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폭주 (3)
“어우, 죽을 뻔했네.”
광역 도발이 있는 기계공학 아이템을 헨젤과 그레텔처럼 흘리고 다니며 크로노와 붉은십자군을 유도한 로칸이 향한 방향은 바로 인간 진영의 도시였다.
도시의 성문 앞까지 데려갈 것도 없이 어느 정도 방향이 잡히자마자 전력으로 질주해 도망쳤다. 그것만으로도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
그다음 일어난 일은 말할 것도 없다.
파괴, 학살.
크로노와 붉은십자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만 하이에나들만 들끓을 뿐이다.
“아싸, 득템!”
“레어, 레어다! 오졌다리!”
아예 사냥을 포기한 대신, 그들이 거점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 때마다 한 박자 늦게 도착하며 썩은 고기 챙기듯 드롭템들을 챙기는 수거꾼들이 생겨난 것이다.
어떻게든 버텨 보겠다고, 공훈도를 올려 보겠다고 덤비던 이들은 대부분 실력에 자신이 있는 고레벨 유저들이었으니 벌이가 꽤 짭짤할 터였다.
그러나 로칸은 그것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그 또한 플레이의 일부일 뿐이니까. 오히려 영리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단, 자신이 하기에는 벌이가 그리 크지 않아서 비용 대비 효율이 안 좋을 뿐.
만약 로칸 자신이 저레벨이었다면 비슷한 짓을 했을 터였다.
‘슬슬 소식이 올 때가 됐는데…….’
그 뒤로도 캐시맨은 퀘스트라도 받았던 것인지 몇 번이나 더 나타났지만 로칸의 방해로 물을 먹었다.
그렇게 다음 도시도, 그다음 도시도 모두 인간 거점이 박살 나자 카이스만과 의회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고대 황제를, 붉은십자군을 적으로 규정할지에 대한 결단을.
그리고 마침내, 인간 종족의 각 도시 게시판에 한 가지 공지가 올라왔다.
[타락한 고대 황제 저지][퀘스트][반복]
타락한 고대 황제와 그의 군대를 저지하라. 누구든 그들에게 유효한 피해를 입히는 자에게는 큰 보상이 있을 것이다.
-고대 황제 처치 시 10,000골드 또는 황궁무고 출입권
-붉은 근위병 처치 시 1,000골드 또는 유니크 아이템 1점(선택)
-붉은십자군 처치 시 200골드 또는 레어 아이템 1점(선택)
바로 현상금 퀘스트. 고대 황제와 붉은십자군의 목에 현상금이 걸린 것이다. 황금사자 진영 전체의 이름으로.
당연히 인간족의 이름도 들어가 있었다. 카이스만과 의회가 금제를 통한 통제 실패를 인정하고 그를 처치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아직 직접 공격을 받지 않아 연합까지는 가지 않은 검은용군단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
그 공지를 확인한 많은 이들이 슬슬 발동을 걸고 싸움을 벌일 준비를 했다.
이미 붉은십자군 하나하나가 마스터급의 강자임이 확실히 된다는 소문은 돌았지만 욕심이 앞선 것이다.
마리당 2백 골드나 하는 돈이 탐나서 물론 그런 이들도 있겠지만 진짜 상위권들은 다른 보상에 눈독을 들였다.
선택 가능한 레어 아이템 보상.
만약 한 열 마리쯤 잡을 수 있다면 원하는 옵션을 가진 레어 풀 세트를 착용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아이템의 등급이 전부가 아니라 적절한 옵션 세팅이 더 강력한 힘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전투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단 한 명, 로칸을 제외하고.
‘정면으로 붙으면 마스터가 와도 개죽음이지.’
붉은십자군은 1천의 마스터 레벨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그들은 게릴라든 뭐든 손해만 볼 게 분명했다. 마스터 레벨을 찍고 자살 특공대처럼 놈들을 데려가는 선택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크로노의 명령만을 듣는 붉은십자군은 절대 따로 움직이지 않는데.
대부분의 경우, 이런 상황에서 선택하는 방법은 졸의 시선을 돌린 뒤 보스를 잡는 일명 ‘알 빼먹기’다.
그러나 상대는 크로노다. 혼자서 저 전율스러운 붉은십자군조차도 쓸어버릴 수 있는 절대 강자. 중앙 대륙에 모인 유저 전원이 달려들어도 그를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자, 카이.”
