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46/53)

“생각했던 만큼, 잘 어울리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말없이 식사에 집중하던 주희사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것치고는 과하게 늦은 말이라 나는 머쓱하게 옷깃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조용한 끄덕임에 주희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넥타이 이야기 하는 거야?”

그때였다. 말없이 우리를 지켜보던 주상빈이 의아하게 물었다. 어울린다는 소리만 했는데 어떻게 바로 넥타이 이야기인 줄 알았지? 주상빈을 돌아본 나처럼 주희사도 말없이 놈을 쳐다봤다. 순식간에 자신에게 쏠린 눈들에 놀란 주상빈이 이내 머쓱한 얼굴을 한다.

“아니, 희사가 아까 넥타이 줬다는 이야기도 했고. 계속 선율이 목만 보고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

“아니, 그, 진짠데……. 아니다. 끼어들어서 미안하다. 대화… 계속 나눠.”

지그시 바라보는 주희사의 시선에 주상빈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어째 좀 그 꼴이 서글퍼 보였다. 왠지 전화 통화를 하러 간 주희민이 급격히 그리워진 표정처럼 보인다면 착각일까?

그나저나 관찰력도 좋다. 주희사가 그렇게 계속 쳐다봤었나? 난 하나도 몰랐는데. 신기하게 그 얼굴을 바라보다 착잡하게 고개를 내렸다. 손목에 찬 시계가 괜히 더 무겁게 느껴진다. ……왜 지가 선물해 준 건 몰라봐? 아무 소리도 안 하는 거 봐서는 진짜 못 알아보는 게 분명한데.

“아직 만나고 있니?”

그때였다. 주희사가 뜬금없이 그런 소리를 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아무런 말 없이 빤히 날 보는 시선에 뒤늦게 속내를 알아차렸다. 고우혁 이야기였다. 동시에 지난 생의 누나가 스쳐 지나간 건 반사적인 일이었다. 나는 애써 그 그림자를 잊으려 노력하며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잘 사귀고 있지. 누나도 그 남자 아직도 만나잖아.”

“……나는 그냥, 같이 있는 거야.”

뭐야, 지금 수줍어하는 거야? 기겁하는 나와는 달리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주상빈이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연애 중이었구나? 희사는 그 선본 사람이지? 잘 만나고 있는 줄은 몰랐네.”

“…….”

주희사가 얌전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예전이라면 다른 사람이 뭐라 하건 상관없이 자신이 물은 답부터 들으려고 날 지그시 바라봤을 텐데. 지금은 아예 자신이 무슨 질문을 했는지도 잊은 얼굴이다.

주상빈이 환한 얼굴로 그러다 결혼하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하자 시선이 저 멀리로 돌아간다. ……뭐야, 이거. 지금 그 자식이랑 진짜 결혼까지 하겠다 이건가?

“선율이는 누구야? 물어봐도 되려나?”

주희사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의 주상빈이 날 돌아보며 물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할 말은 딱 하나였다. 저 옆에서 주희사가 귀를 쫑긋 세우는 것도 문제고, 그냥 다 떠나서… 고우혁은 너무 유명하다. 나는 표정을 굳히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아니.”

“……그, 그래. 그렇지. 연예인이니까, 비밀 연애겠지.”

“뭐야, 뭐야?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주상빈이 어색한 얼굴로 이리저리 눈을 굴릴 무렵, 타이밍 좋게 주희민이 돌아와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 가벼운 행동에도 주상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펴진다. 나는 그 모습을 못 본 체하며 주희민을 보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신경 꺼.”

“아하하. 새침하게 말하는 거 봐.”

“대체 어디가 새침… 흠, 흠흠!”

중얼거리던 소리 다 들렸는데.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주상빈을 쳐다보자 기침을 거세게 하며 시선을 피한다. 주희민이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주희사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먼저 가 볼게.”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뒤집어져라 웃고 있던 주희민이었다.

