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트롤 던전 (2)
로칸이 찾는 것은 이 던전에 숨겨진 이벤트였다. 던전의 이름인 ‘저주받은 생명’이란 약화된 트롤을 말하는 것이니 트롤에게 저주를 내린 원흉도 있지 않겠나
특수한 구조물 아니면 장비 혹은 장소가 특이한 걸까
‘대충 인벤토리에 던져 넣다 보면 하나는 걸리겠지.’
모두 아니었다. 로칸이 찾은 것은 바로 ‘뼈’였다.
트롤의 서식지 곳곳에 쌓여 있는 짐승의 뼈 무더기를 뒤져 인벤토리에 쏟아부으며 ‘획득 가능’으로 나타나는 하나를 찾는 것이다.
[저주받은 짐승의 뼈를 획득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트롤에게 저주를 내린 매개를.
트롤이 저주를 받은 이유는 다름 아닌 ‘먹이’ 때문인 것이다.
생명력은 곧 면역력과도 연관된다.
어지간해서는 저주에 잘 걸리지 않는 트롤이지만, 일단 혈액 속에 저주를 녹여 낼 수만 있다면 더욱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기에 강력한 저주가 심겨진 짐승을 누군가 먹잇감으로 던져 준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먹어 치운 트롤들은 저주에 노출되었고, 또 다른 숙주가 되어 어떤 저주를 잉태시키던 중이었다.
“이걸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군.”
덕분에 로칸도 이득을 봤다. 변이된 몬스터의 발견이 바로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다시 발동시키는 키워드인 것이다.
이것을 크로스로드 수비대장 말킨에게 가져다주면 뭔가 움직임이 시작될 터였다.
“일단 피부터 넘겨 볼까 ”
물론 그 전에 미리 받아 놓은 퀘스트들도 해결해야 했다.
트롤의 피와 힘줄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을 생각하면 이대로 죽치고 앉아 리젠되는 놈들을 잡는 것도 좋겠지만 차라리 한 바퀴 퀘스트를 돌리고 다시 오면 트롤들이 모두 리젠되어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때문에 먼저 찾은 것은 미친, 아니 트뤼엘 남작의 별장이었다.
남작은 저주받은 동굴 트롤의 피를 받자마자 반색하며 그를 반겼고, 보상과 함께 다음 퀘스트를 떠안겼다.
[트뤼엘 남작의 어린 딸 회복 2][퀘스트]
트뤼엘 남작이 자신의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 당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당신이 건네 준 트롤의 피 덕분에 기본 체력은 회복된 상태이다. 체력이 다시 떨어지기 전에 뜨거운 양의 피를 받아 오자.
-완료 조건 : 뜨거운 양의 피 (0/20), 두꺼운 양가죽 (0/20)
-보상 : 7골드
트롤의 피에 이은 양의 피 획득 퀘스트. 이미 끝없는 연구 퀘스트를 받아 본 이들이라면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지루한 연속 퀘스트의 시작.
하지만 로칸은 알고 있었다. 이번 퀘스트가 생각보다 길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생각보다 굵직하다는 것을.
‘더럽기도 하고.’
누군가가 보기에는 눈물겨운 부정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진실을 아는 로칸은 차갑게 눈을 빛낼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퀘스트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그것을 얻을 때까지는 억지 미소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데빌 램이었지 ”
트뤼엘 남작이 요구한 ‘뜨거운 양의 피’는 이름 그대로의 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양 머리를 한 저돌적인 몬스터, 데빌 램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포메트가 아닌 게 다행이라고 해야겠군.”
피식 웃긴 했지만 평범한 데빌 램의 레벨도 무려 110나 되었다. 조합 스킬은 어중간하지만 어쨌든 두 가지나 되었고, 그중 하나인 광속 박치기는 제대로 맞으면 로칸이라 할지라도 위험할 정도였다.
퀘스트의 난이도가 크게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양털 깎이 알바를 시작해 볼까 ”
하지만 그는 로칸이었다.
트롤 던전을 돌파하며 레벨도 두 단계나 오른 덕분에 벌써 그의 레벨도 105나 되었으니 고작해야 5레벨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100레벨 이상은 각자의 특징에 맞춘 능력치 강화가 일어난다지만 이 정도 차이는 우습게 때려잡을 수 있었다.
로칸은 즉시 데빌 램을 찾아 뛰기 시작했다.
