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45/53)

아무도 없는 조용한 통로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우혁 씨, 나 몰래 사람들한테 이야기하고 다닌 거죠.”

─ 하하, 그 정도로 다들 아는 것 같아요?

내 핀잔에도 고우혁이 웃어넘긴다. 사실 나도 말하면서 진짜 고우혁이 사방팔방에 사귄다고 말하고 다녔으리란 생각은 안 했다. 윤하늘이고 신기운이고 다 아는 눈치라서 그냥 툴툴거렸을 뿐이었다. 대체 어디서 그렇게 눈치를 챈 걸까?

“내가 거짓말을 못 하긴 엄청 못 하나 봐요. 나는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왜 다 아는 것 같은지.”

꿍얼거리는 말에 짧게 웃은 고우혁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 그래서 되게 귀여워요.

“……지금 그런 칭찬 받고 싶지 않은데요.”

─ 하하하!

크게 웃는 소리에 두어 번 입을 삐쭉이다가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가벼운 대화에도 마음이 풀린다.

─ 아직 방송국이죠. 녹화는 잘했어요?

“네, 다 끝나고 대기 중이에요. 아직 생방까지 시간도 남아서 여유롭고.”

─ 쉬고 있었구나. 지금은 어디에 있어요? 대기실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에 짓궂게 웃으며 어딜 거 같냐고 묻자 고우혁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여기 고우혁이 되게 잘 아는 곳인데.

사람이 가득한 대기실과 건물을 피해 온 곳은 고우혁의 손에 붙들려 간 적이 있는 통로였다. 사람이 안 오간다며 아무렇지 않게 데려가 놓고는, 지금은 까맣게 잊었다는 듯 “내가 잘 아는 곳이에요?” 하는 맹한 소리를 한다.

“네, 우혁 씨도 잘 알걸요. 내 애인이 나 꼬실 때 데려간 곳이거든.”

─ 아, 저번 컴백 때!

그 소리를 하자마자 이해하는 게 어이없었다. 어떻게 언제인지 바로 알아차리지? 그날 아주 작정하고 꼬시려고 왔었던 건가. 문득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가 수긍했다. 하긴, 그때도 은근슬쩍 손에 깍지를 끼며 컴백 축하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했었다. 누가 봐도 꼬시는 거였지, 그거.

─ 거기 좋죠. 나도 오늘 근처였으면 거기서 데이트하는 건데, 아쉽네요.

“오늘 바쁘면서 무슨. 근처였어도 데이트 못 했을걸요.”

─ 에이, 그래도 시간 내서 내 애인 보러 갔죠. 한동안 못 봤더니 엄청 보고 싶은데.

다정한 말들은 익숙해질 법한데도 매번 듣기가 좋다. 너무 바빠서 뻔히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걸 알면서도 괜히 실실 웃음이 나왔다.

우웅, 우웅!

“지금 어디예요? 오늘 광고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도착했어요?”

─ 아뇨. 아직 가고 있어요. 오늘 길이 많이 막히네.

“……운전하고 있어요?”

─ 아뇨.

“…….”

그 소리는 지금 옆에 매니저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계속 애인이니 뭐니 이야기하지 않았어? 내 이름을 고우혁이 말했던가, 어쨌던가. 가물가물한 대화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됐다. 어차피 남들 다 아는 것 같은데 이 이상 숨기는 의미도 없을 것 같다. 명확하게 말만 하지 말지, 뭐. 대뜸 소속 배우의 연애설을 전화 통화로 알아차렸을 고우혁의 매니저에게 짧은 안타까움이 지나갔다.

우우웅!

“……휴.”

결국 한숨이 터져 나왔다. 계속 무시하고 있었던 진동이 이번만큼은 격렬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이쯤이면 날 무시하지 못하겠지!’ 하고 연달아 보내기라도 하는 것 같은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진동이 얼마나 울리는지, 이젠 이게 내 핸드폰에서 나는 건지 내 손이 움직이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 들어가야 해요?

내 한숨의 의미를 알아차린 고우혁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목소리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벌써 저 연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지도 10분은 훌쩍 넘어서.

“하대진이 아까부터 들어오라고 엄청 연락해요.”

─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에요?

“그건 아니고, 그냥 걱정 많아서 그래요.”

경호원까지 떨쳐 내고 훌쩍 튀어나왔다는 걸 알자마자 죽어라 연락하고 있다. 최백의 스토커 사건이 뇌리에 깊게 박히긴 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 부르는 걸 수도 있고. ……진짜 그런 거 같은데. 확 그냥 가지 마?

