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타락 결탁자 (2)
“……원하는 게 뭔가.”
아스타페 백작은 한참을 뜸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로칸이 사실을 알고도 바로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은 뭔가 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증언, 어떠십니까 ”
“……증언 ”
“예. 증인이 되어 주신다면 빠져나가실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그동안 모은 타락한 힘의 잔재들은 포기하셔야겠지만.”
“으흠…….”
자칫 선문답처럼 들릴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아스타페 백작은 그 의도를 정확히 읽었다. 저 장부에 적힌 다른 이들에 대한 증언을 해 주면 자신은 빼 주겠다는 것이다.
아마 증언을 해야 하니 완전히 지워 주지는 못할 테고, 로칸과 짜고 스파이 역할을 한 것으로 말을 맞춰 주겠지.
대단한 야욕이 있어서 타락한 힘에 손을 댄 것이 아닌 만큼 꽤나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어차피 그가 바라는 것은 안전과 호의호식이 아니던가
애초에 바란 것은 타락한 힘을 통한 생명 연장 정도인 데다 결국 그 뜻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상태였으니 아까울 것도 없었다.
“좋네. 그렇게 하지.”
그렇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대로 황제에게 알려지면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물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몰수당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이미 인간뿐 아니라 황금사자 진영의 모든 종족들이 타락한 힘을 이단이자 사도로 낙인찍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빠르게 줄을 갈아타서 자리를 바꿔서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었다.
“‘그것들’은 어디 있습니까 ”
“이쪽이네.”
협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로칸도, 아스타페 백작도 더 이상 빼거나 탐색하는 것 없이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아스타페 백작이 그들에게 받은 타락의 구슬을 회수한 뒤 다시 대화를 이어 가는 것이다.
물론 로칸이 타락의 구슬을 입수한 뒤 태도를 달리할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도 로칸을 잡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더구나 로칸은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방문자였다.
‘역시 비밀 공간이 있었나.’
끼긱. 드르르륵.
아스타페 백작이 접견실의 한편을 조작하자 어디론가 통하는 문이 나타났다.
뒤편에 공간이 없을 것 같이 생겼지만, 막상 이동해 보니 제법 넓은 공간이 나타난 것이다.
‘공간 확장 마법인가 ’
아무래도 마법적 처리에 의한 공간이거나, 영웅의 시험 때처럼 아예 다른 공간과 접붙여 놓은 듯싶었다.
“흠.”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자 나타난 것은 녹빛 안광을 빛내며 단단히 묶여 있는 트롤의 모습과 그 곁에서 연구를 진행 중인 마법사, 연금술사들이었다.
‘피를 연구하는 거군.’
아무래도 재생력이 뛰어난 트롤에게 타락한 힘을 덧씌운 뒤 재생력을 추출하는 모양이다. 그것을 세포에 잘만 연결시킨다면 못해도 장수, 어쩌면 불노장생의 비밀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불쌍할 정도로 처참하게 실험체로서 고통받는 트롤을 보고 있자니 측은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것은 게임이고, 놈은 몬스터일 뿐이다.
“성과는 ”
“죄송합니다.”
연구자들은 늘 혼자 나타나던 백작이 누군가와 함께 있자 짐짓 놀라는 모습을 보였지만 곧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효과 좋은 재생 포션이나 체력 포션, 강화 포션, 미용 포션까지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원하는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한 것이다.
“알겠다. 오늘은 모두 물러가 보거라.”
본래대로라면 시찰 후 다시 돌아가는 것은 아스타페 백작 쪽이겠지만 오늘은 연구자들을 물렸다. 이제 이 실험도 끝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은 따로 막아야겠지만 그보다는 연구결과와 타락의 구슬 회수가 먼저였다.
“구슬은 저쪽에. 그리고 이놈은……. 자네 마음대로 하게.”
곧 모든 연구자들이 사라지자 아스타페 백작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미련을 버려야 할 때이니까.
“일단 제가 수거하죠.”