“어어? 벌써? 아,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

“……다음에 보자.”

……그 자식이 온 건가. 큰형 생각 때문인지 꺼림칙하기 짝이 없는 주희사랑 선본 그 남자. 질색하는 얼굴을 하자 누나가 작게 웃는다.

평소에도 그다지 말이 많지는 않은 주희사는 짧게 인사를 한 번 더 하고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을 뚫어져라 보다 결국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올 거지?”

앞뒤 말이 뚝 잘린 말에도 주희사는 자리에 멈춰 선다. 그리고 살포시 웃는 얼굴로 날 돌아보며 속삭였다.

“그럼, 가야지. 내 동생이 티켓까지 줬는데.”

“…….”

이상한 기분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콘서트 표를 줬는데, 누나가 당연하다는 듯 오겠다고 대꾸한 것도. 내가 은근히 기대하며 올 거냐고 물은 상황도 괴상하게만 느껴진다.

저번 삶에서 콘서트를 할 때는 단 한 번도 누나에게 티켓을 준 적은 없었다. 굳이 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 있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저마다 무게를 잡고 존재감을 키워 간다. 한때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등 돌렸던 누나가 오기를 내심 바란다. 나는 이 모든 게, 그래. 특별했다. 이상한 게 아니라. 특별해서 참 낯설었다.

주희사는 등 돌려 다시 인사하는 일 없이 곧장 떠나간다. 언제나와 같은 뒷모습에 약간 웃음이 났다. 탁,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옆에서 아쉬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범인은 뻔하다. 주희민이었다.

“와, 섭섭하다.”

“뭐.”

“선율아, 형은? 형한테는 안 줘?”

“뭐가.”

“뭐긴 뭐야! 티켓이지! 콘서트 티켓! 진짜 내 거는 없어?”

이 자식은 왜 이렇게 확신이야? 뻔뻔할 정도로 자기 티켓 달라며 손을 내미는 모습에 나는 물론이고 이 꼴을 지켜보던 주상빈까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 전에도 생각했지만 되게 질척거린다.

“없어.”

“있을 텐데!”

“……희민아, 그냥 내가 줄게.”

“아니, 형. 잠깐만. 내 거가 없을 리가 없다니까? 선율아, 진짜 너 언제 줄 거야?”

“너, 나한테 티켓 맡겨 놨어?”

“와, 이게 바로 밀당!”

“…….”

“…….”

대체 눈이 삐지 않고서야 이걸 보고 어떻게 밀당 같은 소리를……. 주상빈이 슬쩍 주희민에게서 떨어지는 게 보였다. 허연 안색으로 해탈한 듯 웃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주희민이 재차 뻔뻔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형도! 내 동생 첫 콘서트 보러 가고 싶다~”

“…….”

진짜 질린다.

* * *

예상은 했다.

“이야, 우리 막내 도련님 인물 훤칠해지신 거 봐. 역시 피부 관리에는 연애가 제일이에요. 그렇죠, 셋째 도련님?”

대체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안 실장은 오자마자 헛소리부터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 말에 주상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와 안 실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어, 안 실장님도 선율이 연애하는 거 알고 계셨어요? 그러면…….”

주상빈이 말을 이어 가다 말고 슬쩍 내 눈치를 본다.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주상빈과는 달리, 그딴 건 이미 다 갖다 팔아 버렸을 주희민이 해맑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러면 아버지도 알고 계시겠네요!”

“…….”

나도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말로 들으니까 더 최악이다. 예전이라면 이 새끼가 날 빡치게 하려고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의 해맑음이다. 이젠 그냥 주희민이 눈치가 과하게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요. 얼마나 대견해하셨는데요. 막내 도련님 첫 연애 기념으로 시루떡도 먹었어요.”

“네? 진짜요?”

“물론 제 마음속에서요.”

“아…….”

