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35/53)

“일찍 왔네. 아직 저녁은 이르지? 커피 갖다 줄까?”

“…….”

공진하의 태도에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자 놈이 방긋 웃더니 내 주변을 빙그르르 돌며 겉옷을 벗겨 챙겨 갔다. 그 과하게 자연스러운 모습에 그동안 얼마나 공진하가 이런 식으로 내 옷이며 가방을 정리했는지, 그걸 내가 얼마나 태연하게 받았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됐다.

“너… 이러는 거 안 귀찮아?”

“아니! 엄청 좋은데?”

공진하가 신난 발걸음으로 내 방으로 반쯤 뛰어 들어갔다. ……앞으로 하지 말라고 하면 기죽을 것 같은데. 착잡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간단하게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드라마 미팅은 퍽 성공적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단역으로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던 작가는 이젠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오늘은 처음으로 감독을 비롯한 다른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눴는데, 작가에게 대체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다들 시종일관 밝은 얼굴을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작가는 드문드문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일단 내 첫 주연작이기도 했고, 처음에 작가가 급히 써서 보냈던 것과는 캐릭터도, 시나리오도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주강 말처럼 현대극이랑 사극은 많이 다르기도 하고. 음, 사실 지금 수정된 게 전보다 훨씬 더 좋기는 한데…….

“무슨 고민 있어?”

“……너, 커피 언제 타고 있었어?”

“너 올 때쯤 됐길래~! 나 완전 1등 남친감이지.”

“…….”

그 방긋 웃으며 하는 말에 본심이 가득 담긴 단어가 있는 건 착각일까……. 씻고 나오기가 무섭게 커피를 쥐여 주는 공진하를 떨떠름하게 바라보다 뒤늦게 고맙다고 대꾸했다.

자연스럽게 걸음은 식탁으로 옮겨졌다. 내가 가는 걸음을 따라 걷던 공진하가 종종종 움직여 내 앞에 자리 잡고 앉더니 심각한 척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 주겠다는 표정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뭘 그렇게 바로 들어 주려고 해. 너, 내가 그렇게 좋아?”

아. 버릇처럼 장난을 치고는 입을 다물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전에 하던 것처럼 놈을 놀린 것에 화들짝 놀란 나와는 달리 공진하는 환하게 웃었다. 우리 둘 다 평상시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언제나 내가 능청을 부리고 놈이 얼굴을 붉힌 채로 입을 다물었는데, 오늘은 정반대다.

“이제야 장난쳐 주네!”

반갑기라도 한지 밝게 말하는 모습에 시선을 슬그머니 내렸다. 머그잔에 담긴 따뜻한 커피가 묵직하게 제 존재를 드러낸다. 이 순간만큼은 익숙함이, 친근함이 무거웠다. 여러 의미로.

“왜 그런가 했는데, 전부 알아채서 그랬던 거구나.”

가만히 이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번쩍 뜨여진 눈에도 놈은 가만히 눈꼬리를 접었다. 본인의 감정을 눈치채고도 외면하려 했던 내 모습에 상처받는 대신, 공진하는 담담히 나에 대해 말했다.

“선율이 너, 겁 많으니까.”

그 담백하고 다정다감한 목소리에, 나는 이상한 불안이 샘솟았다. 얌전히 내뱉은 말은 모종의 신호탄으로 보였다. 오랫동안 견고하게 혹은 듬성듬성 이어 갔던 우리의 관계가 완전히 그 모습을 바꿀 거라고 말하는, 네가 쏘아 올린 신호.

초조해지는 건 나 혼자였다. 공진하가 날 좋아한다는 걸 의식했던 때와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생각 속의 공진하와 현실의 공진하는 모양새가 다르다. 너는 내가 자신의 감정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고도 평소처럼 순하게 눈꼬리를 휠 수 있다. 겁을 내지도, 두려워하며 안 좋은 기억에 빠지지 않고. 올 것이 왔다는 양 담담하게.

긴장과 초조함에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하고 놈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렸다. 머뭇거리다 튀어나온 목소리는 진절머리 날 정도로 비겁하다.

“우리 친구잖아.”

“응.”

차분히 수긍하는 목소리는 당황도, 분노도, 서운함도 담지 않은 채. 투명한 시선의 놈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우리, 친구지. 그런데 선율아.”

느리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진다. 단 한 번, 눈을 감았다 뜬 공진하는 더 이상의 머뭇거림 없이 말을 이어 간다.

“나는 네가 너무 소중해져서……. 자꾸 네가 신경 쓰여.”

그건 마치 아주 오랫동안 네 속에 있던 감정 같았다.

“그냥 네가 행복하면 좋겠다고,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노래하듯, 음률을 가진 목소리가 둥둥 허공을 떠다닌다. 공기 방울 같은 목소리는 과거를 불러들인다. 네가 지었던 표정 하나, 네가 속삭인 말 하나를 담아 가며. 우리는 현재에 앉아 과거를 곁눈질한다. 여느 날과 같았던 때에 나눴던 대화 한 조각을 떠올리며 우리는 서로를 되새겼다.

“자꾸 괜찮다고 해 주니까, 자꾸 욕심이 나더라.”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다독이고 지지해 왔던 기억들을 한 걸음, 한 걸음 밟아 가다 보니, 그곳에 네가 서 있었다.

