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타락 사냥꾼 (2)
새롭게 열린 길은 칠흑 같은 암흑뿐이었다. 횃불을 켜 봐도 빛이 어둠에 잡아먹혀 아무런 효과도 거둘 수 없었다.
로칸이야 야간시가 있으니 어느 정도 존재들의 윤곽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이라면 어둠의 공포와 싸워야 했을 터였다.
그렇게 긴 길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왔군.”
그 긴 어둠의 터널 끝에서 마주한 것은 거대한 실루엣이었다. 보는 순간 절로 침을 꼴깍 삼키게 되는 그 거대한 위용에 누구나 긴장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
[거대한 XX의 XXX][Lv ]
심지어 이름도, 레벨도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물음표가 뜬다는 것은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강력한 존재라는 의미였으니, 보통의 유저들이라면 여기서 겁을 먹고 도망치는 것이 당연했다.
‘까고 있네.’
하지만 상대는 로칸이다. 로칸은 도망치는 대신 코웃음을 치며 녀석의 영역으로 다가갔다.
크룩
거대한 근육질의 몸체를 돌려세우는 괴물.
살광 어린 눈빛이 로칸을 잡아먹으려 들었지만 로칸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더욱 나아갔다.
[불굴의 의지가 발동합니다.]
[모든 부정적인 정신 계열 효과에 저항합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쿡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거대 괴수가 아니었다. 50센티미터 남짓의, 소인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자그마한 몬스터 한 마리뿐이었다.
거대 괴수의 정체는 이 녀석이 환영 마법으로 거대하게 보인 결과였다.
“스트라이크!”
로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저항할 틈 따위도 주지 않고 녀석의 머리를 쪼개 놓았다.
불굴의 의지가 가진 저항 효과가 아니었다면 싸운다 해도 본체와 환영 간의 간격을 잡지 못해 일방적인 공격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모든 거짓이 들통난 이상 놈은 로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때, 뒤늦게 터널을 통과한 두 용병이 나타났다.
꽤나 심한 격전을 치렀는지 군데군데 상처가 있는 모습이지만 레벨이 레벨인지라 치명적이지는 않아 보였다.
로칸은 그들을 상대로 붕대를 감으며 응급처치 숙련도를 올린 뒤, 마저 안으로 진입했다.
“후, 드디어 이 빌어먹을 곳에 도착했군.”
로칸과 두 용병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십 개는 족히 될 듯한 구멍들이었다.
아주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는 ‘입구’들이다.
무려 3층으로 이루어진 입구들.
“대기하세요.”
깊은 한숨을 푹 내쉰 로칸은 무작정 직선에 있는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쏘옥
“젠장. 꽝이군. 처음부터 당첨될 리 없지.”
빨려 들듯 안으로 이끌려 간 로칸이 다시 나타난 곳은 2층에 있던 입구였다.
입구 하나하나가 다른 입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중 딱 하나의 입구만이 다음 지역으로 넘어갈 수 있는 ‘진짜 입구’였다.
“이번엔 언제쯤 걸리려나…….”
입구 하나하나가 연결되어 있다면 사실 그리 오래 걸릴 이유가 없다.
안 들어가 본 곳부터 하나씩 들어가 보면 그만이니까.
입구가 1백 개쯤 되더라도 쉰 번만 들어가 보면 진짜 입구를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칸은 이상한 행동을 했다. 자신이 빠져나왔던 입구로 뒤돌아 들어간 것이다.
쏘옥.
다시 빨려 든 그가 나타난 곳은 처음의 그곳이 아닌 또 다른 입구였다.
한 번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입구의 매칭이 초기화되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 수십 분의 1의 확률에 당첨되기 전까지는 이 이상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로칸이 텐트며 음식 등 노숙 준비를 단단히 해 온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로칸은 닷새 동안이나 그 자리에 머물렀다.
* * *
지이잉.
‘아, 드디어!’
무려 닷새 만에 느끼는 색다른 감각.
드디어 진짜 입구를 찾아낸 로칸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대충 하루 이틀쯤은 각오를 했지만 자신의 운이 이 정도였을 줄이야!
사흘째에는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끈기로, 나흘째부터는 오기로 반복한 덕분에 이뤄 낸 성과였다.
“호출.”
반면 용병들의 진입은 아주 간단했다. 안으로 들어온 로칸이 호출하자 굳이 진짜 입구를 찾을 필요도 없이 즉시 나타난 것이다.
어쩐지 억울한 기분도 들었지만 만약 그들도 각자 입구를 찾아야 했다면 닷새가 아니라 열흘 이상이 걸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기에 화를 삭였다.
