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날개길 (43/53)

15. 날개길

최근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너 또 그거 봐? 어휴.”

“……이거 지금 갱신된 거 맞지?”

“어휴, 내가 진짜, 어휴…….”

내 말에 하대진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야, 걱정하지 마. 내가 주변에 엄청 홍보하고 다닐게” 하며 위로했다. 그러니까 이게 갱신된 게 맞긴 하다는 말이구나. 고개를 팩 돌려 화면을 노려보자 아예 핸드폰을 뺏어 가 버렸다.

“이런 거 보지 말고 연습이나 하자. 봐 봤자 기분만 안 좋아져.”

“선율이 형, 또 드라마 시청률 봤어요?”

신기운이 덤덤하게 물으며 연습실 문을 열고 등장했다.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축 처진 채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자 하대진이 그런 내 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에 안쓰러움이 가득하다. ……기분 좀 이상한데.

고대하던 첫 방송의 시청률을 본 건 우연이었다. 신입 매니저가 핸드폰 하는 걸 힐끔 봤다가 알아차렸는데……. 심각해 보였다. 시청률이 가장 낮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높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이후, 예전에는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던 ‘시청률’이라는 꼬리표가 내 눈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2화의 시청률도 비슷했다. 내 심각한 표정에 신입 매니저는 지금이 평균이라며 나를 열심히 북돋았지만 기분이 미묘했다. 1위와의 차이가 꽤 심했다. 이거 뭐 하는 드라마인가 싶어 눌러 보기까지 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늘도 어제 했던 3화 방송의 시청률을 자꾸 확인했다. 이제 반쯤은 버릇이다. 이젠 주변 사람도 내가 그러고 있는 걸 다들 알 정도로.

“요즘 TV 보는 사람도 많이 없고, 그 정도면 무난하게 나오는 거예요.”

신기운의 말에 눈썹을 치켜올리며 놈을 쳐다봤다. 얘네 방송도 잘 나오지 않나?

“너네 예능은 얼마나 나오는데.”

“저는 저희 프로 시청률 모르는데요.”

신기운이 덤덤하게 말하며 눈을 깜빡였다. 찾아볼 생각도 없어 보이는 표정이다. 괜히 기분이 떨떠름해졌다. 괜히 계속 찾아보는 내가 창피해지는 기분이다.

뚱한 얼굴로 입을 다무는 내 모습에 하대진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대뜸 자리를 이탈했다.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모양이다. 연습실에서 도망친 하대진과는 달리 얌전히 근방에 온 신기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잘 나오는 드라마가 얼마나 있겠어요. 나중 되면 자연스럽게 높아지겠죠.”

“그러려나.”

진짜 그랬으면 좋겠다. 한숨을 푹 내쉬자 신기운이 어깨를 툭 두드리고는 노래를 틀기 위해 구석으로 향했다. 새삼스럽게 기분이 이상했다. 이거… 위로해 준 거지? 회귀 초의 기분이 새록새록 샘솟는다. 회귀 전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모든 사람과 친해지긴 했지만, 신기운하고도 퍽 친근한 사이가 됐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야!!”

대뜸 버럭 외치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기도 전에 품에 뭔가가 잔뜩 담긴 비닐봉지가 안겨졌다. 뭐……. 맹한 얼굴로 비닐봉지 안을 바라봤다. 편의점 마크가 찍힌 봉투 안에는 간식이며 음료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먹을 거지. 너 진짜 한숨 금지야. 알았어? 시청률 보는 것도 금지야!”

종알거리던 하대진이 봉투 안에 있던 우유 하나를 꺼내 내 손에 직접 쥐여 주었다. 와중에 초코 우유다. 미친, 하대진…….

“너 그거 신경 쓴다고 안 달라지니까, 어? 그런 거에 신경 쓰면 지는 거라고, 어어?”

“…….”

“하여튼, 첫 방송 때도 긴장하더니 방송하고 나서는 시청률 때문에 긴장하고. 너 왜 이렇게 간이 쪼끄만하냐? 그냥 그거 먹고 신경 쓰지 마, 알았지!”

심지어 위로도 못 한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는지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해선 “뭘 봐! 먹기나 해” 하고 괜히 신경질을 부렸다. 진짜 얘는 뭐지? 가끔 하대진을 보면 진짜 이상한 욕구가 올라왔다. 약간… 소유욕 같은 거.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단어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미친 생각 하지 말자.

“고마워, 잘 먹을게.”

“…….”

“하대진이 엄청 부끄러워하네요.”

“아! 신기운, 좀 닥쳐!”

“쟤는 왜 맨날 다 해 주면서 창피해할까요?”

“입 다물라고!”