“그냥 내 옆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과거의 이야기 위에 서서, 네가 내게 해 줬던 말대로 ‘누구보다도 다정해진 네’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나약했던 네가 눈꼬리를 휘며 봄볕처럼 웃었다.

“내가 널 많이 좋아해.”

크지 않은 소리는 아주 조심스럽게 나왔다. 만약 말이 눈에 보인다면, 나는 네 그 짧은 고백이 반짝반짝 빛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 환하게 눈부시니까, 아마 네가 내뱉은 말도 그렇게 소중히 빛이 날 것 같다고.

“아주 오랫동안 몰래 좋아했는데……. 이제 몰래 하는 거 안 할래.”

숨결이 가득 담긴 고백이 천천히 흘러나오는데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 그 속살거림을 들었다. 어느새 스르르 테이블 밑으로 떨어진 손을 슬며시 말아 쥐었을 뿐이다.

“너한테 말하고 싶었어. 좋아한다고.”

한때 봄 같던 분홍빛 머리카락이 하얗게 빛난다. 나는 그게 네 감정 같았다. 너는 세상 모든 다정한 것들을 품어 낸 것만 같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그 사랑에 잠기어.

“예쁜 감정이잖아.”

둘도 없는 사랑에 빠진 얼굴의 남자가,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가만 웃는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날 사랑한다는 양.

그 앞에서 내가 대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시선을 내린다. 담담히 제 감정을 고하는 사람 앞에서 나의 말들은 과하게 가볍게만 여겨진다. 우린 퍽 오랫동안 친구였고, 나는 널 그렇게 본 적이 없고, 나는 너를 잃기가 겁이 나고…….

그 무거우면서 가벼운 것들이 속을 꾹꾹 채워 넣다 말없이 사그라든다.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앉아 놈을 바라봤다.

“에이, 그런 표정 하지 말고. 나, 너 걱정하라고 한 말 아냐!”

공진하가 먹구름 한 점 없는 얼굴로 방긋 웃는다. 그러고는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가까이 기울인다.

“그래서 고민은 뭐였는데?”

“지금 그게 궁금해?”

“당연하지.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안이 네가 시무룩한 건데.”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니 놈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정말 공진하한테는 그게 가장 심각한 사안인 건지,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리지도 않고 재차 물었다. 이게 진짜 방금 전에 고백한 사람이 맞긴 한 건가?

“오늘 미팅하러 갔잖아. 별로였어?”

“……그게 왜 중요해? 너, 바보야?”

너무 태연하게 굴며 넘기니 화가 치밀었다. 내가 공진하를 아는 것처럼, 놈도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 마음을 깨닫자 의뭉스럽게만 느껴지던 뜻 모를 말들도 이제는 하나둘 퍼즐이 맞혀진다. 놈은 이미 그 누구보다도 먼저 최백에 대해, 고우혁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나한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어쩌면 그 사이의 내가 어떤 마음을 하고 행동하는지조차도.

“너, 다 알잖아. 최백도, 고우혁도. ……나도.”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마냥 그 온기를 받고 싶기만 한 이 이기적인 마음도. 하지만 공진하의 표정은 잔잔하다. 내가 잔뜩 표정을 구긴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두 연적도, 내 행동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그런데 진짜 그거보다 내가 더 중요해?”

“중요하지.”

망설이지도 않고 나온 대꾸에 입을 다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유순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게 보인다. 늘어뜨렸던 눈썹이 점점 제자리를 찾고, 힘을 뺀 채 의식적으로 내렸던 어깨에는 찬찬히 힘이 들어간다. 가라앉는 그 겉모습처럼, 이어지는 공진하의 목소리도 점점 더 내려갔다.

“최백도, 고우혁도. 신경 쓰던 시기 지났어. 난 네가 가장 중요하고…….”

종래엔 갈라진 목소리가 깊은 속내를 속살거렸다.

“너한테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해.”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 되새긴 단어를 찬찬히 어루만지듯, 낮은 목소리가 다시 귓가로 흘러들었다.

“네가 나 없으면 안 될 거 같았으면 좋겠어.”

저도 모르게 설핏 새어 나오는 미소가 다정하다.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리는 것처럼, 혹은 미래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처럼.

“내가 그러는 것처럼, 너도 나한테 안달 내고, 좋아 죽고, 옆에 있으면 만지고 싶고, 얼굴 보면 웃음 나고, 웃는 거 보면.”

뚫어질 듯 눈을 마주하던 시선이 아래로 느리게 떨어져 나간다. 긴장을 해서인지, 아니면 계속 시선을 마주하고 있어서인지 눈꺼풀이 움찔 움직이는 게 세세하게 보였다.

“키스할까.”

미묘하게 내려간 시선의 목적지가 은근하게 표현된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말며 마른침을 삼키자 놈이 짧게 웃었다.

“고민했으면 좋겠어.”

그러고는 방긋 웃는다. 지금까지의 긴장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은 공진하가 “그래서 그러는 거야. 특별한 사람 되려고! 완전 계획적이지?” 하고 장난스럽게 윙크한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그냥 네 말을 흘려보내선 안 됐다.

“나 연애 안 할 거야. 아니, 못 해. 나한테 너는 그냥 친구야. 나는…….”

