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날개(2)
“아, 정말요? 안무 좋았죠.”
확실히, 라이브 앱이 늘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팬들과 직접적으로 라이브로 소통할 수 있는 앱이 나온 이후, 많은 연예인들이 이를 이용하며 각종 홍보에 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흠. 엘앤엘에서 이렇게까지 활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두 번의 회귀를 거쳤지만 엘앤엘은 딱히 빽빽한 스케줄을 자랑하거나 홍보 활동에 열성적이진 않았다. 첫 번째 삶에선 홍보도, 스케줄도 모두 거의 최소한이었고, 당연히 라이브 앱은 상상도 못 했다. 맞다. 내 성격이 거지 같아서 그랬다.
두 번째 삶에서는 몇 번의 라이브 앱을 했었고, 거북하건 거북하지 않건 간에 엘앤엘 단체 스케줄은 꽤 잡혀 있는 편이었다. 나는 그게 많은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흠.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생각이긴 했다. 내가 뭐 다른 아이돌 데뷔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다른 사람들과 친하지도 않았으니 많다고 착각할 법도 하지.
세 번째 삶이 되어, 모든 것이 평탄하게 굴러가는 현재에 와서는, 엘앤엘은 내가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라이브 앱을 진행하고 꽤 여러 가지의 예능 활동을 함께했다. 의외라면 의외였다. 지난 두 삶 동안은 그럼 안 한 거였나? ……나 때문에?
“선율아, 표정 왜 이렇게 안 좋아.”
대뜸 신기운이 날 돌아보며 말했다. ……뭐? 이 새끼 지금 나한테 반말한 건가? 기분 나쁘기 전에 떨떠름했다.
신기운은 하대진을 제외하곤 반말을 전혀 안 썼다. 내가 성격을 긁어도 마찬가지였다. 놈은 내가 어떻게 행동하건, 언제나처럼 무던한 얼굴로 적당한 대꾸를 이어 가던 놈이었다. 그런데 이게 갑자기 라이브 앱에서 반말을 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뭐 벌칙이라도 걸렸나?
“채팅 창 읽었어요.”
“아.”
단숨에 이해가 갔다. 그래. 네가 그랬을 리가. 나는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응시하며 손을 흔들었다. 빙긋 웃자 강이헌이 화면 속 내 미소를 본 듯 따라 웃었다.
저번 컴백 때 내 파트에서 응원을 싹 없애 버리던 팬들은 대체 어디에 갔는지, 이번 컴백은 평탄하고 수월하기 그지없었다. 뭐, 물론 그때 바로 대응하기라도 했는지 그다음 무대서부터는 그러지도 않았었지만.
어쨌건, 이번 컴백은 무난하니 나쁘지 않았다. 확실히 전보다 팬이 더 붙은 것 같기도 했다. 라이브 앱에서 누가 날 지칭하며 말하다니. 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다들 이번 곡 좋다는 이야기 많이 해 주시네요! 저도 좋아요. 이번 노래 좋죠?”
“대진이 안무도 한몫했죠~”
강이헌의 말에 공진하가 한마디 얹었다. 대화는 자연스레 음원 순위로 넘어갔다. 전에 비해 많이 올랐다는 이야기를 하며 하대진이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얘도 1위 하면 울겠네. 문득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저번부터 선율이 형은 저희 1위 할 거라고 하던데요.”
내 속내를 보기라도 한 듯, 신기운이 정확하게 내 속을 꿰뚫는 소리를 했다. 순식간에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계속 모니터링을 하고 있던 매니저 형도 고개를 들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진짠데.
“진짜? 선율아, 그랬어?”
“네.”
“에엥? 왜? 주선율, 1위 해 보고 싶어서 그래?”
“…….”
진짜 해서 말했다.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하대진을 바라봤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1위 할 거라서 말했는데.”
“……오오.”
“우와…….”
“이야…….”
“…….”
다들 반응이 왜 이래? 신기운마저 기막힌 표정을 짓고 있어서 억울해졌다. 진짜라고. 컴백하면서 1위 할 생각 정도는 해라.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최백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쟤 노래 내기 전부터 그랬어. 그때 스터디 따라갔을 때 거기서도 1위 할 거니까 스트리밍하라고 하던데.”
“헐! 고우혁 씨한테? 야! 왜 그랬어!”
“왜. 말하면 안 돼?”