어느새 다가온 신기운과 하대진이 옥신각신하며 말다툼을 했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신기운과 표정 변화가 극렬한 하대진의 모습이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저 둘은 왜 또 싸우고… 선율 씨는 무슨 봉투를 그렇게…….”

소란스러움에 어디선가 달려 나온 매니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신입 매니저는 안 보이네. 요즘 내 담당이라 자꾸 붙어 있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내가 먼저 찾게 됐다. 다른 일 하고 있나?

“헉, 선율 씨! 지금은 이거 못 드세요!”

“왜요!”

저 멀리서 다투고 있던 하대진이 쏜살같이 달려오며 내 앞을 막아섰다. 뭐야, 어떻게 들은 거야. 눈이 마주친 신기운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당장 곧 컴백인데 이렇게 칼로리 높은 걸 어떻게…….”

“아니, 하루는 먹을 수도 있죠! 그러다 쟤 말라 죽으면 어떻게 해요?”

“과자 안 먹는다고 사람이 말라 죽지는…….”

“죽어요!”

하대진이 으름장을 놓으며 매니저를 흘겨봤다. ……이 자식도 날 화초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최백이 진짜 애들한테 이상한 개념을 심어 줘서…….

컴백을 얼마 앞두지 않았지만, 연습실 안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요즘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다들 개인적으로 와서 준비를 했고, 심지어 메신저로 영상을 보내 안무를 체크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 겨우겨우 시간을 내서 다 같이 모여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요즘이 이래저래 가장 바쁠 때라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날이 점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후덥지근해졌다. 옷차림은 바뀐 지 오래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온다. 시간은 충실히 흘렀다. 그렇게 우리를 위한 계절이 다가왔다.

7월이 찾아왔다.

* * *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소리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왜 이렇게 크게 느끼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강렬한 매미 소리가 귀 아프게 이어졌다.

“컷!”

이렇게 시끄러운데 소리가 잘 들어가긴 하나? 촬영지에 나무가 많아서 그런지 평소보다도 더 소리가 시끄러운 것 같아 귀를 꾹꾹 누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래서 궁궐 촬영이 좀 나은데. 실내도 좋고.

심드렁하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힐끔 감독의 옆모습을 살펴봤다. 오늘은 작가도 나온 채다.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던 사람들은 작가의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작가의 눈치를 한 번씩 보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채 뭔가를 살피던 작가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곤 환하게 웃었다.

“선율 씨, 이번 컷도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남들이 쩔쩔매는 사람이 내게 친절하게 대하는 게 신기했다. 처음에는 나를 영 못마땅해했었는데. 자주 연락했더니 심지어 좀 친해진 것 같기까지 하다.

“날이 더워서 걱정했는데, 다들 집중력이 좋아서 다행이에요.”

“네, 구름 한 점 없어서 화면에서는 되게 좋게 나옵니다. 덥긴 하지만 촬영하기는 딱 좋네요.”

양산을 쓴 작가와 땀을 뻘뻘 흘리는 감독이 사이좋게 대화를 이어 갔다. ……어제 시청률 이야기는 진짜 한 번도 안 나오네.

첫 방송 이후로도 딱히 감독은 시청률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방송 이후 촬영장에서 만나서 하는 이야기라곤 오늘 찍을 내용이 대다수였다. 겨우 이야기가 나오면 시청자 반응이나 편집 장면에 대한 이야기 정도가 끝이라, 나는 내내 시청률을 신경 쓰면서도 감독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다른 스태프나, 오늘 오랜만에 촬영장을 찾은 작가와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신경을 다들 안 쓰는 거야, 아니면 안 쓰는 척하는 거야? 내가 유심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두 사람이 의아하게 나를 바라봤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혹시 오늘 찍을 영상 관련된 거야?”

“……감독님, 배우들한테 반말하세요? 옛날 분이셔, 아주. 그러다가 욕먹어요.”

“아, 예.”

“…….”

감독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는 차마 작가의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존댓말 하는 사람도 꽤 있겠지만, 나는 저번 영화감독도 신나게 반말하는 사람이었어서……. 하긴, 그쪽은 반쯤 나를 자기 애처럼 생각한 것 같기도 하고.

내심 작가가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작년, 첫 만남에서 존댓말로 사납게 날 물어뜯던 작가가 떠올랐다. 주변 사람들도 다른 비슷한 사례라도 생각했는지, 순간 작가 주변의 사람들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모른 척해 주자.

“시청률 이야기는 안 하신다 싶어서요.”

“뭐?”

“시청률이요?”

둘 다 뜬금없는 걸 들었다는 듯 눈을 끔뻑인다. 진짜 쥐뿔도 생각 안 한 얼굴이라 내심 감탄했다. 신경 안 쓰는 척 수준이 아니었구나. 경이롭게 쳐다보는 날 뒤로한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의아하게 말을 이었다.

