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분기점 (3)
소원. 무려 소원이었다. 노코로콘 영주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해 주겠다는 것이다.
노움의 말이라면 제법 신뢰할 수 있었기에 인간들의 약속과 달리 해결하고 나서 딴소리를 할 위험도 적었다.
물론 모두 해결한 뒤에 그를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로칸이 그를 먼저 깨운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해결된 뒤에 정신을 차리면 일의 심각성을 모르기 때문에 보상 또한 줄어들었을 게 분명했으니까.
덕분에 최고의 보상을 얻어 낸 로칸은 단숨에 영주성을 벗어났다.
‘여기였지 ’
이상 현상의 원인을 찾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마을 사람들의 정신을 일부 깨우고 조각조각의 정보를 모아 단서를 만들어 내야 했을 테니까.
그러나 로칸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굳이 공을 들여 조각난 정보를 모으고, 어렵게 이어 붙이지 않아도 원흉이 숨어 있는 장소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곳은 바로 영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철의 숲이었다. 쇠처럼 단단한 나무인 철목이 자라는 곳이라 해서 붙은 이름. 또한 이 철목은 노코로콘 영지의 특산물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전부가 당한 거지.’
기계공학을 이용해 온갖 장비를 만들어 내는 노움족은 굳이 드워프처럼 힘이 좋지 않아도 철목을 베어 낼 수단들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폭파’라거나.
때문에 장정들 이외에도 여성이나 아이들도 생산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한 번에 마을 전체가 당해 버린 이유였다.
언제부터 똬리를 튼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숲에서 거미줄을 치고 있는 상대에게 먹잇감들이 스스로 걸어 들어간 셈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쯤 철의 숲 중심부는…….”
[환영 미로진에 노출되셨습니다.]
[불굴의 의지의 효과로 환영 미로진에 저항합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로칸은 자신의 기억이 옳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환영 미로진이라는 빌어먹을 장치가 작동한 것이다.
전생에도 무협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진법이라는 것이 유저들을 중심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뱅뱅 돌게 만든 탓에 공략이 늦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법이든 주술이든 결국은 환영 효과를 주는 ‘부정적인 정신 계열 능력’으로 판정되어 무효화 된 것이다.
만약을 위해 준비한 환영 주문 대처 아이템들이 무색해지기는 했지만 되팔아도 되고 돈이야 여유 있었으니 상관없다.
“나왔군.”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삐거덕삐거덕.
로칸의 방문에 조금은 뻣뻣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키는 그것은 바로 목각 인형이었다.
[실험용 주술 인형][Lv 254]
실험용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완성도가 낮은 놈들이지만 방심하면 곤란하다. 기본적으로 놈들을 구성하는 재료가 철목인 까닭이다.
거기에 미약하지만 주술의 힘으로 강화되고 연결되어 공격력과 방어력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퍼억!
“귀찮게 굴지 말고 꺼져.”
그래 봤자 움직임이 어설퍼서는 로칸에게 장애물조차 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몇이나 되는 실험용 주술 인형을 단숨에 쪼개 버린 로칸은 거침없이 중심부로 밀고 들어갔다.
[공개 던전 강철의 숲에 진입하셨습니다.]
[최초 입장 보너스로 3일간 획득 경험치가 30% 증가합니다.]
[최초 입장 보너스로 3일간 드롭률이 30% 증가합니다.]
[타이틀 ‘선구자’의 효과로 최초 입장 보너스가 10% 강화됩니다.]
목표는 철의 숲 중심부에서 입장할 수 있는 공개 던전 강철의 숲이었다.
전생에 이곳은 채집용 던전이라 불릴 만큼 안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수준이 낮고 철목과 철목보다 더 단단하다는 강철목은 여간한 방법으론 베어 내기 힘들어 유저들에게도 그림의 떡 같은 존재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달랐다. 주술 인형이라는 고레벨의 몬스터가, 그것도 다수 등장하는 것이다.
“자리는 이쯤이 좋겠군.”
그것을 알기에 로칸은 안으로 진입한 즉시 자리부터 잡았다.
원래대로라면 최초 진입 버프가 끝나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녀야했지만 이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형태는 조금 다른 것이다.
[탐지의 술에 노출되셨습니다.]
[추적의 술에 노출되셨습니다.]
로칸이 적당한 자리를 물색하기 무섭게 어떤 주술들을 날아와 그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 자체로는 해로운 것이 아니나 그의 위치를 상대에게 밝혀 줄 것이기에 위협적인 요소가 될 것은 분명했다.