‘아’는 뭔 놈의 ‘아’야. 당연히 거짓말이지. 대체 뭘 기대했는지, 주희민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하다. 그럼 저 새끼는 지금 저거랑 아버지랑 나란히 앉아서 내 연애를 축하했으리라 생각한 건가? 머릿속이 대체 얼마나 꽃밭인 거야. 아버지와 안 실장의 대화는 채 열 마디도 넘어가지 않았을 거다.

“요즘 막내 도련님 길이 탄탄대로던데요? 드라마도 최고 시청률 갱신했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뭘 그렇게 다 알아요?”

질색하는 내 얼굴에 안 실장이 능글맞게 미소를 지었다. 소름 돋는다. 사실 스케줄이야 남들도 다 알고 있는 건데도 괜히 기분이 괴상했다. 저렇게 능글맞게 웃으며 다 안다는 듯 굴어서 그런가.

“어, 그거 나도 봐! 재밌더라.”

“연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일찍 연기를 시켰어야 했는데.”

주상빈이 아쉬워하는 소리를 뒤로한 채 신나게 드라마에 대해 늘어놓는 주희민을 바라봤다. 드라마까지 볼 줄은 몰랐는데. 하긴, 내가 나와서 본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사극이고, 볼만하고 하니까.

중반대를 훌쩍 넘어선 드라마는 점점 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나마 달달하고 아기자기했던 초반부와는 달리 후반부는 폭풍 속과 같아서인지, 아니면 악역과 주인공의 첨예한 대립 때문인지 시청률 또한 점점 올라갔다. 초반부 시청률에 대해 걱정하던 건 다 옛일이 됐다. 이제는 나도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드라마의 이름을 검색하는 걸 그만뒀다.

“올해 막내 도련님 사주가 트였나 봐요. 드라마도 잘되고 앨범 활동도 잘되고, 연애도 하고.”

묘하게 마지막 말에 강세가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안 실장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 애인한테서 신경 꺼요.”

“오.”

“와.”

뭔데, 이 반응은. 안 실장이야 말없이 깊게 웃었지만 주희민과 주상빈에게선 아예 웬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못 볼 거라도 봤냐? 반응이 왜 그런데.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에 주상빈이 손을 휘저으며 변명을 내뱉었다.

“아니, 네가 이런 말 할 줄은 몰라서. 희사도 그랬지만 너도 되게 잘 사귀고 있구나. 잘됐네.”

당연히 잘 사귀고 있지. 오랜만의 데이트라며 신나게 이쪽으로 오고 있을 고우혁을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내가 딴 건 몰라도 애인 하나는 꽤 잘 사귀었다. 전생에 나라는 안 구했는데, 운도 좋지. 고우혁의 장점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딱 하나만 꼽자면 가까워지면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거였다.

“도련님들, 지금 저 표정 보셨어요? 이야, 참. 연애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더니, 그게 우리 막내 도련님한테 해당하는 말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안 실장이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옆에 있던 주희민이 실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연애 전부터 좀 바뀌지 않았어요?”

“썸 타면서 바뀌었나 보네요.”

“……그런 단어도 쓰세요?”

아, 좀. 안 실장 지금 누구 데리러 온 거 아니었어? 왜 안 가고 여기 붙어서 내 이야기만 하는 거야. 표정을 구기며 짜증을 내자 눈이 반짝거린다.

“내 연애사에 관심 끄라고.”

“어휴! 그게 끈다고 끌 수가 있나요. 아, 도련님 첫 콘서트도 얼마 안 남았죠? 여유만 있었으면 갔을 텐데 아쉽네요. 다른 분들도 가시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말에 주상빈이 슬쩍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저는… 그, 일이 있어서. 그 주 내내 출장이라.”

“뭐?! 진짜? 와, 형 너무한다. 애 첫 공연인데! 형네 회사잖아.”

“넷째 도련님은 보러 가세요?”