“시청률 무난하지 않았나요?”

“무난했어요. 1위가 아니라서 그런가?”

“……가장 높은 드라마랑 차이 많이 나던데요.”

뭐가 이렇게 담담한데. 내 떨떠름한 말에도 오히려 감독과 작가가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웃을 게 뭐가 있어?

“뭐야, 그러면 첫 방부터 1위 하려고 했던 거야?”

“생각보다 야망 있네요, 선율 씨.”

“아니, 그…….”

차이가 엄청났다니까……. 게다가 이제 첫 방송 아니고 어제 4화 나왔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째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없었다. 내심 마음속 어디선가 1위 하기를 기대했던 마음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말을 머뭇거리는 내 모습에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첫 주연인 나는 겁도 없이 1위를 노리는데, 이미 유명한 두 사람은 딱히 감흥도, 생각도 해 본 적 없다는 듯 굴었기 때문이다. 시청률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을 수가 없지 않나? 이미 커리어가 충분해서 신경 쓰이지 않기라도 하는 건가?

“선율 씨, 마라톤 해 본 적 있어?”

“……어떤 거요?”

갑자기 웬 마라톤? 내가 맹하게 굴자 감독이 다시 한번 “마라톤” 하고 대꾸했다. 아니, 말은 들었는데 너무 뜬금없어서 되물은 건데. 할 말을 잃은 나 대신 작가가 오래달리기도 해 본 적 없을 거라며 손을 휘저었다. 그 어조가 어째 날 놀리는 것 같아서 좀 얄미웠는데, 실제로 해 본 적이 없어서 할 말은 없었다. ……굳이 오래 달릴 필요 없잖아.

“단체 마라톤 대회 같은 거 나가 보면 처음부터 치고 나가는 사람도 있고, 그냥 뒤에서 느릿느릿 달리는 사람도 있거든.”

감독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얼핏 심드렁하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시선은 또렷하게 나를 직시하고 있다.

“그런데 처음에 빠르게 달려 나간 사람이 항상 선두를 유지하지는 않아. 초반에 체력 실컷 쏟아 버리고 헉헉대면서 뒤로 밀리기도 하거든.”

“…….”

“선율 씨, 길게 달릴 때는 호흡이 중요해.”

잠시 말을 멈춘 감독이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감독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속내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표정을 한 채 느릿느릿 말을 이어 간다.

“우린 그냥 숨을 고르면서 계속 달려 나가면 돼. 너무 급하게 가고 있지는 않나, 너무 여유를 부리는 건 아닌가 조절하면서.”

“…….”

“걱정하지 마. 지금도 되게 잘해 주고 있으니까.”

“……네.”

뒤늦게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감독이 시선을 휙 돌리며 그럼 다음 촬영 준비하자며 말을 돌렸다. 감독 옆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던 작가가 나를 향해 다시 한번 씩 웃고는 대본으로 시선을 돌렸다.

“…….”

나는 그 사이에서 입술을 우물거리며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 힐끔 두 사람을 다시 바라봤다. 촬영장의 모든 걸 좋아하는 고우혁이 떠올랐다. 왜 그 사람이 촬영장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또한.

* * *

검푸른 장포와 닮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정이선은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뛰어다녔다. 아니, 그건 ‘날아다녔다’고 표현할 법도 한 모습이다. 난생처음으로 이선은 마음껏 도법을 펼치며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컷!”

……정확히는 그렇게 편집될 예정이었다. 주선율이 열심히 뛰어다니는 모습에 스태프 하나가 애써 마음의 눈을 뜨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리의 장면이 끝나고 이동한 궁 앞, 정이선은 분노를 겨우 참는 얼굴로 거대한 황궁을 노려봤다. 복잡한 이선의 머릿속, 그 감정 하나만큼은 명확했다. 타오르는 것 같은 분노.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이나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슬픔보다도 고통스러운 분노가 온몸을 지배한다.

그때 정이선의 앞에 검은 옷의 사내들이 그림자처럼 내려앉는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장면이다. 극에서도, 실제 촬영장에서도. 빈말로도 몸이 좋다고 말하긴 어려운 주선율이 액션 신을 찍다 부상이라도 당할까 모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얼마 안 가 컴백까지 한다는 말에 얼마나 속이 복잡하던지. 어째 촬영에 들어간 주선율보다도 그 주변인들이 더 긴장하며 장면을 주시했다.

“세자 저하께서 보내셨느냐.”

“…….”

“아니면 아버지께서 보내셨느냐.”

정이선의 표정이 음울하다. 슬픔에 젖은 표정에도 얼굴을 가린 남자들은 말이 없었다. 그건 긍정의 답 같기도, 부정의 답 같기도 했지만 어째선지 정이선은 그 침묵마저 슬프게 느껴졌다.

