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여행 예능과 영화 (49/53)

외전2. 여행 예능과 영화

그 예능은 녹화하기도 전부터 소란스러움을 먼저 가져왔다.

일단 첫째로 여태껏 대단한 톱스타는 거의 출연하지 않았던 그 크지 않은 예능의 스케일 때문이었고, 둘째는 그에 비해 유명해도 과하게 유명한 인물들 때문이었다. 그 어떤 배우도 이 예능을 통해 홍보를 하려 하지 않았는데, 첫 타자가 다름 아닌 예고편만으로도 들썩이게 한 영화 ‘집’ 주연 배우들이라니!

소란스러움을 가져왔던 이 이상 현상은 사실 고우혁으로부터 시작됐다.

“이번 영화 홍보 예능, 아직 미정이죠?”

“응. 왜? 따로 생각해 둔 거라도 있어?”

“‘여행자들’은 어떨까 싶어서요.”

익숙한 여행 예능 이름에 고우혁의 매니저가 성을 내며 외쳤다.

“……왜 또 거기야?!”

그 예능이라면 저번에 고우혁이 우겨서 엘앤엘 출연 때 패널로 나온 예능이 아닌가!

이쯤 되니 매니저로선 퍽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봐 온 이래 신경 쓸 일이라곤 거의 없을 정도로 알아서 잘하던 나의 배우가! 작년을 시작으로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연애를 시작한 이후로! 저 망할 예능도 그 연애가 끼어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매니저는 자부할 수 있었다.

“저번 패널 때도 그렇고, 재밌을 것 같아서요.”

“왜 하필 거긴데? 여행 가고 싶은 거면 다른 여행 예능도 많잖아! 아니지, 그것보다는 여행 예능을 대체 어떻게 찍으려고? 안 그래도 바쁜데!”

당장이라도 ‘너 홍보가 목적이 아니라 연애가 목적이잖아!’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그렇게 외쳤다.

고우혁의 입에서 직접적으로 연애를 한다는 말이 나온 적은 없지만,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당사자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거며, 보란 듯이 켜져 있는 메신저 창이며. 게다가 전화는 또 얼마나 대놓고 하는지, 그 상대가 누군지 파악하기는 더 쉬웠다.

지금 언급한 ‘여행자들’도 그와 연결되는 예능이었다. 올해 초, 저 작디작은 프로그램에 요청도 안 한 패널을 직접 하겠다 나섰던 이유도 뻔했다. 그때는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까 그게 다 엘앤엘의 주선율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담당 피디님께 물어보니까 국내 여행도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철두철미한 데다 친화력까지 좋은 우리 배우님은 이미 담당 피디 연락처까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 제기랄, 지금 그 피디만 살판났겠는데. 처음에나 입소문이 돌았지, 이제는 시청률도 잘 나오지 않아 매일같이 종영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한물간 예능에 톱스타라니. 내가 그 피디였어도 쌍수를 들었을 거라며 매니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지만 입을 다문 이유는 하나였다. 고우혁이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8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저 얼굴의 고우혁은 절대 제 뜻을 굽히지 않는다.

망했다. 결국 고우혁의 매니저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올해 초에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끄덕이는 일밖에 없을 것 같았다.

* * *

“우혁 씨 매니저 울었겠는데요.”

고우혁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고개를 까딱이며 퍽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자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웃는다. 농담 아닌데.

“그래서 결국 억지로 허락받아 낸 거예요?”

“억지라뇨. 다들 별로 반대도 안 한걸요. 선율 씨는 어땠어요?”

반대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그냥 알았다고 한 거 아닐까. 의심스럽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번에 콘서트 이후로 영환이 형이 우리 사이 눈치채서 알아서 해 줬어요.”

단독 콘서트 날, 고우혁이 내 손을 잡고 떠난 이후 영환이 형은 뭔가를 눈치챈 것 같았다. 아니, 하대진 빼고 전부 다. 걔는 내가 그렇게 수상하게 갔는데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당시에는 왜 손을 잡고 있냐느니 하던 소리를 하더니, 이젠 다 잊은 것 같기도 하고……. 이쯤 되니 그냥 내 연애사에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영환이 형은 다른 애들과는 달리 조금 이상한 기색을 보였다. 고우혁과 관련된 일에 복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묘하게 찝찝한 얼굴을 하는 게……. 뭔가 예상치 못한 걸 마주한 사람의 느낌이었다. 이상한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예전에 신기운이랑 나 밀어주려고 했던 게 떠올라서일까? 아니면 최백하고 연관된 건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표정을 하면서도 형은 내 연애사에 다양한 도움을 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홍보 겸 고우혁과 같이 예능에 나가고 싶다는 말에 두말없이 알았다고 했을 정도다.