“안 되지 그럼! 우릴 막 콧대 높고 싸가지 없다고 오해하시면 어떻게 해?!”
“…….”
누가 하대진 눈에 낀 콩깍지 좀 떼어 줬으면 좋겠다. 왜 저렇게 고우혁을 좋아하나 모르겠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공진하가 방글방글 웃으며 “하하, 이러고 나서 1위 하면 진짜 웃기겠다!” 하는 이야기를 했다.
다들 그 말에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아주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양 행동해 댄다. 아니 어떻게 한 명도 안 믿어?
“그러지 말고 1위 공약이라도 생각해 봐.”
“으하하하!!”
“공약? 공야악? 하하하! 선율아, 진짜 1위 하면 내가 너한테 뽀, 뽀뽀, 뽀한다!”
“……그건 벌칙이고.”
공진하가 말을 더듬어 대며 장난치는 말에 곧장 대꾸하자 하대진이 뒤로 넘어갈 듯 웃어 재꼈다. 어쩐지 말을 들은 공진하는 귓가가 발갛게 물든 채 시무룩한 얼굴로 “벌칙 수준이야?” 하는 소리를 했다. ……그럼 대체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말한 건데……?
“근데 선율아, 너 왜 나한테 선물 안 줘?”
앞에서 진짜 1위가 되면 어떨지, 안 되더라도 몇 위까지 올라갈지에 대해 떠들고 있을 때 공진하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자 공진하가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다. 내 속내를 알아차린 탓이다.
“너, 줄 생각도 없구나.”
“……타이밍 놓쳤으니까. 왜,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내가 갖고 싶은 게 있어서 말하는 건가, 뭐!”
그럼 왜 말하는 건데……? 의아하게 깜빡이자 공진하가 푹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린다. 하대진한테 사 준 운동화나 신기운한테 사 준 헤드셋 이야기가 이어진다. 하긴, 하대진하고는 얼마 차이도 안 났는데 얘만 쏙 빼놓고 하대진 선물만 챙기긴 했다.
“필요한 거 뭐 있어?”
“와~ 이제 와서? 됐어. 내 생일도 완전 까먹고 있다가 괜히 엎드려 절 받…….”
“놀러 가자.”
말이 뚝 멈췄다. 팩하니 고개를 돌려 날 외면했던 공진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날 돌아봤다. 핑크색 머리에 화려한 화장과 더불어지니 그것참. 귀엽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깜짝 놀라 댕그랗게 뜬 걸 보니 정답인 모양이다. 그때 놀자고 해 놓고 못 놀아서 불퉁해 있던 게 떠올라 말을 꺼냈는데. 절로 웃음이 새 나왔다. 빙긋 미소 짓자 귓가가 발갛게 변한다.
“둘이서.”
“진짜……?”
“안 돼.”
조심스레 물어본 질문의 답이 내가 아니라 앞에서 튀어나왔다. 이쯤 되면 타이밍의 왕이라 부를 만한 남자의 등장이다. 최백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우릴 돌아보고 있었다. 계속 순위 이야기나 하지, 언제 대화를 들은 거야?
“절대 안 돼.”
강조하듯 한 번 더 내뱉는 말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이 새끼 진짜 저번부터 타이밍 너무 적절해서 짜증 내고 싶네. 이상하게 최백이 난입할 때마다 시선이 집중됐다. 아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가. 놈은 이상할 정도로 사람의 시선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어… 뭐가 안 돼요, 백 형?”
아니나 다를까 하대진이 맹한 얼굴로 최백을 바라보며 물었다. 강이헌이 입을 벙긋거리며 뭐라 말을 할 듯, 말 듯 고심하는 게 보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앞에서 계속 순위 이야기 하느라 못 들었을 텐데. 그때였다. 공진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입을 막는 시늉을 했다.
“어라, 백이도 나랑 놀고 싶었어?”
“내가 미쳤냐?”
곧장 신경질을 부리는 최백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공진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으스대는 표정을 지었다.
“아~ 보셨어요, 여러분? 제가 이렇게 인기가 많아요! 백이야, 너는 백오십칠 번째니까 순서 잘 지켜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씹, 싫거든? 내가 미쳤다고 너랑 순서까지 기다리면서 노냐?”
“뭐어? 백이가 진하를 너어~ 무 사랑한다고? 와, 우리 백이 막 이런 곳에서 공개 고백도 해 주고. 다 컸네, 다 컸어!!”
