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1인 척살 (2)
“죽여!”
그러나 이번에는 적들도 만만치가 않았다. 나름 상위권이라는 MP의 정예들이다. 직업에 대한, 스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고 무엇보다 피지컬이 훌륭했다.
현실에서 무술이라도 하나씩 하는 것인지 어떤 자는 복싱 스텝을, 어떤 자는 묵직한 한 걸음을 내디디며 로칸을 덮쳐 왔다.
“크허허허허헝!”
워 크라이가 터졌지만 이번에는 영 신통치가 않았다. 능력치가 저하된 듯 움직임이 굼떠지기는 했지만 기절을 한 자는 없는 것이다. 레벨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뭔가가 작용한 듯싶었다.
“안 통해, 새끼야!”
그것도 모자라 로칸에게 무기를 휘둘러 오기까지 했다.
“어쩌라고!”
까강!
하지만 쉽게 공격을 허용할 로칸이 아니다. 배틀 액스를 휘둘러 놈들의 검을 일수에 떨쳐 버렸다. 강력한 힘으로 동시에 찔러 오는 세 개의 검을 동시에 날린 것이다.
신기에 가까운 움직이지만 로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함성이랑 버프겠지, 뭐.’
워 크라이가 통하지 않은 것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다른 스킬 효과로 디버프가 상쇄되거나 약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게다가 워 크라이는 그저 거들 뿐, 로칸은 오직 자신의 실력만을 믿었다.
“이것도 받아 봐라! 파이어 인챈트!”
이번에는 무기를 강화하는 인챈트 스킬이었다. 화려하게 불길을 휘감은 장검이 긴 호선을 그렸다.
“병신.”
그러나 로칸의 대응은 간결했다. 풀스윙으로 휘두르는 상대를 비웃으며 배틀 액스의 도끼 자루를 짧고 잡고 휘둘렀다.
도끼가 아무리 묵직한 한 방이 있는 무기라지만 난전의 상황에서 저처럼 풀스윙을 마구 휘둘러 대는 것은 초보나 하는 짓이었다.
가벼운 장검과 중병기인 배틀 액스가 동시에 휘둘러졌지만 먼저 도착한 것은 배틀 액스였다. 심플한 동작과 무지막지한 힘이 그 차이를 만들어 냈다.
“꺽!”
그것으로 끝이었다.
“미친! 힘체가 메인이 아니었어 ”
“흩어져!”
더불어 한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로칸이 힘뿐 아니라 민첩도 크게 올렸다는 것이다. 공격 속도가 오직 민첩에만 영향을 받는다고 믿은 탓이다.
일반 게임이라면 그렇겠지만 더 로드는 달랐다. 어디 야구에서 배트 스피드가 몸이 가볍다고 빨라지는 것이던가 연속적으로 휘두르는 것이라면 모를까, 짧은 격돌에서의 공격 속도는 오히려 힘에 더 영향을 받는 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오해는 큰 실책을 불러왔다.
“리프 어택!”
“큭!”
로칸의 민첩이 낮을 것이라 상정하고 기동력과 마법 화력을 살리려던 놈들의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다. 뛰어 봤자 금방 잡힐 것이라 예측한 생각이 움직임을 굼뜨게 하고 손발이 맞지 않게 만들었다.
로칸은 그 틈을 치고 들어가 최대한 빠르게 놈들의 수를 줄여 놓았다.
그렇게 한참을 날뛰어 대고 있을 때, 로칸의 뒤에서 무언가가 솟아났다. 은신을 한 채 타이밍을 재고 있던 도적이었다.
“비열한 습격! 칼날 비틀기!”
“…… ”
푸욱!
어지간한 공격은 맨몸으로 튕겨 내는 로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막아 낼 수 없었다. 등에 칼날이 박혀 들고 비틀어지며 상당한 출혈이 났다.
“스트라이크!”
퍼억!
재빨리 팔을 휘둘러 놈을 떨쳐 냈지만 상태는 제법 심각했다.
‘출혈’은 상태 이상 중에서도 꽤나 고약한 축에 속했다. 포션을 붓거나 사제의 치료 주문을 받지 않는다면 어지간해서는 멈추지 않는 것이 출혈이기 때문이다.
“잘했어!”
그리고 상대들도 그것을 알기에 곧바로 손을 썼다. 포션을 꺼낼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무차별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까가가강!
로칸은 배틀 액스를 휘돌려 그것들을 쳐 냈지만 포션을 꺼낼 시간까지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흐흐흐! 그렇게 천천히 죽어 가라!”