“국내로 가게 돼서 조금 아쉬워요.”

고우혁이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에 턱을 기댔다. 아쉽다고? 어쩐지 코웃음이 나온다.

“국내라서 출연할 수 있었을걸요.”

아니라면 스케줄 때문에 영화사고 소속사고 전부 다 결사반대를 외쳤을 것 같은데.

지난번 고우혁이 말했던 ‘여행 예능’은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진행됐다. 분명 가볍게 나온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상상 이상으로 준비가 착실하게 되어 가는 게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고우혁의 소속사가 엄청 싫어해서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예전에 하대진이 한 번 출연해 고우혁도 패널로 나왔던 그때도, 고우혁의 매니저는 촬영 내내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이번에도 되게 싫어했을 것 같은데……. 대체 그 깐깐해 보이는 매니저를 어떤 말로 설득했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내 애인이 그렇게 말을 잘하나? 의아하게 힐끔거리는 내 시선을 뒤로한 채, 고우혁이 미련을 버리지 못한 얼굴로 말을 뒤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해외에서는 조금 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거 예능인 거 알죠? 우리만 가는 거 아니고 카메라도 같이 붙어 다녀요.”

“하하.”

왜 여기서 웃고 말아? 어서 안다고 대꾸해야지. 이러다가 가서 티라는 티는 다 내는 거 아니야? 나름대로 이어진 비밀 연애가 고작 1년도 안 돼서 전부 탄로 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마음에 몸을 일으켜 놈을 흘겨봤다. 붙어 있던 몸이 떨어지자 고우혁이 아쉬운 얼굴을 하며 말을 이었다.

“빨리 가고 싶다. 방송은 언제 할까요?”

순한 얼굴로 끝의 끝까지 조심하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 고우혁이 말을 돌린다. 그 뻔뻔하고 얄미운 얼굴을 흘겨보다 퉁명스럽게 입을 열어 “영화 개봉 근처에 나오겠죠.” 하고 대꾸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영화 하니까 뭐가 하나 떠오르는데…….

“그런데 혹시 감독님한테 뭐 이야기한 거 있어요?”

“네?”

눈을 댕그랗게 뜨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깜빡이는 표정에 나는 곧장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거 되게 수상한 반응인데. 저 모습을 보니 의심에 확신이 들었다. 나는 여행 예능에 대해 말하며 음흉하게 웃던 감독을 떠올렸다.

“감독님이 되게 수상하게 굴던데. 지금 당신처럼.”

“하하. 나 아무 말도 안 했어요.”

“…….”

내 미심쩍다는 표정에도 고우혁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무 말도 안 했다기엔 그때 감독 표정이 매우 음흉했는데. 연애하는 걸 다 들킨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한참 동안 말없이 그 해맑은 얼굴을 흘겨보자, 고우혁은 내 의심을 풀어 주는 대신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선율 씨. 계속 그렇게 나랑 떨어져 있을 거예요?”

퍽 애잔한 얼굴이다. 슬쩍 제 옆의 이불을 걷어 내며 내게로 손을 뻗는 건 퍽 귀엽고. 어서 이리로 오라는 무언의 압박에 여태까지 흘겨보던 건 다 잊은 채 웃음을 터뜨렸다.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웃음을 참고 있다는 걸 다 알면서도 고우혁이 눈썹을 내린 채 가만 바라본다. 보채는 것 같은 얼굴에 속이 간질거린다. 나는 애써 너무 환하게 웃지 않도록 입술에 꾹 힘을 주며 괜히 더 표정을 굳혔다.

“당신 내일 리딩 날 아니에요?”

“괜찮아, 오후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빨리 와 줘요.”

저게 바로 ‘그’ 고우혁이라니. 그 누구보다도 연기에 진심이던 그 톱스타가 나한테만큼은 약해지고 느슨해지는 게 진짜…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다. 요즘 나는 내 취향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고 있었다. 난 아무래도 고우혁이 취향인 것 같다. 이 사람이 귀여운 게 좋고, 이 사람이 능청스럽게 구는 게 좋으니까.

