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타락 웨이브 (4)
검은용군단 트롤 종족의 도시 중 하나인 칼뤼킨트. 그곳을 덮친 타락한 몬스터들은 여느 때와 달리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트롤 사냥꾼들이 그들이 달려드는 먼 곳까지 위력적인 화살을 정확히 꽂아 넣으며 돌진을 저지했고, 근접했을 때는 성벽 뒤에서 거대한 돌덩이들이 날아들었다.
트롤 특유의 강력한 힘으로 장애물이 될 만한 것들을 집어던진 것이다. 맞아도 좋고, 이동을 저지해도 좋았다. 그저 시선을 끌고 성문을 부수는 것만 막을 수 있다면.
“제법 머리를 썼군.”
하지만 진짜는 따로 있었다. 여러 차례의 전투를 통해 유저들이 타락 웨이브의 약점을 찾아낸 것이다.
정확히는 약점이라기보다 빈틈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지만 어느 쪽이든 공략의 포인트가 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똑바로 봐! 눈 돌아간 놈들만 노려!”
“으앗, 마법사! 어딜 쏘는 거야!”
성벽 위는 정공법이었다. 원거리 공격수와 주문 사용자들이 빼곡히 올라서서 화력을 최대한 뽑아냈다.
하지만 성벽 아래가 달랐다. 기존에는 성문이 뚫릴 때까지 대기하던 근접 전투 계열들이 성문 안을 지키는 대신 성벽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노리는 것은 타락 웨이브의 양옆. 수십, 수백 번에 걸친 영상 리플레이를 통해 타락한 몬스터들이 후방의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은 이후 공격 방향이 한정된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공격을 받으면 반격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비선공 몬스터처럼 변하는 시점이 있으니 그 틈을 노려 일점사를 한다면 한 마리씩 착실하게 눕힐 수 있었다.
“어그로 안 튀게 조심해! 낙인찍는다!”
표적을 정하는 방법도 간단했다. 사냥꾼의 스킬 중 하나인 사냥꾼의 낙인을 발동시켜 표시를 남기면 타이밍을 맞춰 일제히 공격을 퍼붓는 것이다.
타이밍이 생명이었기에 각 조는 함께 합을 맞춰 본 적 있는 파티나 길드 단위로 쪼개졌고, 그 전략은 실제로 제법 효과를 보았다.
“어디서 잔꾀를!”
하지만 몰록이라고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너무 멀어 잘 보이지 않는 것인가 싶었는데 동시에 십여 마리씩 두세 번의 갉아 먹기가 진행되자 즉시 새로운 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그것도 게릴라전을 펼치기 위해 나온 놈들을 손쉽게 죽일 만큼의 개체만 움직였다. 나머지는 계속해서 도시를 향해 진격했고, 수십 마리의 타락한 몬스터만이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안 돼!”
“시간을 끌어라! 도발!”
“메즈기, 메즈기라도 걸어! 빠져나올 시간을 벌라고!”
성벽 위에서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용을 써 봤지만 소용없다. 거리가 멀기도 했고, 그들의 스킬에 의해 시선이 돌아간 만큼 또 다른 타락한 몬스터들이 그들을 향해 방향을 튼 것이다.
“AI를 너무 쉽게 보는군.”
결과는 요격 팀의 전멸. 그나마 그들이 해치운 정도의 숫자는 밤이 되면 금방 채워질 수준에 불과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것은 칭찬해 줄 만했으나 잔꾀를 부려도 약자는 약자였다.
어설픈 무력을 가지고서는 아무리 전략을 세워도 잔머리에 불과했다.
“차라리 완전히 게릴라전으로 전환한다면 또 모르겠군.”
어느새 성문이 뚫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검은용군단 진영을 보며 로칸이 아쉬운 탄식을 흘렸다.
차라리 아예 게릴라전으로 콘셉트를 잡고 화력과 기동력을 극대화시킨 전력으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한다면 느리고 오래 걸리긴 해도 착실히 수를 줄여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성벽을 끼고 싸우려는 편견 혹은 강박 같은 것 때문에 자멸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물론, 그들이 해법을 찾지 못할수록 로칸의 수입은 계속해서 늘어날 테지만 말이다.
[인간 자작 로칸 님이 칼뤼킨트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칼뤼킨트 영지의 보유금 1,521골드 5실버 2쿠퍼를 인출하셨습니다.]
“짜군.”
마을보다 사이즈나 인구 모두 월등한 도시급의 영지였지만 보유금은 오히려 마을급보다 적었다.
영주가 빼돌려서 물론 그럴 수도 있다. 로칸의 수작을 알아차려서 그건 확률이 낮다. 점령 상태에서 이런 짓이 가능하다는 것도 아직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나 진짜 이유는 생각보다 위협적인 타락한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 성벽을 강화하고 공성 무기를 들여놓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은 까닭이었다.