나는, 우리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관계가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참 이기적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강하게 내뱉었던 첫말과 달리 끝으로 가면 갈수록 목소리는 작아지고, 주눅이 든 양 고개는 아래로 떨궈진다. 중간에 뚝 끊긴 말을 끝으로 침묵이 찾아온다.

“응.”

짧게 수긍한다. 내가 하지 않은 말까지 알아차린 듯이, “나도 알아. 선율아” 하고 속삭인다. 나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식탁을 두고 마주 앉은 너는 시선이 마주치자 가만히 웃는다.

“사귀자는 것도, 나한테 시간을 달라는 것도 아니야.”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냥 언젠가는 말하고 싶었어.”

그냥 알아만 달라고.

“그게 오늘이라서 기뻐.”

공진하는 눈꼬리를 접는다. 정말 그게 다라는 듯이. 원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듯.

‘키스할까. 고민했으면 좋겠어.’

“그럴 리가.”

바라지 않는다는 건 전부 거짓말이다.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입을 꾹 다문 채 흘겨보자 방긋 웃으며 몸을 기울인다. 그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제스처에 기가 막혔다.

“아깐 고민했으면 좋겠다며.”

“으흐흥. 고민하면 좋으니까! 그래도 너 부담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지.”

방실방실 웃는 얼굴이 얄밉다. 하루 종일 고민하라고 일부러 말한 거 아닐까. 나에 대해 잘 아는 놈이니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은데.

“그런데 있잖아, 선율아.”

의심스럽게 보는 나를 향해 몸을 숙인다. 바짝 식탁에 몸을 붙인 채 가까이 다가오는 공진하가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그러고는 방긋 웃으면서.

“요즘은 썸 탈 때도 할 거 다 한대.”

“미쳤, 미쳤어? 누가 썸을 타?”

“으응? 누가 썸 탄댔나~ 그냥 그렇다는 거지!”

손을 휘젓는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모습에 공진하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이라는 것처럼 굴지만, 놈을 과하게 잘 아는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진심이다. 지금 할 거 다 하고 싶다고 그냥 대놓고 말한 거나 마찬가지다!

급하게 내 방으로 도망치는 나를 향해 공진하가 소리쳤다.

“나는 사귀기 전에 할 거 다 하는 거 찬성이야!”

“조용히 해, 변태 자식아!”

“이 찝찝한 분위기는 뭐야.”

최백이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와 공진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공진하가 환하게 웃는 걸 보고 내가 시선을 피하자, 놈과 나 사이에 방어막처럼 끼여 앉아 있던 하대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까부터 이랬어요. 둘이 싸웠나 봐요.”

“그런 거치고 진하 형 표정은 너무 밝은데? 형, 진짜 선율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진짜 싸웠어?”

소파 앞 바닥에 앉아 있던 강이헌이 공진하를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모습에 방긋 웃은 공진하가 손을 휘저으며 밝게 대꾸했다.

“싸운 거 아니야~ 이건 더 좋은 거야!”

“……?”

“……뭔 소리예요?”

하대진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멀거니 최백 뒤의 벽지를 바라봤다. 방에 들어가고 싶다.

내 넋 놓은 시선에 최백이 눈썹을 찌푸리며 눈앞에 손을 휘휘 젓는 게 보였다. 하지 말라고 눈에 힘을 빡 주니 그제야 손을 내려 날 이리저리 살핀다. 종래엔 옆에 딱 붙어 앉아 볼을 꾹꾹 누르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기까지 했다. ……대체 무슨 확인을 하는 거야? 내가 진짜 화초라도 돼?

이런 나와 최백을 신경도 쓰지 않고, 왼쪽에서 공진하와 하대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진아,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 알아?”

“알아요.”

“이게 바로 그거야.”

“……진하 형 아픈 거 같은데요.”

하대진의 심각한 목소리에 강이헌이 진짜 그런 것 같다며 동조했다. 이 와중에 서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신기운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진하 형 말이 맞아요. 이건 긍정적 변화예요.”

“신기운, 너까지 왜 그래? 이거 방 문제인가? 형, 쟤도 아파 보이죠?”

“……저기 터가 안 좋나?”

시선이 곧장 신기운에게로 돌아갔다. 심드렁한 얼굴로 사과를 베어 물며 눈을 깜빡이는 모습에 이가 다 갈렸다.

‘진하 형은 다른 거 열심히 하셔야죠.’

저 자식, 다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심지어 밀어주고 있었어.

‘진하 형 솔로곡이에요. 제목은 어제 지었는데, 이건 제가 아니라 형이 말하는 게 낫겠죠?’

그때 곡 제목도 나보고 말하라고 하더니……. 이미 한참 전에 모든 걸 눈치채고 공진하를 도와주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니, 그걸 왜 도와주고 있는 거야? 어이가 없네. 코웃음을 치는데 옆에서 최백이 입술을 꾹 잡아당겼다. 이 와중에 이건 뭔가 싶어 성질이 나 거칠게 놈의 손을 내리쳤다.

“넌 이거 그만 안 해?”

“멀쩡한 건가 확인 좀 했지. 평소랑 너무 달라서.”