나는 결국 실실 웃으며 슬금슬금 고우혁에게로 다가갔다.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빙긋 웃은 고우혁이 내 손을 맞잡고 제 쪽으로 이끌었다. 나는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고우혁에게 몸을 기대며 속삭였다.

“그런데 요즘 왜 자꾸 먼저 침대에 들어가서 나 기다리는 거예요?”

“어디서 들었는데, 연인 사이에 신호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무슨 신호?”

“오늘은 잠을 조금 늦게 자자는 신호?”

웃기시네. 그 점잖은 대꾸에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냥 밤새도록 야한 짓 하자는 이야기를 되게 담백하게 한다. 그 말을 하며 한 행동은 담백하지 않았지만. 손끝으로 느리게 팔을 쓸어 올리는 행동이 야살스럽기 짝이 없다. 눈을 반쯤 내린 시선과 가만가만 이어지는 손길 속, 나긋한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선율 씨, 그런 글 본 적 있어요? 영화 예고편 영상에서 이현이랑 세언이 잘 어울린다고 하는 거.”

“안 볼 수가 없겠던데요. 너무 많아서.”

하나 지나서 하나 튀어나올 정도로 자주 보이던 말이다. 진짜 이상한 일이었다. 남녀 주인공이 명확한 멜로 영화 예고편에서 그 아들과 선생을 엮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고개를 젓는 내 모습에 고우혁이 뿌듯한 얼굴로 씩 웃었다.

“역시 다 티가 났나 봐요.”

“무슨 티가 나요. 나는 그때 마음 없었는데.”

“응. 선율 씨는 없었어요. 내가 마음이 있었죠.”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고우혁이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날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아, 일부러 짓는 표정이다.

“그러다가 내가 되게 재밌는 걸 봤는데…….”

낮게 속삭이며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김에 볼도 만지작거리고.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어두울 때 자주 보던 걸 이렇게 불 켜고 보니까 기분이 묘한데. 지금 바로 입맞춤이라도 할까 고민하게 만드는 얼굴이다.

“누군가 쓴 포스팅 글을 봤거든요.”

“……그런 말을 하면서 왜 이상한 표정을 지어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리려 하는데도 고우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아주 작정한 모양이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우혁의 의도에 따라 줄까? 고심하고 있던 찰나 휙 몸이 뒤로 넘어갔다.

“이현이랑 세언이랑…….”

“아!”

“침대에서 재밌는 걸 하더라고.”

침대에 누워 그 말을 들으니 괜히 아래쪽이 묵직해진다. 그렇지. 침대에서 재밌는 게 되게 많지. 흥미롭게 들으며 입술을 씰룩이다 뒤늦게 괴상한 표현을 떠올렸다. 누군가 쓴 포스팅 글에서, 침대에서 재밌는 일을 하는 김이현이랑 강세언을 봤다고?

“보다 보니까 실제로도 해 보고 싶어졌는데, 도와줄래요?”

“……재밌으면.”

이상하다는 듯 떠올렸던 문장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고우혁한테 재밌어 보였던 거면 나한테도 되게 재밌을 것 같은데. 눈을 반짝이는 순간, 환하게 웃은 고우혁이 대뜸 그렇게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선생님이라고 해 줄래요?”

“……도대체 뭘 본 거예요?”

갑자기 여기서 선생님이 왜 나와?

“야한 거.”

그 단어만큼 야하게 웃는 얼굴에 침이 꿀꺽 삼켜졌다. 진짜 뭘 본 거야. 나랑 고우혁의 배역들이 나오는 포스팅 글에, 침대에, 야한… 설마.

“……미치겠네. 설마 우혁 씨, 그, 팬, 팬픽 그런 거 본 거예요?”

“선율 씨, 그런 단어도 알아요?”

“……우혁 씨도 알아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아는 것보다 고우혁이 아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나야 애들이 말해 줘서 알았지만 고우혁은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나는 예전에 하대진이 신기운하고 자기를 엮은 괴상한 걸 봤다고 펄쩍 뛰는 바람에 알게 됐었다. 대체 어떻게 저리 자세하게 아나 싶을 정도로 공진하가 줄줄이 의미를 읊어 대서 덩달아 나도 뜻을 알게 됐고.

