히 지원자가 모이지 않아 반 이상을 NPC 병사와 기사들로 채웠지만 그런 만큼 키탄로성의 수비가 애매해졌다.
전력 자체는 유저든 NPC든 비슷하겠지만 유저들을 기용할 경우 커다란 잠재적 리스크를 안아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도주.
위급 상황에서 도망칠 곳이 없는 NPC들과 달리 유저들은 도망치거나, 사망 후 이탈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니힐만성이 너무나 쉽게 털린 것도 바로 그런 이유가 아니던가
그렇게 불안한 상태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시반 : 전부 틀어막아!
원래대로라면 버리고 떠나는 것이 맞았다.
키탄로성에서 이쪽으로 향하는 유저의 숫자만 최소 5천에서 1만은 족히 될 텐데 고작 1천의 병력으로는 버티기는커녕 개죽음밖에 건질 것이 없으니까.
그러나 크록취는, 1천 명의 결사대는 버티기로 작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결사 항전][퀘스트]
키탄로성을 공략할 때까지 니힐만성을 사수하라!
-성공 조건 : 키탄로성 공략 시까지 니힐만성 방어
-실패 조건 : 키탄로성 공략 실패, 니힐만성의 함락
-성공 보상 : 1레벨 상승, 대량의 명성, 극대량의 경험치
1레벨 상승이 걸린 퀘스트가 그들의 앞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무려 최전방의 거점들을 공략하고 수비할 때를 제외하면 거의 나타나지 않은 1레벨 상승의 보상이 걸린 퀘스트. 레벨이 높을수록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성공 보상이 그들을 자극했다.
-초르기 : 제발 막자. 나 이번 퀘스트만 끝나면 마스터 퀘스트라고!
-제니스 : 나도 1업만 더하면 298이야. 운 좋으면 경험치 보상으로 299레벨 직행이라고! 제발 한 번만 도와주라, 얘들아!
-시반 : 두 놈 다 닥쳐! 여기서 꽁레벨 안 먹고 싶은 사람 있냐 정신 사나우니까 입 다물고 자리나 지켜!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내성의 창문 등 난입 가능한 루트를 틀어막고, 좁은 길목을 이용해 싸운다 해도 마스터 레벨까지 즐비한 적들을 막아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키탄로성의 공략이 얼마나 걸릴 줄은 몰라도 마스터 레벨이라고는 크록취 하나인 상태로 그건 무리다.
“쏴라!”
그러나 믿는 구석은 또 있었다. 바로 크록취가 영주의 자리를 맡자마자 보강한 수비 시설과 NPC 병사들.
그들이 수비 시설들을 조작하며 1선에서 적들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폭격!”
수성 병기와 마법사 NPC들의 광역 마법. 그리고 크록취의 폭격까지. 그것만으로도 적들은 쉬이 다가오지 못했다.
먼저 접근하면 확실하게 죽는다.
그런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 잡은 탓에 선뜻 나서는 이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크록취와 1천의 결사대 모두가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이쪽의 퀘스트에 대해 알 리 없는 적들은 빠르게 탈환전을 끝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강한 압박까지는 갖지 않은 것이다.
[키탄로성 탈환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대치가 유지되던 어느 순간, 모두에게 새로운 알림이 나타났다.
키탄로성 탈환전의 시작. 진정한 버티기가 시작된 것이다.
“후우.”
크록취는 짐작했다. 이 시스템 알림이 나타난 것이 비단 그들만은 아닐 것이라는 걸.
아마 대치 중인 드워프, 노움 연합군과 유저들에게도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고 그들은 선택을 해야 했다.
싸울 것인가, 돌아갈 것인가.
“전군 돌격! 방패를 들고 적의 공격을 방어하라! 마법사들은 적의 마법을 견제해! 이대로 뚫는다!”
“으, 으아아아아앗!”
적들은 싸움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