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해저터널 (1)
“일단 이쪽으로 앉아라.”
해저인의 마을은 바깥의 그것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시골의 작은 마을 느낌이랄까.
모든 것이 낡아 있었고, 사치나 화려함 따위는 1그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딱 필요한 것들만 놓고 생활을 하는 느낌이었다.
해저터널이라는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분위기였지만 로칸은 표정 관리를 잘했다.
그들이 호의를 가지고 자신에게 권하는 자리를 감사히 찾아 앉아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로칸의 등장과 함께 속속 모여드는 해저인들.
부담스럽게도 그를 빙 둘러싸고 모인 그들은 복잡한 눈으로 로칸을 바라보았다.
“그래, 중앙 대륙으로는 왜 가려는 거지 ”
다음으로 날아온 기습적인 질문.
보통의 유저들이라면 ‘레벨이 올라서.’라거나 ‘더 큰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서.’ 따위의 뻔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겠지만 로칸은 달랐다.
이것 역시 하나의 시험이며, 이곳을 하나의 세상으로 대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가진 소스를 풀어 놓았다.
“저는 조사단의 일원입니다. 세계에 큰 이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죠. 그동안 모은 소식을 전하고 새로운 조사를 이어 가기 위해 중앙 대륙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조사단……인가.”
조사단은 해저인들에게도 통하는 키워드였다. 그만큼 조사단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이들 해저인의 과거와도 연관이 있었다.
해저인은 하나의 종족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네 개의 종족이었고, 지금은 피가 섞여 어떤 종족이라고 말을 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근친에 의한 기형쯤 되는 건가 ’
네 가지 종족.
그들은 인간, 하프엘프, 드워프, 노움의 후예인 것이다.
오래전 해저터널의 관리를 맡고 이곳에 왔지만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아 잊힌 이들.
항해술이 발달하고, 마법이 발달하고,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지상’은 이들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굳이 해저터널을 이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오갈 수 있게 되기도 했고.
실제 유저들이나 정기선을 이용해서 이동하지, 말킨이라든지 하는 고위 인사들은 이동 마법진을 통해 이동하거나 소식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로칸은 조사단이라는 키워드를 내놓고서도 조심히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오랫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소홀한 것은 인정하지만, 우리는 아직 당신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누구와도 협의되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 한마디가 해저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주륵.
해저인들의 눈에서 모든 것을 씻어 내는 맑은 눈물이 흘렀다.
뭔가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자신들의 부모와 그 부모들이 이곳을 지키고 관리해 온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다. 증명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만약 당연하게 사용하려고만 들었다면 불같이 화를 내며 혼쭐을 내 주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감동적인 언사라니!
물론 평판 효과와 호감도 증가 효과가 겹쳐져 발생한 우연이었지만 로칸의 말은 해저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별것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준비해 봤습니다. 오랫동안 보급이 없어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로칸은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인벤토리에서 준비한 것들을 몽땅 꺼내 놓았다.
각종 음식부터 포션, 해독제 등등의 기능성 소모품들이었다.
오랫동안 보급을 받지 못해 자급자족을 해야 했던, 그래서 병든 이나 죽어 간 이들이 많은 이들의 사정을 고려한 일종의 뇌물이었다.
원래는 이것으로 환심을 사서 자잘한 퀘스트들을 패스할 생각이었기에 무게 게이지가 가득 차도록 꽉꽉 눌러 담아 온 그것들을 한쪽에 쌓기 시작하자, 해저인들의 눈빛이 크게 떨려 왔다.
“이건 금바늘! 이거라면 석화를 해제하고 이오로나를 구할 수 있어!”
“안약도 있어! 이건 자네 눈에 사용하면 되겠군.”
“중급 해독 포션. 이걸 조금만 더 일찍 얻었더라도……!”
오랜만에 보는 문명의 혜택에 해저인들이 술렁거렸다.
다른 것은 몰라도 상태 이상을 해제하는 물건들은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소란 피우지 마라!”
그때, 로칸을 데려온 자가 소리치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아무래도 그가 대표쯤 되는 모양이다.
“자네와 조사단의 뜻은 잘 알았네. 가져온 물건들은 잘 쓰도록 하지.”
그는 흥분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그것을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사실 그들이 그동안 기울인 노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진작부터 꾸준히 받아 왔어야 할 물건들이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개인이 준비할 만한 물량은 아니기에 그들은 그것을 ‘조사단’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로칸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해저터널의 이용뿐이니까.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그는 꺼내 놓은 아이템을 옮기도록 지시했고, 탑처럼 쌓여 있던 아이템이 금세 어디론가 이동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건 이거고, 자격을 시험하는 건 별개인 건 알고 있겠지 ”
‘젠장, 안 통하네…….’
혹시나 관계가 급호전되며 자격시험도 패스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살짝 기대했지만 그는 꽤나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아직까지 여기를 지키고 있겠지.’
아쉽기는 했지만 사실 여기까지 진행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만약 허튼소리를 했다면 뭘 해 보지도 못하고 쫓겨났을 터였고, 간신히 머무는 것을 허락받는다 해도 난이도 높고 소득은 없는 자잘한 퀘스트로 관계 회복부터 시도를 했어야 할 테니까.
게다가 그 과정에서도 한 번만 삐끗하면 바로 쫓겨날 수 있었다.
그러니 바로 자격시험을 볼 기회가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물론입니다.”
“바로 보겠나 ”
“그럴 수 있으면 좋지요.”
이곳 해저터널은 애초에 자격을 갖춘, 특별한 이들을 위한 통로였다.