그나저나 어떻게 그런 게 벌써 뜬 거지? 영화도 개봉하기 전부터 뭔가가 쓰이고 만들어진다는 게 신기했다. ……고우혁이 그걸 본 건 더 신기하고.

“이번에 알게 됐어요. 되게 재밌던데. 되게 야하고.”

심지어 야한 걸 본 모양이다. 아니,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찾는 거야. 나도 영화 검색 좀 열심히 해 봐야겠다. 대체 어떤 내용이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도 해 보려고.”

내 양손에 깍지를 낀 고우혁이 고개를 숙였다.

“몰랐는데, 내 역할이 참 야하더라고요.”

“아!”

“세언아.”

애인의 입에서 오랜만에 나온 낯선 이의 이름에 등골이 오싹했다. 숨을 깊게 내뱉으며 내려다보자 올려다보는 시선과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다리 좀 벌려 볼까?”

“……흐흡.”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튀어나온 소리에 열심히 제 할 일을 하던 고우혁이 조용해졌다. 아, 어쩌지. 분위기 깬 것 같긴 한데, 너무 웃겨 가지고. 한참을 조용히 있던 고우혁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뚱해 보이는 목소리다.

“왜 웃어요?”

“변태 같아서.”

단호한 말에 고우혁이 고개를 돌린 내 턱을 붙잡아 시선을 맞추며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선율 씨, 몰랐구나. 나 변태 맞아요.”

“푸흐흡! 진짜 뻔뻔하네.”

아무렇지 않게 능청을 떨며 민망한 말을 내뱉는 고우혁의 모습이 너무 웃겼다. 누가 연기자 아니랄까 봐 얼굴은 태연하기 짝이 없다. 아니지, 이거 연기가 아닌 건가?

“선생님이라고 해 주면 안 돼요? 진짜 재밌어 보였는데. 우리 한 번만 잠깐 연기해 봐요. 진짜 이현이랑 세언이처럼.”

“김이현이랑 강세언은 야한 짓 하면 안 돼요.”

“괜찮아요. 이름만 같은 스핀오프 영화 찍는다고 생각하지, 뭐.”

무슨 스핀오프야. 깔깔거리며 웃자 고우혁이 퍽 심각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턱을 쥔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간 게 그대로 느껴졌다. 변태고 자시고 지금 상황에 그 누구보다도 진심인 고우혁이 나를 설득하려 애쓰고 있다.

“정말 영화라도 하나 찍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연기해 봐요. 지금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고.”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고? 나는 정색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변태네.”

“그렇다니까.”

“그래도 그거 싫어요.”

내 단호한 말에 고우혁의 어깨가 내려갔다. 눈썹도 축 처지는 게 잔뜩 시무룩한 모양새다. 대체 뭘 봤길래 저 정도로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괜히 기대되네, 엄청 재밌을 것 같은데. 나는 짓궂게 웃으며 양손을 뻗어 고우혁의 뺨을 감쌌다.

“고우혁 씨랑 야한 짓 하는 건 강세언 말고 나만 할 수 있어서.”

“…….”

‘세언아’라니, 그것도 재밌을 것 같지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이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내 이름 하나였으면 좋겠는데. 나도 이현이니 뭐니 딴 이름으로 고우혁을 부르고 싶지도 않고.

나는 내 하나뿐인 애인에게 눈을 접으며 속삭였다.

“우혁 선생님.”

“……하.”

“우리, 좋은 거 할까요?”

깊게 숨을 내뱉은 고우혁이 제 뺨을 감싼 내 손을 쥐었다. 고우혁의 얼굴이며 손에 열기가 도는 게 느껴졌다. 말없이 숨을 고르던 고우혁이 허리를 숙여 입술에 짧게 입맞춤을 했다.

“선율 씨도 변태예요.”

“괜찮아요. 내 애인도 변태라 이해해 주는 것 같거든요.”

“하하, 맞아요. 되게 좋아.”

짧게 웃음을 터뜨린 고우혁이 내게 몸을 완전히 숙이며 다시 입맞춤을 이어 갔다. 내 손은 어느새 고우혁에게 이끌려 상대의 목 뒤에 옮겨져 있었다. 혀가 섞이는 퍽 야살스러운 소리 사이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상대가 옷을 벗기기 수월하도록 허리를 세웠다가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왜?”