그걸 왜 눌러 보고 해야 아는 건데. 이놈의 그룹에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최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놈의 얼굴을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몇 시부터인데.”

“뭐가?”

“뭐긴 뭐야, 네 방송 시간이지.”

최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모르는 척을 하는지 모르겠네. 저번 주는 몰랐어도 이번 주는 멤버 전부가 확실히 최백의 예능을 아는 눈치였다. 나는 최백이 일요일 스케줄을 묻는 걸 보고 눈치챘는데, 아무래도 애들 중 일부는 그 예능을 실제로도 본 모양이었다.

심지어 하대진은 아침부터 오늘은 절대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을 정도다. 하여튼 이런 거 되게 잘 챙긴다. 나 예전에 드라마 처음 촬영했을 때도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서 방송 보더니.

모른 체를 하는 최백 대신에 하대진에게 달라붙어 이상한 말을 계속하던 공진하가 허리를 숙여 이쪽을 바라봤다.

“아, 내가 알아. 그거 6시부터야.”

“…….”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 방긋 웃는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하필 시선을 돌린 옆에 최백이 딱 붙어 앉아 있어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최백의 눈이 가늘어지는 모습에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아… 오늘 왜 이렇게 피곤하지. 침묵에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지는 게 그대로 느껴진다.

“흐흥. 선율이가 되게 조용하네! 고맙다는 말도 안 해 주고, 시선도 피하고~”

“주선율이 말도 안 하고 시선도 피하는데 형은 왜 즐거워 보여요?”

공진하의 신난 목소리에 하대진이 떨떠름하게 대응하는 걸 들으며 괜히 고개를 내려 TV를 보는 척을 했다. 6시면 슬슬 할 시간인데. 틀어져 있는 채널은 예상했던 그 프로그램이었다. 복면 쓰고 노래 부르는 거. 어이가 없다. 저 프로그램일 줄 알기는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기서 비밀로 하랬다고 진짜 멤버한테까지 말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거짓말을 하려면 좀 노력이라도 하든가……! 기가 막혀서 표정을 팍 구기자 옆에 앉아 있던 하대진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렸다.

“야, 야. 내버려 둬. 저 형 분명 자기 들통나기 전까지는 저러고 있을걸?”

“흠.”

최백이 어깨를 으쓱이며 씩 웃는다. 그게 퍽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라 뭐라 하려던 말도 결국 한숨으로 변해 튀어나왔다. 융통성도 없고 거짓말할 노력도 안 하는 자식이지만 여기에 나온 걸 보여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떨떠름하게 놈을 바라보다 입을 꾹 다물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백이 스스로를 숨기기란 쉽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한테는. 워낙 뭘 안 하는 애다 보니 보는 사람이고 패널들이고 얼굴을 가린 최백이 누군지 감도 안 잡히는 모양이었지만, 같은 그룹에 속해 있는 우리는 최백이 노래를 부르자마자 힐끔거리며 최백을 바라봤다.

놈은 그 시선에 모른 척도 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마치 ‘나 대단하냐?’ 하는 것 같아 입술을 비틀었다.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만으로 대결을 해, 거기서 실제로 듣는 사람들의 판정으로 승패가 가려지는 이 음악 예능은 최백이 본인의 첫 예능으로 할 법한 장르였다. 부담스럽지도 않고, 얼굴도 가리고, 실력도 보이고.

듀엣곡으로 더 듣고 싶은 목소리를 가려낸다는 1차전은 지난주에 끝이 났다고 하고, 오늘은 솔로곡을 불러 일대일로 맞붙는 2차전부터 시작이 됐다. 놈의 호칭은 ‘보글보글 사자머리’였다. 사자탈을 쓴 최백이 약간 우스꽝스러워 보이면서도 깔끔하게 정장을 입은 게 꽤 괜찮아 보이기도 했다. 얼굴만 나쁘지 않은 줄 알았더니 이 자식은 비율도 좋았던 거다. 다 가졌네, 아주.

패널들이 얼굴 가렸는데도 이미 훤칠하다는 말에 화면 속의 최백이 별다른 행동도 취하지 않은 것에 비해, 화면 밖의 최백이 심하게 환히 웃으며 날 바라봤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건지, 놈은 윙크까지 해 댔다.

“야, 주선율. 들었어? 나 얼굴 가렸는데도 잘생겼대.”

“저 때 좋아하지, 왜 지금 이러고 있는 건데?”

“빈말일 수도 있잖아. 네 눈에는 어떤데. 잘생긴 거 같아?”

“…….”

빈말 좋아하시네……. 어이도 없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찝찝해서 머뭇거리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발이 쑥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라 보니 공진하가 소파 뒤에서 다리를 뻗으며 나와 최백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뭐야, 언제 온 거야?

“아이고, 우리 백이 잘생겼지 그러엄! 어? 누구네 그룹 비주얼인데 잘생겨야지 그럼!”

“아, 뭔데.”

“아니, 진하 형 오늘 왜 이래요? 자리도 넓은데 왜 거기에 앉으려고 해?”

성질을 내는 최백의 소리와 급하게 옆으로 자리를 비켜 주는 하대진의 목소리가 양옆에서 터져 나왔다. 정신이 없네. 옆으로 자리를 옮기고 공진하가 자리에 앉는 사이 2차전 판정이 발표됐다.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TV 소리가 무슨 저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승자는, 보글보글 사자… 뭐?

