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끌어진 곳_백 (17/53)

이끌어진 곳_백

최백은 스스로 판단하건대,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실 가타부타 따라붙는 단어들이 있긴 했다. 열정파라든가, 노력가라든가. 사실 그건 최백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였다.

그는 결코 흔히들 이야기하는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반듯하게 깎아지른 틀 안에 존재하는 당연한 것들을 해내는 인물일 뿐이다. 그의 동창 왈, 그는 어딘가 비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최백의 아이돌 데뷔는 꽤 충격적인 선택이었다. 아이돌이라니! 겉모습이야 훌륭했다지만 속은 그 단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사람 아니던가. 분명 부모를 따라 교편을 잡으리라 예상했던 주변이 술렁이는 것과는 별개로 가족은 잠잠했다.

그래, 무어라고 이렇게 줄줄이 떠들까. 요점은 하나였다. 최백과 주선율이 맞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내가 왜?”

뾰족한 시선으로 눈썹을 올리는 주선율은 익숙하기까지 하다. 놈은 틀 안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주변을 무시하고, 노력을 얕잡아 보고.

주선율은 모난 돌이었고, 최백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주 당연하다 여기는 것마저 해내지 않는 주선율은 그의 기준에서 ‘해야 할 기본적인 원칙’도 지키지 않는, 그야말로 무뢰한 그 자체였다.

그리고 2015년의 어느 날. 주선율이 변했다.

“진짜 암이면 어떻게 하지…….”

“형, 매니저 형한테 말할까요?”

덕분에 때아닌 소동이 일어났다. 걱정 많은 강이헌과 하대진을 필두로 신기운까지 나서서 검색창을 뒤지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변한 그 모습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최백은 눈을 가늘게 뜨며 주선율을 떠올렸다. 희게 질린 안색과, 하루가 가면 갈수록 도드라지는 뼈를. 무어라 표현할지 모르겠는 그 모습은 마주하자 뚜렷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꿇으라면 꿇고, 빌라면 빌게요.”

아. 주선율은 죽어 가고 있었다. 그 어떤 욕구도 들지 않는 얼굴로 시선을 피한 모습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주선율은 물에 잠겨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죽음을 직감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 얼굴에 최백은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게다가 주선율에게선 더더욱 느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우울증 아니에요?”

“뭐?”

“우울증이요, 우울증. 형은 다 컸으면서 그것도 몰라요?”

아이들이 연달아 입을 열며 종알거렸다. 최백의 입에서 튀어나온 많지 않은 단어에도 아이들은 금세 이유를 알아차린다. 연신 우울증이니 그게 위험하다느니 하며 원장이 했을 법한 잔소리를 능숙하게 흉내 내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너네 말 왜 이렇게 늘었어? 우울증도 알아?”

“형이 자주 안 오니까 그렇죠! 형아 저번에 열 밤만 자면 온다고 했으면서!”

“거짓말쟁이! 오늘은 백 밤만 자면 온다고 할 거죠?”

“…….”

들켰네. 씩 웃기만 하고 대꾸하지 않는 모습에 아이들이 나쁘다며 입술을 내밀었다.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제게 딱 달라붙는 모습을 보며 최백이 잠시 단어를 되짚는다.

우울증. 마치 처음 듣기라도 하는 양 낯설기 그지없는 단어였다. 그 단어에 주선율의 모습이 비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하다. 한동안의 주선율은 그랬다. 하지만 요즘은 멀쩡한 것 같던데. 그럼 우울증이 아닌 건가? 그게 잠깐 왔다가 다시 사라질 수도 있는 건가?

최백의 상념이 드문드문 이어지다 멈춘다. 정신없이 주변을 오가는 아이들과 점심시간을 알리는 시계까지. 상념이 이어지려야 이어질 수 없는 환경이긴 했다. 최백은 생각을 멈추고 식당으로 아이들을 이끈다.

거의 사라질 것 같던 단어가 남은 건 조금 뒤처지던 아이가 손가락을 꽉 맞잡았을 때다. 꾹 잡은 손길에 시선을 내리자 아이는 왠지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그런데요, 형. 그거요. 되게 아프대요.”

“그거? 뭐가 되게 아픈데?”

까만 눈동자가 최백을 올려다본다.

“우울증이요.”

“……그래?”

“네에, 그으. 비밀인데, 진짜 비밀인데요. 진태 형이 막.”