그 말에 주희민이 한숨을 푹 내쉰다.

“표가 있어야 가죠. 날은 빼놨는데 선율이가 자꾸 부끄러워해서…….”

“야! 내가 언제.”

“어휴, 보셨죠. 말도 못 꺼내게 하는 거.”

“막내들의 매력이죠.”

“역시! 안 실장님은 알아주실 줄 알았어요.”

“그럼요. 제가 막내 도련님 업어 키웠잖아요.”

“…….”

집에 가고 싶다.

날 놀리러 온 양 신나게 떠들던 안 실장의 목적은 주상빈이었다. 업무상 본가에 가게 됐다는 말에 주희민의 표정이 부러움으로 가득 찼다. 본가에 가는 것도, 아버지를 만나는 것도 부러운 모양인데……. 많은 생각이 오가서 기분이 미묘했다. 회귀 전도 떠오르고, 작년 일도 떠오르고.

“넷째 도련님도 가실래요?”

그 빤히 보이는 얼굴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는 안 실장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묻자, 주희민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늘은 다시 회사로 돌아가 봐야 해서…….”

“……뭐?”

뭐가 어째? 나는 깜짝 놀라 시계를 바라봤다. 이 시간에 회사를 간다고? 9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새벽 촬영을 가는 것도 아니고, 대체 회사원이 왜.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런, 넷째 도련님도 워라밸이 별로네요.”

안 실장이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지금 이쪽도 퇴근 안 한 거잖아. 내 지난 생 모든 기억 속의 안 실장은 낮에도, 밤에도 존재했다. 대체 잠은 어디서 자는 거야? 내 기겁하는 시선을 알아차린 안 실장이 빙긋 웃는다.

“왜 그러세요, 막내 도련님?”

“어디 살아요?”

“네?”

“집 어디냐고요.”

“……제 집이요?”

안 실장이 미묘한 얼굴로 되물었다. 의아함과 당황이 잔뜩 뒤엉킨 표정이 평소 모습과는 영 매치가 되지 않는다.

“왜요? 데려다주시게요? 제가 알기론 우리 막내 도련님께선 면허가 없으신데.”

“그건 또 어떻게 아는, 아니. 지금 퇴근 안 한 거잖아요. 새벽에도 깨어 있던데 잠은 자나 싶어서.”

“…….”

표정이 알기 어려울 정도로 모호해진다. 뭐야, 이상한 말 안 했는데.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순간 뒤에서 주희민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거 드라마인가? 나 지금 선율이 저번 드라마 떠오르는데. 거봐 형, 선율이 완전 츤데레라니까.”

“희민아, 선율이가 너 노려본다…….”

……저 자식은 왜 이렇게 꼴 보기 싫을 때가 많은지 모르겠다. 환한 얼굴로 종알대는 모습을 노려보다 따갑게 쏘아지는 다른 시선에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뭐.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요.”

“다 컸다 싶어서요. 이젠 진짜 내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다 컸구나 싶어서.”

기다렸다는 듯 이어진 대꾸에 말문이 막혔다. 안 실장의 도움? 순간 기억들이 왈칵 쏟아진다. 생을 막론한 기억 속의 안 실장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 적당한 거리에 선 남자는 내게 어머니에 대해 말하고, 자리를 비운 아버지에 대해 말하고, 총을 쥐는 법에 대해 말한다. 능청맞게 웃으며 뭔가를 말하는 안 실장은 익숙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러다가 문득, 그런 의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 남자한테 나는 어떤 존재였는가.

순간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묘한 얼굴로 날 바라보던 안 실장이 들리란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괜히 울적하네요. 이것도 막내 도련님이 연애해서 변한 건가요? 저는 망나니 같은 우리 도련님도 되게 좋았는데……. 연애를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나 지금 되게 깊은 생각 중이었는데. 지금 저거 혼잣말이야, 아니면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은근슬쩍 속을 긁는 말에 표정을 일그러뜨리자 크게 기뻐한다. 예전 망아지 같던 얼굴 같단다. 이 자식은 날 싫어하는 거야, 좋아하는 거야? 내가 질색하며 떨어지는 꼴에 주희민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안 실장님이 선율이 아빠 같네요.”

