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해적왕 (5)
“후우! 뒈질 뻔했네.”
하이 마스터의 마스터 스킬은 실로 강력했다. 공간 이동을 마치고도 한동안 저릿한 기운이 계속 될 만큼.
덕분에 로칸은 버서크를 풀지 못하고 한참이나 기운을 풀어 내는 데 주력했다.
“캔슬, 생명 충전!”
몸의 감각이 돌아오자 그제야 버서크를 해제했다.
“가급적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웬만하면 버서크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이 마스터의 마스터 스킬을 막아 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덕분에 후유증 시간 동안 시간을 보내야 하게 생겼다.
“찍어.”
로칸은 조수 소환의 지속 시간이 지나기 전, 지도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붉은십자군을 날려 보낸 위치를 표시하도록 만들었다.
“소환 해제.”
로칸이 한 일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게임에서도 흔히 매스 피라고 불리는 것이니까.
다수를 동시에 텔레포트시킬 수 있는 능력 또는 마법을 이용해 납치하듯 대상을 데려간 뒤 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조수 소환의 제한 시간이 있기에 로칸은 일단 놈들을 흩어 놓는 것부터 시작했다. 점퍼의 능력을 이용해 한 번에 4~5기의 붉은십자군을 데리고 날아가 버리도록 만든 것이다.
마나를 듬뿍 퍼다 쓴 덕분에 쉽게 재합류를 하지도 못할 터였다.
다만 한 가지, 버서크를 사용하는 바람에 로칸도 바로 사냥이 불가능했다.
“적어도 유저들은 빼먹지 못하겠지.”
그래도 큰 걱정은 없다. 4기뿐이라 해도 몇 개나 되는 길드가 죽기 살기로 덤비면 또 모를까 유저들이 사냥하기에는 한없이 강한 상대이니까.
그렇기에 느긋하게 버서크 후유증 시간을 보냈다.
검은용군단의 시야에 닿지 않도록 카이와 함께 고지대로 이동해 시간을 보낸 뒤,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놈들에게로 날아갔다.
‘그새 승냥이 떼들이 몰려왔군.’
그곳에는 이미 선객들이 있었다.
감히 덤비지는 못하고 한 발 걸칠 수 있을까 간을 보는 탐욕스러운 고블린 무리들.
공격을 준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로칸은 척 보면 알았다. 아마 누군가, 다른 어떤 길드가 전투에 돌입하는 순간 눈치만 보다가 막타만 치려고 하겠지.
언제든 뒤통수칠 수 있는 상대가 주변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들을 완전 배제하기도 어려웠다. 유저이니까.
아마 룬북을 저장해 놓고 대기하는 중일 테니 당장 죽인다 해도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 죽여야지, 뭐.’
하지만 아예 손을 놓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가만 두면 잔대가리를 굴리는 게 이 바닥이니까.
“폭격.”
때문에 로칸은 시작부터 화려하게 등장했다. 폭격의 힘을 머금은 열 자루의 손도끼가 지상에 떨어져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카이!”
뀻!
폭연으로 뒤덮인 대지를 카이가 쓸고 내려갔다. 연기를 날려 버림과 동시에 로칸을 안전하게 땅 위에 내려 줬다.
끼윳!
인사하듯 소리치며 다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아직 레벨도 낮고, 전투 관련 스킬도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에 하늘을 배회하여 로칸을 기다리는 것이다.
“휠 윈드!”
그리고 대지에 굳건히 다리를 박은 로칸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휩쓸어 부수고 갈아 버렸다.
“끄엑!”
“저게 뭐야 ”
로칸은 영리했다. 자칫 막혀서 무산될 수 있는 붉은십자군을 노리는 대신, 위협이 될 만큼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대기하던, 숨어 있던 고블린 유저들이 모조리 갈아 버렸다.
“로, 로칸 ”
“저 새끼가 왜 여기 있어!”
“젠장, 벌써 소문이 퍼진 건가 ”
그들이 군침이라도 흘릴 수 있게 붉은십자군을 소수 단위로 쪼개 놓은 것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인지 욕지거리를 내뱉어댔지만 로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놈들이니까.
후우우웅!