“돌았냐고, 공진하.”
최백이 결국 뒷목을 잡자, 요령 좋게 신기운이 치고 나오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아, 다들 놀라셨죠. 최연장자들의 대화 맞습니다. 저랑 대진이 대화 아니에요.”
“으하하! 아, 사실 제가 막내가 아니에요! 사실은 진하 형이 막내예요!”
“맞아요. 제가 엘앤엘의 귀염둥이에요.”
공진하가 애교를 떠는 모습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개판이다. 이러는데 1위가 진짜 가능하긴 할까? 생각해 보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나에 대한 인식도 그렇고. ……이번에는 1위 못 하나?
넋을 빼놓은 얼굴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는데, 아직도 화면으론 뒤통수만 보여 주고 있는 앞의 남자가 보였다.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는 시선이 따갑다. ……한동안 답지 않게 스터디도 안 따라가고 거리 두더니. 왜, 오늘은 못 봐 주겠어?
시선을 내려 최백을 내려다봤다. 앞에 앉은 터라 나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자리에 앉은 최백이 날 약간 올려다보며 노려보고 있었다. 최백을 내려다보는 건 간만의 일이라, 나는 나도 모르게 삐뚤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잘 다녀와.’
그날 먼저 등 돌려 떠날 때는 돌아보지도 않더니.
“……!”
그렇게 생각하곤 곧장 정신이 훅 들었다. 미, 미친. 지금 나 뭐라고 생각한 거야? 무슨, 놈이 먼저 등 돌린 게 신경 쓰인다는 양 생각한 거잖아. 나 미쳤나? 아니, 이건 모조리 다 최백의 탓이었다. 그렇게 온몸으로 나에 대한 감정을 뿜어내고 다녔으니까.
‘알잖아, 주선율. 난 너 좋아해.’
‘넌 근데 내가 말 안 걸면 먼저 걸지도 않냐? 씨발, 억울해 죽겠어, 진짜. 나만 애타지?’
내가 좋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갑자기 대뜸 등 돌려 멀어지니까.
‘그냥. 넌 참 순식간에 날아간다 싶어서.’
왠지 낯설게 느껴져서……. 그래서 그런 거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최백이 이상해서, 그래서 내가 이상해진 거다. 퍼뜩, 며칠 전의 예감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안정적이기 그지없던 관계가, 이상하게 부서질 것만 같은.」
그게 정말, 변화에 대한 예감이었을까? 어쩐지 서늘한 기분에 팔을 쓸어내렸다. 관계가 변화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어떻게 안 찾으러 가냐. 눈만 뗐다 하면 시들어 가는데.’
깜빡이던 가로등 아래.
네가 날 찾아냈던 날부터 계속.
* * *
30위권에 들어서자, 순위는 훅훅 올라가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다면 운이 좋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번 노래가 좋았고, 안무가 좋았고 하는 문제를 떠나, ‘그럴 수밖에 없는’ 느낌이기도 했다. 작년 입소문을 탄 강이헌이 올해 급격하게 뜨며 그에게서 우리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옮겨졌다. 그게 바로 저번 활동 곡이었다.
세계적인 회사의 캐릭터들을 따와 만든 뮤직비디오와 일명 ‘강이헌과 아이들’로 비쳐지며 우리를 더 알렸던 첫 단추. 그게 저번 곡이었다면 이번은 그 모든 것들이 차례로 묶이며 자연스레 그룹을 하나로 묶어 빛나게 했다,
비단 과거의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올해는 더더욱 그랬다. 예상치 못한 KCON 행부터, 그룹의 발목을 잡곤 했던 내 여러 문제를 묻게 만든 각종 예능에서의 이미지, ‘고우혁의 지인’이라는 타이틀에 수많은 미디어 노출까지 합쳐지니 우린 시선을 안 받으려야 안 받을 수 없는 그룹이 되어 있었다.
아, 맞다. 물론 시기적 장점도 있었다. 이번 컴백 때는 팬덤이 두터운 유명 아이돌도, 대중에게 사랑받는 발라드 가수도, 기가 막힌 명곡을 써내는 싱어송라이터도 노래를 내지 않았다. 아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이미지를 두르고 등장한 우리는 일종의 ‘다크호스’였다.
“1, 1, 1, 1위 후보!”