아무나 해저터널을 통과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면 분수를 모르는 이들이 화를 당할 수도 있고, 해저터널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곳에 머무는 해저인들이 자격시험을 내고, 그것을 통과해야만 이용이 가능하도록 조건을 건 것이다.
“해저터널의 관리자 나, 아이데가 인간 진 버서커 로칸의 자격을 시험하겠다.”
로칸을 이곳으로 데려왔던 사내, 아이데는 자격시험을 알림과 동시에 눈빛을 바꾸었다.
친밀도는 친밀도이고, 시험은 공정해야 하니까.
선대의 약속과 규율에 따라 엄정한 심사를 볼 것을 다짐하며 로칸에게 첫 번째 시험을 내렸다.
“첫 번째 시험은 가치 증명이다. 중앙 대륙으로 넘어갈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라! 통과!”
‘응 ’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아이데는 시험 내용을 발표함과 동시에 로칸의 통과를 알렸다.
“조사단원이라면 이미 응당 그만한 가치를 증명한 셈이다. 굳이 따져 볼 것 없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봐준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힘을 증명하든, 지혜를 증명하든, 그것도 아니면 제작 관련 보조 직업을 통해 쓸모 있음을 증명해야 할 텐데 로칸은 그대로 프리 패스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두 번째 시험은 명예의 증명이다. 자신이 악인이 아님을 증명하라. 통과!”
‘헐.’
두 번째 시험은 명예의 증명.
명예라고 했지만 사실은 대상의 심성을 파악하는 시험이었다.
압박 면접을 하듯, 특수한 상황을 던져 놓고 그에 대한 대응을 보는 것인데,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만큼 문제와 해석이 다양해 로칸이 가장 긴장하던 시험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마저 통과라니 이 정도면 봐준다는 느낌이 아니라 확실히 편의를 봐준다고 봐야 했다.
“이미 명예와 명성까지 쌓은 이에게는 굳이 필요 없는 시험이다. 더구나 경비대라면 남을 위해 희생하는 역할이기도 하니 믿을 수 있지.”
핑계는 적절했다. 이미 명성 수치까지 쌓은 로칸이 아니던가
거기에 수비대의 직함을 아직 유지하고 있고 PKK의 타이틀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 정도면 악인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도 섣부른 판단은 아니었다.
‘좀 찔리기는 하는군.’
물론 본인을 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로칸의 입장에서는 조금 찔리는 일이긴 했다.
황금사자 진영의 입장에서나 그렇지, 검은용군단에게는 악마와 같은 이미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이데가 다음 시험을 내렸다.
“세 번째 시험은 존중의 증명이다. 해저터널을 만들며 희생된 수많은 이들의 넋을 기리고 유지와 보수에 일조하겠다는 성의를 보여라. 통과!”
세 번째 시험마저 통과!
해저터널을 만들며 희생된 이들에게 묵념을 올리는 것이야 백번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이데는 이미 자신들을 감동시킨 말로써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면 자신들에게도 그런 위로와 사과를 건넬 수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성의를 보이는 것은 원래 유지 보수를 위한 재료를 채집해 오는 것이지만, 그보다 가치 있는 것들을 아낌없이 베풀었으니 소급하여 인정할 수 있었다.
“자네가 전해 준 물품들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을 걸세.”
‘너무 쉽게 풀려서 불안할 정도인데, 이거…….’
하지만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 네 번째 시험은 제대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였다.
“네 번째 시험은 만약의 상황에서 해저터널을 수호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 머맨을 사냥해 와라!”
“알겠습니다.”
머맨 사냥!
머맨이라면 195레벨의 인어였다. 여성체인 머메이드와 달리 근접 공격에 특화된 종.
문제는 이 머맨을 ‘물속에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곳이 지상이었다면 어떻게든 육지로 놈을 꼬여 낸 다음 해치우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자격시험은 초기화된다.
그러니 결국 이곳을 통해 나간 뒤 머맨을 사냥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물속에서는 호흡도, 움직임도 제약이 걸릴 수밖에 없다 보니 무척이나 난해했다.
전생에도 많은 이들이 여기서 포기하거나 고전했다.
이쪽은 모든 능력이 저하되는 것은 물론, 움직임이 크게 굼떠지는 데 반해 머맨은 애초에 수중에서 생활하는 놈답게 물속에서 훨씬 빠른 속도를 내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머맨을 물속에서 잡아라
수중 관련 스킬이 없는 이상, 그것은 다른 말로 자살을 하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나 ”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데의 시험에 시간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곳에 부활 등록을 하면 싸우다 죽더라도 다시 이곳에서 살아나 몇 번이고 도전할 수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이곳을 뚫어 낼 작정인 로칸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머맨은…… 딱히 공략법이 없었지.”
머맨의 공격 패턴은 꽤나 단순했다.
빠른 속도를 이용해 삼지창 같은 무기를 찌르고 달아났다.
일부 방어력이 좋은 이들에게는 큰 대미지가 아니었지만 오히려 죽을 때까지 바늘에 찔리다 죽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었다.
수중 호흡에는 한계가 있고, 이쪽의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만한 힘이라면 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전생과는 격이 다른 힘을 지닌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로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저터널에서 바깥, 즉 수중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안내받은 뒤 소라 껍데기 같은 아이템을 하나 넘겨받았다.
[머맨의 호출용 나팔][매직]
머맨을 불러낼 수 있는 호출용 나팔. 원래는 머맨들끼리의 연락 수단이나, 해저인들이 빼앗았다.
-머맨 소환
머맨을 찾기 위해 멀리 나갈 것 없이, 이것을 통해 바로 불러내서 싸우면 되는 모양이었다.
“좋아, 가자.”
시간을 끈다고 방법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미적거릴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로칸은 즉시 도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