“눈치 볼 것 없잖아 덤벼!”
하지만 로칸은 오히려 그것을 반겼다.
상대의 스타일을 알기에, 자신의 위치를 알고 계속해서 수작을 부려 준다면 오히려 환영이었다.
[단단한 주술 인형][Lv 268]
[파괴적인 주술 인형][Lv 271]
그리고 잠시 후, 새로운 주술 인형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던전 밖에서 상대하던 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뻣뻣하던 놈들과 달리 관절의 움직임부터가 유연하고 자연스러웠고, 형태도 새로웠다.
푸릉, 푸르릉.
그저 사람 형태를 한 목각 인형뿐 아니라 들소의 모양을 한 주술 인형, 드워프의 모습을 한 목각 인형까지 형태가 무척 다양한 것이다.
“크흥!”
심지어 형태에 따라 특징까지 다양했다. 정말 그 생명체가 된 듯, 원판이 사용할 법한 스킬과 전투법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자 로칸은 동시에 수십 종의 몬스터와 싸우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러나 최상위 포식자는 바로 로칸이었다.
대상을 복사해 내는 주술 인형의 위력은 대단하지만 조합 스킬의 부재라는 치명적 단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공격력과 방어력은 원판보다 나을지 모르지만 쓸 수 있는 것은 일반 스킬까지다.
종족 스킬이나 직업 스킬은 사용할 수 있어도 개체 특유의 개성이 드러나는 조합 스킬과 생성 스킬은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것이 아주 결정적인, 압도적인 차이를 만들어 냈다.
“크허허헝!”
광기의 외침에 실린 마나가 놈들의 신호 체계를 가닥가닥 끊어 놓았다.
주술로 유지되는 몸체가 한순간 무너졌다가 천천히 복구되었다.
“난무!”
퍼버버버버버벅!
그사이 로칸의 주변에 있던 녀석들은 잘게 토막이 나 박살이 나고 말았다. 어지간해서는 상처를 입히기도 어려운 철목과 강철목이지만 로칸의 도끼에는 자비가 없었다.
무 자르듯 일격, 일격에 놈들의 각 부위가 깍두기처럼 썰려 나갔고, 그 와중에 붙어 있던 주술 부적도 함께 파괴되었다.
골렘의 핵처럼 망가진 인형을 자동으로 복구시키던 부적의 힘이 사라지자 남은 것은 그저 단단한 나무토막에 불과했다.
[철목 × 3을 획득하셨습니다.]
더불어 제어력을 잃어버린 주술 인형은 재료 아이템으로 둔갑했다. 그것도 아주 값비싼.
로칸의 힘 정도면 이곳에서도 벌목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굳이 나무를 베지 않아도 대량의 철목을 수집할 방법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드롭률이 40%나 상승한 상태로.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왜 갈라 흐흐흐!”
로칸이 자리를 잡고 놈들을 맞이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가만히 있으면 계속해서 주술 인형을 보내 경험치와 인벤토리를 두둑하게 만들어 줄 텐데 뭐 하러 일찍 사냥을 하겠나 더구나 놈이 죽어 버리면 이 던전은 다시 채집용 던전으로 변해 버릴 텐데.
그렇기 때문에 로칸은 적어도 사흘간은 절대 안으로 나아갈 생각이 없었다.
사방에 재료야 널렸으니 상대 역시 꾸준히 주술 인형을 만들어 공격을 보내 올 테니까 말이다.
스슥 스슥 스슥.
그렇게 한참을 사냥하고 나니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한차례 주술 인형을 소진시켰으니 새로 보충도 해야 하고 더 강한 주술 인형들을 집결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사이 로칸은 다음 웨이브를 기다리며 도끼의 날을 갈았다.
드워프제 특제 숫돌로 천천히 날을 갈아 내구력을 회복시키면서 감각 또한 날카롭게 갈아 언제 기습을 가해 올지 모르는 주술 인형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 * *
사흘. 꼬박 사흘 동안 로칸은 거의 풀 접속 상태를 유지하며 최초 진입 보너스가 가진 꿀을 제대로 빨아먹었다.
같은 무게의 철괴, 아니 은괴보다 비싸다는 철목과 강철목이 인벤토리 가득 묵직하게 쌓였고, 보너스까지 받아 경험치는 몇 번이나 그를 레벨 업 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260레벨마저 찍을 수 있었다.
