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대도서관 (1)
“역시나로군.”
인벤토리에 들어온 두 개의 아이템을 확인하고 로칸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 들어온 아이템은 하나 더 있었다.
[타락의 구슬]
바로 타락의 구슬. 타락 집결지가 표시된 지도를 얻는 순간 확신하기도 했지만 이걸로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셈이다.
“이 새끼 봐라 ”
그들이 그것을 지니고 있던 이유는 루베론의 명령서를 열어 보자 명확해졌다.
그 안에는 일단 로칸의 신뢰를 얻은 뒤, 계획을 망치고, 큰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도록 유도하라는 지시가 적혀 있던 것이다.
그리고 타락의 구슬을 가지고 있던 이유도 적혀 있었다.
“고작 다섯으로 날 잡겠다고 ”
기회가 닿았을 때, 타락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로칸을 죽이라는 명령 또한 함께인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방문자의 특성을 파악한 것인지 리스폰 지역에 대기하고 있다가 살아나는 순간의 무방비를 이용하라는 자세한 방법까지 적혀 있었다.
어차피 마스터 레벨을 찍은 이상, 아무리 죽여도 그 밑으로 레벨이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아이템의 드롭과 성장의 정체는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인 듯 싶었다.
확실히 레벨 하나를 올리기가 엄청나게 힘들어진 마스터 레벨부터는 한 번의 죽음을 복구하기 위해 몇 날 며칠 사냥에만 매진을 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니까.
‘기를 죽이려는 의도도 있을 테고.’
그것을 알기에 어떤 의도인지 이해했지만, 그렇기에 로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자신을 잡기 위해 고작 마스터 레벨 기사 다섯을 파견한 것도 우스웠고, 일명 ‘공구리’를 치려고 한 것 또한 용납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마침, 전투의 연속이 아니라 방어를 굳히고 있던 상황이 아니던가
로칸의 눈빛이 음흉해지고, 곧바로 성안으로 돌아왔다.
“후작님, 같이 간 기사들은…… ”
“따로 임무를 부여했다.”
다섯의 마스터급 기사들을 불러낸 로칸이 혼자 돌아오자 몇몇이 짧은 의문을 표했지만 로칸의 대답에 곧 생각을 거두었다.
로칸이 별동대를 운용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야전사령관으로서 지금까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으니 캐묻거나 의심 할 수 없던 것이다.
“선택 집결.”
그렇게 다시 개인 막사로 돌아온 로칸은 부대 관리 창을 열어 인원을 선별했다.
탈라란과 델라스를 포함해 몇몇의 하이 마스터와 마스터급 인원을 선별하여 자신의 막사로 은밀히 집결시켰다.
“가지.”
설명은 길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비밀이 유지되기는 쉽기 때문이다.
로칸은 어중이떠중이 병력 대신 마스터와 하이 마스터급 핵심 병력 일부를 이끌고 간이 텔레포트 마법진에 올랐다.
일단 카잔티아로 돌아온 뒤, 루베론 영지를 향해 단숨에 도약했다.
“저, 정지. 어…… 무슨 일이십니까 ”
곧장 내성으로 향하자 내성을 지키던 문지기 기사가 그들을 막아섰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완전무장을 한 병력이 우르르 몰려오니 그들로서는 막아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베론 백작을 만나러 왔다.”
“약속이 되셨습니까 잠시만…….”
로칸의 대답에 슬쩍 눈알을 굴리는 기사. 무슨 언질을 받은 것이 있던 것일까
그가 어떤 장치를 조작하려 하자 로칸은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휘익. 퍼억!
“가라, 반역자 루베론을 잡아들여라!”
놈이 무언가를 하기 전, 로칸이 놈의 머리통부터 쪼개 놓았다.
로칸과 함께 온 마스터와 하이 마스터들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지만 머뭇거리는 이들은 없었다.
로칸처럼 루베론 영지의 병사와 기사들을 작살내 놓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충분히 놈들을 제압할 무력이 있었으니까.
즉시 내성 안으로 밀려들었고 마주치는 모든 병사와 기사들을 쓰러뜨렸다.
“마, 막아라!”
“무슨 짓을 해서든 시간을 벌어!”
영문도 모르고 방문자들을 맞은 루베론 영지의 기사와 병사들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아니, 처음에는 그랬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필사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로칸이 이 난리를 피우는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제압으로 그치던 기사들의 손 속도 사나워졌다.
“카이!”
뀻!
해일처럼 밀려드는 병력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로칸이 한발 먼저 영주의 집무실을 노렸다.
카이를 타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최상층의 창문을 통해 안으로 난입을 시도했다.
“폭격!”
난입을 예상한 듯, 창문을 틀어막고 버티던 병력도 있었지만 로칸의 상대는 아니었다.
폭격으로 몽땅 쓸어버리고 내성에 진입한 로칸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가로막는 자들은 무기와 방어구째로 갈라 버리며 루베론 영주를 찾았다.
“히, 히익!”
그렇게 로칸을 마주한 루베론 영주는 그야말로 기겁을 하고 눈알이 빠지도록 이리저리 굴리더니, 모르는 체하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다.
“후작님, 대체 왜 이러십니까 ”
팔락.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로칸은 인벤토리에서 놈의 직인이 찍힌 [루베론의 명령서]를 꺼내 들었고, 놈은 마지막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해십니다! 이런 짓을 하면 황제 폐하께서…….”
“황제 폐하께서, 내게 이번 전쟁과 관련한 전권을 위임하셨지. 그리고 네놈은 그것을 망치려고 들었고. 그렇다는 건 네놈이 황제 폐하께 반기를 들었다는 것 아니겠나 반역자를 처리하는 데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지. 선조치 후보고, 참 편리한 단어지. 안 그래 ”
“……쳐라!”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루베론 영주는 즉시 자신을 호위하던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섯이나 되는 마스터 레벨 기사를 로칸에게 보내고도 놈에게는 일곱의 마스터 레벨 부하들이 있었다. 과연 유력한 백작가다운 저력이랄까.
