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점령 (2)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강대한 힘이 몸 안 가득 차올랐다.
소모했던 마나 그런 것은 의미 없다. 버서크 상태에서는 마나가 무한이 되니까.
하지만 그것으로도 로칸은 안심되지 않았다.
애쉬 타운 수비대장 쟈로스. 트롤 종족인 그라면 버서크를 사용한 후라도 힘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기 어려울 테고, 조합 스킬 또한 상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지고 있을 테니까.
‘파괴의 일격이었지.’
치명적 일격이 치명타 확률과 대미지에 집중한 스킬이라면 녀석의 대표적인 조합 스킬 파괴의 일격은 오롯이 파괴력에만 집중한 것.
무기 중 파괴력만으로는 으뜸이라는 둔기를 사용하는 놈의 일격을 정면으로 받는 것은 로칸조차 위험할 정도였다.
거기에 순간적으로 방어력을 급증시키는 또 다른 조합 스킬 ‘수호자의 갑옷’과 재생 능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는 ‘트롤의 재생력’도 만만치 않았다.
‘해보는 수밖에.’
그러나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반은 부딪쳐 보는 수밖에!
로칸은 즉시 거리를 좁히며 배틀 액스를 횡으로 휘둘렀다.
“어딜!”
까앙!
묵직한 반탄력과 함께 쟈로스가 망치를 세워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밀어붙이며 몸을 날려 왔다.
로칸의 주특기 중 하나이기도 한 숄더 차지!
쿠웅!
로칸 역시 숄더 차지로 맞받아쳤지만 서로를 튕겨 내는 것에 그쳤다. 능력치의 대부분이 힘과 체력에 집중된 녀석이었기에 순수한 힘에서만큼은 만만치 않은 것이다.
“폭격!”
“수호자의 갑옷!”
로칸이 서둘러 손도끼를 던져 봤지만 놈도 방어형 조합 스킬로 응수했다. 손도끼를 몸으로 비껴 내고 오히려 로칸에게로 돌진했다.
“스트라이크!”
그 틈을 노려 로칸이 배틀 액스가 놈의 발목을 노렸다. 돌진 스킬을 발동할 때 생기는 빈틈을 노려 발목을 베어 간 것이다.
“덮치기!”
그때, 쟈로스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다이빙을 하듯 로칸에게 엉겨 붙어 바닥을 뒹굴었다.
“빌어먹을 생성 스킬.”
덮치기라는 스킬은 더 로드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바로 200레벨 때 만들 수 있는 생성 스킬이었다. 특정한 행동을 스킬로 지정하여 익히는 200레벨의 특권.
쟈로스는 그 생성 스킬에 그라운드 기술을 채워 넣은 것이다.
“마운트!”
이내 상위 포지션을 잡은 녀석이 또 다른 생성 스킬을 발동시켰다.
마운트.
상대를 깔고 앉은 상태에서 때리는 공격법이지만 생성 스킬의 힘을 빌리자 전해지는 충격이 달라졌다.
“큭.”
쿠웅 쿠웅 쿠웅.
급히 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해 봤지만 가드 위로 때리는 충격량이 어마어마했다. 한 방 한 방에 땅이 울리고 생명력이 푹푹 깎여 나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우위에 있는 로칸의 힘으로도 놈을 밀치고 벗어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탈출!”
대신 반지에 내장된 스킬을 발동해 빠져나왔다.
이미 생명력은 10%나 깎인 상태였지만 놈이 무기를 다시 들기 전에 빠져나온 것이 다행이었다.
“크허허허허헝!”
분노를 가득 담은 로칸의 외침이 놈을 옭아매 보지만 그다지 효용은 없었다. 레벨 차이가 상당했으니까.
어차피 이걸로 승부를 보려던 것은 아니었기에 로칸은 즉시 놈에게 달려들었다.
까앙 깡 깡!
배틀 액스를 짧게 잡고 휘두르는 3연격이 자세를 회복한 놈에게 모조리 막혔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묵직한 타격을 방어하느라 경직된 놈의 다리를 걸어 올리듯 후려 찼다.
“읏 ”
“치명적 일격!”
그리고 이어진 필살의 일격!
[크리티컬!]
[피의 각인이 발동되었습니다.]
[상대에게 입힌 대미지에 비례하여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칼날 마인의 원념이 적의 지혈을 방해합니다.]
제대로 터진 극딜에 놈의 갑옷 일부가 쪼개지며 옆구리가 갈라졌다.
“트롤의 재생력! 기상!”
1초. 그러나 단 1초 만에 모든 상처가 아물어 버렸다. 재생 능력을 극대화시켜 상처를 회복해 버린 것이다.
더불어 마지막 생성 스킬이 발동하며 무너진 자세까지 바로잡혔다.