“저 마음 이해할 것 같아, 나도. 선율이가 형이라고 했을 때의 그 복잡한 마음을 잊기가 어렵더라.”

주상빈이 그 말만큼이나 복잡한 얼굴로 하는 말에 주희민이 놀란 얼굴을 한다.

“어? 형한테도 형이라고 안 했어?”

“날 부른 적이 없었어.”

“……나한테도 그랬는데, 선율이는 만인에게 공평했구나.”

“…….”

다 들린다고. 지그시 노려보다가도 없는 말은 아니라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시선이 마주친 안 실장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아, 제가 도련님께 드리고 싶은 선물이 있었는데 잠시만요.”

“……?”

안 실장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꺼낸 건…….

“푸흐흡!”

“큽…….”

“…….”

웃음 참는 소리 속, 나는 내 성질머리를 참았다. 내 짧디짧은 인내심이 아슬아슬하게 붙잡혔다. 장난치는 건가 쳐다본 안 실장의 표정이 심각하다. 내가 집어 가지 않자 직접 내 손을 붙잡고 물건을 올려 두기까지 했다. 와중에 목소리는 신중하기 짝이 없다.

“성관계 시에는 꼭 콘돔 쓰고 하셔야 해요. 쓰는 방법은 아시죠?”

모르겠냐고. 나도 모르게 콘돔이 든 상자를 손으로 뭉갤 뻔했다. 침착하자.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 노력하며 최대한 상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시 가져가요.”

“제 선물 거절하시는 거예요? 넥타이도 하고 시계도 차셨으면서?”

콕 집어 말한 것들이 모조리 다른 사람이 준 선물들이다. 대체 뭘 어디까지 아는 거야?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인다. 주씨 집안사람들 일거수일투족을 다 체크하고 다니는 건가?

“시계……?”

주상빈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야 뭔가를 눈치챘는지 뚫어져라 내 손목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둔하다. 혀를 차며 안 실장을 돌아봤다.

“선물 받은 건 어떻게 아는 건데요.”

“제가 고른 디자인인걸요. 그렇죠, 셋째 도련님?”

“이게 진짜 그때 산 시계 맞아요? 선율이가 그걸 차고 나왔다고요?”

“이거 형이 선물한 거야? 괜찮네!”

주상빈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과 시계를 번갈아 바라봤다. 처음부터 눈치는 챘는데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모른 척하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어이가 없으면서도 동시에 이해가 갔다. 그… 흠. 내가 성격이 좀, 그런 편이긴 했지.

“아니, 나는 착각했나 싶었지……. 내가 선물해 준 거냐고 물었는데 아니라고 하면 민망하잖아.”

“…….”

“선물 주면서도 하는 상상은 못 했는데. 고맙다.”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했어.”

주상빈을 본 이래 가장 편안하게 웃는 얼굴이다. 나는 괜히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며 툴툴거렸다. 이제 이 선물 건은 적당히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주희민이 실실 웃으며 더 말을 이었다.

“내 말 맞지, 형? 선율이 츤데레야.”

“진짜 그런 것 같은데.”

“안 가? 본가 간다며. 그만 가.”

짜증을 팩 내자 웃음이 터진다. 나는 순간 엘앤엘 멤버들이 떠올랐다. 거기도 여기도 웃음이 많아졌다. 내가 시작한 변화가 모두를, 이 분위기를 변화시켰다는 게 새삼스레 신기하다. 고작 1년 전만 해도 같이 밥을 먹는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감회에 젖은 얼굴을 모르는지, 아니면 모르는 척한 건지 가만 우리를 지켜보던 안 실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을 피웠다.