‘양 주제에 시꺼멓기는.’
아직 밤이 깊었고 털이 까만 탓에 찾기가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 로칸에게는 야간시가 있었다. 탐색꾼 타이틀의 효과로 깊은 밤이지만 적의 윤곽을 파악할 정도의 시야는 확보가 가능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거기에 마법 지도의 내비게이션이 더해지자 데빌 램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데빌 램의 조합 스킬은 두 가지.
털 속에 몸을 숨겨 ‘물리 타격’을 막아 내는 스킬과 광속으로 돌진하여 박치기를 하는 스킬이었다.
첫 번째는 주먹이나 둔기류의 공격만을 방어하니 없는 것이나 같았고, 두 번째 역시 쓰기 전에 접근해 버리면 무용지물이다.
“리프 어택!”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로칸은 단숨에 뛰어올라 데빌 램의 목을 쳤다.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말을 타듯 데빌 램의 등에 올라타더니 배틀 액스로 머리를 연달아 찍어 박살을 내 버렸다.
[뜨거운 양의 피를 획득하셨습니다.]
[두꺼운 양가죽을 획득하셨습니다.]
로칸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퀘스트 아이템이 들어왔다.
데빌 램은 조합 스킬이 아니라도 방어력이 뛰어나서 잡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놈이었지만 세 방에 한 방은 크리티컬이 터져 주니 크로스로드로 넘어와 만난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쉽게 처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냥 과정이 영상에 담기고 있었다.
퀘스트 아이템이 들어온다는 것은 일시적으로 표시 해제를 통해 감추었으니, 쉬운 사냥을 원하는 이들이 몰려들겠지.
‘당해 봐라, 요놈들아.’
하지만 그들 모두가 로칸처럼 꿀을 빨 수는 없을 터였다. 데빌 램의 포악한 성격을 버티기 위해서는 로칸처럼 엄청난 악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데빌 램을 끝장내기 전에 자신이 바닥에 처박혀 부딪히고 밟혀 죽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로칸은 데빌 램들의 사이를 한참이나 옮겨 다니며 사냥을 이어 갔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별다른 피해도 없이 제대로 꿀을 빨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사냥 환경인가 로칸은 진작에 퀘스트 아이템을 모두 모았지만 아침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레벨을 올렸다. 기어코 데빌 램과 같은 110레벨을 찍고야 말았다.
‘미친 남작 퀘는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까.’
물론 너무 늦을 경우 처음부터 퀘스트를 다시 해야 했지만 상관없다. 데빌 램의 피는 쉽게 식지 않을 것이고, 처음부터 다시 한다 한들 레벨이 오른 만큼 이제는 시간을 더 단축시킬 수 있을 테니까.
대신 다시 크로스로드로 향했다. 그쪽에도 전달해야 할 퀘스트 아이템이 있는 것이다.
‘시간이 아슬아슬하겠는데 ’
하지만 시간을 확인하니 아슬아슬하다. 이대로면 자칫 제대로 퀘스트를 발동시키지도 못하고 강제 로그아웃이 될 판. 로칸은 서둘러 수비대 건물을 찾았다.
“말킨 님, 이것 좀 봐 주십시오.”
“이게 뭔가 ”
“강력한 저주가 깃든 짐승의 뼈입니다. 저주받은 생명의 동굴 속, 트롤의 서식지에서 발견했습니다.”
“음 그 말은 혹시…….”
척이면 척. 조사단원답게 말킨은 즉시 상황을 알아차렸다. 애초부터 그 동굴에 트롤이 자리 잡은 이유에 대해 의문이 있었기에 단서를 곧장 추측과 확신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게 정말이라면 큰일이군. 트롤마저 이럴 정도라면 다른 몬스터들 역시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겠어. 로칸, 지금부터 나는 이 뼈에 대한 연구를 맡기러 가겠네. 자네는 트롤 이외에 영향을 받은 다른 몬스터들을 찾아 줄 수 있겠나 ”
“물론입니다.”
[변이된 몬스터][퀘스트]
저주의 기운을 품은 짐승을 먹고 변이를 일으키는 몬스터를 찾아라. 변이가 깊어지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완료 조건 : 변이된 몬스터 확인 (0/3)
-보상 : 90실버, 크로스로드 수비대의 창(매직)
로칸이 쓸 만큼은 아니지만 보상으로 나온 크로스로드 수비대의 창은 제법 쓸 만했다.