끼윳!
로칸은 다시 한 번 카이에 올라타 하늘을 유영하며 때를 기다렸다.
* * *
“슬슬 시작하겠군.”
정비를 마치고, 도시를 떠난 로칸은 즉시 붉은십자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가 노리는 것은 난전 상황. 사실 난전씩이나 된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일방적인 전투일 뿐이지만 어쨌든 자신을 대신해 시선을 끌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성격 급한 유저와 길드는 얼마든지 있었다.
“한 놈만 일점사 해! 우리는 한 놈만 팬다!”
들뜬 목소리로 힘을 모으는 파티는 아예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일점사. 그리하여 모두가 죽더라도 딱 1기의 붉은십자군을 해치우는 것이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결국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계산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대기, 대기, 대기……. 지금!”
계산했던 위치에 붉은십자군의 병사 하나가 올라서는 순간, 그들이 집단 은신을 풀고 일시에 나타나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을 한 명에게 집중적으로 쏟아부었다.
쿠과과과과과.
“헉!”
“미친!”
“튀어!”
그러나 상대는 마스터였다. 그들이 지금까지 어떻게든 비벼 오던 그들보다 조금 더 레벨이 높은 몬스터 정도가 아니었다.
격이 다른 존재.
그들 중에는 로칸이 마스터 레벨을 잡았다는 소문에 그 정도는 나도 가능하다고 자부하던 자들도 있었지만, 부딪치는 순간, 1천의 붉은십자군 중 단 하나가 힘을 발휘한 순간 그 생각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이없는 것이었는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스킬 한 방에, 모든 것이 깨어져 버렸다.
그들이 쏘아 낸 스킬도, 자신감도, 생존에 대한 의지조차도.
“제압.”
촤라라라라락.
“……!”
그들이 자신들이 노렸던 붉은십자군에게 무참히 도륙을 당하는 순간, 로칸이 카이를 타고 강하했다.
파멸을 봉인한 쇠사슬에 내장된 특수 스킬을 발동시켰다.
1기의 붉은십자군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오만하게 대기하던 붉은십자군 무리 중 하나를 낚아채 빠르게 고도를 높였다.
“월척이구나!”
고대 황제의 부활을 저지하려던 놈들을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레전드 등급의 아이템에 제압당한 붉은십자군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무력화였다.
촤륵!
쇠사슬을 움켜쥔 왼손을 털 듯 휘두르자 꽁꽁 묶인 붉은십자군이 카이의 위로 올라왔다.
뀻!
갑자기 무거워지자 카이가 불만을 토했지만 아주 잠깐 몸이 출렁거릴 뿐, 곧 균형을 회복했다.
아래에서 쏘아지는 스킬들을 피해 곡예 하듯 방향을 꺾으며 멀어지기 시작했다.
“광살.”
그리고 안전거리까지 멀어졌을 때, 로칸의 필살기가 터졌다.
쇠사슬로 감싸지지 않은 머리통을 무참히 쪼개 버렸다.
“일단 하나.”
제아무리 마스터라지만 로칸의 무시무시한 파괴력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금속 인형이라 좀 더 단단한 느낌은 있었지만 때린 데 또 때리고, 치명타로 때리는데 어쩌겠나. 깨지고 박살 나는 수밖에.
다른 이들이라면 한참이 걸리겠지만 로칸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놈의 머리를 박살 내 버리고 경험치와 전리품을 취하며 현상금 퀘스트의 기본 완료 조건을 채웠다.
‘하나 처리했다고 쪼르르 달려가는 건 미련한 짓이지.’
하지만 바로 퀘스트 보상을 받고 갱신하러 가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보상이야 언제가도 받을 수 있는 것이기도 했고 딱히 당장 레어 등급 정도로는 업그레이드할 수 없는 스펙이기도 했지만, 이 현상금 퀘스트 자체에 숨겨진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붉은십자군 한 마리를 잡으면 2백 골드 또는 레어 아이템을 선택해서 받을 수 있지만, 서른 마리를 잡아서 한 번에 보상을 받으면 보너스가 존재했다. 30+1이라고나 할까.
골드로 받을 경우 추가 정산이 있고, 레어 아이템도 하나 더 얻을 수 있었다.
‘아니면 레어 서른 개를 포기하고 유니크 하나를 얻든가.’
