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종족 대연합 (2)
여덟 종족이 사인한 계약서를 모으는 것으로 종족 대회의의 1차 목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그것으로 회의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다.
일단 힘을 합치는 것에는 동의했으니 이제부터 세부적인 작전을 짤 필요가 있었다.
“고대 황제는 내가 사냥하지.”
“크큭, 너 혼자서 될까 활잡이는 그냥 잔챙이들이나 상대하시지 진짜 전투는 나 같은 전사들이 할 테니.”
“감히 건방지게 사냥꾼을 무시하는 건가 사냥당하고 싶은가 보군.”
물론 대화가 잘될 리 없었다. 각자 전투라면 자신이 넘치는 하이 마스터들이니 자존심을 굽히고 협공, 또는 협동 작전을 펼친다는 것에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같은 진영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서로가 주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우겨 대고 상대에게는 보조나 하라고 이야기해 대니 한참이 지나도 회의에 진전이 있을 리 없다.
덕분에 한숨이 늘어 가는 것은 노움 진행자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계속되는 아크 리치의 딴죽을 로칸이 여유롭게 받아넘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이 마스터에도 오르지 못한 잔챙이가 끼니 격이 안 맞아서 이야기가 되질 않는군. 이봐, 너는 굳이 정할 것도 없이 잔챙이들이나 상대하는 게 어때 ”
“그거 좋지. 그렇지 않아도 붉은십자군의 대부분은 내가 처죽였거든. 아무도 못 하는 일이라면 내가 해 줄 수밖에.”
부들부들.
아무리 하이 마스터라지만 1천이나 모여 있는 마스터 군단을 거의 혼자서 죽지 않고 2백 마리까지 줄이는 일은 장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령술의 정점에 있는 그라 해도 과연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 그것을 해낸 로칸의 비아냥거림에 아크 리치는 오히려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이 마스터가 아니라는, 제대로 싸우면 결코 자신이 질 리 없다는 믿음이 있기에 날카롭게 말을 튕길 뿐이었다.
“거참 말끝마다 하이 마스터, 하이 마스터. 무슨 앵무새냐 꼬우면 너도 해 보든가. 이제 꼴랑 2백 마리도 안 남았으니 간단하겠네. 안 그래 ”
물론 그조차도 그냥 들어 주고만 있을 로칸이 아니었다.
“그만, 그만!”
그렇게 한참이나 계속되는 설전에 참다못한 진행자가 개입했다. 이대로는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이대로는 오늘 내로 끝이 날 것 같지 않군요. 그럼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붉은십자군. 아직 2백 기가 조금 안 되게 남아 있는 이것들은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
“잘난 척하는 놈이 하나 있더군. 알아서 처리하겠지.”
이번에도 아크 리치다. 로칸은 어깨를 으쓱이며 허세를 부렸지만 사실 그라 해도 붉은십자군 2백 기를 한 번에 상대하는 것은 제법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못 할 것도 없지.’
단, 한 가지 전제가 붙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만약 이들이 크로노와 붉은 근위병을 충분히 견제해 준다면. 그리하여 방해를 받지 않고 붉은십자군만을 상대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광풍 현신의 최고 장점 중 하나는 무한한 마나가 아니던가 조합 스킬을 난사해 댄다면 고만고만한 수준에서는 못 할 것이 없고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굳이 어렵게 풀어 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조금만 돕는다면 붉은십자군부터 모두 정리하고 고대 황제와 하이 마스터들은 따로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러나 굳이 그럴 것도 없었다. 하이 마스터들이 각자의 마스터 스킬을 쏟아부어 준다면 애를 써서 2백 대 1의 전투를 벌일 것도 없이 크로노와 하이 마스터들만 남길 수도 있는 것이다.
2백 대 1까지는 몰라도 단신으로 마스터 수십은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이들이니까.
아크 리치는 그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을 다물었고, 그 의견에 동조하고 나선 것은 의외로 트롤 종족의 대표였다.
“동의한다. 저항할 힘이 있는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지. 적을 차근차근 말려 죽이는 것은 사냥의 기본이다.”
전설적인 트롤 사냥꾼의 제자 중 하나라고 했던가 놈은 사냥의 기본 원칙에 충실했다.
일단 같은 팀으로 엮인 이상, 로칸을 몰아붙일 생각이 없는 듯 함께 붉은십자군부터 정리하는 것에 동의한 것이다.
“저도 좋아요.”