“어휴, 가야죠. 우리 막내 도련님이 이제는 축객령까지 내리시고…….”

그게 뭔데. 낯선 단어가 끼어 있다. 반쯤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강 넘기려 손을 휘젓다가 뒤늦게 내 손에 아직도 쥐여진 콘돔 박스를 발견했다. 어이없네. 그 잠깐 사이에 익숙해져서 아예 들고 갈 뻔했다.

“이거 가져가라고요.”

“도련님, 저 이거 진심이에요.”

짜증을 내는 말에 심각하게 대꾸하는 꼴을 보니 속이 터진다. 이걸 진짜 가지고 가라고? 내가 이걸 쥐고 등장했을 때의 고우혁 얼굴을 떠올려 봤다.

“…….”

은근슬쩍 손을 내리며 등 뒤로 물건을 숨겼다. 흠, 뭐. 챙겨 가는 것도 괜찮겠네. 고우혁 반응이 궁금해서 가져가는 건 절대 아니다.

늦장을 부리던 게 거짓인 양 주상빈과 안 실장이 곧장 차에 탔다. 주상빈이 웃는 얼굴로 먼저 차를 타는 걸 본 안 실장이 운전석으로 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덥석 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잡힌 손에도 웃는 얼굴로 무슨 일이냐 묻는 모습을 보다 주머니에 있던 걸 내밀었다. 주희민이 자기는 왜 안 주냐며 노래를 부르던 그 티켓이었다. 예상치 못한 걸 받았다는 듯 상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거…….”

“그냥 주는 거니까 안 갈 거면 버려요. 기념으로 가지든가.”

“…….”

가만 바라보는 시선에 무슨 생각이 담겼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뒤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며 재촉했을 주희민도, 차에서 안 실장을 기다릴 주상빈도 이때만큼은 조용하다. 그래서인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평소보다도 더 고요하게만 느껴졌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얼굴에 미소가 조용히 번진다. 퍽 다정해 보이는 얼굴에 나도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이야, 절 이 나이에 두 시간 동안 세워 둘 생각을 하는 건 도련님밖에 없을 거예요.”

“콘서트 티켓 받고 그 소리 하는 사람도 그쪽밖에 없을 것 같은데.”

“도련님.”

“왜요.”

“지금 하고 있는 일. 좋아해서 참 다행이에요.”

잔잔한 목소리에 아까의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안 실장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는지,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당신은.

“빨리 가기나 해요. 저거 데려다 놓고 퇴근이나 하시죠.”

생각을 멈추고 슬쩍 멀어지며 툴툴거리자 안 실장이 안주머니에 티켓을 넣으며 생글생글 미소를 지었다.

“이야, 이 와중에 제 퇴근 걱정까지 하다니. 우리 막내 도련님이 이래서 인기가 많았군요.”

“좀 가라고.”

상대를 반쯤 강제로 운전석에 밀어 넣고는 배웅 아닌 배웅을 했다. 내 옆에서 손을 흔들던 주희민이 씩 웃으며 내 쪽으로 몸을 붙인다. 뭐야, 왜 붙어. 신경질적으로 쳐다보자 음흉하게 웃는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네?”

“…….”

“알았어, 알았어. 장난 안 칠게. 노려보는 거 진짜 잘해.”

대체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낯을 안 가리는 거야? 나한테 낯가리는 것도 웃기긴 하겠는데, 너무 거리감이 없다. 이젠 나한테 장난까지 칠 정도라니, 과하게 가까운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얘랑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아직 없는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주희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진짜 기분 이상하다. 너랑 나랑 이렇게 있는 거.”

“누군 아닌 줄 알아?”

“게다가 선물 생각하니까 조금 미안하네. 나도 네 선물 좀 챙길 걸 그랬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없어.”