그 상황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로칸은 양동이에 담긴 타락의 구슬들을 수거해 인벤토리에 담고, 끈질기게 버둥거리는 타락한 트롤의 앞에 섰다.
마지막 안식을 내려 주기 전, 지그시 아스타페 백작을 바라보았다.
‘꽤 신중한 놈이군.’
정확히는 그 너머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모르는 아스타페 백작은 처형자의 그것을 보듯 슥 눈을 돌려 로칸의 시선을 피했고, 로칸은 곧 마음을 굳힌 듯 도끼를 들어 올렸다.
푸확!
타락한 트롤의 목을 정확히 떨어뜨리며 경험치를 쌓았다.
“커헉……!”
“크허허헝!”
트롤의 목이 떨어짐과 동시에, 아스타페 백작에게서도 피가 솟구쳤다. 로칸이 수작을 부려서 아니다. 어둠속에 숨어있던 자객이 타이밍 좋게 그의 뒤를 노린 것이다.
그냥 죽이지는 않겠다는 듯, 독을 바른 단검을 비틀어 내장을 상하게 만든 녀석은 몸에 몇 개나 되는 구멍을 더 뚫은 뒤 몸을 빼내려 했지만 로칸의 울부짖음이 그 행동을 막았다.
“어딜!”
휘청하고 다리가 풀린 놈을 짓누른 로칸이 팔목을 밟아 단검을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어디서 온 놈이냐!”
“크크크, 우리를 배신하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았나 그분의 기운이 스민 이상 살아남진 못할 거……. 쿠억!”
퍼억!
붙잡힌 놈이 악에 바친 고함을 내질렀지만 로칸은 묵직한 한 방으로 놈을 침묵시켰다. 솥뚜껑만 한 주먹으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자 놈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쳇.”
그 모습에 로칸이 놈을 발로 차 멀리 날려 버리며 아스타페와 함께 멀어졌다. 놈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퍼엉!
바로 자폭. 타락한 힘을 역행시켜 스스로를 폭탄으로 만드는 그 기술로 놈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독부터!”
“쿨럭!”
놈이 사망했음을 확인한 로칸은 즉시 아스타페의 독부터 해소시켰다.
마침 상급 해독제를 가지고 있었기에 해독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생명력이 문제였다.
거기다 암살자가 사용한 스킬은 지속 대미지 효과가 있는 타락한 힘이었다.
때문에 아스타페 백작은 로칸이 포션을 건넸음에도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했고, 겨우 채워 올린 생명력도 다시 빠르게 줄어들었다. 애초에 생명력 자체도 높지 못했다.
“안 돼……. 이렇게 죽을 수는…….”
피를 너무 흘려서일까, 의식이 흐릿해져 왔다. 자신이 가진 것들, 그리고 가지지 못한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며 생에 대한 집착이 더욱 커졌다.
“살려 주게. 무슨 짓이든 할 테니 나를……!”
회광반조.
생에 대한 집착이 아스타페의 생명력을 마지막으로 불태웠다.
“이, 이건…….”
그때, 웬 종이 한 장이 아스타페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로칸이 내민 ‘계약서’였다.
그것도 딱 봐도 몹시 불평등한 조약들로 가득한 계약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는 대신, 연금처럼 일정 금액을 매월 후원해 주겠다는 불평등 계약서였다. 아니, 사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무시하기에는 상황이 안 좋았다. 조건이 너무 파격적이었다.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것이니까.
귀족의 작위가 유지되는 이상, 그간 쌓아 놓은 모든 것을 잃더라도 어느 정도의 부는 다시 쌓아 올릴 수 있겠지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죽어 가면서도 그 계약서에 사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이제 나를…….”
퍼억!
그렇게 사인을 마친 순간, 로칸이 그에게 확실한 죽음을 선사했다. 살려 주겠다는, 계약서의 내용과 달리 그를 죽음으로 인도한 것이다.
“됐군.”
숨이 멎었다. 모든 생체 활동이 정지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아스타페의 장기에 파고들던 타락한 힘도 흩어져 버렸다.