─ 대진 씨는 정말 선율 씨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

나지막한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침묵했다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고우혁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묘하게 낯설다. 아니, 원래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긴 했지만 최근에는 좀 달라서.

‘우리 그 이야기는 안 하면 안 돼요?’

평소와는 전혀 달랐던 그 불퉁한 목소리를 떠올리자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날 고우혁 진짜 귀여웠는데.

─ 왜 그래요?

“아뇨, 그냥. 전에 연이 씨 이야기할 때랑은 반응이 정반대라서.”

─ …….

상대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아직도 그 이야기는 하기 싫은 모양이다. 티 나게 싫은 티를 팍팍 내는 고우혁이 과하게 귀여워서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결국 소리를 내며 웃자 한동안 침묵하던 목소리가 뚱하게 튀어나왔다.

─ 아직 연이 이야기 금지 기간이에요.

“기간까지 있는 거였어요? 언제 풀리는데요.”

─ 어, 그걸 왜 궁금해하지. 묻지 마요. 질투 나서 기한 없음으로 정할지도 모르니까.

“아하하!”

선연이 들으면 되게 억울해하겠는데. 고우혁이 답지 않게 선연의 이야기를 영 꺼려 하는 이유는 그거 때문이었다. 선연과 내 드라마를 엮었던 팬 영상.

처음에는 덕분에 내 드라마 시청률 올라갔다며 기뻐하던 고우혁은 그 팬 영상의 인기가 사그라들지 않자 점점 입꼬리를 내렸다. 그도 그럴 게 나도 질릴 정도로 주변 사람들이 선연과 나를 엮어 댔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와 비슷하게 흥해서 그런지, 아니면 우리의 나이대가 엇비슷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 웃지 마요, 진짜 진심이니까. 저 지금 연이 엄청 견제 중이에요.

“그 사람을 뭐 하러 견제해요? 아무 사이도 아닌 거 뻔히 다 알면서.”

─ 다 알아도 자꾸 커플 영상 같은 거 돌아다니니까 신경 쓰인단 말이에요.

고우혁의 툴툴대는 모습이 아까 전의 내 모습과 겹쳐진다. 이거 약간 서로가 닮아 가는 것 같은데. 나는 고우혁을 놀리는 대신, 애써 웃음을 삼키며 퍽 진중한 체를 하며 놈을 다독였다.

“왜 그런 걸 신경 써요. 내 애인은 우혁 씨인데.”

─ 그러니까. 붙어 다녀도 내가 몇 배는 더 붙어 다녔는데 왜 나랑은 안 나고 연이랑 나?

“푸흐흐…….”

─ 안 되겠어요. 더 붙어 다녀야지. 다음 커플 영상은 나랑 나야 해요.

돌겠네, 진짜. 숨이 넘어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깔깔대던 나는 왜 안 오냐는 듯 연달아 울리는 진동에 겨우 속을 진정시켰다. 아까만 해도 진심이 가득하던 고우혁은 그사이 평온해져선 다음에 커플 동영상을 찍자는 이야기를 태평하게 늘어놓았다. 그건 또 뭐야. 잘 보면 고우혁은 ‘커플’이라고 달린 모든 단어를 좋아하는 것 같다.

─ 오늘 무대 잘 하고 와요. 끝나고 연락해 주면 더 좋고.

“음, 바빠서 안 되겠는데요.”

─ 해 줄 거 다 알아요.

“아닌데.”

─ 하하하.

이제 너무 날 잘 안다. 뻔뻔하게 아니라고 대꾸하다 웃음이 이어진다. 결국 통화는 몇 분 더 이어졌다. 하대진이 분통 터져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 왜 이제 와!”

성질을 부리는 모습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전부 다 여기저기에 늘어져 있는 걸 보니 무슨 일이 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심심해서 찾은 건가?

“너 무슨 연락을 그렇게 해. 뭐 사고라도 났어?”

시치미를 뚝 떼고 하는 말에 하대진이 그럼 사고 났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제야 온 거냐며 펄쩍 뛰었다. 그건 아니지만. 전화는 안 하고 계속 어디냐, 대기실 와라, 빨리 와라를 반복하는 모습에 급한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실제로도 별일은 아니었던 것 같…….

“아. 하하. 죄송해요. 제가 있어서 그런지 대진이가 자꾸 연락하더라고요.”