하대진이 버퍼링이라도 걸린 듯 버벅댔다. 매니저 형을 통해 들은 이야기였다. 매니저 형은 싱글벙글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도 못하면서도 “너네 경거망동하지 마! 아직 후보일 뿐이니까!” 하는 소리를 했다. 신기운도 어쩐지 멍한 기색이 역력했고 공진하는 기겁하는 얼굴로 날 돌아봤다.
“선율아… 갑자기 돗자리 편다고 숙소 나가고 그러면 안 돼!”
“안 나가.”
이상한 걱정을 하고 있어. 저번 여자 연습생들 모아서 아이돌 그룹 만드는 기획사 때도 그렇고, 어떻게 생각하는 것마다 이상한 연계로 탈퇴하기도 힘든 이유를 만들어 대는지 모르겠다.
“언어의 마법인가 봐요.”
믿고 있던 신기운마저 헛소리를 했다. 뭔 소리냐며 돌아보자 “선율이 형이 전부터 1위 이야기 했잖아요. 강하게 믿고 있으면 실재가 된다는 에세이가 있었는데, 그 효과인가 봐요” 한다.
……진짜 1위 후보란 게 대단하긴 하구나. 신기운마저 헛소리를 하게 만들다니. 차마 과거에서 보고 왔으니 그딴 효과는 없었고 그냥 예정된 일이었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나는 귀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뭐라 대꾸하기도 힘드네.
“야. 우리가 1위 후보지, 1위냐? 다들 정신 차려라.”
“백 형은 놀랍지도 않아요?! 1, 1, 1위 후보라잖아요!”
“후보라잖아.”
최백이 목 안마 기기가 든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나갔다. ……쟨 일말의 기대조차 안 하는 모양이었다. 문득 최백이 오늘 1위임을 알게 됐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울까? 아니면 놀라서 날 바라볼까. 아니면 당연하다는 듯 웃을까.
“이건 백이 형 말이 맞아. 다들 인터뷰 때 말 조심히 하자. 아직 1위인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후보니까.”
1위 후보라는 말에 가장 먼저 넋을 빼놓았던 강이헌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멤버들을 다독였다. 한 명씩 차례로 밴에서 나가고, 가장 마지막으로 나와 공진하가 나왔다.
여느 날처럼 방송국 앞에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각종 기자들은 물론이고 팬들도 꽤 많아서, 최대한 인터넷을 하지 않는 나에게는 팬들이 얼마나 유입됐는지를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이헌아!”
“……우와.”
밴을 나가던 공진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돌아봤다. 펜스 안 어디선가에서 들려온 우렁찬 외침에 하대진을 챙기던 강이헌이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
누가 자길 불렀는지는 모르겠는지, 강이헌은 사방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디서 귀엽다는 소리가 이어졌다. ……확실히. 팬이 많아졌다니까.
“백아아악!”
“최백! 이쪽 좀! 여기 좀! 제발!”
“……백이 팬분들은 성대 괜찮으신가 모르겠어.”
“…….”
“진하 형! 선율아! 빨리 와.”
강이헌의 목소리에 빠른 걸음으로 나란히 서 있는 멤버들의 옆으로 갔다. 가장 먼저 선 최백은 그 반대편의 끝에 선 날 지그시 바라보긴 했지만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뭔데. 표정이 절로 구겨지려는 걸 애써 참았다. 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백이 날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걸까? 쏟아지던 감정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도망갈 때는 언제고, 문득 그런 생각이 이어졌다. 정말,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나는 최백한테 뭘 바라는 걸까, 대체?
최백을 싫어하진 않았다. 하지만, 최백과 같은 마음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최백에게 갖는 감정은 아주 복잡했고, 난 그 안의 감정이 명확하게 무엇 무엇인지 판단할 정도로 스스로의 감정에 확고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과거에는 분명 확고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판단하며 바라본 세상이, ‘멋대로 재단했던’ 세상임을 깨달은 이후로 나는 내 판단이 불안해졌다.
“우서야!”
부름에 퍼뜩 고개를 든 건 거의 무의식이었다. 몇 개월 동안 드라마 속의 ‘유우서’라는 캐릭터로 살아서인지, 아니면 감독이 내 이름보다도 역 이름을 더 많이 불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내가 ‘우서’라도 된 양 고개를 들었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 촬영도 끝났는데. 우서라는 사람이 또 있었던가?