딱 잘라 말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어둑한 주변에는 인기척도, 보이는 차도 없었다. 전화가 안 오는 걸 봐서는 내린 거 같지는 않고.

“가깝지 않아서 그런가, 형제 중 널 가장 모르는 거 같아. 유일한 동생인데.”

내가 주변을 살피며 고우혁을 찾든 말든, 깊은 상념에 젖은 주희민이 중얼거린다. 대꾸도 안 하는데 용케 놈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가는 게 대단해 보일 정도다. 그리고 질린다.

“너 향수 뿌리는 줄도 몰랐어. 데이트 때 엄청 신경 써서 나오는구나, 너.”

“……냄새 많이 나?”

무시할 수 없는 말에 슬쩍 몸을 굳히며 묻자 다행히 주희민이 신나게 고개를 저었다. 눈이 반짝거리는 게 과하게 부담스럽다.

“아니? 향 좋네. 무슨 향이야?”

“너한테는 말 안 해.”

“그래~ 내가 알아서 찾아볼게.”

……왜 이렇게 기분이 쎄하지. 설마 찾아서 살 생각인가? 나중에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자기도 같은 향수 샀다는 주희민이 떠올랐다. 아, 싫다고. 고우혁과의 향수에 이 망할 자식을 끼워 넣고 싶지는 않았다.

“너, 설마 따라 살 거야?”

“왜? 설마 이거… 여자 친구가 선물해 준 거야?”

“…….”

“맞구나? 이야, 사랑꾼이네.”

여자 친구. 침묵하는데도 넘겨짚은 주희민이 깔깔거리며 놀리기 바쁘다. 나는 미묘한 얼굴로 눈을 굴리다 익숙한 차의 모습에 시선을 멈췄다.

“아닌데.”

“응? 뭐가?”

“여자 친구. 아니라고.”

아, 나도 비밀 연애니 뭐니. 그런 거에 확실히 재능은 없는 것 같다. 얼굴에 티가 나는 것도 문제인데, 가끔 숨김없이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까지 한다. 내심 가족을 소개해 주길 바라는 고우혁을 알아서인가?

“다른 사람이 선물해 줬어?”

“굳이 따지면 남자 친구지.”

주희민의 의아한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며 대꾸했다.

“내 애인, 남자야.”

“……응?”

맹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역시. 내가 고우혁의 차를 순식간에 발견한 것처럼, 고우혁도 나를 곧장 알아본 모양이다. 모자도 없이 차에서 내린 고우혁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선율 씨.”

“왔어요?”

“어.”

환하게 웃고 있던 고우혁의 시선이 아직도 날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주희민에게서 멈췄다. 잠깐 놀란 것 같긴 했지만, 고우혁은 예상대로 딱히 거리낌 없이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고우혁이라고 합니다.”

“어어!”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누군지를 알아본 주희민의 눈과 입이 동시에 커졌다.

“대박! 알죠, 알죠. 와, 우리 선율이 연예인은 연예인이구나! 고우혁 씨를 실물로 보게 되다니, 와.”

의외로 되게 맹한 구석이 있다. 맨날 뭐든 열심히 하고 잘 해내서 빠릿빠릿할 줄 알았는데. 아까까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던 건 다 잊었는지 신난 얼굴로 고우혁을 반기고 있다. ……쟤가 어떻게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게 되는 거야?

“작품 재밌게 보고 있어요. 아, 저는 선율이 형, 주희민이라고 합니다.”

“네, 전에 토크쇼 같이 나오신 거 본 적 있어요.”

“세상에, 톱스타가 내가 나온 토크쇼를 봤다니……. 영광입니다.”

와중에 감격한 표정까지 짓는다. 야, 데이트라고. 내 애인 얘라고. 이름만 안 말했을 뿐 다 말한 거 같은데 왜 대뜸 딴 길로 샌 건지 모르겠다. 한심하게 쳐다보는데도 고우혁을 본 게 신기한지 조잘거리기 바쁘다.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르는 고우혁은 빙긋 웃는 얼굴로 그 말을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선율이 다음 약속이 그 고우혁이라니, 진짜 신기하네요. 저희 선율이랑 많이 친하신가 봐요.”