하대진의 옆에 앉아 있던 낯선 남자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퉁한 표정의 하대진을 보니 남자의 말이 맞은 모양이었다. 아니 근데, 이 사람 누군데. 일단 아이돌인 건 알겠다. 얼굴만 봐도 알겠는데.

“안녕하세요, 선율 씨. 클리어의 한세연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엘앤엘 주선율입니다.”

그룹명도 이름도 낯설다. 얼굴은 묘하게 익숙한 게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어색하게 인사를 하자 하대진이 눈을 댕그랗게 뜨며 화들짝 놀랐다.

“뭐야, 너 기억 안 나?”

“뭐가?”

“나랑 여행 갔던 형이잖아! 여행 예능! 2박 3일 갔던 거! 너도 패널로 나오고!”

“…….”

하대진의 언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옆에 서 있는 남자의 표정에 영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연달아 울려 퍼지는 쩌렁쩌렁한 소리에 여기저기서 널브러져 쪽잠을 자고 있던 멤버들이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묘하게 익숙한 남자를 바라봤다. 이제야 기억이 날 것 같았다. 하대진이 갔던 여행 예능.

‘아, 이번 주 예능 패널 그거였지. 누구랑 갔었다고 했더라?’

‘세연이 형.’

지금 생각해 보니 그전에 이름도 들었던 것 같다. 방송까지 했는데 얼굴도 이름도 전부 잊다니……. 습관이란 게 진짜 무서웠다. 주변 신경을 너무 안 쓰고 살았던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대충 대하곤 했다.

“죄송합니다. 그때 뵙고 처음이라…….”

어색하게 내가 변명을 하며 사과하자 남자가 아니라며 손을 휘저으며 환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그때 다른 패널도 많아서 인사할 시간도 없었으니까요. 그, 이번 엘앤엘 콘서트 때 저희 팀이 게스트로 나가게 돼서, 대표로 인사드리러 왔어요.”

“아.”

아, 게스트. 누구를 게스트로 데려올지 고민하는 매니저 형에게 걱정 말라며 단언하던 하대진이 떠올랐다. 여기 그룹 사람들이 오는구나. 콘서트 중간에 등장한다는 깜짝 게스트는 공연도 짧게 하고 간다고 들었다. 그래서 인사하러 온 걸까? 굳이 날 기다린 게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얌전히 말을 듣고 있던 하대진이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이 형 뻥치네! 야, 세연 형 너 팬이라서 기다린 거야.”

“야!”

매너 좋게 웃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남자가 벌건 얼굴로 발길질을 하고 손을 휘두르는데도 하나도 안 아프다는 듯 하대진은 깔깔거리며 놀리기 바빴다.

“으학학! 와, 얼굴 시뻘게지는 거 봐! 형, 술 마셨어? 왜 이렇게 빨개져?”

“아니, 그. 그게요! 팬은 맞는데! 아, 진짜. 야! 하대진!”

“왜, 맞잖아. 야, 형 너 배우 데뷔 팬이야, 데뷔 팬. 악수라도 해 줘.”

“아, 진짜!”

“으학학학!”

잔뜩 당황한 남자와 그걸 놀리기 바쁜 하대진을 보고 있으니……. 이 사람 진짜 하대진이랑 닮았는데. 둘이 같이 여행 간 걸 보면서도 이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펄쩍 뛰는 남자의 모습이 하대진이랑 과하게 겹쳤다. 둘이 진짜 친하구나. 하긴, 여행도 갈 정도면 말 다 했지.

웃는 모습이며 화내는 모습이 비슷한 게 신기해 말없이 쳐다보는데, 시선을 느낀 남자가 수줍어하며 자신의 머리를 이리저리 쓸어내렸다.

“그, 흐흠. 달별 민수 때부터 완전, 연기 잘한다고 느껴서요……. 패, 패, 팬입니다…….”

“끄학학! 아, 이 형 무슨 선보는 줄! 패패팬입니다는 무슨 팬이야? 피터팬이야?”

남자가 한마디를 하기가 무섭게 옆에서 깐족거리는 하대진의 모습에 남자가 성질을 낸다. 하대진, 너도 고우혁 앞에서 저래. 자기가 저러는 줄은 쥐뿔도 모른 채 놀리기 바쁜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아, 좀 그만하라고!”

“그만하라고~”

“하대진.”

툭 튀어나온 낮은 목소리에 순식간에 하대진이 얌전해졌다. 갈라진 목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또렷하게 들린다. 하대진의 소란스러움에 잠에서 깬 최백이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자와 하대진이 동시에 뒷걸음질을 쳤다. ……쌍둥이 아니야?