여포가 방천화극을 돌리는 게 이런 기세일까. 압박감에 몸이 굳은 놈들은 무엇 하나 해 보지도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까앙!
그리고 그 순간, 붉은십자군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이미 로칸의 얼굴이야 동료들을 낚아채 가는 모습으로 몇 번이나 본 상태였으니까. 크로노처럼 영혼과 감정을 지니지는 못한 금속 인형들이지만 크로노의 영향을 받아 강대한 적의는 갖고 있는 상태였다.
“성격들도 급하기는!”
가만히 기다리면 어련히 상대를 해 줄까!
로칸은 미처 회수하지 못한 도끼 대신 사슬을 두 손으로 넓게 잡으며 놈의 공격을 막아 냈다. 아예 휙 하고 놈의 무기를 사슬로 감싸 버린 다음 한 가지 스킬을 발동시켰다.
“회피!”
오직 회피를 위해 만들어진 생성 스킬이 발동하며 로칸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쇠사슬이 빠르게 줄어들며 놈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았다.
“월척이군!”
마치 어망에 걸린 물고기와 같다고나 할까. 사슬에 감겨 딸려 온 무기는 인벤토리에 바로 넣을 수 없었지만 로칸에게는 다른 보관법이 있었다.
“카이!”
휘익.
잡아챈 검을 하늘 높이, 힘껏 던지자 곧 하늘에서도 반응이 왔다. 카이가 그것을 입에 문 것이다.
이렇게 되자 놈은 무기를 되찾을 길이 요원해졌다.
멀리 던졌으면 가져오거나 어딘가에 박아 넣었으면 깨고 부숴서라도 되찾겠지만 새가 물어 가 버린 다음에야…….
졸지에 적수공권이 된 녀석을 대신해 옆에 있던 다른 붉은십자군이 무기를 내질렀다.
촤르륵!
다시 한 번 길어진 사슬이 대신 받아 냈지만 힘을 이기지 못하고 출렁였다. 이 또한 사슬 조종 능력이 가진 약점 중 하나였다.
사슬만으로 허공에 형태를 갖출 경우, 적의 공격을 막아 내도 밀려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튕겨져 날아온 사슬뭉치에 자신이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로칸은 놈의 공격 속도를 줄이는 정도로만 사슬을 활용했다.
가볍게 몸을 틀어 속도가 줄어든 채 밀려오는 창대를 붙잡아 불끈 힘을 쥐었다.
“흐앗!”
그대로 붉은십자군의 몸까지 들어 올려 패대기를 쳤다.
엄청난 괴력에 속수무책으로 딸려오는 몸을 무기 삼아 동시에 짓쳐 드는 나머지 붉은십자군을 후려쳤다.
서로가 서로를 깔아뭉개며 뭉쳐 있는 놈들을 향해 돌진하며 소리쳤다.
“폭주!”
광풍 같은 난무가 사방으로 몰아쳤다. 그리고 버서크!
광기의 신이 강림한 듯 피부가 저릿해지는 기운이 로칸에게서 뿜어지기 시작했다.
촤르르륵.
그리고 그의 왼손에 감기는 사슬.
“광살!”
진정한 전투 모드에 들어간 로칸이 전력을 다해 놈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 * *
[아무리 적대 관계라지만 뒤치기로 붉은십자군을 스틸한 로칸을 규탄한다.][작성자 : 이형근]
[조금 전, 붉은십자군을 어렵사리 본진에서 떼어 내고, 혈투 끝에 다 잡아 가고 있는 저희 길드원들을 뒤치기로 전멸시키고 붉은십자군의 막타를 친 인간 유저 로칸을 규탄합니다. 아무리 적대 진영이라지만 지들이 싼 똥 치워 주는 건데 이건 정말 도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로칸이 24시간 내에 사과 글을 올리지 않는다면 저희 뒤콘 길드는 집단행동에 들어갈 것입니다.]
└와드 : 헐. 이거 진짜면 로칸 진짜 개새끼네.