“그래, 이제 밥값을 할 시간이다.”
닷새나 머무르는 바람에 녀석들의 몸값도 엄청나게 들어갔다.
하루에 48골드씩, 총 2백 골드가 훌쩍 넘는 비용이 들어간 것이다.
차라리 유저를 고용했다면 10~20골드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너무 약했으니까.
아마 첫 번째 기관을 작동시키기도 전에 모두 죽어 나갔을 터였다.
‘굳이 타이틀을 나눠 먹을 이유도 없고.’
게다가 함께 파티를 맺고 이 일을 마무리할 경우 최초 타이틀의 효과도 하락할 게 분명했다. 어쩌면 전리품 분배에서도 문제가 생길지 모르지.
그러니 차라리 돈을 쓰더라도 NPC 용병을 고용해 혼자 해 먹는 게 훨씬 속 편했다.
“미유키, 앞장서 주세요.”
“예, 맡겨 주십시오.”
미유키에게 지시를 내리자 그녀가 5미터쯤 앞으로 나갔다. 바로 함정을 탐색하기 위함이다.
1차 직업 ‘도적’ 이후 갈라지는 길잡이 직업을 가진 그녀였기에 어떠한 함정도 능숙하게 파훼해 낼 수 있었다.
이곳 유적의 수준은 고작해야 170 정도였으니까.
무려 10레벨이나 높은 그녀가 버벅거리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완료했습니다.”
빠르게 함정을 발견, 해체해 가는 그녀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자 2~3백 미터 만에 함정투성이인 길이 종료되었다.
다음은 고우키의 차례.
“고우키 씨, 저것들 다 끌어모아서 저쪽으로 달려요.”
“예.”
그들 앞에 나타난 광장을 가득 메운 것은 다름 아닌 슬라임이었다. 그것도 중독 효과를 지닌 포이즌 슬라임.
레벨은 160 정도로 높지 않았지만 달라붙는 순간 이동속도가 저하되고, 더 많은 슬라임이 달라붙을수록 이동속도 저하 효과도 중첩이 되기에 로칸이라 해도 위험한 놈들이었다.
“광역 도발! 돌진!”
하지만 고우키는 아주 간단히 해결했다. 광역 도발 스킬을 시전해 모든 슬라임의 어그로를 끌어모은 뒤 한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기본 이동속도 자체는 슬라임보다 고우키가 더 빨랐기에 단숨에 붙잡히지 않고 놈들을 유인할 수 있었고, 그사이 로칸과 미유키는 광장을 통과했다.
그렇게 다음 지역으로 이동한 뒤 고우키를 호출하자 중독되어 온몸이 시퍼렇게 변한 상태로 다시 나타났다.
“이런!”
NPC 용병이야 죽으면 알아서 용병 길드로 돌아간다지만 비싼 값을 치르고 데려왔는데 슬라임 따위를 따돌리는 데만 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즉시 해독초와 붕대 감기를 이용해 회복시킨 뒤, 둘에게 마지막 작전을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해 볼게요.”
대답을 하는 두 용병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둘 역시 그것을 알기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지만, 그들의 죽음은 ‘기절’로 표시되어 돌아갈 뿐이기에 거부하는 일은 없었다.
만약 그런 것까지 리얼리티를 줬다면 용병을 쓸 이유가 전혀 없겠지.
그렇게 합의를 본 세 사람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쿠구구궁.
로칸이 기관을 작동시키자 굉음과 함께 석벽이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거대한 공간.
마치 콜로세움 같은 그 공간 너머에 위치한 왕좌에는 온몸이 온통 초록빛으로 물든 미치광이가 앉아 있었다.
“쿡쿡쿡쿡!”
[타락한 힘에 취한 미치광이 마법사][Lv 175]
타락 중독.
타락한 힘에 과도하게 노출된 이들이 보이는 증상이었다.
“곧 있으면 내가 알아서 너희를 찾아갈 터인데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는 수고를 했구나.”
녀석은 원래 인간이었을까 아니면 하프엘프
본래 종족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기괴하게 변해 버린 모습의 녀석이 로칸을 보며 스산하게 웃었다.
녹색 기운을 가득 머금은 지팡이를 땅에 찍으며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뭐, 네놈을 제물로 삼아 저항하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는 것도 좋겠지!”
끼이이익.
그 순간, 녹이 슨 쇳소리와 함께 갇혀 있던 몬스터들이 풀려났다.
톱날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으르렁거리던 몬스터 샤핀이 자신을 가두던 창살을 벗어나 광기를 해방시켰다.
