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너와 나(2부 4권) (42/53)

14. 너와 나

6월이 되자 오래간만에 영화 팀이 전부 모였다. 몇 달 만의 일이었다.

“세언아!”

오래간만에 보는 감독이 환한 얼굴로 다가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아직도 세언이야?

“촬영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 세언이에요?”

“나 선율 씨라고 하지 않았어? 세언이라고 했어?”

“…….”

자각도 없이 그냥 그렇게 부른 거야? 기가 막히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독이 대단해 보였다. 그냥 내 얼굴 보면 강세언이라는 역할이 먼저 떠오르는 모양이다. 이 촬영 팀 중에 가장 열중해서 작업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 아닐까?

“어어~ 세언선율 씨다!”

“선율세언이! 잘 지냈어요?”

“…….”

취소.

오랜만에 봤는데도 스태프들의 활기는 여전했다. 그 수더분한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환한 얼굴로 다가와서는 내 볼이며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에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 얼굴을 못 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못 본 건지. 내게로 몰려든 스태프들이 계속해서 내 뺨을 매만졌다. ……내가 진짜 고등학생 막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오늘 포스터 촬영만 하는 거 아니에요?”

“맞지, 포스터 촬영만 하죠! 그런데 우리 세언이 좀 마른 것 같은데……. 누가 괴롭혀요?”

“요즘 드라마 들어갔다던데, 드라마 많이 힘들어서 빠졌나?”

“……그런데 왜 다들 와 계세요?”

누가 보면 포스터 촬영이 아니라 영화 추가 촬영이라도 하나 싶을 정도의 인원이다.

“보고 싶어서 왔죠!”

“오길 잘했네, 이렇게 빠진 거 몰랐으면 포스터 보고 울 뻔했어요! 감독님, 오늘 회식하죠!”

그 말이 그렇게 튀어? 회식을 사양하지 않는, 오히려 촬영 때도 나서서 회식하자고 했던 감독이 싫다는 소리를 할 것 같지 않아 다급하게 주변을 훑었다. 이 사람들하고 회식하면 집에 못 가는데……!

“좋아, 오늘 끝나고 회식이다!”

아니나 다를까 신나게 튀어나온 긍정의 말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덩달아 내 뺨을 꾹꾹 누르던 손들이 떨어져 나가자 옆에서 그 꼴을 지켜보고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곧장 팔을 잡아당겨 수정을 시작했다. 아니, 잠깐만.

“저 내일 촬영 있어요.”

“알지, 알지! 우리 세언이 미자니까, 콜라만 마시고 가!”

이제 나도 미자라는 단어가 뭔지 안다. 누가 미성년자야? 게다가 20대만 지금 세 번째 겪고 있는데, 엄연히 회귀한 시간들까지 따지면 앞자리가 바뀌고도 남았다.

“오늘 회식하시게요?”

“어어, 우혁 씨! 준비 끝났어요?”

“네, 정아 씨는 조금 더 걸릴 것 같아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등장한 고우혁의 모습에 여기저기서 짧은 탄성이 이어졌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정장을 차려입고 머리를 넘긴 모습을 보니……. 고우혁 차기작도 정장을 입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단추며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차려입은 고우혁이 자연스럽게 내 옆에 다가왔다. 평소라면 능청스럽게 잘생겼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며 다가와 말을 걸었을 스태프들이 맹한 얼굴로 길을 비켜 준다. 오늘따라 잘생겨 보이는 게 내 콩깍지는 아닌 모양이다.

“오늘 회식 갈 거예요? 내일 아침 촬영 있잖아요.”

“못 가요. 언제 끝날 줄 알고.”

“세언이 안 가게? 선율 씨는 내가 특별히 빨리 보내 줄 테니까 같이 갑시다! 몇 달 만에 다 같이 만났는데, 어?”

깜짝아. 언제 들었는지 바짝 다가온 감독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살갑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는 내 팔을 꾹꾹 눌러 보며 오늘 꼭 살을 찌워서 보내야겠다느니 하는 무서운 소리를 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스타일리스트가 다시 머리를 만져 준다. ……이 사람도 되게 정신없겠네.

소란스럽던 스튜디오는 다른 배우들이 준비를 끝내고 나온 이후,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며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몇 달 전 촬영장에서도 매일같이 보던 풍경인데, 오랜만에 보니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지금 하는 드라마도 조용조용한 편은 아니지만,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어떤 팀도 여기를 못 이길 것 같다. 이게 십년지기의 힘인 건가?

“좋아요! 단체 컷은 여기까지 하고, 우혁 씨랑 정아 씨! 이쪽으로.”

영화의 주역인 내 어머니 역 배우와 내 가정 교사 역을 맡은 고우혁의 촬영은 아까와는 약간 다르게 진행됐다. 목 끝까지 잠겨져 있던 단추가 몇 개 풀어지고 넥타이가 사라진다. 두 배역의 관계가 관계여서 그런지 두 배우 모두 약간 흐트러진 차림새였다.

촬영도 퍽 볼만하게 진행됐다. 와, 포즈 되게 야하네. 모태 솔로라던 고우혁은 애인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게 촬영을 이어 갔다. 놀라운 프로 정신이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표정이 뚱하게 변했다. ……그래도 그렇지, 고우혁 너무 내 신경 안 쓰는 거 아니야?

그때였다. 내 속내를 듣기라도 한 양 고우혁의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미소가 내려앉는다.

“…….”

짧은 순간의 눈 맞춤이었지만 효과는 좋았다. 나는 입술을 비틀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빙긋 웃고 사라진 시선이 기분 좋다.

“선율 씨, 저 잠깐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작게 속삭인 매니저가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괜히 불안하네. 촬영 당겨진 건 아니겠지? 솔직히 오늘도 겨우 시간을 냈다. 오전에는 촬영하고 오기도 했고. 당장 이번 달 말부터 방영이라 정신이 없었다. 홍보 영상에, 예능에, 드라마 촬영까지. 주연은 상상 이상으로 빡셌다. 조연일 때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던 것까지 전부 내 일이 된 기분이다.

우웅!


하대진 : 긴급공지!! 싸비쪽 안무랑 동선 좀 바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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