동 레벨의 다른 몬스터들 대비 경험치가 조금 짠 편이었지만 숫자가 워낙 많았기에 그런 엄청난 레벨 업 속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슬슬 가 볼까 ”
그 후로도 마을과 던전을 오가며 아예 진을 치고 사냥에 나선 로칸은 265레벨을 찍고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전히 습격해 오는 주술 인형의 레벨은 그보다 조금 더 높았지만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것이다.
“처음은 장작이었지 아이스 인챈트.”
한차례 습격해 온 주술 인형들을 쓸어버린 뒤, 놈들이 온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 로칸은 기억을 더듬으며 스크롤을 찢었다.
속성 인챈트. 그것이 필요한 이유가 곧 나타났다.
화르르르르륵!
“키야아아아아아아악!”
로칸이 장작이라 부른 것. 불타는 주술 인형이 나타난 것이다.
놈들은 단순히 몸에 불이 붙기만 한 게 다가 아니었다. 불 속성 대미지는 흡수하고, 무속성 대미지로는 ‘파괴 불가’라는 미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설령 포스가 발동한 상태라도 놈을 제어하는 부적을 파괴할 수 없으니 만약 속성 공격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표현하자면 로칸은 준비된 자였다.
“어스 인챈트.”
새로운 속성계 주술 인형이 나타날 때마다 준비한 상극 속성의 인챈트 스크롤을 찢어 내며 빠르게 공략에 들어갔다.
속성 주술 인형의 경우 상대하기는 무척이나 까다롭지만 딱히 경험치나 아이템을 더 주는 것도 아니니까, 굳이 여기서 시간을 끌어 숫자를 늘리기보다 가능한 빠르게 정리하고 본체에 다가가는 편이 나았다.
“타 죽어라!”
그렇게 한참이나 주술 인형들을 박살 내고 나아가자 중간 보스이자 두 번째 영역의 최종 보스가 나타났다.
[거대화된 불타는 주술 인형][Lv 280]
기존의 놈들과 다른 건 없다. 딱 한 가지. 덩치가 집채만 할 뿐이다. 5미터는 족히 될법한 불타는 거구로 깔아뭉개니 그것만으로도 깔려 죽거나 피하지 못하고 타 죽을 판이었다.
애초에 개발사에서도 레이드를 하라고 만들어 놓은 몬스터이기도 했고.
상대가 로칸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광살!”
아예 [깔아뭉개기]를 사용하며 덮쳐 오는 놈을 향해 로칸은 힘을 폭발시켰다. 압도적인 위력으로 놈의 거체를 뚫고 나가 제어 부적을 갈기갈기 난도질했다. 그리하여 놈을 침묵시켰다.
그러는 동안에도 화염 대미지가 적지 않게 들어왔지만 이미 여러 타이틀 효과 등을 통해 상당한 화염 속성 저항력을 얻은 그였다. 사우나에 들어온 것 같은 열기를 훅 뱉어 내는 것만으로 참아 내는 것이 가능했다.
‘이제 마지막 페이즈군.’
대량의 강철목을 획득하여 한 걸음 더 내디딘 로칸은 이제 목적지에 가까워져 왔음을 확인했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나타난 주술 인형의 종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주술 인형][Lv 273]
레벨의 차이는 크지 않다. 그러나 이놈들은 ‘살아’ 있었다. 노코로콘 마을의 주민 숫자가 생각보다 적었던 이유. 그것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감히 내 아이들을 박살 내다니, 그 값은 톡톡히 치르게 해 주마!”
살아 있는 주술 인형과 함께 나타난 것은 이 모든 일의 원흉.
그는 놀랍게도 ‘하프엘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진짜 하프엘프이니까.’
[정신이 비틀린 하프엘프 주술사 헬린][Lv 281]
조금만 연습하면 숨 쉬듯 자유롭게 마법과 정령술을 쓸 수 있는 하프엘프의 권능을 굳이 마다하고 주술이라는 독특한 수법을 익힌 괴짜이기도 했다.
“흐흐흐, 그래, 이들은 네가 구하려는 노코로콘의 실종자들이다. 과연 네가 이들을 해칠 수 있을까 ”
로칸이 잠시 움직임을 멈춘 이유를 예단한 놈은 사악하게 웃으며 로칸을 조롱했다. 구해야 할 이들. 그들이 살아서 덤비는 것에 과연 로칸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재미있는 쇼를 보는 듯, 놈의 표정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확실히 그들을 해치는 것은 영지와 영지민들을 구해 달라는 영주의 부탁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로칸이 도끼를 들었다.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을 툭 내뱉었다.
“뭐 어쩌라고 여기서 다 죽으면, 과연 사람들은 누구 짓이라고 생각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