“놈들을 죽여라!”
쿠웅.
놈이 다시 한 번 지팡이로 바닥을 찧자 지팡이로부터 타락의 힘이 뿜어져 나갔다. 달려드는 몬스터들의 몸으로 흡수되어 내면의 광기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것들이 어디서 감히 ’
“크허허허허헝!”
그따위 어설픈 광기를 보아 주고만 있을 로칸이 아니었다.
포스의 힘을 가득 담은 포효를 내지르자 달려들던 샤핀들의 눈빛이 꺼지고 몸은 제자리에 우뚝 섰다.
“위치로!”
로칸이 소리치자 고우키와 미유키가 콜로세움의 한쪽으로 달려갔다.
그사이 샤핀들이 정신을 차렸지만 전과 같은 패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덤벼!”
이깟 놈들을 상대하는 데 셋이나 달라붙을 필요도 없었다. 구석에 처박힌 두 용병들을 대신해서 로칸이 날뛰기 시작했다.
타락한 힘에 의해 버프를 받았다 해도 놈들의 본래 레벨은 고작 150 정도. 식후 운동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듯, 로칸은 스킬의 사용도 없이 가뿐하게 놈들의 뼈와 살을 분리시켰다.
“다음!”
그리고 오만하게 타락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리프 어택으로 뛰어올라 놈의 골통을 부숴 놓고 싶었지만, 타락한 힘에 의해 콜로세움 주변이 결계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놈의 힘을 빼놓기 전까지는 놈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네 번 남았나 ’
그때까지 총 네 번의 웨이브를 더 막아야 했다.
“건방진 놈. 이것도 막아 봐라!”
쾅! 쾅!
놈이 신경질적으로 지팡이를 내리치자 또다시 타락한 힘이 뿜어졌다.
좀 전보다도 많은 양의 에너지가 철창 안으로 흘러들어 가는가 싶더니 두 번째 웨이브가 시작되었다.
“똥개라, 좋지!”
[타락에 조종당하는 굶주린 다이어 울프][Lv 162]
이번엔 늑대다. 짐승에게 타락한 힘이 입혀지자 무시무시한 증폭을 일으켰지만 그래 봤자 10레벨쯤 증가한 수준으로는 로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로칸이 배틀 액스를 휘두를 때마다 단단한 가죽이 통으로 벗겨졌고, 도낏자루에 맞으면 뼈가 부러져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래도 그것이 1백에 가까이 덤벼들자 로칸도 슬쩍 스킬을 섞어 체력을 보전해야 했다.
“이익! 어디 이것도 막나 보자!”
크르릉!
이번엔 사자였다. 정확히는 사자처럼 생긴 티갈이라는 몬스터였는데, 로칸의 반응은 이번에도 심드렁했다.
“개나 고양이나.”
남들에게나 맹수이지, 로칸에게는 똥개, 길고양이에 다르지 않았다.
1백이나 된다는 것이 부담일 뿐, 하나하나 착실하게 해치우자 생명력은 생명력 흡수 덕분에 3% 이상 떨어지지 않고 박살 낼 수 있었다.
“이게 다냐 이 오크보다 못생긴 놈아!”
그렇게 세 번째 웨이브를 박살 낸 순간, 로칸이 놈을 도발했다.
타락한 힘에 의해 녹색으로 변해 버린 녀석이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 정도로 단단히 화가 났다. 미치광이가 되었다 해도 타락한 힘 때문에 변해 버린 얼굴은 콤플렉스인 것이다.
“제대로 끝장을 내 주마! 이번이 마지막이다!”
우우우웅. 파앗!
얼마나 큰 힘을 모은 것일까 녀석의 몸 색깔이 옅어질 만큼 커다란 타락의 힘이 철창 안으로 쏘아졌다.
그와 함께 철창 안에 남아 있던 모든 몬스터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원래는 4차와 5차 웨이브로 각각 나와야 할 놈들이지만 로칸의 도발이 놈들을 일시에 불러들인 것이다.
[타락에 조종당하는 하프엘프][Lv 182]
[타락에 조종당하는 오크][Lv 183]
그들이 타락한 힘을 직접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정신 지배라고나 할까.
놈에게 붙잡혀 정신이 피폐해지도록 고초를 겪던 하프엘프와 오크 들을 타락한 힘이 자극해 광인으로 만들었다.
원하는 것은 오직 살육과 복수뿐!
“고우키!”
그런 악의를 홀로 담담히 받아들이던 로칸이 큰 소리로 고우키를 불렀다. 작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