[트롤의 재생력에 의해 출혈 효과가 무효화되었습니다.]
“젠장…….”
문제는 저 빌어먹을 재생력이 꽤 오래 지속된다는 것이다.
점차 약해지기는 하지만 당분간은 일격에 목을 치거나 심장을 터트리지 않는 이상 놈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사라졌다.
“미치겠군.”
그리고 그것은 로칸에게 아주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버서크에는 지속 시간이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물론 로칸의 능력치와 컨트롤이라면 버서크 후유증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지만, 저 멀리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무언가가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망한 건가 ”
애쉬 타운의 수비대.
거기다 조금만 더 있으면 죽은 자의 요람에 소속된 경비병들 또한 부활할 터였다.
이제 승리는커녕 살아남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하는 수 없지.”
콰앙!
로칸은 그 즉시 폭격을 날렸다. 놈이 방어하는 틈을 타, 돌격과 대시를 이용해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작전상 후퇴.
“어딜 도망가느냐!”
그 뒤를 쟈로스와 뒤늦게 도착한 애쉬 타운 수비대가 쫓기 시작했다.
“기회다!”
“이번에는 잡아야 돼!”
그리고 로칸에게 발각당해 죽임을 당할까 마을 주변을 맴돌던 유저들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젠장. 귀찮게 구는군.’
그 때문에 로칸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유저들의 공격이 생각 외로 매서워서 그럴 리가. 그들의 공격쯤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가벼웠다.
버서크의 후유증이 하락시키는 것은 능력치뿐이니 후유증을 앓는다 해도 큰 타격은 아니겠지.
그러나 진짜 문제는 ‘전투 상태의 지속’이었다.
아까의 경우야 빠르게 따돌리느라 공격에 맞지 않은 시간이 제법 되어 룬 북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자잘한 공격에 적중당해 전투 상태로 인식이 된다면 룬 북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전투 중에도 자유로이 룬 북을 사용할 수 있다면 무적의 회피 기술로 여겨질 수도 있을 테니까.
“타격이 없어도 돼! 수비대가 따라잡을 수만 있게 만들어!”
적들 중에도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 있는지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전투 상태의 지속, 그로 인한 도주 불가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온 힘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힘과 체력, 맷집은 높아도 민첩이 높지 못한 로칸이었기에 그들의 모든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길고 긴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빌어먹을.”
쟈로스와 수비대에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로칸은 그야말로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쟈로스 역시 파워 타입의 NPC인 까닭에 달리기 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것일까.
더구나 로칸 같은 강력한 원거리 공격 기술도 없었기에, 수시로 폭격을 쏘아 내는 것으로 간신히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꿀꺽꿀꺽.
그러면서 꾸준히 포션을 마셔 주자 가랑비에 옷 젖듯 생명력을 야금야금 갉아먹던 유저들의 공격도 적당히 막아 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그렇게 달리기 수십 분이었다.
버서크의 후유증이 끝나고 재사용 시간마저 돌아왔지만 길드 단위로 앞을 막아선 놈들을 뚫어 내느라 로칸은 다시 버서크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슬슬 포션도 떨어져 가는데……. 아슬아슬하겠군.’
마법 지도에 나타나는 최단 거리를 이용해 달리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경계’를 넘기 위해서는 5분은 더 달려야만 했다.
“죽어라!”
“레어 롱 소드는 내 꺼다!”
그런 로칸의 앞을 또다시 검은용군단의 유저들이 막아섰다.
버서크 후유증 상태인 로칸이라면 해볼 만하다는 계산이겠지만, 어림없는 일.
1차 후유증이 끝난 로칸도 일반의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푸확!
로칸은 멈추지도 않고 공격을 교환하며 놈의 머리를 쪼개 놓았다.
막강한 방어력이 대미지를 감소시킬 테고, 미미하게 깎여 나간 생명력은 생명력 흡수 효과가 빠져나간 부분을 다시 채워 넣었다.
“후우!”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빛바랜 대지가 생기 넘치는 초록으로 변하는 저기만 넘으면……!
‘응 ’
다시 한 번 리프 어택으로 좁혀지던 거리를 다시 벌린 로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중무장을 한 채 이쪽을 향해 전진해 오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
하프엘프를 중심으로 노움, 드워프가 간간이 섞여 있는 황금사자 진영의 유저들이었다.
“젠장, 적이다!”
“합류 못 하게 막아! 거의 다 잡았다고!”
덕분에 검은용군단의 유저들도 마음이 급해졌다.
조금만 더 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로칸의 모습에 분통을 터트리며 마지막으로 힘을 내었다.
로칸을 멈추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윽.’
약속이나 한 것처럼 쏟아지는 조합 스킬들.