“그럼요. 아마… 제일 친할걸요.”

“…….”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씩 웃는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돌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 사귀니까 가장 친하긴 하다. 내 모습에 주희민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맞나 보네~ 우리 선율이가 부끄러움이 많아서 애가 좀 새침하게 굴어요!”

“아하하.”

“어휴, 그런데 얘는 데이트한다고 했으면서 왜 배우님을… 불렀… 어?”

드디어. 한참을 신나게 떠들던 주희민이 드디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반짝거리던 눈동자에 급격하게 생기가 사라지며 몽롱해지는 걸 보니 이제야 마음속으로 하나둘 퍼즐을 맞추고 있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보는데, 고우혁이 환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정말요? 선율 씨, 그렇게 말했어요?”

“맞잖아요.”

“소개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거든요. 지금 서로 소개하는 자리 맞죠.”

“아뇨. 그냥 얼굴만 보는 자리예요. 얼굴 다 봤으니까 이제 그만 가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딱 자르는 내 말에 서운한 얼굴을 하던 고우혁이 손을 잡자 다시 밝아진다. 주희민이 보는 앞에서 손을 잡았다는 게 기쁜 모양이었다. 뭐, 이 정도면 반쯤은 소개한 거 아닌가. 둘이 사귄다는 이야기만 안 했지 할 건 다 한 거 같은데.

나는 고우혁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말하고는 아직도 맹한 상태로 이쪽을 보고 있는 주희민에게 돌아섰다.

“나 간다.”

“……어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넋은 반쯤 놨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마지막 남은 티켓 하나를 꺼냈다. 챙기면서도 진짜 줄까 말까를 수십 번 고민했는데……. 그렇게 원하던 티켓을 꺼냈는데도 멍하니 바닥만 보고 있는 꼴을 보니 약간 애잔하기까지 했다. 이게 미운 정인가.

주희민의 눈앞에 티켓을 내밀었다. 계속 영혼이라도 없는 듯 맹하니 있던 주희민이 깜짝 놀라며 날 바라본다. 그 꼴마저도 맹하게 보인다. 바보 같아. 괜히 뚱한 표정을 하며 퉁명스럽게 말을 덧붙인다.

“오든가.”

주희민의 표정이 환해진다. 곧장 티켓을 쥔 놈이 밝게 웃었다.

“나 주는 거야? 세상에, 안 주나 했는데 고맙… 아, 아니. 이게 아니라, 너 설마 사귀는 사람이…….”

“바빠서 그만 간다.”

“야!”

더 이상의 말없이 등 돌려 차에 탔다. 이미 먼저 자리하고 있던 고우혁이 난감한 얼굴로 창밖의 주희민을 살피는 걸 보며 차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주희민의 고함이 들렸다.

“주선율!”

탁!

“…….”

“…….”

이제야 조용하네. 뻔뻔하게 웃으며 여유롭게 안전벨트를 매자 한참을 말없이 지켜보던 고우혁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정말 이렇게 가도 돼요?”

“괜찮아요. 한 번 이렇게 기겁하게 만들고 싶었거든요.”

“푸흡, 네. 알았어요.”

차가 출발한다. 주희민은 멍하니 자리에 서서 떠나는 차를 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주희민이 두 번째로 알게 된 건가. 고우혁과 있는 걸 안 실장이 가장 먼저 봤으니까 정확히 누군지 아는 건 주희민이 두 번째가 맞는 것 같다.

“아.”

그런 생각을 이어 가다 퍼뜩 누군가의 생각이 났다. 급하게 핸드폰을 들며 메신저 창을 열었다.

21:11

주희사한테는 말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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