“허억! 뭐야?! 이겼잖아! 형, 이겼어요?”

“노래 준비한 거 다 부르고 왔겠네! 그래서 기분 좋았던 거구나, 우리 백이~”

“지금 기분 나빠졌으니까 빨리 원래 자리로 꺼져라, 공진하.”

최백이 눈을 번뜩이며 공진하를 노려봤다. 꽤 서늘한 표정인데도 공진하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아, 우리 백이가 나한테 막 해서 나 너무 서운해” 하고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 숙소에 있던 리얼리티용 카메라가 다 빠져서 안타까운 장면이다. 열심히 귀여운 척을 하는 공진하나, 그걸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는 최백이나 둘 다 되게 우습고 하찮은데…….

“너 진짜 안 가?”

“절대 안 가지!”

투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송은 계속해서 진행됐다. 생각보다 최백이 꽤 오랫동안 나오고 있다. 우리가 보기엔 누가 봐도 최백인데, 여전히 TV 속 사람들은 별별 이름들을 다 대면서도 놈의 이름만큼은 누구 하나 꺼내지 않고 있었다. 발라드 가수라니, 아이돌이라고 속으로 열 번은 넘게 항변했을 무렵, 마지막 무대가 시작됐다.

“대체 얼마나 연습한 거야…….”

강이헌이 웅얼거리는 소리에 힐끔 시선을 옮겼다. TV를 보고 있는 눈가가 촉촉하다. 오늘 우리 리더 울겠는데. 글썽거리는 강이헌과 달리 최백은 불퉁한 표정이다. 자기가 부르는 노래를 심드렁하게 듣던 얼굴이 돌아가고, 시선이 마주치자 거짓말같이 표정이 환하게 풀렸다. ……어이없어. 내가 뭘 했다고 저렇게 웃는 거야? 그 모습에 헛웃음을 터뜨리는데,

“안 돼.”

짧은 목소리와 함께 시야에서 최백이 사라졌다. 그 대신 보인 건 몸을 기울여 정확히 최백을 가린 공진하의 옆모습이다. 내려가 반쯤 잠긴 시선이 고개와 함께 내게로 쓱 옮겨졌다. 무표정한 얼굴이 얼핏 서늘하게도 보였다.

“안 되지, 선율아.”

낮은 목소리와 함께 뻗어진 손이 볼에 닿았다.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싼 공진하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깜빡인다.

“여기 나도 있는데.”

“…….”

아까 내가 뭐랬더라. 리얼리티 카메라가 없어서 아쉽댔나. 전부 취소다. 아니, 아쉽지 않다. 천만다행이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급하게 몸을 움직여 공진하의 손에서 벗어났다. 화들짝 놀란 나만큼이나 놀란 하대진이 덩달아 공진하의 반대쪽으로 움직이며 순식간에 소파 끝으로 움직였다. 아까만 해도 서늘한 표정을 짓던 공진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방긋 웃으며 입가를 가리는데, 누가 봐도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하하, 엄청 놀라네! 왜 놀라고 그래~”

“너, 미쳤어?”

“진, 진, 진하 형. 무섭게 왜 그래요?!”

하대진의 말을 듣고 내심 안도했다. 쟤 눈에는 무섭게만 보였구나. 나한테는 위험하게 보였다. 참고 참던 감정을 못 이기고 터뜨려 결국 혼자 하던 짝사랑이 모두가 함께 아는 짝사랑이 되는 그런 위험한 걸로 보였다.

이, 이 자식 왜 이래. 왜 막 나가? 원하는 거 없다더니, 거짓말인 줄은 알았지만 진짜 완전 헛소리였네! 공진하는 화들짝 놀란 내 얼굴에도 밝게 웃었다.

“이제 두 걸음!”

“그거 속담 아니었어요? 뭐 게임이야?”

하대진이 기겁하는 얼굴로 공진하를 보더니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내 앞에 앉아 나를 자기 뒤로 보호했다. ……이 자식 눈치 심하게 없는데? 신기운이 지그시 하대진을 응시하는 게 보였다. 쟤 눈에도 나랑 비슷하게 보인 것 같은데, 어째 하대진 눈에만 공진하의 행동이 퍽 위협적으로 보인 모양이다.

“…….”

그때였다. 차분히 모든 걸 듣고 있던 최백이 무시무시한 분위기로 일어났다. 그 기세가 얼마나 오싹했는지, 최백이 손을 움직일 때 나도 모르게 멱살잡이라도 하려나 긴장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최백은 그런 것 없이 검지를 내밀며 공진하를 가리켰다.

“이 새끼, 가둬.”

어디에. 나도 모르게 맥 빠진 표정을 짓고, 긴장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깨졌다. 공진하가 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백아, 그렇게 나를 독점하고 싶었어? 하, 어쩌지. 이런 집착, 너한테 받고 싶지 않은데” 하고 속을 긁어서 더 그랬다.

나름대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최백도 그 말에 열이 받아 공진하의 머리를 붙잡았고, 놈은 방긋 웃으며 손목 끝을 붙여 제 턱에 꽃받침을 만들었다. ……개판이다.