└밀러 : 와, 아무리 적대 진영이라도 이건 좀 아니다. 이건 로칸이 잘못했네. 근데 집단행동이면 어쩌겠다는 거지 한판 붙겠다는 건가
└켄네이하 : 이건 또 뭔 듣보잡 길드냐 니들이 로칸을 잡는다고 ㅋㅋㅋㅋ
└카오페 : 완전히 듣보는 아님. 뒤콘이면 그래도 검은용군단에서 이름은 꽤 알려진 상위 길드임. 하지만 로칸에겐 탈탈 털리겠지.
└킴쿤 : 이건 신종 자살 방법인가요
└자단 : 지금 로칸 레벨이 몇이야 아는 사람 있어 어차피 마스터 레벨은 아닐 거 아니야 그럼 해볼 만하지.
└젠베 : 마스터는 아닌데도 이미 마스터 때려잡은 거 모르냐 고블린 따위는 그냥 두들겨 맞고 아이템이나 뱉겠지.
“이건 또 뭐야 ”
따로 떨어진 붉은십자군 무리 중 첫 번째를 사냥한 이후, 버서크의 후유증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로칸은 홈페이지에서 이상한 글을 발견했다.
제목부터 그의 아이디를 적어 놓았을 뿐 아니라 단시간 내에 조회 수 상위로 베스트 글이 되었으니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내용은 황당했다. 뒤치기 스틸
뭐, 뒤치기까지는 어떻게든 인정할 수도 있었다. 숨어 있는 놈들과 도망치는 놈들의 뒤통수를 쪼개 놓은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자기들이 잡고 있었다고 거의 다 잡았다고
“개소리하고 있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전투는커녕 쫄아서 모습도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것들이 규탄이라느니, 집단행동이라느니 하는 개소리를 적어 놓았으니 화가 나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당장 휠 윈드 한 방에 순삭을 당한 것들이 아닌가 또 붙어 봐야 몇 초 컷이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텐데 이렇게 자신하는 이유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이형근 : 글을 쓴 뒤콘 길드장 이형근입니다. 로칸이 강하다는 것은 알지만 저희에게도 확실히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확실하게 잡을 방법이 있다 ”
그러다 작성자가 다시 단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이 얼마나 오만한 말인가. 혹시 독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아쉽게도 로칸은 백독불침이었다. 그들의 레벨을 생각할 때, 로칸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수준의 독은 구할 수도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을까.
어떤 함정을 파서 자신을 즐겁게 해 줄 생각일까.
로칸은 화가 나는 대신 큰 흥미를 느꼈다. 뒤콘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것도 같지만 제대로 기억은 안 나는 걸 보면 그다지 실력 있는 자들은 아닌 것 같은데 이처럼 자신하는 이유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가상 키보드를 소환했다.
구구절절한 해명 대신, 하고 싶은 말만 간단히 전했다.
└로칸 : 자신 있으면 덤비면 그만이지 뭔 구구절절 개소리를 정성스럽게 쓰고 있어 덤벼!
그들의 구구절절한 거짓 사연 팔이에는 대응하지 않는 호쾌한 해답이었다.
어차피 거짓 사연으로 여론을 선동하는 짓이야 흔히 있는 일이고, 설령 그 일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적대 진영이니 사과를 할 만한 사연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한 오해도 일어났다. 역시 로칸이라는 반응도 있는 반면, 뒤콘의 거짓말을 진실처럼 여기는 이들도 생겨난 것이다.
그래 봤자 로칸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는 작은 여론일 뿐이지만, 그것으로 뒤콘과 이형근은 기고만장해졌다.
└이형근 : 마지막 기회를 드렸음에도 끝내 거부하시는군요. 이제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감수하셔야 할 겁니다.
로칸은 별다른 감정 없이 홈페이지를 껐다. 놈들이 어떤 수를 쓸지는 알 수 없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덤비면 밟아 주면 그만.’
설사 버서크 후유증 상태에서 덤빈다 해도 적어도 죽지 않고 도망칠 자신은 있는 로칸이었다. 여차하면 조수를 소환해 도망쳐도 되고.
자존심 다른 이들의 조롱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 말조차 나오지 않게 그 몇 배쯤 철저하게 박살을 내 주면 되니까.
로칸이 스산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음으로 가까운 붉은십자군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직업 길드를 찾아 마스터 레벨 퀘스트를 수행하십시오.]
그리고 몇 시간 후, 로칸이 299레벨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