결국 그조차도 통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로칸이 접수하기 전에 이미 소진해 버린 탓에 건질 수 있는 금액은 크게 줄어들고 있었다.
[히얄라 영지의 보유금 935골드 13실버 67쿠퍼를 인출하셨습니다.]
[미치난 영지의 보유금 743골드 26실버 48쿠퍼를 인출하셨습니다.]
다음 도시도, 그다음 마을도.
투석기나 발리스타 같은 공성 무기는 타락한 몬스터에게도 충분히 통했기에 가진 역량을 최대한 동원해서 타락한 몬스터들을 막아 내려 들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나며 아까운 돈만 날리고 말았다.
‘아직은 나서지 않으려나 ’
벌써 무너진 거점만 아홉 개. 종족도 다양하게 숫자의 차이는 있지만 검은용군단 모든 종족의 거점을 휩쓸고 지나갔다.
비교적 저레벨 지역들이기도 하니 아직은 쉽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몇 개쯤 도시를 더 빼앗기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하지만 곧이야.’
그러면 트롤이든 언데드든, 고블린이나 오크든 중앙에서 힘을 끌어오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로칸이 계속해서 타락한 몬스터의 뒤를 쫓아 거점들을 빼앗아 먹을 테니까.
사실 저레벨 거점 몇 개 뺏긴 것쯤이야 별문제는 아니지만 문제는 이들 거점을 파괴하고 지나갈 때마다 타락 웨이브의 규모가 점점 불어날 것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연금술사인 몰록이 계속해서 글루터니들을 만들어 내기도 할 테지만 그를 돕기 위해 따라붙은 두 명의 존재 중 하나가 네크로맨서이기 때문이다.
그가 NPC와 유저들의 시체에서 언데드들을 일으킬 테고, 몰록이 그들에게 타락의 힘을 부여해 병력을 부풀릴 것이다.
지금은 머리 좋게 새로 생성해 낸 언데드들을 후방으로 보내 감추고 있지만, 놈들이 전면에 나서는 순간 검은용군단은 엄청난 물량전을 감당해 내야 할 터였다.
그때가 돼서는 하나의 종족이 가진 힘만으로 해결하기 어렵겠지.
‘말이 같은 진영이지 손해 볼 짓은 안 하는 놈들이니 말이야.’
각자의 종족이 보유한 마스터, 또는 하이 마스터들이 움직인다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만 굳이 총대를 메고 싶지 않아 한다고나 할까.
굳이 먼저 나서서 병력을 소진시키는 대신 눈치를 보거나 공동의 위험이라는 명목하에 종족별로 인원을 차출하게 되겠지.
그러나 그 또한 로칸이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정말로 월드 이벤트가 검은용군단만의 잔치로 끝이 나게 되니까.
‘적당한 때를 잘 맞춰야겠군.’
아무리 유저들이 끼어들 틈이 없을 만큼 고레벨 퀘스트로 진행된다지만 그저 영지 몇 개 뺏어 먹는 용으로만 써먹기는 조금 아쉽지 않은가 해 먹을 수 있는 것은 좀 더 해 먹는 것이 좋았다.
몰록의 등골을 뽑아 먹기 위해 로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단 수부터 좀 줄여 볼까 ”
다시 밤이 되어 타락한 몬스터들의 활동이 잦아들자 로칸은 다시 홈페이지에 접속해 정보 교란용으로 사용하는 아이디로 로그인을 했다.
가장 중요한 정보는 비틀어 놓지만 신뢰도 확보를 위해 꿀 팁이라 할 수 있는 간단한 정보들도 자주 흘리는 계정이기에 이미 ‘믿고 읽는다’는 사람들도 제법 되는 네임드 아이디이기도 했다.
로칸은 그 신뢰도를 이용해 타락 웨이브에 대한 공략 팁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믿거나 말거나이긴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 확인은 해 보겠지.”
퍼트린 내용은 간단하다. 밤에 타락한 몬스터가 활동하지 않는 이유. 그리고 그들을 공략하기 위한 방법.
간단히 말해 성 밖에서 요격하라는 것인데, 물론 이것을 안다 해도 쉽게 시도할 수는 없을 터였다. 몰록이 공간 이동 주문을 제약하는 능력을 가진 이상 게릴라전이라 해도 리스크가 크니까.
‘하지만 따르지 않을 수도 없겠지.’
아직은 사실 여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글을 올렸으니 호기심 넘치는 누군가는 확인을 해 볼 터였다.
아마도 도적 계열이 사실을 확인할 것이다.
그렇게 인증 글 하나만 올라오면 게임 끝이다.
“무시하기엔 너무 매력적인 먹잇감이니까.”
타락한 몬스터들은 강력하지만 그만큼 훌륭한 경험치와 아이템을 주는 녀석들이니까.
거점을 빼앗기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더 높이 오르고 싶은 상위 길드들이라면 포기할 수 없는 먹잇감이지만 정면으로 부딪치기엔 리스크가 너무 커서 아직 뒷짐을 지고 있던 놈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말해 무엇 할까. 무조건 참전이다.