내 모습이 꽤 웃겼는지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옆에서 서 있던 공진하도 킥킥거리며 웃더니 “우서야, 웃어야지!” 하는 말장난을 쳤다. ……재미없거든?
엘앤엘의 순서는 놀랍게도 맨 마지막이었다. 나는 직감했다. 오늘이구나. 역시 오늘이 맞는구나. 오늘 우리는 처음으로, ‘엘앤엘로서’ 1위에 처음으로 도달하는구나. 먼저 깨달은 나는 약간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주변을 바라봤다. 강이헌이 막 긴장한 얼굴로 입을 떼고 있었다.
“1위 후보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는 오늘도 좋은 무대를 꾸미겠습니다!”
“어어, 1위 공약은 없나요?”
“어… 타이틀… 2배속… 댄스… 요.”
기겁해서 고개를 돌려 강이헌을 바라봤다. 뭘 하겠다고? 초점이 풀린 강이헌이 맹한 얼굴로 날 돌아봤다. 아무 말이나 내뱉은 모양이었다.
“아, 기대되네요! 이번 춤 난이도가 정말 높다고 하던데, 꼭 1위 하셔서 보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적의 없는 해맑은 인사가 심장을 찔렀다. 제길. 자신 없는데. 강이헌이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 몰랐다. 얘가 말한 거니까 얘 혼자 하면 안 되나?
카메라가 떠나간 뒤, 넋 나간 강이헌이 하대진에 의해 어깨가 뒤흔들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냐며 놈이 강이헌을 닦달했지만 강이헌은 여전히 맹한 표정으로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쟤 괜찮은 건가……?
“강이헌. 우리 아직 아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냉랭한 목소리가 난잡한 분위기를 깨부수고 튀어나왔다. 팔짱을 낀 최백이 강이헌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강이헌은 그 모습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쓸었다.
“그렇지. 아, 하하. 뭔가 긴장돼서 나도 모르게. 우리 1위 후보도 처음이잖아.”
“알아. 그래도 너무 넋 놓고 있지 마라. 곧 무대니까.”
따끔하게 내뱉은 최백의 말에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연신 다리를 덜덜 떨며 소리를 내던 하대진도 얌전해져선 가만히 자리에 앉아 마지막 메이크업 점검을 받았다. 신기운은 이어폰을 꽂고, 공진하는 날 돌아본다.
“음료수 마시러 갈래?”
환하게 웃는 모습에 기분이 미묘해졌다. 아까부터 느끼는 건데, 놈은 영 떠는 기색이 아니었다. 콩알만 한 간을 갖고 있을 것 같았는데.
“넌 긴장 안 돼?”
“으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긴장하면 하는 거고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그런 것 같기도 하다’는 소리가 뭔 소리야?
공진하는 음료수 안 마실 거면 마실 때 같이 있어 달라며 앞장서서 걸어 나간다. 문 앞에 서서 나오길 기다리는 모습이 이젠 익숙하다. 옛날이라면 손을 잡고 끌었을 텐데.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내게 전혀 닿지 않는 공진하는 이제 익숙했지만, 가끔, 이질적이었다. 말똥말똥 눈을 깜빡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뒤늦게 걸음을 옮겼다. 환하게 웃으며 앞서 걷는 모습을 뒤쫓아 가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
“…….”
어느새 자리에 앉아 목에 안마 기기까지 걸쳐 놓은 최백이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에는 헤드셋이 씌워져 있기는 했지만 주의 깊게 듣는 기색은 아니다. 나는 최백이 이번만큼은 한 소리를 할까 싶어 걸음을 늦췄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리게 시선을 내린 최백이 가만히 바닥 어딘가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나는 순간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멈춰 섰다. 최백이 날 외면했다.
“선율아, 안 갈 거야?”
“……아니, 갈게.”
공진하의 타박에 걸음을 옮기면서도 두어 번 더 뒤를 돌아봤지만, 거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최백은 내 쪽을 돌아보지 않는다.
‘넌 참 순식간에 날아간다 싶어서.’
문득 말을 되새겼다. 깊게 박혀 들었던 단어가, 최백한테는 얼마나 날카로웠는지를 깨달으며.
“…….”
그러네. 정말이었다. 나는 정말 최백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었다.
‘우리 포유. 제가 참, 좋아하는 거 알죠? 제가 계속. 좋아할 수 있게 해 줘요.’