“아이, 참. 그렇게 날 가까이서 보고 싶어 할 줄은 몰랐어!”

“솔직히 말해 봐. 술 마셨냐? 아니면 머리 깨졌어? 아니면 앞으로 내가 깨뜨려 줄까?”

“혀, 형! 형, 참아요! 머리 깨면 사람 죽어!”

“그래, 둘 다 자리에 그만 앉자! 지금 거실에서 뭐 하는 거야. 응? 백이 형도 진하 형 머리 놓아주고, 진하 형도 그만 놀리고.”

“……최백 형, 가왕전까지 갔어요?”

뭐? 신기운의 목소리에 정신 사나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깨졌다. 모두가 서 있어서 반쯤 가려져 있던 TV를 급하게 돌아봤다. 막 화면에선 ‘보글보글 사자머리’가 인사를 받으며 퇴장하고 있었다. 강이헌이 리모컨을 뚝 떨어뜨림과 동시에 시선이 공진하 머리를 붙잡고 있던 최백에게 쏠렸다. 얌전히 앉아 있던 나도 반사적으로 자리에 일어선 채였다.

“허억.”

“흡…….”

“…….”

다들 제대로 된 말도 못 하고 최백을 바라봤다. 심지어 머리를 잡혔던 공진하도 넋 놓은 얼굴로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놈을 돌아봤을 정도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거실에서 TV 소리만 느긋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패널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침묵 속을 맴돌자, 멋쩍은 표정을 짓던 최백이 어색하게 공진하의 머리를 놓았다.

“……왜.”

“…….”

“뭐. 왜.”

최백이 마침내 표정을 구겼을 때, 대뜸 바로 앞에 있던 공진하가 최백을 꽉 껴안았다.

“뭐야! 너 미쳤어? 징그럽게 왜 이래?”

“가왕님!”

“아직 가왕 아니잖아! 안 보여? 그냥 3차전 통과한 거라고! 이거 놔!”

“멋있는 내 새끼! 야, 이 자식아! 이걸 몇 주 동안 말 안 한 거야? 바보야, 너? 했어야지!”

“놓으라고!”

최백이 온몸을 비틀며 난동을 부렸지만 딱 달라붙은 공진하가 놈의 어깨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괴로워하는 최백에게 곧 하대진이 달라붙었다. 최백의 이름을 부르며 꽉 껴안자 최백이 목 졸린 소리를 냈다. 얼마 안 가 강이헌도 그 포옹에 합세하자 거실에 거대한 사람 덩어리가 탄생했다. 그 사이에 낀 최백이 너네 다 미쳤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도 어째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형, 무슨 인기도 없는 보컬이 저기까지 올라갔어!”

그건 욕 아닌가. 그런 강이헌의 목소리에 물기가 찼다. 울고 있는 모양이다.

“왜 혼자 갔어요, 백 형! 저렇게 다들 형도 못 알아보고 서운하게! 말했으면 내가 꽃 사 들고 갔지!”

얼굴 가리고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서 무슨 말인지……. 하대진의 말에 난동을 피우던 최백이 피곤함에 찌든 목소리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만해, 가왕 못 됐어. 상대 잘하더라.”

“에엥?!”

하대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쑥 내밀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때였다. 마치 드라마의 BGM처럼, 때마침 TV 속에서 ‘둥가둥가 어르고 달래줘 아기 가왕님’이 오랜 명곡을 샤우팅하고 있었다. 그 고음을 내지르는 타이밍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혹시 여기에 아직도 카메라가 달려 있어서 때마침 방송국에서 그 장면을 내보낸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잘하네.”

“그러게. 못 될 만했네.”

어색한 하대진과 강이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왕이라고 확신하며 뿌듯함에 달려들었던 두 사람이 머뭇머뭇 떨어졌지만 공진하는 끔뻑이다 환하게 웃으며 최백의 양 볼을 마구잡이로 잡아당겼다.

“어이구, 우리 백이. 가왕 못 돼서 속상해쪄? 아니야, 잘했어! 첫 예능에 저기까지 간 게 어디야?”

“이어 나아.”

발음이 다 샌 말에 공진하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자 전염된 듯 절로 웃음이 터졌다. 다들 바보 같고 귀여웠다. 갑자기 싸우다가, 말리다가, 울다가, 저게 뭐 하는 짓인지. 하여튼 다들 감정적이다. 이 와중에 신기운은 절대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저 멀리서 사과만 먹으며 방관하고 있는 것도 웃겼다.

내 웃음에 벙찐 얼굴을 짓고 있던 멤버들이 하나둘 웃음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다 같이 서서 깔깔거리는 진풍경이 이어지더니, 곧 신기운이 핸드폰을 켜며 매니저 형의 회식 선언을 알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컴백을 위해 고기와 탄수화물 양을 줄이라던 형이 먼저 회식하자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만큼 퍽 기쁜 모양이었다.

아마 여러 감정이 겹쳤겠지. ‘엘앤엘 일 아니다’라며 개인 활동을 안 하던 최백, 갑자기 내 촬영장까지 달려와 쓰러졌던 최백. 저기 가서도 아무도 ‘혹시 엘앤엘 최백 아니냐’며 묻지도 않을 정도로 인지도 없는 놈이 저기까지 올라간 것에 대한 뿌듯함. 그리고 내가 세세하게 알지 못할 수많은 그들 사이의 기억들.