그러나 어차피 목적은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였다. 퀘스트를 흔쾌히 수락한 로칸은 최대한 상점가로 걸어 나온 뒤 접속 제한 시간에 맞춰 로그아웃을 했다.
“끄응, 매번 고생이군. 그러고 보니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
로칸이 떠올린 것은 곧 진행될 패치였다. 자잘한 내용들이 담겨 있지만 가장 큰 핵심은 캡슐 형태의 접속기를 사용하는 이들에 한해 접속 제한 시간을 대폭 완화하는 것이다.
캡슐형의 접속기를 사용할 경우 그 안에 들어차는 영양액 덕분에 오랫동안 접속 해제를 하지 않아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심지어 더 로드를 플레이하는 동안 뇌가 운동을 하는 것처럼 인식해서 오히려 몸이 더 좋아질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될 경우 일반 접속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큰 손해를 보게 되지만 개발 운영사인 팔콘은 배짱을 부렸다.
싫으면 하지 말든가.
‘별 의미 없긴 했지.’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미 하드코어하게 플레이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캡슐형의 접속기를 이용하고 있었다. 감도며 반응 속도가 좀 더 좋았으니까.
오히려 그보다 더 이슈가 되었던 것은 다른 제품의 출시였다.
“오, 나왔네 ”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을 해 본 로칸은 원하던 것을 발견했다. 바로 캡슐형 접속기 전용 슈트였다.
현재 캡슐형 접속기는 자체 거름망과 여과기를 통해 사용자의 대소변을 거르고 정화해 주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찝찝한 기분은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주기적으로 영양액을 교체해 주어야 했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접속 제한 완화 패치와 더불어 전용 슈트가 발매되었던 것이다.
상하의 일체형으로 입게 되어 있는데, 대소변에 의한 오염을 막아 주고 슈트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정화해 주기까지 하니 적어도 영양액의 오염은 막을 수 있었고 전기 자극을 주어 신체에 운동 효과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로칸은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여유 있게 두 벌이나 주문하고 즉시 캡슐에서 동영상을 다운받았다.
다른 자들이 3차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편집을 끝내서 최대한 주목을 받아야만 했다.
* * *
“끄응, 빨리 편집자를 구하든 해야겠군.”
빠르게 영상 편집을 끝내야 했던 덕분에 접속 제한 시간이 풀릴 동안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영민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지압하며 영상을 업로드했다.
이번 영상은 모두 두 개.
하나는 크로스로드 최초의 던전 클리어 및 공략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초반에 꿀을 빨 수 있는 사냥법에 대한 것이었다.
‘따라 할 수 있으면 따라 해 봐.’
물론 두 가지 영상 모두 함부로 따라 했다가는 레벨만 다운되겠지만 적어도 로칸의 영상 속에서는 꿀도 그런 꿀이 없어 보였다.
이것을 본 크로스로드 진출 유저들은 함정인 줄도 모르고 도전했다가 갈려 나가기만 하겠지.
그렇다고 로칸을 탓하거나 욕할 수만은 없었다. 로칸은 저렇게 쉽게 시범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남들에게 이야기해 봤자 ‘네 컨트롤을 탓해라.’라는 소리만 들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영민은 또다시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떡밥을 던져 두고 더 로드에 접속했다.
“왜죠 왜 팔지 않겠단 말입니까! 돈은 충분히 있다니까요 ”
그리고 접속과 함께 울려 퍼진 하이 톤의 고성 때문에 귀를 막아야 했다.
‘유저 ’
벌써 크로스로드에 새로운 진출자가 생겨난 것이다.
‘하루 이틀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는 빨랐지만 전생과 비교하면 아주 빠른 것만은 아니었다.
난이도 높은 100레벨 몬스터를 피하고 고만고만한 놈으로 잡는다고 생각할 때, 또 개인이 아닌 집단이 움직여 정보를 수집했을 경우 충분히 누군가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니까.
다만 다들 로칸의 거짓 정보에 속아 ‘더 좋은 보상’을 노리고 99레벨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제 그마저도 슬슬 몬스터의 패턴에 익숙해져 극복하는 자들이 나올 테고.
‘시작은 역시 하프엘프로군.’
로칸은 상황을 파악한 즉시 몸을 숨기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종족과 클래스를 가늠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끔한 모습으로 상점에서 소란을 피우는 무리는 하프엘프로 이루어진 전사 계열의 유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