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광풍의 흔적을 찾아서 (4)
* * *
-다시 돌아왔군.
육신을 되찾은 고대 황제 크로노가 감회에 젖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월에 깎여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바로 이곳이라는 것을.
그토록 바라 왔던 순간에 그토록 저주하던 장소에 찾아왔음을.
-일단 저 버러지 같은 이종족 놈들을 정리한 후 찾아가 주마.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크로노는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강력한 힘의 폭풍이 일어나 주변 지형을 바꾸어 버렸다. 비석 하나만을 남기고 모조리 날아가 버린 것이다.
우우우웅.
가볍게 내려앉아 비석에 손을 얹자 안배해 둔 게이트가 나타났다.
주변이 전혀 개발되지 않은 걸로 보아 아직까지 이것을 발견한 이가 거의 없는 모양. 그럼에도 비석이 제법 파헤쳐져 있는 것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자신의 목을 가져왔다는 것은 누군가 이곳에 들어왔다는 이야기이니까.
하지만 안으로 들어간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 붉은 구슬에 접속하지는 않았지만, 확장된 감각이 내부에 일어난 변고를 감지했다.
되살아난 뒤 큰 표정의 변화가 없던 크로노의 얼굴이 굳어지고 전신을 감싼 기운이 난폭하게 쏘아졌다.
-이노옴!
그를 반긴 것은 조각조각 부서져 널브러진 붉은십자군의 모습.
1천의 기사들 중 족히 수십은 파괴된 듯싶었다.
적다면 적은 숫자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마스터 레벨급의 전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붉은십자군은 자신과 함께 전장을 누비고, 훗날을 약속하며 스스로의 영혼을 금속 인형에 담은 충신들이 아니던가
크로노의 두 눈에 귀기가 서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뇌 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타락의 힘이 그에게로 흘러들어 갔다.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감히 이런 짓거리를 벌인 놈을 찾아 반드시 찢어 죽이고 말 것이다.
으르렁거리는 크로노에게로 옅은 녹빛의 기운이 흘렀다가 사라졌다.
* * *
“슬슬 소식이 올 때가 됐는데…….”
한바탕 날뛰고 난 뒤, 타이무라로 돌아와 버서크 후유증이 끝날 때까지 통합 경매장에 강화석을 올리고 있던 로칸이 먼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크로노의 속도라면 지금쯤 자신의 무덤에 도착했을 테고, 자신이 벌인 일을 확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놈의 성격으로 볼 때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겠지. 꼭 타락의 힘이 아니더라도 꼭지가 돌면 물불 가리지 않는 것이 놈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일단 거창하게 일을 벌이기는 했는데 수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이걸로 더 로드가 망하지는 않겠지만 한번 주춤하며 내려앉거나 미래가 크게 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처럼 유저들이 시간을 벌어 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정면으로 붙어 버리면 자칫 주요 NPC들이 깡그리 죽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월드 이벤트. 폭군의 부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월드 이벤트 공지가 떴다.
폭군의 부활.
맞는 말이다. 인간들의 입장에서야 고대 황제라지만 다른 종족들 입장에서는 폭군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던 월드 이벤트가 연달아 열린 셈이었지만 곧 알게 될 터였다. 타락 웨이브가 그러했듯 전혀 반길 만한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폭군 크로노와 붉은십자군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폭군 크로노는 고대에 중앙 대륙 전체를 지배하던 패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입니다.]
“291레벨이라……. 쉽지 않겠군.”
공지를 확인한 로칸은 즉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지금부터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여기서 한가롭게 돈이나 벌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로칸은 즉시 각 영지들의 대외 활동을 최대한으로 축소시키고, 활동 반경을 제한시켰다. 최대한 모든 행위를 영지 내로 제한시키고 크로노의 관심을 끌지 않도록 하였다.
눈에 띄면, 찍히면 죽는다.
그것을 알기에 로칸은 최대한 몸을 사리는 쪽을 택했다.
“9레벨이라…….”
300레벨만 찍었어도 그냥 들이받았을 터였다.
100레벨, 200레벨, 300레벨처럼 100레벨 단위의 기준점을 달성하고 나면 죽더라도 경험치만 떨굴 뿐 레벨 다운까지는 가지 않으니까. 그러면 충분히 붙어 볼 만했다.
장비 드롭의 위험은 있어도 재미있지 않은가
돈이야 차고 넘치니 어차피 일정 수준의 장비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고 그렇게 수십, 수백 번쯤 들이받다 보면 붉은십자군의 숫자도 급격히 줄어 있을 터였다.
강자들과의 피 터지는 전투라니, 그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로칸의 레벨은 300레벨에서 9레벨이나 모자란 291레벨. 그것도 미칠 듯이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는 광(狂)렙 구간이었으니 한 번의 죽음도 치명적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
그렇기에 고대 황제와 붉은십자군의 행보가 중요했다.
로칸의 의도와 달리 검은용군단이나 쳐죽이고 다니면 그는 별로 할 것이 없다. 그냥 사냥터에 틀어박혀 레벨이나 주야장천 올리는 수밖에.
그러나 만약 그의 의도대로 놈이 움직인다면 아마도 꽤나 바빠질 터였다.
상황에 따라 역으로 도망치기 위해 검은용군단이 진영에 쳐들어가야 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로칸은 주점과 홈페이지, 영지 내 정보원들을 통해 귀를 활짝 열고 고대 황제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보망에 고대 황제의 소식이 걸려들었다.
“된 건가 ”
[고대 황제, 노움족 영지 공격 중! 이거 실화냐 ][작성자 : 시라냐]
홈페이지가 한바탕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고대 황제 때문이었다.