반쯤 제 신분을 잊은 채 도술사로 살아온 정이선과는 다르게, 정이선의 집안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가풍이 엄격한 집안이었다. 권력에 대한 오랜 야망과 그 사이에 모순적으로 얽힌 충절은 고즈넉한 집 안을 더 묵묵하게 만들었다. 작중에는 그런 표현도 나올 정도였다. ‘귀신이 사는 집’.

그 말 그대로였다. 정이선의 아버지는 제 영향력과 권력을 위해 세자의 손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오랜 벗을 죽이고, 일면식도 없는 타인을 해치는 건 쉬운 일이 되었다. 세자는 매번 잔인했고, 그에겐 타인의 목숨에 대한 경중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하나뿐인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인의 원수가 되었다.

“결국 우리 부자가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구나.”

이 사람들이 세자의 사람이면 어떻고 아버지인 정 판서면 어떠한가. 결국 두 사람이 쥔 칼자루는 하나나 다름없는데.

새카만 어둠이 정이선에게 달려든다.

깊은 밤의 소란을 하나도 모른다는 듯, 잠잠한 호수는 새벽하늘을 비추며 처연히 빛났다. 그 앞에 지어진 누각은 대단히 화려하진 않았지만, 뭐라 말하기 힘든 고압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마치 그 안에 느긋하게 앉아 새벽을 즐기고 있는 한 사내처럼.

쿠웅!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듯, 검은 옷의 남자를 짓밟고 있는 정이선이 누각 앞에 등장한다. 고통스러워하는 남자에게서 내려온 그가 제 쪽을 쳐다도 보지 않는 누각 안의 사내를 노려봤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이선이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거대한 평상이었다. 평상에 깔린 두꺼운 보료 위, 느긋하게 앉아 있는 사내의 무료해 보이는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오만함이 엿보였다. 장침에 기댄 채 비스듬한 자세로 호수를 바라보던 남자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이며 인위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

“왔는가.”

정이선은 서늘한 얼굴로 그 얼굴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이선이 걸음을 하나 옮길 때마다 폭풍이라도 치듯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가장 먼저 이선이 짓밟고 내려온 남자가 휩쓸려 갔고, 그다음에는 보란 듯이 사내의 앞에 놓여 있던 다과상이 거친 소리를 내며 누각 한편으로 밀쳐졌다.

“시끄럽군. 내가 이래서 도술사를 싫어해.”

찡그린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기울였던 몸을 세워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럼에도 등을 받치는 안석에 느른하게 기댄 상태라 정이선의 눈에 불이 붙었다. 그동안 있었던 수많은 살인 사건의 범인이 바로 눈앞의 남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평이를 해치신 게 저하십니까?”

“해치다니?”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입꼬리를 올린다. 여전히 인위적인 미소였다.

“그 아이는 살아 있지 않느냐. 내가 해친 건 네 그 귀찮은 도술사 스승밖에 없거늘.”

무심한 목소리에 정이선의 걸음이 뚝 멈췄다. 누각 끝에 선 정이선과 가장 호수가 잘 보이는 안쪽에 앉은 남자, 세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가만 웃는 얼굴을 한 남자가 한쪽 팔을 느리게 움직이며 검은 옷자락을 정리한다.

“감히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짖어 대는 놈이었다. 하여 내 은덕을 내려 예의를 가르쳤을 뿐인데, 해치다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하느냐.”

“……평이는 그저 제 종놈일 뿐입니다.”

“재밌는 말이구나. 어느 종놈의 이빨 끝이 그리도 뾰족하지?”

정이선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새파란 도포 끝자락에 묻은 핏방울이 화면에 슬쩍 보였다가 사라진다. 꽉 움켜쥐었던 손을 펴며 여유를 부리듯 세자를 따라 옷자락 정리를 한다.

“손속이 과하셨습니다. 여러모로.”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감정을 숨기지 못한 터라, 정이선의 목소리며 눈빛이 흉흉하기 그지없다. 사나운 태도에도 세자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인다. 정이선은 그런 세자의 모습이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느냐? 내 넓은 아량으로 네가 숨긴 계집년 하나를 살려 주고 있는데, 어찌 내 손속이 과할까.”

정이선이 화들짝 놀라 남몰래 움켜쥐고 있던 부적을 놓칠 뻔했다. 그녀를 말하는 거였다. 최연화! 정이선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저하!”

“감히 이 나라의 하늘도 모르는 치를 내가, 하해를 베풀어, 살려 두고 있거늘.”

“…….”

눈을 부릅뜬 채 짓씹는 단어에 정이선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된다는,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는 행동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약간 물러선 정이선이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저하께서는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나른한 목소리에 정이선의 표정이 구겨진다. 질색하는 얼굴을 보고 재밌다는 듯 웃은 세자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장침을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그 등 뒤에 숨긴 게 마음에 들지 않아.”