마스터 레벨 달성자가 제법 많았던 전생에서는 그리 비밀도 아닌 이야기였지만 지금은 다를 터였다.
아까 본 것처럼 길드 단위가 달려들어도 붉은십자군 하나를 잡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킬 포인트를 올렸다면 당장 레어 아이템과 교환하고 장비를 업그레이드하고 싶을 테니까.
아니, 그 전에 혼자서 서른 마리 이상을 잡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잘만 해 먹으면 짭짤하겠는데…….’
당연히 로칸이 고를 것은 장비가 아니다. 액세서리다.
기본 방어력과 공격력이 없는 대신 옵션빨이 가장 큰 액세서리 종류야말로 ‘선택’이라는 특전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 아니겠나
씨익 미소를 지은 로칸은 카이에게 상으로 최상급 체력 포션을 하나 물려 주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제압의 쿨 타임인 30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25분이 지났을 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카이와 함께 다시 날아올랐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다시금 허공을 맴돌며 붉은십자군의 행보를 살피던 로칸은 몇 번이나 빈틈을 노려 붉은십자군을 낚아 올렸다.
제압보다 빠르게 쿨 타임이 돌아온 광살을 이용해 극딜을 퍼부어 박살을 내 버리니, 광렙이라 불리는 구간임에도 생각보다 빠르게 레벨 업이 가능했다. 마스터 레벨이 주는 경험치는 그만큼 어마어마하니까.
다만, 같은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니 붉은십자군에서도 로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크로노가 분통을 터트리며 로칸을 향해 힘을 쓴 탓에 몇 번은 아슬아슬하기도 했지만, 교감 덕분인지 간신히 피해 내며 도주할 수 있던 것이다.
물론 불나방처럼 덤벼들어 주는 유저들의 공도 컸다.
“은신.”
이쯤 되자 로칸도 작전을 달리했다. 하늘에서 날다가 강하하는 것은 같지만, 아예 하늘을 보며 경계하는 눈을 피하기 위해 은신을 사용한 것이다.
본래는 사용자만 감추어 주는 스킬이지만 교감 때문인지 카이까지 동화되었다.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가, 제압이 펼쳐지는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바이바이.”
“캬아아악! 죽여라!”
예상치 못한 은신 능력에 크로노가 분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화풀이는 다른 유저들에게 돌아갔지만 로칸은 미안한 마음 따위를 전혀 가지지 않았다. 그들 역시 공을 세워 볼 욕심에 이곳에 온 것이니까.
은신으로 또다시 한두 번 재미를 보자 크로노도 제법 이성적인 판단을 했다. 그를 보좌하는 하이 마스터 중 하나를 부려 은신 해제 주문을 광범위하게 펼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자 로칸은 또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제압! 휘익!”
카이에게 허공을 맴돌도록 지시해 둔 뒤, 크로노와 붉은십자군의 시선이 돌아가자 다른 유저들의 틈에 숨어 든 것이다. 그러고는 또 한 놈을 제압하고 휘파람을 불어, 큰맘 먹고 장만한 천골마를 소환해 도주했다.
이미 캐시맨의 사례를 통해 붉은십자군보다 천골마의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은 확인했으니까.
말 한 필에 1천 골드나 주는 것이 아깝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샀을 것이기도 하기에 어느 정도 쓰린 속을 달랠 수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격파!
유저들이 썰려 나가는 가운데, 로칸만이 유일하게 붉은십자군을 농락하고 있었다.
“이쪽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로칸은 크로노와 붉은십자군의 방향을 분쟁 지역 쪽으로 이끌었다. 결국 크로노를 잡기 위해서는 그들의 손이 필요한 것이다.
최강자들의 무력만으로 놓고 보았을 때, 황금사자 진영보다는 검은용군단 진영이 더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대신 황금사자 진영은 집단전에 좀 더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크로노처럼 미친 수준의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강한 다수보다는 압도적인 강자 몇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조차도 금제 당한 크로노를 상대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겨우 승리를 거두었으니까.
더구나 로칸 본인은 카이 덕분에 기동력이 크게 높아져 어느 진영에 있든 상관없었다.
‘피해는 너희가, 이득은 내가!’
다만 양측의 균형을 적절이 조율할 뿐이었다. 힘의 균형이 무너져 버리면 다른 진영의 대규모 침공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본의 아닌 균형의 수호자가 되어 창공을 바쁘게 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