[미친, 이거 실화냐 나 지금 노움 지역 루코코 마을인데 고대 황제 떴다. 타락한 몬스터 잡는 중이라 처음에는 다들 아군인 줄 알았는데, 시발. 타락한 몬스터고 노움이고 다 학살한다 저 새끼는 인간 아니야 황금사자 진영 동맹 깨짐 병력도 어마어마하게 끌고 왔던데 저거 무슨 수로 막냐. 죽었다가 부활하니까 그새 성벽 부수고 있네; 이거 히스토리라도 아는 사람 있으면 좀 알려 줘 봐! 죽을 때 죽더라도 억울하지나 않게. 와, 이 글 쓰는 순간에도 병사 하나가 경비병 여럿을 썰고 있다;; 병사가 최소 수백은 되는 것 같은데 하나하나가 경비병보다 세다고 밸붕 미쳤다. 시발x망껨!]
붉은십자군을 일으키자마자 노움 지역으로 이동한 고대 황제 크로노가 마주치는 몬스터뿐 아니라 노움들까지 모조리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생전의 크로노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종족을 눈 아래로 본 극렬한 인종차별주의자이니까.
당시에는 황금사자 진영이고 뭐고 없었다. 인간 대 모든 이종족의 대결 구도랄까. 그리고 최후의 승자는 인간이었다.
‘먹혔군.’
그러나 로칸은 노움 종족이 먼저 공격당한 이유가 비단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의도적으로 흘려 두었던 노움족 기계공학 장치. 그것을 크로노가 발견한 것이다.
그가 있던 고대에도 다른 종족이 노움족 기계공학을 익힌 케이스는 극히 드물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더 싫어하는 검은용군단 진영보다 노움족을 먼저 찾을 리 없으니까.
‘슬슬 알아차리겠지.’
이쯤 되면 당황하는 건 황제와 의회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원래 그런 것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황금사자 진영의 종족을 먼저 공격할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 로칸이 전해 주었던 꼭두각시의 비서. 그것을 이용한 어떤 금제를 크로노의 몸 안에 심어 놓은 것이다.
처음부터 금제를 발동시키지 않은 것은 가급적 크로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함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크로노와 붉은십자군의 위용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만 믿고 모든 종족을 적으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적어도 일단 검은용군단의 모든 종족들을 제압한 뒤가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전생에는 통했어.’
그리고 그 금제의 효과는 확실히 나타났다. 적어도 그가 알던 전생에서는.
현 황제인 카이스만은 크로노를 완벽히 통제하며 검은용군단과의 대전쟁을 시작했고, 1천의 마스터가 뿜어 대는 막강한 힘 덕분에 전황은 꽤 일방적으로 흘러갔었다.
‘약점이 있긴 했지만.’
그러나 그 노도와 같은 진격은 마냥 계속되지 못했다. 검은용군단 측에서도 적극적인 대응에 나선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저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퀘스트를 발동시켰고, 붉은십자군 1기를 파괴할 때마다 상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현상금을 걸었다.
마스터 레벨의 유저들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각 종족의 최강자들이 직접 나섰다.
고대 황제 크로노를 막기 위해서는 최소 다수의 하이 마스터나, 그와 같은 경지인 그랜드 마스터가 나서야 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고블린, 언데드, 오크, 트롤 종족의 최강자들은 한마음으로 힘을 합쳤고, 결과적으로 크로노를 해치울 수 있었다.
크로노와 붉은십자군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던 것이다.
‘회복 불가. 이걸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
바로 회복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붉은십자군은 금속 인형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영혼을 갖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도 자신의 몸을 수복하지는 못했다.
정확히는 가능하지만 그들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금속이 워낙 특수해 현재는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크로노도 마찬가지.
살살이 꽃으로 살을 채우고 피가 돌게 만들었지만 그 속에는 인간 종족의 보물과 같은 재료들이 마구 들어간 상태였다.
그의 피 한 방울이 곧 영약이자 독약과도 같으니 기본 재생 이외의 회복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그가 피를 흘릴 수 있게 만드는 것 자체가 요원한 일이지만.
“일단은 지켜보는 수밖에.”
거기까지 생각한 로칸은 일단 크로노와 붉은십자군을 직접 찾아가는 것을 보류했다. 최소 금제를 실행한 이후, 반응을 보고 움직이려는 것이다.
그가 심어 놓은 타락의 힘이 어떻게 작용할지도 지켜볼 필요가 있었고.
때문에 로칸은 방향을 틀어 크로노와 붉은십자군이 있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다.
마침 시간을 죽일 수 있는 딱 좋은 사냥터가 있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다시 사냥에 나섰다.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수정해야겠군.”
그러나 이전처럼 레벨 업에 집중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레벨도 중요하지만 카이를 일정 수준까지 성장 시켜 두는 것도 중요했다. 잘만 하면 애초의 계획보다 그 편이 더 수월한 사냥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곧 성장하겠지.’
짹
레벨이 오르며 덩치가 좀 더 커지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카이의 몸집은 아직 팔뚝만 한 정도였다.
빅버드라는 이름보다는 보라매 정도가 어울리지 않나 싶을 정도지만 조금 더 레벨을 올리면 달라질 터였다. ‘진화’라고 해도 어울릴 만큼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될 테니까.
200레벨에 도달하는 순간, 단숨에 탑승이 가능해질 만큼 크기도 커지고 힘과 체력도 좋아진다. 유저들이 클래스 익스퍼트에 오르며 크게 성장하듯이.
그렇기에 로칸은 이번엔 조금 다른, 특별한 사냥터를 골랐다.
“좋아, 해 보자, 카이.”
사냥감을 확인하자마자 카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사기를 북돋았다.
[종족 효과로 카이의 공격력이 30% 증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