“!”

대체 언제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나! 화들짝 놀란 정이선이 부적을 움켜쥐었다. 순간 누각 밑에서 뛰어 올라온 검은 옷의 사람들이 세자의 곁에 섰다. 호위하듯 선 자들은 하나같이 칼을 빼 들고 있었는데, 그 끝은 전부 정이선을 향해 있었다. 정이선은 예상했다는 듯 그 얼굴들을 살피며 등 뒤에 숨겨 두었던 부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여태 표정을 잔뜩 구기고 있던 이선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세자의 얼굴에 흥미로움이 맴돈다.

“그러십니까? 그럴 만도 하지요. 저하께서는 도술사라면 치를 떠시지 않으십니까.”

“오호. 드디어 평소의 자네로 돌아왔군. 그래, 조금은 정신이 드는가? 그동안 너무 무지하게 굴었어. 정 판서의 면을 봐서 내 한 번쯤은 눈감아 줄 수도 있네마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정이선이 빙긋 웃었다. 자주 웃는 얼굴이었지만, 이젠 그 곁에 충실한 심복 성평도, 마음에 두고 있는 연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쩌면 그 자신조차도 이곳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이선’에게 깊게 스며들고 있던 주선율이 숨을 고르게 내쉬며 집중했다. 한동안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것들은 전부 다 사라진다. 바쁜 스케줄, 보기 힘든 얼굴들, 그리운 사람, 마음 같지 않은 시청률, 감독의 덤덤한 어투와 작가의 밝은 얼굴까지.

주선율은 자신의 것을 모두 잊고 정이선에게 빠져들어 간다.

“저하께서는 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무심결에 툭툭 가볍게 부적을 건드리다 빙긋 웃으며 흔들어 보인다. 대본에는 적혀 있지 않았던 얄미운 모양새다.

“아마 이놈도 저하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겝니다.”

“하하하!”

종이에 적혀 있던 글귀가 생기를 머금고 살아나는 광경이 이어진다. 주시하는 시선은 무겁게 그들을 에워싸고, 카메라는 멈추는 일 없이 계속해서 돌아간다. 무게를 잡으며 자리하고 있는 액션 배우들의 귀에 두 사람의 대화가 밀려들어 왔다.

“그래서, 지금 내게 이라도 드러내겠다는 것인가?”

“살기 위해선 뭔들 못 하겠습니까.”

“날 죽일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는 것이냐.”

“그리하지 않으면 제 여인이 죽겠지요. 제 사람 하나 지킬 수만 있다면, 못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니, 전부 틀렸다.”

혹시 대사가 아닌 게 아닐까? 이게 전부 실존하는 일인 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그런 스스로가 우스워진다. 저기 카메라도 있는데 이게 연기가 아니면? 이렇게 주변을 거대한 스태프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진짜일 리가.

하지만 그렇다. 이는 재능의 차이일까? 아니면 집중력의 차이? 어쩌면 기가 막힌 타이밍과 모든 걸 도와주는 것 같은 적절한 날씨, 오늘따라 좋은 두 배우의 컨디션 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번 장면을 도와주는 모든 것들이 모여 허구를 현실로 만들어 간다.

정이선 역의 주선율이 집중력을 놓지 않은 것처럼, 세자 역의 남자 또한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여 주며 서늘하고 무심한 세자를 그려 냈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저는…….”

“정 판서가 죽을 것이다.”

“…….”

“정이강도 죽을 것이고.”

세자가 속삭였다. 대사와는 달리 입가에는 미소가 담겨 있다. 목소리마저 평소보다 훨씬 다정해진 것 같다. 그 목소리로 세자는 연달아 비극을 고했다.

“네 집안은 반역죄로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

정이선은 담담하다. 스태프 중 하나가 힐끔 감독을 바라봤다. ‘화들짝 놀라는’ 장면이 사라졌지만 태연한 얼굴을 보니 이미 상의가 된 내용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일단 계속 지켜보자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고.

묵묵히 상대를 응시하던 정이선이 빙긋 웃는다. 이 또한 대본에는 없던 장면이지만 이번에는 감독을 돌아보는 대신 바짝 긴장하며 두 배우를 주시했다.

“모르셨나 봅니다.”

“……뭐?”

“저는 정 판서 댁과 연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뭐라 묻기도 전에 헐레벌떡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저하, 저하!”

뛰어온 남자가 헉헉거리며 큰 소리를 냈다.

“불이옵니다, 도성에 큰불이 났사옵니다!”

“무슨!”

화들짝 놀란 세자가 편안히 기대고 있던 안석에서 등을 떼어 상대를 바라봤다.