“마스터급이라니, 제법 신명나게 싸울 수 있겠군.”
트롤을 선두로 하프 엘프와 오크, 드워드 등이 동의했다. 그러자 나머지 대표들도 마지못해 찬성했고, 언데드 대표인 아크 리치는 꿍한 채 계속 입을 열지 않았지만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방침은 정해졌다.
“그럼 붉은십자군부터 우선 정리하기로 하죠. 일단 고대 황제와 하이 마스터들을 막을 분과 붉은십자군을 처리할 분을 나누겠습니다.”
“제가 놈들을 붙잡겠어요.”
“다수의 적을 정리하는 것은 내가 가장 빠를 것 같군. 내가 붉은십자군을 맡겠다.”
일단 방침이 정해지니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하프엘프와 노움, 오크, 고블린 족이 고대 황제와 하이 마스터들을 묶어 두기로 했고 나머지 넷이 붉은십자군을 빠르게 정리하기로 했다.
사실 오크보다는 사령술을 다룰 수 있는 언데드 아크 리치 쪽이 더 시간을 끌고 발목을 잡는 데 유리했지만 하프엘프들과는 절대 같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붉은십자군 처치 쪽으로 붙은 것이다.
그렇게 붉은십자군을 정리하고 난 이후는 간단하다. 마스터 스킬의 쿨 타임이 돌아올 때까지 같이 모여 기다렸다가 정면으로 한판 붙는 것이다.
8 대 11로 이쪽의 숫자가 부족하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 있었다. 고대의 잔재인 그들에 비해 사고가 유연하기도 했고, 각 종족의 최강급에 속하는 이들이니 자신감이 넘치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능력 중에는 동시에 둘 정도는 상대하거나 하나를 마크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것들도 있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다.
‘안일하군.’
낙관하지 않는 것은 오직 로칸뿐이었다.
육체의 균열로 격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크로노는 한 번 그랜드 마스터에, 절대의 경지에 올라 보았던 인물이다. 아무리 타락의 힘이 침습하여 정신을 잃었어도 고작 숫자도 적은 하이 마스터들에게 밀릴까.
여차하면 전멸하는 것은 이쪽이 될 확률이 높았다.
‘나쁘지 않지.’
그리고 그런 일이 발생하면 이득을 보는 것은 무조건 인간이었다. 그들과 달리 로칸 자신은 무한히 살아날 수 있으니까.
무기만 드롭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죽어 줄 의향까지도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시기와 장소를 정하도록 하죠.”
습격의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일 또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미 각 종족의 소식망을 통해 고대 황제의 위치는 실시간으로 파악이 되고 있었기에 적당한 매복 장소와 습격 방식만 정하면 그만이었다.
서로에게 가진 것을 모두 내어 보이는 것은 쉽지 않으니 이 또한 조율이 필요하겠지만 각자 한 가지씩 재주를 선보이기만 해도 붉은십자군을 해치우는 것까지는 충분해 보였다.
* * *
“오는군.”
고대 황제 크로노와 하이 마스터인 붉은 근위병, 그리고 2백 기가 조금 안 되는 마스터 레벨의 붉은십자군을 맞이하는 것은 단 여덟 명의 하이 마스터뿐이었다.
마스터나 익스퍼트급을 더 지원받을 수도 있지만 그래 봤자 희생만 커질 뿐이라는 것에 의견을 모은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로칸의 의견을 받아들여 준비한 것은 있었다.
“가자! 죽어도 버텨!”
바로 유저들이다. 그들을 이용해 1차적으로 시선을 끌자는 의견이 받아들여지며 지금 각 종족의 유저들에게는 한 가지 퀘스트가 내려진 상태였다.
[결사항전][퀘스트]
하모크 평원에서의 결사항전을 준비하라.
-성공 조건 : 30분간 구역 사수
-성공 보상 : 레어 아이템 1종(랜덤 지급), 초대량의 경험치
퀘스트 내용은 간단하다. 이미 전체 공지를 통해 모든 지역이 일시적인 중립 지대로 바뀐 것은 알려졌고, 종족에 관계없이 힘을 합쳐 특정 지역을 30분만 지켜 내면 레어 아이템을 하나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붉은십자군 현상금 퀘스트처럼 선택해서 가질 수는 없지만 30분 만에 레어 아이템 하나라니, 무조건 이득이 아닌가
적대 진영에게 뒤 치기를 당할 걱정도 없으니 구역을 가득 메울 만큼 엄청난 인원이 모여들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일격에 갈려 나갈 어중이떠중이이긴 하지만 말이다.