후두두둑 투둑.
“…… ”
그러나 그때, 로칸의 등에서 쏟아지던 피가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연애편지 퀘스트를 통해 얻은 눈물 에메랄드 목걸이의 힘이었다. 즉시는 아니지만 빠른 시간 내에 지혈 효과를 갖는 매직 등급의 목걸이. 그것이 힘을 발하자 핏자국은 금방 말랐고 상태 이상 출혈이 해제되었다.
“다 했냐 ”
남은 것은 성난 사자와 같이 으르렁거리는 로칸뿐이었다.
* * *
정예 격파!
MP 길드에서 비밀리에 이적한 이들은 로칸에게 제법 상처를 입히긴 했지만 결국 모조리 깨졌다.
아직 PK가 아니었던 그들이었지만 로칸을 공격하며 일시적으로 ‘범죄자’가 되었고 로칸에게는 정당방위가 인정되었기에 PK에 준하는 페널티를 받았다.
“이 자식들…… 사랑한다!”
대량의 경험치 하락과 아이템 드롭!
한 푼이 아쉬운 이때에 일곱 명이나 되는 이들이 착용 템을 드롭한 것이다.
원래는 피리아도 서넛 정도로 생각했다가, 로칸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진 것만 같아 짓밟아 버리라는 뜻에서 홧김에 여럿을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로칸을 짓밟고 영상으로 찍어 게시판에 박제한 뒤 떨어진 위상을 회복할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한 명을 당해 내지 못하고 몰살을 당한 데다가 주요 장비까지 드롭하다니 피리아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2층집을 가졌다는 것을 적극 홍보하여 인원을 모으고 있기에 차츰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당장 그들의 장비를 복구해 줄 골드도 없었다.
다시 수준에 맞는 장비를 구하려면 미친 듯이 사냥을 하거나, 현금을 털어 골드를 구입해야 했다.
“아니지. 사랑합니다, 호갱님~ 하고 인사를 해야 하나 흐흐.”
그렇기에 로칸은 그들이 자신의 사랑스러운 ‘호갱님’이 되어 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직하게 사냥을 해서 복구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테니까.
물론 파티를 이루어 서로를 보완하면서 사냥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이미 PK 집단인 블러드 체이서에 발을 담근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영역의 일이었다. 차라리 무슨 수를 써서든 로칸을 처치하고 다시 MP 길드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리라 생각하겠지.
그리고 그 판단은 로칸에게 더 많은 수입을 안겨 줄 터였다.
지금은 2배의 시세이지만 가진 골드를 다 풀어 낼 생각이 없으니 가치는 점점 더 뛰어오를 것이다.
“이번엔 또 어디로 가 볼까나…….”
물들어 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을 떠올리며 로칸이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PK를 통해 소모한 골드를 회복하려는 블러드 체이서를 탈탈 털어 주머니를 두둑하게 불렸다.
중간에 다시 정예들이 나타나긴 했지만 장비마저 부실해진 상황에서 로칸의 상대가 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로칸 역시 그들의 전투 스타일에 익숙해졌기에 버서크를 사용하지 않고도 가뿐하게 연달아 박살을 내 주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로칸은 한참 동안 PK 사냥을 하다가, 놈들의 출몰이 뜸해질 때쯤 신분 위장을 사용해 골드를 거래했다.
서비스 같은 것을 챙겨 줄 필요도 없었다. 골드가 씨가 마른 지금, 골드를 판매해 주는 것만으로 절을 해야 할 상황이니까.
총 판매된 골드는 20골드. 그것도 10골드씩 쪼개서 두 곳에 나누어 팔았다. 쉽게 돈을 버는 것도 좋았지만 한쪽의 상황만 좋아지는 것은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골드를 구매한 두 길드 중에 블러드 체이서나 MP는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질수록 높은 시세에도 골드를 구입할 테니까.
로칸은 그들에게는 내일쯤 판매하기로 생각하고 일단 접속을 종료했다.
* * *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
영민이 접속 제한 시간이 다 되기도 전에 로그아웃을 하는 것은 무척이나 드문 일이었지만 반대로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부르르르르!
그때 영민의 스마트폰이 모처럼 춤을 췄다. 카톡이다.
[수희♡ : 혹시 오빠가 로칸이야 ]
단도직입적인 문자. 회귀한 순간부터 신경도 쓰지 않아 저장된 이름도 바꾸지 않은 전 여친 임수희였다. 분명 자신을 차단했을 텐데 이렇게 톡을 보내는 걸 보면 이 질문을 위해 차단을 해제한 모양이었다.