“그게, 정 판서 댁에……!”

“……정이선.”

경악한 세자가 정이선을 돌아본다. 시종일관 담담하던 아까의 세자를 비춘 것처럼, 가만 웃고 있는 정이선이 괴이하게 보인다. 세자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정이선이 한 일이었다. 제집에 불을 내고, 구태의연한 얼굴로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거다. 순하게 웃고 있는 얼굴과는 정반대의 미친 행태였다.

“네가 정녕 미쳤구나.”

세자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린다. 그런 세자를 가만 지켜보던 정이선이 눈꼬리를 접었다.

“그럴 리가요. 태어난 이래, 지금이 가장 또렷한 제정신인걸요.”

“너도 죽을 작정인 게야.”

“…….”

“최연화를 위해 모든 걸 불태워 죽어 버릴 작정이야!”

자리에서 일어나 고함을 지르는 세자의 모습에 정이선의 표정이 침잠한다. 얼굴에 핏줄까지 선 세자가 평상에서 내려오고, 묵묵히 지켜보던 정이선이 느리게 손을 한 번 털었다.

“저 미친놈을 당장 죽여라!”

그리고 다시 모든 스태프를 긴장하게 할 액션이 돌아왔다.

…정이선이 쓰게 웃는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 무너진 그는 새빨갛게 피로 물든 제 손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정이선은 무언가를 직감한다. 끝을, 죽음을,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 찬란함을.

‘이선 님.’

그렇기에 이 순간 그 여자를 떠올렸을 거다.

“그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는데…….”

정이선의 주변에는 쓰러진 사람들이 가득하다. 모두가 의식이 없는 가운데,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건 정이선이 유일했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피를 많이 쏟은 것도 정이선이라, 그는 누가 봐도 겨우 버티고 있는 모양새였다. 항상 깔끔하던 푸른 도포 자락은 피로 범벅이 되고, 눈이 쑥 들어간 얼굴 또한 평소보다 훨씬 기운이 없어 보인다.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정이선은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결국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여자를 떠올렸을 거다. 결국 모든 걸 놓게 만든 여자가. 아무것도 모른 채 아직도 씩씩거리며 화를 내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을.

주저앉아 ‘최연화’를 그리는 ‘정이선’을 연기하며, 주선율은 그 순간 누군가를 떠올렸다. 마지막 순간에 떠올릴 것 같은 얼굴을, 주선율의 ‘최연화’를. 그 다정하게 웃는 남자를.

얼굴에 짧게 희미한 미소가 스친 건 그 탓이다.

* * *

이제는 익숙한 호수를 걸어 나간다. 풀숲 헤치는 소리 사이로 따라 걷는 소리 또한 들렸다. 그리고 그 끝에 다정한 부름이 새벽이슬처럼 맺힌다.

‘연화 낭자.’

‘낭자라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내 여기서 기다리겠소.’

투정에 대한 대꾸도 없이. 정이선이 뜬금없는 소리를 하며 자리에 우뚝 서 환하게 웃는다. 신발을 툭툭, 두드리는 장난스러운 몸짓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요? 왜요?’

‘낭자가 툭하면 성을 내고 가 버리지 않소. 매번 내게 미안하다 할 때마다 고역인 얼굴을 보니, 내 속이 다 안타까웠소.’

‘……지금 제가 자주 화를 내니, 처음부터 듣지도 않고 여기 서 계시겠다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아하하!’

능청을 부리던 정이선이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얄밉다는 듯 흘겨보는 표정을 다정하게 바라본 정이선이 옆에 핀 연꽃을 턱짓으로 가리킨다.

‘여기에 연꽃이 피지 않소.’

‘아…….’

의식적으로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연꽃을 닮았다고 말하던 목소리가 아른거리고, 자연스럽게 생각은 조금 더 깊어진다. 가만 이어지던 침묵을 함께하던 상대가 속삭였다.

‘내 계속 연꽃 피는 자리서 기다리겠소.’

‘……저는 연꽃 싫습니다.’

‘왜?’

의아한 얼굴에 뚱한 표정을 지으며 괜히 연꽃을 흘겨본다. 최연화. 이름이 ‘연화(蓮花)’인데도 연꽃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이 이름이 싫었다.

‘연꽃은 흙탕물에서 피어나지 않습니까.’

조금 더 예쁜 꽃들이 많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불퉁한 표정을 짓자, 이선이 웃으며 손을 맞잡아 온다. 움찔거리는 손을 아무렇지 않게 꾹 눌러 잡으며 속삭인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이지.’

‘…….’

‘내 흙탕물과도 같은 존재지만, 품은 꽃 하나는 그리도 귀하다오.’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바라본다. 아무런 말도 못 하는 모습을 보고도 정이선은 그저 눈꼬리를 휘며 다정하게 웃는다. 슬쩍 웃는 얼굴에도 감정이 그득 담긴 것만 같다.