한창 바쁘던 고우혁이 입술을 떨어뜨리며 묻는다. 나는 고우혁이 막 벗으려던 셔츠를 손수 벗겨 주며 귓가에 쪽쪽 입맞춤을 이었다.

“아까 했던 말 떠올라서요.”

“했던 말? 어떤 거요?”

어떤 거냐면. 느리게 손을 움직여 상대의 허벅지 안쪽을 매만졌다. 손끝은 무릎에서 시작해 더 안으로, 더 깊이 움직인다. 바지 버클을 일부러 소리 내어 풀었다.

“뭘 거 같아요?”

“……하하.”

짧게 웃은 고우혁이 고개를 틀었다. 그러고는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귓가로 고개를 숙이며.

“선율아, 다리 좀 벌려 볼까?”

만족스럽게 웃으며 상대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런 나를 마주 껴안은 고우혁이 웃음을 터뜨린다.

* * *

“아주 대놓고 연애하지 그러냐.”

최백이 드물게 대놓고 질색하며 짜증을 냈다. 아니지, 이 표현이 맞나 모르겠다. 얘는 원래 짜증을 잘 내니까. 하지만 내 연애를 시큰둥하게 보며 언급도 안 하려 하던 놈이 이렇게 애들 있는 곳에서 대놓고, 남들 다 알란 듯이 구박을 한 건 처음이었다.

“뭔 연애? 무슨 소리예요?”

그럼에도 하대진은 여전히 맹한 얼굴이었다. 저쯤 되니 약간 의심스러워졌다. 나중에 내가 대놓고 고우혁이랑 사귄다고 해도 못 알아듣는 거 아니야? 그 의심에 확신이라도 가져다줄 생각인지, 하대진이 화들짝 놀라며 날 돌아봤다.

“어! 뭐야, 너 설마 고우혁 선배님이 연막이야? 너 설마 가서 몰래 여친 보려고 일부러 가는 거야? 어?”

“…….”

“…….”

그냥 나랑 고우혁을 ‘연애’라는 카테고리 안에 안 넣는 것 같기도 하고. 헛다리를 열심히 짚으며 성질까지 내는 모습에 신기운이 경멸하는 시선으로 놈을 쳐다봤다. 그래, 나도 그 표정 이해가 간다. 연막은 무슨 놈의 연막이란 건지. 걔가 당사자다.

“너나 그쪽이나 되게 바쁘지 않아? 무슨 갑자기 여행 예능을 가?”

평소라면 하대진을 신나게 놀렸을 공진하도 아예 하대진의 말을 무시한 채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급하게 잡힌 예능이 괴상하게만 느껴지는 모양이다.

들어 보니 그 예능은 하대진이 나왔던 때만 해도 시청률이 꽤 나왔지만, 최근에는 시청률은 물론이고 화제성도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그때 패널로 나왔던 나와 고우혁, 공진하 사이에 있었던 미묘한 기류까지 떠올렸다면… 최백이 대놓고 연애한다며 짜증을 낸 것도 이해가 갔다.

“영화 홍보도 있고, 뭐…….”

“홍보 좋아하시네.”

“무슨 홍보를 여행 가서 해?”

최백과 공진하에게서 동시에 말이 쏟아져 나왔다. 너무 빈약한 변명거리였던 모양이다.

“선율이가 난감해하잖아. 그만해, 형들.”

난감해하는 내 모습에 강이헌이 편을 들어줬다. 나는 눈짓으로 감사 인사를 보내며 슬금슬금 움직여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탐탁지 않게 보는 시선들이 영 신경 쓰인다.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영환이 형이 나타났다. 형은 아직도 주섬거리며 뭔가를 챙기고 있는 날 보고는 경악한 얼굴을 했다.

“뭐야, 선율이 너 아직도 짐 싸고 있어?”

“다 했어.”

“어휴, 지금 당장 나가야 해! 뭐야, 지금 뭐 남았어?”

영환이 형이 다가와서 주섬주섬 나를 따라 뭔가를 넣기 시작했다. 대강 정리가 다 되자 나보다도 먼저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은 형이 끌고 앞서 나가며 빨리 따라오라고 소리를 외쳤다.

그렇게 그 예능 여행은 소란스럽게 시작됐다.

* * *

“안녕하세요.”

카메라가 잔뜩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 들어가는 건 항상 어렵다.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인사를 하자 먼저 기다리고 있던 고우혁이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나는 그런 상대에게 다가가면서도 스태프들 쪽을 계속해서 힐끔힐끔 바라봤다. 무시무시한 카메라 부대가 신경을 다 뺏어 간 탓이다.