“하지만 그냥 줄 수는 없지.”
그러나 남 좋은 일을 그냥 할 리 없는 로칸이었다. 알짜배기 정보를 흘리는 한편, 따로 한 가지 준비를 했다.
* * *
“정찰조 ”
일백의 무리가 어둠을 틈타 은밀하게 기동했다. 정확히는 트롤과 오크, 언데드와 고블린 50씩 두 개의 무리였다.
그중 트롤과 오크 무리의 우람한 덩치는 짙게 깔린 어둠으로도 가리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집단 은신을 특기로 하는 유저의 조합 스킬이 발휘되자 언데드나 고블린보다도 완벽하게 기척이 사라졌다.
“적 위치 확인했습니다. 현재 언데드 생산 중. 대량의 마나 소모로 적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자리를 잡았을 때, 먼저 이동한 정찰조로부터 소식이 전해졌다. 적의 동태를 살피고 최적의 타이밍을 잡은 것이다.
“다른 길드는 ”
“아직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은신해 있을 수도 있지만……. 오면서 깔아 둔 은신 탐지 장치에 안 걸리는 걸 보면 아직 안 온 모양입니다.”
“좋아. 오늘은 우리 길드가 제대로 꿀 빨아 보자. 모두 대기! 정확히 1분 후에 시작한다. 다른 길드 놈들이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쳐야 하는 거 알지 타이밍 잘 맞춰!”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이 경계하는 것은 타락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검은용군단 진영의 다른 경쟁 길드들이었다.
이 방법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먼저 시작한 길드들은 상당한 재미를, 이득을 보았다.
때문에 그들도 더 이상 늦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장비가 귀하고 구간별 장비 성능 차이가 심한 더 로드에서 250레벨 이상의 아이템을 먼저 구하는 것도 모자라 고위 등급 아이템으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미묘하던 격차가 한순간에 달아날 수 있었다.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5, 4, 3, 2…… 1! 조져!”
모두가 들리도록 길드 메시지로 카운트다운을 하던 트롤 마법사의 외침에 모두의 은신이 일시에 풀렸다.
선공은 언데드, 고블린 부대.
이유는 당연히 그들이 주문 사용자와 원거리 공격수이기 때문이다.
“파괴 광선!”
“오염된 하이드로 펌프!”
“다크 선더!”
“로빈 훗 샷!”
“일점폭사!”
제각기 가진 조합 스킬이 일시에 발동됐다. 이미 조별로 파티를 따로 맺어 뒀기에 표적이 헷갈릴 일도 없었다.
“크워어억!”
하나하나가 필살기급의 스킬인 까닭에 타락한 몬스터들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개중에는 방어력이 높은 개체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공격을 무시할 정도의 생명력이나 방어력을 갖추지 못했으니까.
“2선 돌격! 한 번에 쓸어버리고 2타를 기다려!”
다음은 트롤와 오크들의 차례다.
레벨 차이는 한참이나 났지만 그들 역시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몬스터를 수도 없이 상대하며 성장해 온 정예 중의 정예.
매서운 기세로 놈들에게 돌진하는가 싶더니 그들 역시 필살기 급의 조합 스킬을 쏟아 냈다.
히트 앤드 런.
애초에 그들은 근접전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 최대한 많은 숫자를 줄이고 빠질 계획이었던 것이다.
“좋았어!”
공격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이번이라도 특별히 다른 패턴으로 대응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예상대로의 성과였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정확히는 그들이 아닌 다른 길드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젠장, 뺏겼잖아! 어쩔 수 없다. 우리도 공격!”
그들의 폭격 같은 공격과 거의 비슷한 순간에, 반대편에서도 소란이 일어났다. 또 다른 검은용군단 진영 길드들이 습격을 가한 것이다.
사실 별것 아닌 국지전이었지만 타락한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평소와 달리 눈에 띄게 둔해졌다.
“우리도 공격!”
바로 몰록의 지배를 받기 때문.
그의 통제에 따르면서 오히려 지시를 받지 않으면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단점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몰록은 애초에 전투 직종이 아니었다. 실험실에서 연구만 거듭하던 연금술사로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전투에 깔끔하게 대처하기 어려웠다.
“늦지 마라! 한 마리라도 더 처치해!”
검은용군단 유저들이 노린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다른 길드에서 호응해 주지 않으면 각개격파를 당하고 만다는 단점이 있지만 타락 웨이브라는 강대한 적 앞에서는, 타락한 몬스터라는 꿀단지 앞에서는 모두가 암묵적으로 협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쪽에서 호응해 주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선공을 가했을 때도 시선을 분산시켜 줄 지원이 없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순식간에 난전이 펼쳐졌고, 대기하고 있던 모든 유저들이 튀어나왔을 때 평소와 다른 변수가 나타났다.
저 먼 하늘에서부터 검은 그림자가 덮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