그들이 일제히 힘을 격발시키며 로칸에게 달려들었다.
“까고 있네. 버서크!”
로칸도 즉시 힘을 개방했다.
영주 집무실의 층고가 높지 않은 관계로 광풍 현신은 무리다.
그걸 사용했다가는 구부정하게 몸을 숙여야 해서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웠고, 한 방에 놈들을 몰살시킨 뒤 스킬을 캔슬하는 게 아닌 이상 도망치는 놈을 잡기도 여의치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여러 타이틀 효과와 아이템빨로 강화된 로칸의 힘은 마스터 스킬이 없이도 마스터 레벨을 씹어 먹을 만큼 강력했으니까.
“폭주 전차.”
로칸은 아예 놈들을 무시하고 강행 돌파를 시도했다.
사자왕의 봉인된 견갑의 힘으로 한껏 강화된 돌진의 힘을 폭발시키며 가로막는 자들을 볼링 핀처럼 넘겼다.
파앙!
그뿐이 아니다. 방어력과 생명력이 약한 주문 계열의 마스터는 아예 몸이 풍선처럼 터져 버렸다. 몸체가 슬라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분해되고 피가 방 안 가득 튀어나갔다.
“제, 제발, 목숨만은……!”
그렇게 부하들을 바리케이드 삼아 도망치던 루베론 영주의 뒷목을 잡아채기까지는 불과 30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말하겠습니다! 무엇이든 대답을 하겠으니……!”
퍼억!
겁이 많은 걸까, 심지가 약한 걸까. 루베론 영주는 붙잡히자마자 항복을 선언했지만 로칸은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머리를 쪼개고 놈의 몸에서 혈액이 도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영주니…….”
“말살의 사슬.”
퍼억!
그와 함께 그를 대신해 로칸을 막아서던 놈들도 행동을 멈추었지만 정작 로칸은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알고도 자신을 막아설 정도라면 한패, 공범으로 봐도 무방하니까.
그 정도 충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어차피 회유를 권해도 마찬가지였다.
사슬의 폭풍이 놈들을 때리고 부수었다.
“죄인 루베론은……!”
“……후작님 ”
쿠웅
그때, 영주 집무실의 문을 박차고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래 봤자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싸늘한 시체와 뜨거운 피 웅덩이뿐이었지만.
“샅샅이 뒤져라.
로칸은 아무렇지도 않게 명령을 내린 뒤 제 볼일을 봤다. 루베론과 수하들의 시체를 치우지 못하게 한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조수 소환, 영혼술사.”
루베론의 시체를 발로 툭 차서 넘긴 로칸은 조사단원의 팔찌를 사용했다.
불러낸 조수는 다름 아닌 영혼술사.
이름은 거창했지만 공격 능력은 그다지 크지 않은 애매한 능력의 클래스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격용으로 썼을 때의 문제고, 유틸적인 능력으로는 이야기가 달랐다.
“스피릿 스피킹 사용해.”
“예. 스피릿 스피킹.”
스피릿 스피킹. 다른 말로 고스트 스피킹이라 불리는 이것은 대상의 영혼과 연결하여 대화를 나누는 기술이었다.
죽은 NPC와 대화를 하거나, 유저가 죽었을 때도 부활 전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스킬인데, 이게 NPC에게 적용되었을 때가 재미있었다.
[영혼술사 하약카가 루베론의 영혼과 접속합니다.]
[루베론의 영혼이 영혼술사 하약카에게 제압되었습니다.]
[연결된 동안 루베론의 영혼은 진실만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지속 시간 : 600초]
루베론의 영혼과 접속하고, 제압하자 로칸과 하약카의 눈에만 보이는 희뿌연 영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내가 어떻게…….
“닥쳐.”
-흡!
영혼을 제압한 것은 영혼술사 하약카였지만 그는 로칸의 조수, 자동으로 로칸에게도 권한이 전이되었다.
덕분에 루베론은 로칸의 한마디에 입술이 달라붙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로칸은 만족한 듯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묻는 것에만 대답해. 이 일에 누가 연관되어 있지 다 불어.”
-그, 그건…….
루베론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모두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영혼이 제압된 상태에서는 영혼에 각인된 정보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군.”
흉수들의 목록을 쭉 읊어대는 걸 확인한 로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미 예상하던 자들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루베론의 ‘파벌’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역시 파벌의 힘을 등에 업고 크게 성장한 인물이었고, 백작이지만 어지간한 후작급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으니까.
“그럼 다시 묻지. ‘타락의 구슬’은 어디서 났지 ‘너희’의 목적은 뭐야 ”
-타락의 구슬은 타락 사제들에게 구했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타락의 힘을 이용해 세상을 지배하는 것. 모두가 타락의 힘을 배척하고 있지만 그것은 잘만 활용하면 강력한 몬스터들을 조종해 세상을 통치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결코…….
루베론의 영혼은 이미 체념한 듯 곧장 말을 늘어놓았다. 저항하려 해 봤자 영혼이 쥐어짜이는 고통만을 느끼게 될 뿐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첫 번째 대답은 조금 애매했다. 너무나 당연해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 그리고 두 번째 대답은 이미 로칸이 예상하던 그것이었다.
현 인간 황제 카이스만이 고대 황제를 조종해 인간의 격을 높이고 천하 통일을 이루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타락의 힘을 컨트롤해 세계를 정복하려는 집단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그렇군. 이것을 후스타페 공작도 알고 있나 ”
-모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