아니, 여행 예능이라며. 리얼리티 때보다도 카메라 더 많은 것 같은데. 앞에 둔 어마어마한 인파를 두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는 고우혁이 퍽 대단해 보였다.

“조금 늦었네요. 늦잠 잤어요?”

“그건 아닌데, 멤버들이 자꾸 짐 싸는 걸 방해해서…….”

내 말에 말없이 지켜보던 담당 피디가 경악했다.

“짐을 오늘 챙기신 거예요? 출발 날에?”

“아니, 어제 하긴 했는데 깜빡한 게 몇 개 생각나서 그거 챙긴다는 게…….”

괜히 변명하듯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힐끔힐끔 피디의 눈치를 봤다. 딱히 화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괜히 더 찔렸다. 아무리 급하게 잡혔다고 해도 어제 다 끝냈어야 하는 게 맞기도 하고. 그나저나 의외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을 때 피디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 줄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나 오기 전에 이미 촬영을 시작했을 줄이야.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진 이후, 곧이어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오늘 여행지는 들으셨나요?”

“그럼요. 아까 주신 표도 잘 받았는걸요.”

“아, 그걸 저희가 먼저 드렸던가요……?”

맹한 스태프들의 말에 고우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따라 웃을 수 없었지만. 표 준 걸 잊어버리면 어떻게 해. 문득 하대진의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내 출연 소식에 기뻐하기보단 말을 아끼는 모습에 왜 그러나 싶었는데, 이런 허술한 부분들 때문이었나?

시간 관계상 해외를 가지 못하게 된 터라, 갈 수 있는 여행지는 확 축소되었다. 그렇게 고심하다 가게 된 곳은 빤한 곳이었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한 번쯤은 다 가 봤을 법한 곳.

“제주도 가는 건 오랜만이네요. 선율 씨, 가 본 적 있어요?”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예요? 당연히 가 봤죠.”

울컥하며 말하자 고우혁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눈썹을 올렸다.

“여행으로?”

“……촬영 있어서.”

“아하하.”

그럴 줄 알았다며 웃는 꼴이 좀 짜증 나지만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여행지로 가 본 곳은 거의 없었다.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는 더더욱.

“오늘 선율 씨 첫 여행인 거네요, 그렇죠?”

“아닌데요. 리얼리티 촬영 때 한 번 갔었어요.”

게다가 주희사 보러 왔다 갔다 했던 적도 있으니까 그것도 크게 보면 여행 아닌가? 여행자처럼 군 적은 없어도 외국 나가면 다 여행이지. 뻔뻔하게 굴며 턱을 치켜들자 고우혁이 자연스럽게 볼을 꾹꾹 눌렀다.

“그래도 첫 제주도 여행은 나랑 가네요.”

“…….”

고개를 끄덕이며 그 손을 잡으려다 몸을 흠칫 굳히며 슬그머니 눈을 굴렸다. 눈이 마주친 스태프들의 얼굴이 맹하다. 넋이 반쯤 나간 얼굴을 확인하곤 나는 정색하며 고우혁의 손을 떼어 냈다.

“요즘 멜로 연기 연습하시나 봐요.”

“어떻게 알았어요? 요즘 매일매일 하거든요.”

손을 팩 떼어 내며 한 말에도 고우혁이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윙크를 날렸다. 왜 여기서 이러는 거야, 아깝게. 깔깔거리고 웃고 싶은 걸 꾹 참으며 고우혁이 꺼낸 비행기 표 하나를 가져왔다.

내가 반쯤 무시하는 것과는 다르게 저 멀리서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탁 트인 공항에서 촬영하는 터라 사람들 시선이 평소보다 배로 더 따가웠다. 나름대로 촬영 팀에서 통제를 하는 것 같았지만 거의 소용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홍보 하나는 잘되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표를 재차 바라봤다. 제주도. ……제주도에 뭐가 유명하지? 아무 준비 없이 온 나는 멍하니 바닥 어딘가를 바라보다 표를 안에 넣었다. 알아서 준비한다고 했으니, 그냥 따라나서기만 하면 되는 거겠지.

우웅!

하대진

너 무슨 공항서부터 소식이 이렇게 많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기운

영화가 아니라 예능이 잘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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