나갈 준비를 분주히 하며 순식간에 흩어지는 애들 사이에서, 최백이 말없이 서서 날 바라본다. 그 묵묵히 바라보는 눈길이 담담하다. 최백의 일에 놈보다도 열렬히 반응하던 애들 사이에서 있어서 그런가, 그 모습은 더 정적으로 보였다.

“깜짝 놀랄 만한 걸 준비하긴 했네.”

슬쩍 웃으며 놀리듯 한 말에 최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에 영화 촬영으로 내려갔을 때, 최백이 통화상으로 한 말에 대한 이야기였다.

‘네가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걸 준비 중이라.’

그렇게 말하더니, 사실 노래 예능을 나간다는 건 나름대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 저 정도로 잘하고 올 줄은 몰랐다. 놈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상대 또한 길이길이 남을 법한 ‘레전드 영상’을 찍어 냈다. 이번 화 입소문이 돌면 아마 최백에 대한 시선도 달라질 것이다.

최백은 그 누구보다 눈에 띄는 인물이다. 엘앤엘 이외의 활동을 싫어하던 이전 삶에서도 놈은 엘앤엘이 눈에 띔과 동시에 점점 가십에 휘말리기 시작했었다. 본인이 아무리 얌전히 있어도 세간의 이목은 놈을 향해 움직였다.

그런 과거를, 아니. 어느 시점의 미래를 알고 있어서일까, 나는 오늘이 최백의 어떤 특별한 기점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연예인으로서 확연히 달라질 그 기점이 되리라고.

그 생각은 참 이상하게도 뿌듯했다. 덤덤히 있는 최백과는 달리, 나는 다른 애들이 그랬던 것처럼 만족감과 안도감에 차 절로 미소를 지었다. 놈은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다가, 씩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다음 주에 가왕 됐어?”

“거기선 좀 벗어나라. 떨어졌는데 뭘 2주 동안이나 도전을 해?”

최백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끔뻑이자 눈꼬리를 휜다. 눈물 점이 돋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제 즐거움을 숨기지 않은 놈이 허리를 굽혀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귀를 가져다 대자 최백이 웃는 소리를 낸다.

“이제 나한테 익숙해졌나 봐.”

“……아니거든.”

뒤로 물러서자 따라서 한 걸음 붙는다. 놈을 흘겨보려 하는 순간이었다.

“요즘 연기 배워.”

“……뭘 배워?”

“연기.”

입이 벌어졌다. 최백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백이. 노래도 아니고 연기를 배운다고? 남들 몰래 작게 속삭이던 놈이 환하게 웃었다. 내 표정이 마음에 든다는 얼굴이었다.

“거봐, 깜짝 놀랄 만한 걸 준비 중이라니까.”

꽤 오랫동안 이런 장면을 그린 듯이, 그렇게 말한 놈이 내 머리를 한 번 쓱 쓸고는 떨어졌다. 나는 그 떨어져 나가는 손을 급하게 잡아챘다. 내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오. 뭐야, 이거. 떨어지니까 아쉬워?”

“연기를 배운다고?”

“응.”

고개를 끄덕인다. 최백이 진절머리 치며 어쩔 수 없이 드라마를 찍던 이전 삶이 스쳐 지나간다. 그랬던 놈이 연기를…….

“왜?”

내 말에 최백이 물끄러미 날 바라보다 시선을 내린다. 잡아챈 손에 닿았던 걸까, 얌전히 잡혀 있던 손이 느리게 움직여 저를 잡은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손끝으로 느리게 손등을 쓸어내리며, 두어 걸음 떨어져 있던 놈이 슥 맞붙어 온다.

“네가 좋아하니까.”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 온다. 팔이 붙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최백이 손끝에 힘을 준다.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손등을 꾹꾹 누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놈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서.”

밑을 보고 있던 고개가 올라가고, 나처럼 시선을 내렸던 최백도 나를 마주한다. 코앞에서 응시하고 있는데도 놀라는 기색 없이,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하게 웃는다.

속살거리는 목소리처럼, 마주 잡고 있던 손은 느긋하게 움직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겹쳐 들어간 온기가 나를 꽉 옭아매면서, 까만 눈이 가만히 시선을 즐기듯 깜빡인다. 희미한 숨소리가 예민하게 겹쳐 들고, 긴 속눈썹이 움직이는 걸 지켜보며. 나는 너에게 온몸이 붙들린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한 채 그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너랑 연애하려고.”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뭐 해?”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떨어지며 고개를 돌렸다. 차갑게 굳은 공진하가 최백을 쏘아보고 있었다. 손에는 겉옷을 들고 있었는데, 그거… 내 거잖아. 내 옷을 챙겨 온 모양이었다. 이 와중에.

“뭐야, 되게 노려보네. 내가 노려볼 타이밍 아니냐? 방해받았는데.”

“방해?”

되묻는 목소리가 서늘하다. 심드렁한 최백의 얼굴과는 달리 차갑게 굳은 공진하가 입꼬리를 올렸다.

“재밌는 단어네.”