그 무엇 하나도.
“엘앤엘-!!”
“꺄아아아아!”
“축하드려요!!”
펑! 꽃가루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나울 정도로 쏟아지는 조명과 떨어져 내린 꽃가루에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와 축하 소리. 정신 사나울 정도로 복잡한 광경 속에서 나는 머리에 닿은 꽃가루를 떨쳐 내며 주변을 돌아봤다.
“……선율아.”
아니, 그러려던 찰나였다. 속삭임인지, 웅얼거림인지 모를 부름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확인한 나는 마주한 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의식적으로 공진하라고 생각했는데,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최백이었다.
나는 사실 이 장면을 아주 오랫동안, 자주 되새겨 보곤 했었다. 기뻐서 그랬던 건 아니고, 그리워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과거의 한 페이지를 연신 펼쳐 보며, 다른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궁금해 되새기고 되새겼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들은 없었다. 첫 번째 삶에서는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어서 그랬고, 두 번째 삶에서는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박수 치는 데 온 신경을 다하고 있어서 그랬다.
그랬다. 나한테 있어서 ‘엘앤엘의 첫 1위’는 그 정도 감상이었다. 그리고 세 번의 삶에 와서야 두 번이나 겪은 익숙한 것을 되새기는 감상은 다른 멤버들의 그 속내를 알고 싶다는 거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얼마나 기뻐했을까. 울었나? 아니면 웃었나? 기뻐서 얼싸안고 있었을까, 아니면 너무 울어서 주저앉아 있었을까.
그리고 평상시 여유롭기 그지없는 표정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던 거다. 최백은. 너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 답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건 무언가, 일종의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쏟아지는 종이 빗속에서, 새카만 머리에 하얀 꽃잎을 두어 개 올려놓고는. 까만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날 바라보는 장면은, 그래. 하나의 그림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은 이미지였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을 것 같은 그 명화 속의 최백이, 내게로 손을 뻗었다. 떨림 없이, 망설이지도 않고 쭉 뻗어진 손이 내 어깨를 짚었다.
“선율아.”
일그러진 얼굴에, 나는 놈에게서 옮은 듯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가까워져 오는 놈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최백의 눈가가 발갛다. 까만 눈이 뒤늦게 눈을 깜빡인다. 한 손을 뻗어 날 붙잡은 최백이 곧장 몸을 끌어안았다.
“주선율…….”
어깨에 올라앉은 온기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든다. 등이 끌어안긴 채로 눈을 깜빡였다. 오른쪽 귀에서 피어오른 온기가 그대로 몸속에 스며든 기분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꾹 어깨를 누른다.
“넌 왜 이렇게 특별해.”
어깨에 고개를 묻은 최백이 어리광이라도 부리듯 머리를 비비며 파고든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최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최백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조명에 환하게 비춰진다. 마침 타이틀곡이 나오기 시작했다.
버릇을 들이듯 쉼 없이 연습한 안무가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진 것처럼, 나는 아무런 생각도 잇지 못한 채로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최백이 쏟아 내는 온기를 가만히 받아 내고만 있었다.
“나한테는, 선율아.”
갈라진 목소리가 웅얼웅얼 귓가를 맴돌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변이 이렇게나 소란스러운데도 최백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네가 특별해…….”
특별하다는 단어는 귀를 타고 스며든다. 나는 머뭇거리며 팔을 올렸다가 말없이 내렸다. 날 껴안고 있는 최백도 충분히 알아챘을 움직임이었지만 최백은 아무런 말도 없이 더 꽉 날 끌어안았다.
오른쪽 어깨가 젖어 든다. 나는 입술을 짓씹은 채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속을 뒤집고 쏘다니다 차분히 어딘가로 가라앉는다. 쏘아지는 빛은 마치 어두운 공원의 깜빡이는 가로수 등이 된다. 아, 나는 과거에 있었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붉은색 불빛이 번쩍였다. 묻지 말라고, 도망치라고. 이 남자는 네가 정신 차리기도 전에, 알지도 못했던 곳까지 끌고 갈 거라고.」
나는 아직도 그날 밤에 머무르고 있었다…….
시선을 내렸다. 늦가을. 해가 거의 다 끝나 가는 무렵. 엘앤엘은 처음으로 음악 방송 1위를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물기 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참았던 숨이 허공에 흩날리기라도 할 것 같다. 오랫동안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