“타이밍도 좋군.”
임수희도 게임을 좋아하다 보니 아무래도 함께 게임을 즐긴 적이 여러 번이라, 영민이 자주 사용하던 아이디를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확신하지는 못하는 듯싶었다. 로칸이라는 아이디도 알고 있고 수준급인 영민의 게임 실력도 알고 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전생의 그는 이 시절에 이만한 힘과 컨트롤을 갖추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왔나 ”
딱히 올 사람이 없는 곳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영민이 신청을 해서 불렀으니까.
그들은 바로 팔콘사의 엔지니어들이다. 영민이 캡슐 이전 서비스를 신청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이 그가 이사를 가는 날이니까.
[나 : 메탈리어 아이디 말하는 거야 ]
영민은 스마트폰을 터치해 의뭉을 떨어 주고는 팔콘사의 엔지니어들을 맞이했다.
근육이 좀 붙었을 뿐 외형을 많이 변형하지는 않았으니 결국에는 영민이 로칸임을 알아차릴지도 모르지만, 아주 잠깐의 시간만 벌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이사 가는 집의 위치는 아무도 알지 못하니까.
영민의 자취방 위치를 알고 있는 임수희를 통해 누군가 현피를 하려 해도 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아직 더 로드를 통해 큰 수익을 올리지 못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이사를 하는 이유도 비좁은 원룸이 살기 불편한 것보다 블러드 체이서, 그리고 MP 길드와 맺은 악연 때문이었다.
이만한 피해를 입었으면 당장 쫓아와도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시죠.”
작은 원룸에 불과했기에 짐은 별로 없었다. 이삿짐센터까지 부를 것도 없이 작은 용달 하나면 충분했고, 이사할 집의 위치도 크게 멀지 않았기에 이사는 빠르고 단출하게 끝이 났다.
대부분 잡동사니들이고 실제 필요한 건 옷가지 조금과 더 로드 접속기인 캡슐뿐이니까.
“자, 그럼 다시 사냥을 시작해 볼까 ”
단 몇 시간 만에 이사를 끝낸 영민은 곧장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 * *
그리고 그 몇 시간 동안, 상황은 꽤 많이 바뀌어 있었다.
“와, 이놈들 미쳤네.”
사실 따지고 보면 로칸이 몇 번이나 그들을 털어먹은 탓이었다. 수금하듯 사냥터를 휩쓸고 다녔는데, 역으로 로칸에게 몇 번이나 아이템을 헌납하고 나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놈들은 건드려서는 안 될 자들을 건드렸다.
“이게 자폭인 걸 모르는 건가 ”
바로 길드였다.
그동안은 암묵적인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던 그들이다.
길드들은 성장에 방해되지 않는 것은 물론, 잠재적 경쟁자인 일반 유저들의 성장을 늦춰 주니 좋고 블러드 체이서는 위협적인 길드들과 척을 지지 않아서 좋으니 서로를 보고도 못 본 척 그냥 넘어가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깨졌다. 자금의 압박 때문인지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었다 여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블러드 체이서가 길드들의 사냥터를 습격한 것이다.
노리는 것은 당연히 몬스터가 아닌 유저였다.
로칸이 없는 동안 로칸을 맡기 위해 내려 왔던 MP 길드의 정예들이 작정을 하고 그들을 털기 시작했다.
결과는 약간의 피해가 있었으나 블러드 체이서의 승리.
길드에 소속된 자들의 실력도 만만치는 않았겠지만 몬스터와 전투 중인 상황을 노려 뒤치기를 한 탓에 전투가 일방적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덕분에 판이 뒤집혔다. 갑작스러운 블러드 체이서의 행동에 길드들이 분노하고 나선 것이다.
비단 공격을 당한 길드만이 아니라 트린식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길드들이 들고 일어났다. 자신들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머리를 들자 애초에 싹을 잘라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암묵적 불가침이든 뭐든 어쨌든 불안 요소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길드들이 하나둘 블러드 체이서 척살에 동참을 하면서 도시 전체가 어수선해졌다. 쇠뿔도 단김에 빼겠다는 듯 아예 사냥마저 멈추고 블러드 체이서의 색출에 나선 것이다.
덕분에 로칸이 나설 기회가 없어졌다.
“쳇, 더는 꿀 빨기 힘들겠군.”
굳이 나서지 않아도 블러드 체이서가 천천히 무너져 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명백한 피리아의 판단 미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