‘그러니 꼭 이곳에 돌아오시오.’

‘…….’

‘내가 계속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씨! 희진 씨!”

“헛, 네! 네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시 넋을 놓고 있었던 임희진이 기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쳤다. 나 지금 옛날에 찍은 촬영본 생각한 거야?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일에 진심이었어? 스스로의 행동에 소름이 돋는다. 몸을 부르르 떨자 매니저가 이상하다는 듯 그런 임희진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어휴, 저번 촬영 생각이 좀 나 가지고……. 벌써 다 찍었어요?”

“네, 배우분들이 진짜 대단하시더라고요. 워낙 감정 연기 심한 곳이라 NG 여러 번 날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끝났어요! 감정도 안 끊기고, 진짜 첫 장면 그대로 같던데요?”

신나게 떠들어 대는 소리가 영 현실감이 없었다. 가끔 신들린 것 같은 촬영 현장이 있다고는 듣긴 했는데……. 어떻게 그 집중력이 이 하이라이트에 적절하게 왔나 모르겠다. 오늘따라 모든 게 완벽했다. 촬영에 들어갈 시간에 비해 일찍 도착한 임희진을 제외한 채 모든 것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마저도 주님의 배려 같기도 했다. 좋은 장면이 있으니 보라고 길이라도 인도해 주신 거 아닐까?

고개를 끄덕이던 임희진의 눈에 감독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무덤덤한 얼굴의 주선율과 환하게 웃는 황강이 보였다. 주연이고 악역이고 실제 배우랑은 너무 매치가 안 되는 모습이다. 떨떠름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 빠른 속도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어, 희진 씨. 벌써 왔어요?”

먼저 살갑게 인사하는 건 이 드라마의 악역, 세자를 맡은 황강이고.

“안녕하세요.”

딱히 반가운 기색 없이 인사하는 건 능청맞은 주연 정이선 역을 맡은 주선율이다.

저렇게 실제랑 다른 거 보면 신기하단 말이야. 임희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아까 떠올렸던 정이선과 최연화의 장면을 상기하다가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요?”

“두 분이 연기를 너무 잘하셔서요. 시청자분들 반응이 궁금해서.”

“그거까지 봤어요? 진짜 일찍 오셨구나.”

“저, 여기 불타는 줄 알았잖아요. 두 분 모두 연기 너무 잘하셔서.”

“하하하!”

“감사합니다.”

호탕한 웃음소리 속에서 어색한 감사 인사가 이어졌다. 두 배우의 정반대 모습을 보고 임희진이 말없이 씩 웃는다. 촬영이 끝나 가는 게 아쉬워진다. 조금 더 긴 작품이었으면 더 많이 좋은 장면들을 봤을 것 같은데.

주인공과 악역의 대립이 간접적으로 이어진 부분이 많았던 게 새삼스럽게 안타까웠다. 촬영이 다 끝나 가는 이 마당에 너무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차라리 처음부터 신나게 맞부닥쳤으면……. 아니지. 그때는 이런 긴장감이 없었으려나.

임희진은 생각을 이어 가다 말고 흘끔 주선율을 바라봤다. 슬쩍 핸드폰을 보고 있던 주선율이 시선을 느꼈는지 움찔거리며 눈치를 보는 게 약간 웃겼다.

* * *

이 스케줄 최악인데.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제 들어갈게요.”

“여기 앉으시면 돼요.”

“마이크 한 번만 체크하겠습니다.”

“선율아, 저기 백이 봐 봐! 우리 백이 완전 막둥이 같지 않아? 여기서 예쁨 되게 받네~!”

“다 들린다.”

정신이 몽롱했다. 스태프가 와서 마이크를 확인하고 헤어를 체크하고, 옆에서는 공진하가 신나게 떠들어 댄다. ……혹시 이거 꿈인가? 이 상황이 진짜 말이 돼?

최백이 예능을 들어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지금 방영하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다만… 내가 여기에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아, 대진이네 라디오도 궁금했는데!”

혼란스러운 나와는 달리, 해맑기 짝이 없는 공진하가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과하게 태연한 태도였다. 저 앞에서 다른 패널들과 대화를 나누는 최백도 마찬가지다.

최백의 예능에 다른 누구도 아닌 공진하와 단둘이 나오게 된 비극적인 이유는 그 망할 가위바위보 때문이었다. 컴백을 앞뒀지만 각자의 스케줄로 다른 때처럼 모든 일정을 소화하기가 버거워, 멤버들의 고정 예능을 활용하기로 했다가 이 꼴이 난 것이다.