느리게 걸어오는 최백의 안색이 안 좋다. 뮤지컬은 끝났지만 컴백에 다른 스케줄에 이래저래 잠을 못 잤는지, 강제로 잠을 깬 것에 엄청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하대진의 앞에 선 최백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따라와.”

“아니, 그게. 백 형, 그…….”

“와라. 긴말하게 하지 말고.”

“네…….”

시간 소모 없이 곧장 하대진이 최백의 뒤를 따라 대기실을 나갔다. 반쯤 끌려 나가는 모양새였지만 나도, 앞의 남자도 태연한 얼굴이었다. 의외인데. 나야 최백을 잘 아니까 저래 놓고 음료수 사러 갈 게 뻔해서 얌전한 거지만, 앞의 남자도 최백을 잘 아는 양 얌전히 있는 게 신기했다. 하대진한테 이야기라도 들었나?

“잘됐네요, 그죠.”

“……아, 네.”

그냥 하대진이 끌려 나간 게 기쁜 모양이다. 환한 얼굴에 ‘속 시원함’이라고 적혀 있기라도 한 것 같다.

“사실 대진이가 놀리듯이 말하긴 했지만, 진짜 저 선율 씨 팬이거든요. 이번 드라마도 되게 재밌게 잘 보고 있고……. 사실 제가 꼭 인사드리고 싶어서 기다렸는데, 그거 때문에 대진이가 귀찮게 했나 봐요.”

“아…….”

남자가 난감하다는 듯, 만난 게 기쁘다는 듯 구는 모습에 괜히 어색하게 목을 매만졌다. 팬이라는 단어가 낯간지럽다. 특히 이렇게 직접적으로 마주한 사람이 말하는 건 더 그랬다.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작은 목소리로 웅얼웅얼 대꾸했다.

“그, 흠. 별로 안 귀찮았어요.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요즘 드라마도 잘되고 첫 콘서트도 하시고! 팬으로서 뿌듯하네요.”

팬. 진짜 이상한 단어다. 그 단어만 껴 있으면 구름이라도 껴안은 듯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간질거리는 마음에 슬금슬금 입꼬리가 올라간다. 예전이라면 내 팬이 어딨냐고 생각했을 텐데, 이제는 순수하게 저 단어가 기쁘고 좋았다.

“그래서 그런데!”

깜짝아.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 남자가 한 걸음 다가오며 환하게 웃었다.

“사진 한 장 찍어 주실 수 있나요.”

“……저랑요?”

“네, 아, SNS에 올려도 돼요? 자랑하고 싶은데…….”

나랑 사진 찍은 걸 자랑해서 뭐 해? 신나게 종알거리는 모습에 한 번 더 하대진이 겹쳐진다. 뭐라고 해야 하나. 낯선데 되게 익숙하네. 잠시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그래요.”

“앗싸! 감사합니다.”

크게 기뻐한 남자는 두어 번 나와 사진을 찍고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대기실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하대진은 오지 않았지만, 남자는 쥐뿔도 신경 쓰지 않는지 찾기는커녕 연달아 나를 돌아보며 몇 번이고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럼 선율 씨! 감사합니다! 콘서트 때 봐요!”

“네.”

“드라마도 파이팅!”

“아… 네, 감사합니다.”

남자가 떠나가자 대기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멤버들이야 자고 있다지만 다른 스태프들도 꽤 많은데도 어째 인파가 몰려들었다 사라진 듯 텅 빈 느낌마저 들었다. 하대진 친구들은 다 저런 느낌인가. 엄청 환하고, 시끌거리고, 밝고…….

“흐흥.”

“!”

깜짝아! 공진하의 웃음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자 사방에서 너부러져 자고 있던 멤버들이 몸을 일으킨 채 날 보고 있었다. 다들 언제 깬 거야? 아까 최백 깼을 때 다들 깼던 건가. 잔뜩 졸린 눈의 공진하가 나긋나긋 말을 이었다. 아직도 잠기운이 가득한 얼굴이다.

“우리 선율이, 인기 많네에.”

“그러게. 인기 많네.”

“선율이 형, 대배우네요.”

“너네 다 언제 깼어?”

공진하의 말에 대꾸하듯 강이헌과 신기운이 사이좋게 말을 이어 가는 모습에 괜히 표정을 굳히자 웃음을 터뜨린다.

“어, 부끄러워한다. 그치.”