……왜 이렇게 오싹하지.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팔뚝을 쓸어내렸다. 그런 날 눈치챈 공진하의 표정이 피어났다. 웃는 얼굴로 분위기를 바꾼 공진하가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손수 겉옷을 입혀 줬다.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 노력하며 옷을 입었다.

“내가 챙겨도 되는데.”

“내가 챙기고 싶었어. 밖에 추우니까.”

아까와는 다른 사람인 건가.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힐끔 곁눈질을 하니 방긋 웃는다.

“모자도 챙겨 올까? 차 타고 이동할 거라 괜찮을 거 같긴 한데.”

이 이상 안 챙겨 줘도 될 것 같다. 아무 말 없는 최백이고, 보란 듯이 구는 공진하고 매우 불편하니까.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괜히 겉옷을 정리했다.

“그… 마스크는 챙겨 올게. 내가.”

“그럴 줄 알고 마스크도 챙겨 왔지!”

마법사라도 된다는 양 뿅! 하고 말하며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낸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내가 이미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얼굴이다. 마스크 찾을 걸 알았던 건가?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공진하가 수줍게 웃으며 마스크로 제 입가를 가렸다.

“센스 대박이지. 나, 완전 일등 남친감 아니야?”

“…….”

“하.”

최백의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는 날 두고 공진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능청스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기서 뭐 해, 백아?”

그러고는 입꼬리를 쓱 올리면서 상냥하게 속삭인다.

“방해되잖아.”

“…….”

“이번엔 내가 노려볼 타이밍인 거 같은데. 그치.”

“……이 새끼가 되게 재밌게 구네?”

“칭찬 고마워. 갈까, 선율아?”

“…….”

이거 돌겠는데. 삼각관계 이거 끔찍하다. 아무것도 모를 매니저 형과 강이헌에게 강렬한 죄책감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멤버 절반을 연애사로 꼬이게 만들었다.

“뭐 하세요?”

이상한 긴장감 속, 준비를 끝내고 제 방에서 나온 신기운이 무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고는 겉옷은커녕 아까와 다를 바 없는 최백을 쓱 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매니저 형이 바로 나오랬어요.”

이때다. 나는 곧장 신기운의 옆에 다가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가자.”

“다른 형들 안 기다리고요?”

“됐어, 나랑 먼저 타.”

“네.”

급히 신기운을 붙들고 나가는 사이, 미묘한 침묵이 숙소를 휘감는다. 바야흐로 삼각관계의 시작이다.

* * *

물음 이후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소란스러움을 뒤로 한 흐린 배경 속, 담담한 얼굴이 말을 잇는다.

‘좋은 사람이라서요.’

“…….”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 걷혔는지, 커튼이 전부 걷힌 창문에서 환한 볕이 쏟아 들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꽤 늦은 시간이다. 간만의 늦잠이었다. 스케줄이 없어서 다행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 어제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매니저 형은 컴백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오늘 회식에선 술은 절대 하지 말라고 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멤버들을 일일이 지켜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잔뜩 신난 매니저 형의 앞에 앉아 유일하게 술을 허락받은 신기운의 소주를 몇 잔 뺏어 먹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술이지만 어제따라 얼마나 잘 들어가던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느긋하게 진동하며 존재를 알리는 핸드폰의 연락과, 드문드문 이어지는 시선들은 자꾸만 술을 불렀다.

최백과도, 공진하와도 같이 앉을 자신이 없어 가장 먼저 신기운의 손을 붙들고 매니저 형 앞자리에 앉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모든 걸 눈치채고 있는 신기운은 계속 여기에 앉아 있을 거냐고 물어 댔지만. 나는 계속 그 말을 무시하다 끝내 한 질문을 내뱉었다.

‘너, 공진하 왜 도와줬어?’

‘좋은 사람이라서요.’

“…….”

어제의 짧은 대화가 머릿속에서 이어진다. 깊은 한숨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향했다. 그래도 어제 일이 전부 기억나는 걸 보니 저번처럼 취해서 못 할 말을 내뱉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누구 남아 있는 사람이 있나 애들 방을 다 열어 봤지만 모든 방이 텅 비어 있었다. 늦잠을 잤다지만 다들 진짜 집에 붙어 있지를 않네. 체력 한번 대단하다.

나는 비척비척 소파로 걸어가 편하게 자리에 누웠다. 이상하게 침대보다 여기가 더 편하다. 창밖에서 비추는 햇살에 눈을 감으니 나른한 감각이 몸을 휩쓸었다. 볕에 쭉 퍼진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생각도 날 흔들지 못한다. 음, 못 했다.

‘요즘 연기 배워.’

“미친놈.”

얼핏 떠오른 목소리 하나에 열이 훅 올라온다. 최백이 연기에 관심 없는 건 아마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 거다. 세 번째 삶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그 최백이 연기를 배운단다. 내가 좋아해서.

미친놈 이상 그 자식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나. 내가 좋아한다고 배운다니, 그럼 내가 좋아한다면 터무니없는 것까지 다 배울 생각인 건가? 놈의 기준이 나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최백의 삶 전반을 뒤흔들고 있는 줄은 몰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최백의 방문을 노려봤다. 이 자식 지금 없는 것도 혹시 연기 배우러 간 거 아냐? 텅 빈 방을 노려보다 핸드폰을 들었다.

10:02

너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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