신기운하고 강이헌이 간 하대진의 라디오가 그리웠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데 이상하게 너무 그립다. 여기보다는 거기가 훨씬 편했을 것 같은데…….

“야, 너 좀 조용히 못 하냐? 왜 이렇게 시끄러워?”

“뭐야, 뭐야? 백이 지금 다른 패널들 피해 끼칠까 봐 그러는 거야? 대박이다! 우리 백이 언제부터 이렇게 배려왕이었어?”

“너한테만 막 해, 이 시끄러운 자식아.”

어느새 다가온 최백과 공진하가 다툼인지 대화인지를 나눴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기분이 복잡하다. 나만 이렇게 불편한 건가? 얘네는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얘는 왜 이렇게 기죽어 있어?”

“몰라? 아까부터 대꾸도 안 하던데? 선율아, 긴장돼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 말 없이 침묵하는 내가 이상하다는 듯 구는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내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행동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이게 더 나았다. ……그렇다고 불편한 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태연한 얼굴의 최백을 바라봤다.

“뮤지컬이랑 예능 같이하는 거 안 힘들어?”

“약간. 그래도 2주에 한 번 촬영이라 괜찮아. 이거 끝나고도 뮤지컬까지 조금 시간이 남기도 하고.”

최백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시간이 조금… 남는다고? 거의 안 남지 않나? 게다가 이 아침부터 나와서 녹화 준비하고, 가서 늦게까지 공연하면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생각할 것 같은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뭐라 말을 하나 고심하고 있는 나 대신 공진하가 해맑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에이, 여기서 말 한 번 안 하고 앉아 있기만 해서 편한 거 아니야?”

“…….”

“너, 마이크 찼냐?”

“응! 이미 찼지롱! 왜? 안 찼으면 어쩌려고 했는데? 들으셨죠, 감독님! 얘가 이렇게 폭력적이에요!”

부산스럽게 호들갑을 떠는 모습에 최백이 짜증을 내며 날 쳐다봤다.

“이 자식 대체 몇 살이야? 얘, 사실 너보다 어린 거 아냐?”

“…….”

그 기막혀하는 모습에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나도 가끔 하는 생각이다. 계속 “에베베베!” 하는 헛소리를 하며 밉살맞은 표정을 짓는 공진하를 착잡하게 바라봤다. 고정 예능 하고 나서 더 저러는 것 같은데……. 쟨 가서 대체 뭘 배우고 오는 걸까?

표정이 구겨진 최백이 뭐라고 하려는 순간, 저 아래쪽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백이야! 잠깐 이리 와 봐라!”

“네.”

최백이 망설이지도 않고 곧장 등을 돌려 아래로 향했다. ……뭐야, 지금. 저거 최백 맞아? 아니, 뭐. 최백이 평소에 대단히 예의가 없고 그러지는 않았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기겁한 나와는 달리 태연한 스태프들을 보니 자주 있는 일인 모양이다. 그게 더 충격적이었다. 최백이 저렇게 순하게 구는데 아무도 안 놀란다고?

“뭐야, 지금? 쟤 백이 맞아? 누구 다른 애 데려온 거 아니야?”

경악하는 공진하를 보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나만 이상하게 보는 게 아니구나. 복잡한 마음이 가라앉자 내심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멤버들 없이 나간 예능은 처음이라 걱정했는데, 잘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백인데 어지간히 잘했으리라 생각은 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잘 지내네.”

“너무 잘 지내지 않아?”

내 말에 공진하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삼키며 뭐라 대화를 나누는 최백을 지켜봤다. 저 모습을 보니 왠지 뮤지컬에서도 잘 지냈을 것 같다.

“사이좋아서 다행이긴 한데… 기분 되게 이상하다! 다른 애들도 아니고 백이가 저러고 있으니까 무슨 다른 집 백이 데려온 것 같아.”

“다른 집 백이는 뭐야.”

어감 너무 이상한데. 내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는지 공진하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유쾌한 웃음에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어떤 게, 왜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갑자기 든 안도감이었다. 나는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곧이어 녹화가 시작됐다. 매번 예능에 대해 물을 때마다 ‘별거 아니다’, ‘나는 조금만 나온다’ 하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프로그램은 일반인 지원자들 중심으로 이어졌다. 한동안 인기 있던 일반인 음악 프로그램 포맷을 그대로 따라간 프로그램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이어졌다.

무난하게 이어지던 촬영 속에서 나도 오랜만에 긴장의 끈을 놓았다. 우리도 게스트로 초대가 되긴 했지만 딱히 하는 말도 많이 없고, 척 봐도 촬영 중심이 우리가 아니란 게 느껴지니 편안하기까지 했다. 느긋하던 기분이 사라진 건 중간 쉬는 시간에 고우혁의 연락을 받고 난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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