그래 봤자 뛰어난 수준은 없었지만 숫자가 숫자이다 보니 로칸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후유증을 2배로 물더라도 다시 버서크를 써야 할까 ’
아니다. 얼마 남지 않은 경계를 바라보는 로칸의 눈빛이 냉정해졌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황금사자 진영의 유저들을 바라보며 시동어를 외쳤다.
“생명 충전.”
무섭게 빠져나가던 생명력이 급속도로 차올랐다. 로칸에게 마지막으로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돌격!”
마지막 힘을 짜내 경계를 탐하는 로칸.
어느새 그의 앞까지 다가온 황금사자 진영의 유저들이 힘차게 소리쳤다.
“로칸!”
쐐애애액!
그리고 느닷없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지만 로칸은 예상했다는 듯, 땅을 박차고 옆으로 굴렀다.
“크아아악!”
“제길!”
덕분에 공격에 휩쓸린 것은 뒤쫓아 오던 검은용군단의 유저들.
아군이 공격을 받자 응사하기 시작한 검은용군단의 유저들과 적대 진영을 발견하자마자 가차 없이 손을 쓰기 시작한 수비대 때문에 순식간에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사이 로칸은 다른 방향으로 리프 어택을 펼쳐 경계에 더 가까워졌다.
‘진영이 같으니까 믿으라고 그런 정성스러운 개소리가 어디 있어 ’
애초부터 믿을 생각이 없던 덕에 그들의 공격이 오히려 득이 되었다.
인터넷상에서야 로칸을 찬양하는 이들이 제법 된다지만, 그를 구하기 위해 이만큼이나 사람을 모아 마중 나온다
웃기는 소리다. 오히려 로칸이 내건 현상금을 차지하기 위해 PK를 하러 왔다면 모를까.
“오빠들, 뭐 해요. 도망가잖아!”
그때, 후퇴하는 황금사자 진영에서 빼꼼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하 ’
온실에서 봤던 그 얼굴이다.
‘그렇군.’
벌써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왕벌. 온실에서 욕을 먹고 쫓겨난 뒤 또 어떤 길드엔가 들어가 남자들을 홀려 온 모양이었다.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거기까지 확인한 로칸이 낙법을 하듯 몸을 굴리며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자신을 쫓아오는 세 무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단 말이지.”
애쉬 타운의 수비대, 검은용군단의 유저들, 그리고 여왕벌과 현상금에 눈이 멀어 자신에게 PK를 걸고 있는 황금사자 진영의 유저들.
저벅저벅.
그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몇 걸음 더 뒷걸음질 친 로칸은 더 이상 물러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멈추어 섰다.
“뭐 해 나 잡으러 온 거 아닌가 덤벼!”
오히려 먼저 도발을 감행했다!
아직 버서크의 후유증도 1차밖에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로칸의 얼굴에 여유가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움찔.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
그 기세에 눌린 양측 진영의 유저들이 멈칫거렸지만 누군가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쫄지 마! 우리는 수비대가 싸울 수 있는 판만 만들면 돼!”
어차피 로칸을 몰아세우는 것은 자신들이 아닌 수비대다. 그러니 멀리에서 하던 대로 견제만 하면 이길 수 있다.
그 희망의 빛이 다시 눈에 떠오를 때, 변화가 일어났다.
“어 어어 왜 그냥 가 ”
“저것들 왜 저래 ”
쟈로스를 비롯한 애쉬 타운 수비대가 이를 갈며 로칸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뒤돌아선 것이다.
바로 로칸이 ‘경계’를 넘었기 때문.
일개 유저들이 경계를 넘는 것이야 개인적인 선택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애쉬 타운의 수비대 소속인 그들이 넘을 경우 ‘전쟁’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쟈로스는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애쉬 타운으로 돌아갔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젠장, 그럼 잡는 건 또 글렀잖아 시간만 버렸네!”
“아 씨, 누가 여기 오자고 그랬어 내 화살값이랑 마나 포션값 어쩔 거야!”
검은용군단의 여론이 급변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
수비대도 혼자서 때려잡는 로칸을 기껏해야 130레벨 남짓한 그들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로칸을 노리고는 있지만 황금사자 진영의 유저들이 언제 돌변해 자신들을 공격해 올지도 모르고.
여기서 더 무리를 했다가는 아까운 목숨만 잃을 판인 것이 분명했기에 하나둘 눈치를 보며 떠나가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이렇게 되면 남은 것은 하나였다. 겁도 없이 로칸에게 PK를 걸었던 황금사자 진영의 유저들.
계산상 로칸의 버서크 후유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지만 감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오빠! 기회잖아요. 내 복수 안 해 줄 거예요 ”
딱 한 명만 제외하고.
그런 그녀와 다른 이들을 슥 돌아보며 로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같은 진영이니까, 마지막 기회를 주지. 1레벨당 1실버. 내놓을래, 뒈질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