아무래도 이 힘은 살아 있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니까.
타락한 힘이 언데드에 작용할 수는 있어도 언데드를 만들어 내는 힘은 갖지 못한 것이다.
“피닉스의 꼬리, 사용.”
그의 시신이 완전히 식어 버린 뒤, 로칸이 다시 한 가지 아이템을 사용했다.
피닉스의 꼬리.
죽은 자를 되살리는 유니크 아이템!
그것은 유저에게도 효과를 발휘하지만 NPC에게도 사용이 가능한 것이다.
‘노환으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런 경우 절대적인 협상 카드가 되지.’
사실 로칸은 처음부터 암살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타락자들과 결탁한 이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변장한 감시자가 붙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그의 죽음을 예상하고도 방치했고, 다시 되살린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계약서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효력이 발동되었다.
“아니, 어떻게 ”
피닉스의 꼬리가 대단한 이유 중 하나는 부활한 대상을 다시 완전한 상태로 돌려놓는다는 것이다.
이미 헤집어진 내장은 제자리를 찾았고 몸속을 파고든 타락한 힘도 모두 사라진 상태. 오히려 몸 상태가 최상으로 돌려지며 전보다 더 건강해진 모습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
아스타페 백작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그의 눈앞에 들이닥친 건, 다름 아닌 그가 사인한 계약서였다.
“믿는 건 천천히 하시고, 이제 약속을 지키실 때로군요.”
“그, 그건…….”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던가 막상 살아나고 나니 생각이 바뀐 아스타페 백작이지만 이미 그의 생각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계약서는 강제력을 지닌 아이템이니까.
더구나 무르자고 우겨 보자니 상대가 로칸이었다.
“……알겠네.”
잠시 머뭇거리던 아스타페 백작은 곧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겠지만 그나마 로칸이 최소한의 생활비는 보장한 것이다.
‘이러면 복수 같은 건 생각하지 않겠지.’
영주성은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생활비도 매월 1백 골드씩 넉넉히 지급을 하니 그가 원하는 안빈낙도의 삶에는 오히려 제법 가까워질 터였다.
‘그 전에 죽을 수도 있겠지만.’
물론, 또 다른 암살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연금의 상속에 대한 조항은 없으니 죽으면 그대로 지원은 끝이다. 가족들은…… 글쎄,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한동안 바쁘겠군.’
그렇게 협상을 마친 로칸은 서둘러 그의 모든 것을 양도받는 서류 처리를 끝내고 의회와 황제, 그리고 조사단에 서신을 보냈다. 그의 증언을 통해 타락자들의 집단과 결탁자들에 대한 꼬리를 제대로 잡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부’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빼 두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의심 가는 바도 있었기에 모든 행정 처리가 끝난 뒤, 조사단에 아스타페의 신병을 인도하고 재판일을 기다렸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재판일은 사흘 뒤로 잡혔고, 그동안 로칸은 날로 집어먹은 아스타페 백작의 영지들을 수습했다.
“휘유, 알뜰하게도 모았군.”
영지 창을 통해 확인한 아스타페 백작의 재산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같은 백작이긴 해도 로칸이 땅 따먹기 하듯 집어먹은 기존 영지들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다.
본영지인 아스타페뿐 아니라 부속 영지들 역시 여러 개나 되는 데다 목도 좋아서 걷히는 세금도 어마어마했다.
이러니 다른 생각 안 하고 오래 살면서 놀고먹는 것을 소원으로 삼았던 것이겠지.
내정 역시 따로 건드리지 않아도 좋을 정도였음에도 워낙 발전된 도시들이라 파악하는 것만도 한참이 걸릴 지경이었다. 때문에 로칸이 신경을 쓴 것은 단 하나였다.
타락한 힘을 이용해 진행했던 연구 결과.
연구자들은 큰 성과가 없었다고 이야기하지만 로칸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재생 포션 체력 포션 광기 포션 그런 거야 어찌 되든 좋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단 하나. 바로 미용 포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