“10분. 개입하는 건 앞으로 10분 후입니다.”
“저런 버러지들이 10분이나 버틸 수 있을까 마스터 레벨 하나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버틸 겁니다.”
그들을 바라보던 로칸이 10분을 예상했다. 유저들이 10분은 버텨 줄 것이니, 그때까지 하이 마스터와 고대 황제의 스킬을 빼놓고 싸우자는 것이다.
사실 작정하며 밀어붙인다면 10분은커녕 2~3분이면 모조리 쓸려 나갈 전력에 불과했지만 로칸은 유저들의, 특히 한국유저들의 집요함을 믿었다.
이미 그 집요함으로 몇십 기나 되는 붉은십자군을 해치운 전적이 있지 않은가 무한 부활을 해서라도 반드시 구역을 사수할 것이라고 믿었다.
더욱이 보상으로 나타난 초대량의 경험치라면 한두 번쯤 죽어도 어느 정도 커버가 될 테니 말이다.
“흥, 같은 방문자라고 편을 드는군. 작전을 망치면 네 탓이니 알아서 해라.”
다른 하이 마스터들은 못내 못미더운 표정이었지만 설사 그들이 일거에 쓸려 버리더라도 스킬 몇 개만 빼 준다면 이득이라는 생각에 잠자코 있었다.
“붙는다.”
그리고 잠시 후, 격돌이 시작되었다.
“딜러들 어그로 끌지 마! 어그로 먹으면 싸우지 말고 그냥 돌아!”
“어차피 버티는 게 이기는 거다! 모두 방어와 버프에만 집중해!”
“밀어! 밀어 내!”
퀘스트 성공 조건 때문인지 전투는 꽤나 요란했다.
시선을 뺏고, 행동을 제약시키고, 시간을 끌 수 있는 스킬들이 난무하다 보니 붉은십자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생각처럼 쉽게 유저들을 밀어 내지 못했다.
“붉은 기사의 검.”
그러나 그것이 막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마스터급도 되지 못한 이들의 공격 따위는 모기를 쫓듯 휘휘 팔을 젓는 것으로 충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마스터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조합 스킬만으로도 길을 뚫고 유저들을 참살할 수 있었다.
“뭉치지 마! 흩어져!”
“파고들어서 교란해! 소모품을 아끼지 마!”
그러나 유저들의 대응도 유연했다. 붉은십자군이 힘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하자 산개하거나 오히려 놈들의 진영 안쪽으로 파고들어 교란하기 시작한 것이다.
“으랏차차차!”
“호잇!”
게다가 그중에는 밋티와 하멜, 폴텐도 있었다. 로칸을 도우면서 죽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지 셋이 함께 붙어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극회피, 극생존 세팅을 맞추면서 공격력이 꽤나 떨어진 그들이지만 여전히 일반 스킬 중 강력한 스킬들이 제법 되었고, 무엇보다 폴텐의 특수 효과가 있었다.
백 단위로 몸을 일으키는 언데드들이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찔러 대자 시선을 끄는 것을 넘어 붉은십자군을 해치우는 것에 성공했다.
“와아아아!”
“할 수 있다! 조금만 더 버텨!”
그리고 그것은 유저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어떻게든 버티기만 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역으로 쓰러뜨리기까지 하다니.
하멜, 밋티, 폴텐의 활약뿐 아니라 일부 각 종족 상위 길드에서도 힘을 내어 한둘의 붉은십자군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하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처음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아무 것도 해 보지 못하고 죽었던 이들이 적극적으로 부활하며 달려들었고,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죽여라. 모조리 쓸어버려라……!”
하지만 그것도 크로노와 붉은 근위병이 개입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밟으면 꿈틀거리는 것밖에 하지 못한 무지렁이들따위가 저항하자 크로노가 분노하며 직접 몸을 움직인 것이다.
“잠시만. 잠시만 더.”
그때부터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지만 로칸은 당장이라도 튀어나가려는 하이 마스터들을 달래어 제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10분이 흐르고 하이 마스터들의 마스터 스킬이 몇 개나 빠졌을 때, 가장 먼저 몸을 일으켰다.
“갑시다.”
뀻!
카이를 타고 날아오르며 고대 황제와 그의 군세에게 반격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