“아니야.”

아니기는! 그렇게 대꾸한 공진하가 깔깔거리고, 신기운이 “부끄러워하는 거 맞는 거 같네요” 하고 말을 받았다. 아니라고……. 와중에 강이헌은 깊게 감명이라도 받은 듯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진짜… 감동이야. 선율이가 연기한다고 할 때만 해도 이런 거 상상도 못 했는데……. 진짜 선율이 대배우 같아.”

“특출 때부터 대박이었잖아! 대배우 맞지, 맞아.”

“손뼉이라도 칠까요?”

“……그만 놀려.”

“으흥흥!”

공진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잠이라도 깬 듯 동그랗게 뜨여진 눈이 반짝거리더니 이내 곱게 접히며 눈웃음을 친다.

“내가 칭찬 들은 것도 아닌데, 이거 되게 뿌듯하네.”

“…….”

나는 입술을 우물거리다 슬쩍 시선을 돌렸다. 공진하의 마음이 어떤지 알 것 같아서, 괜히 더 민망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인정받는 기분이란 참 좋다. 누군가 좋아해 주고, 잘한다고 해 줄수록 나는 더 내 일에 집중하게 된다.

다정한 말과 시선이 나를 이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부드러운 속내를 닮은 따뜻한 장소로.

* * *

긴 촬영이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인사 소리가 영 현실감이 없다. 촬영이 끝났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첫 주연이라 더더욱 그런 것 같았다. 거의 매일매일 출근했던 이 일터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진짜 끝난 건가? 정말 다음 대본이 없는 거야?

“고생했어요, 선율 씨.”

“고생 많았어.”

당장이라도 다음 화라며 대본을 건네줄 것 같은 작가가 대본 대신 손뼉을 쳤다. 항상 묘하게 굳어 있던 감독의 표정은 환하다. 이상하다. 그 얼굴을 보니 끝이라는 실감이 뒤늦게 들었다.

기분이 진짜 이상하다. 시원섭섭하다는 기분이 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딱 그 기분이었다. 일이 끝났다는 것에 대한 시원함과, 내가 뚜렷하게 이해하기 버거운 이유를 담은 섭섭함이 내 속을 흔든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환한 표정의 감독에게 괜히 불퉁하게 굴었다.

“촬영 끝나서 좋으신가 봐요.”

“좋지, 그럼. 선율 씨는 섭섭한가 보네.”

“첫 주연이잖아요.”

감독의 짓궂은 목소리에 작가가 나를 감싸듯 슬쩍 끼어들었다. 그 말에 감독이 어깨를 으쓱인다.

“정말 그동안 고생했어요, 선율 씨. 점점 연기도 좋아지고 캐릭터도 딱 맞는 옷 입은 것처럼 잘 표현해 줘서 정말 좋았어요.”

작가가 환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가자 감독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시청률도 오른 것 같아. 이래저래 선율 씨한테 고맙네.”

뭐가 올라? 작가처럼 미소를 지은 감독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시청률 신경 안 쓰는 거 아니었어요?”

“아하하! 아, 이럴 줄 알았어요.”

“설마! 푸하하!”

뭐야. 대뜸 작가와 감독에게서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며 멍하니 감독을 쳐다봤다. 뭐야, 그때 분명 하나도 신경 안 쓰는 것처럼 굴었잖아.

‘선율 씨, 마라톤 해 본 적 있어?’

덤덤한 얼굴로 하던 말에 내심 감동까지 받았는데……. 계속 달려 나가기만 하면 된다던 감독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럼 뭐야, 그건. 멍한 표정에 숨이 넘어가라 크게 웃던 감독이 외쳤다.

“전부 허세 부린 거였지!”

“아하하! 아, 진짜. 그때 선율 씨 표정 되게 진지했었는데, 아하하!”

“…….”

뭐가 웃긴데. 내가 싸늘한 표정을 짓는데도 두 사람은 웃음을 멈출 기미가 없어 보였다. 어이가 없네. 허세를 왜 부려. 내 속내를 듣기라도 한 듯, 낄낄거리는 감독 대신 작가가 웃음을 멈추며 말을 이었다.

“아마 그때 다들 불안해했을 거예요.”

웃음기 섞인 말치고는 약간 암울한 말이다. 다들 불안해했다고? 내 기억 속의 촬영장은 언제나 일관성 있었다. 다들 딱히 시청률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방영 전과 후가 크게 차이 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솔직히 여기서 시청률 신경 쓰는 건 나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멍한 생각들 사이로 감독과 작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에이, 전부는 아닐걸요. 그때 진짜 뭐 시청률이 대단히 낮지는 않았잖아요.”

“그래도 시청률 차이 꽤 났었잖아요. 아, 진짜 조마조마하면서도 곧 종영하면 달라지겠거니 했는데, 다행히 진짜 달라졌죠.”

“그러니까요. 천운이지.”

언급은 하나도 안 하던, 내 말에도 자신감 있던 모습과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럼 그때는 왜…….”

“선율 씨가 쫄았잖아!”

감독이 장난스럽게 외쳤다. 쫄았…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표현이 되게 직설적이다. 나이가 지긋한 감독에게서 튀어나온 말이 어색하다. 겉모습은 저런 말 진짜 하나도 안 할 것 같이 생겼는데, 나오는 게 엄청 자연스럽다.

“그런데 나도 쫄았다고 하면 어떻게 해. 우리 주연님 안 그래도 첫 주연이라 바짝 긴장했는데 나라도 센 척해야지.”

감독의 말에 작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퍽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시청률 신경 안 쓰는 사람 없어요, 선율 씨.”

“……두 분은 안 쓰는 줄 알았는데.”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둘 다 꽤 유명해 보였고, 이미 흥행한 작품도 여럿 있어 보였다. 솔직히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나와는 느낌이 다르지 않을까 내심 멋대로 판단하기도 했다. 나는 처음이지만 두 사람은 아니니까 부담감이 다른 거 아닌가 했는데. 그때는 가만히 웃고 있던 작가도, 뻔뻔하게 ‘마라톤’ 이야기를 하며 나를 다독이던 감독도 불안했던 거였다.

“어떻게 안 써요. 차기작의 미래가 여기에 달렸는데!”

“아.”

작가가 심각한 얼굴로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번 첫 주연 말아먹었으면 다음 작품은 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런 거랑 비슷한 거겠지. 작가를 따라 나도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내가 웃기다는 듯 작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불안해한다고 바뀌는 것도 없으니까. 그래서 감독님 말에 나도 얌전히 있었죠, 뭐.”

“……그러면 그 마라톤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었어요?”

“설마!”

감독이 단호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반쯤은 나한테 하는 말이었어. 예상했던 것보다 좀 낮아서 잔뜩 쫀 나한테 하는 말. 그러니까 없던 말은 아니지.”

“…….”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그냥요.”

나는 깊게 숨을 내뱉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의 감독 이야기도, 지금의 감독 이야기도 신기할 정도로 귀에 잘 들어온다. 그리고 동시에 많은 걸 생각하게 됐다.

나는 그 어떤 촬영장에서보다도 많은 부담감을 느꼈던 긴 촬영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듯 속삭였다.

“이 드라마 하면서 많이 배워 간다 싶어서요.”

“……?”

이해하지 못한 듯 날 바라보는 얼굴에 말없이 웃기만 했다. 뭐라 딱 하나만 꼬집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덕분에 연기가 많이 늘기도 했고. 고우혁이 왜 그렇게 촬영장을 좋아하는지도 알게 됐고.

가만 웃고 있는 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작가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뭘요? 감독님 허세요?”

“아, 오 작가님, 너무하시네.”

“하하하!”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거예요? 저도 끼워 주세요!”

“저도요!”

다른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던 임희진과 오경준이 다가왔다. 여자 주인공과 내 호위 무사 역. 둘 다 나보다 훨씬 경력도 많고 연기도 잘하던, 음. 연기 ‘선배’들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두 사람은 내 시선은 눈치채지 못한 듯 다른 사람들과 신나게 대화를 이어 갔다. 나는 두 사람을, 특히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처음에는 둘이 붙어 있으면 연기력 차이 나서 싫고, 자꾸 예정에도 없던 애드리브를 쳐서 싫었는데. 지금 보니까 그거 덕분에 오히려 연기력이 늘어난 것 같다. 연극 무대를 오랫동안 섰다고 했지. 그래서 그런 걸까? 연기도 잘하고, 발성도 좋고…….

“음… 선, 선율 씨. 왜 그렇게 쳐다봐요?”

시선을 느낀 오경준이 어색하게 나를 힐끔거린다. 나는 빤히 그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경준 씨.”

“네, 어… 네?”

맹한 표정으로 날 보는 얼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전화번호 알려 주세요.”

“……네?”

* * *

오경준 : 그래서 오늘 정장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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