이어 가던 말이 뚝 멈춰진다. 입술을 우물거리는 모습에 최백은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무언가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 아이의 입에서 더 이상 그 ‘비밀’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다만 주저앉아 저를 다독이는 최백의 목에 달라붙어 작게 속삭였을 뿐이다.

“형을 아껴 주고 돌봐 주라고 했어요. 선생님이요.”

양손을 뻗어 목을 끌어안는다. 반사적으로 아이를 안아 올리며 최백은 문득 굳게 닫힌 문을 떠올렸다. 이제는 닫혀 있는 게 더 익숙해진 문을.

“많이 슬픈 거니까요, 그러니까요. 현이가 아프면 선생님이 토닥토닥하는 것처럼요. 토닥토닥해야 된대요.”

속삭이는 소리가 흐려지는 일 없이 또렷하게 들렸다. 최백은 잠시 하얗게 질린 주선율을 떠올렸다. 대뜸 하대진의 방송에 방청객으로 갔다 오더니 갑자기 연기를 한다고 말했다던 놈이.

그리고 생각은 과거로 간다. 연속해서 떠오르는 건 여전히 주선율이다. 쉽게 손을 올리고, 쉽게 단어를 내뱉고. 아주 쉽게.

‘그까짓 걸로 뭐가 변할 거 같아? 버러지 같은 게.’

‘주선율!’

얕잡아 보던 놈의 모든 것들.

이어지던 생각은 멈춘다. 최백은 단어도, 아이가 내뱉은 모든 이야기도 흘려보낸다. 기계적으로 아이를 달래듯 도닥거리는 손에는 더 이상 주선율의 잔재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은 남아서 어디로 가는 걸까? 

툭하니 떠오른 의문은 재차 가라앉는다. 이날의 대화도 가만히 그의 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 냈다.

* * *

“…….”

그리고 지금, 최백은 다시금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이가 내뱉었던 이야기와, 멤버들의 걱정 어린 대화들을. 침묵하며 지켜봤던 모든 것을. 소파에 가만히 누워 움직이지 않는 하얀 사람을 지켜보면서.

“…….”

그래, 하얗다. 최백은 그 단어가 명확하다고 생각했다. 창으로 드는 빛에 그대로 노출된 주선율은 그렇게만 보였다. 빛에 닿은 눈이 투명하게 빛나고, 가만히 너부러진 손끝에 볕이 난반사된다.

아, 주선율은 저 볕 아래서도 차근히 죽어 가고 있었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살아났다가, 제가 보이는 곳에서 죽어 가는. 주선율은 사람이라기보단 차라리 식물 같았다. 최백은 근처에 다가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생각을 이어 갔다.

“이제 보니.”

드디어 멈춰 있던 존재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말없이 시선을 옮기는 모습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말을 내뱉는다.

“너, 화초 같네.”

그건 최백이 내뱉을 수 있는 가장 주선율과 가까운 존재의 이름이다. 최백은 그런 단어와 거리가 멀었다. 우울하다. 죽어 간다.

한없이 긍정적인 것에도 가깝지 않았지만 한없이 부정적인 것에도 가깝지 않은 최백의 시야에선 주선율은 충분히 화초로 보였다. 어린 시절 짧은 무관심으로 순식간에 시들어 죽어 버린 그 여린 연둣빛으로.

주선율은 별다른 변화 없이 가만히 마주하다 다시 시선을 바닥 어딘가로 옮긴다. 최백은 천천히 걸음을 떼 그 앞으로 향했다. 빛을 막고 선 덕에 얼굴에 그림자가 졌음에도 주선율은 시선 한 번 옮기지 않는다.

최백은 이러한 앞의 존재가 생경했다. 이게 정말 ‘그’ 주선율이란 게 믿기지 않았다.

“한눈판 사이 컸다가. 한눈판 사이 죽어 버리네.”

중얼거리며 드문드문 아이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형을 아껴 주고 돌봐 주라고 했어요.’

속삭이며 끌어안던 온기를 떠올리며, 최백은 마주한 시선을 응시한다. 아껴 주는 건 싫고, 돌봐 주는 건……. 그래, 뭐. 그 정도라면. 노려보는 눈길에 최백이 환하게 미소 짓는다.

“왜 넋 나간 놈처럼 그러고 있냐?”

꽤 괜찮은 출발 아닌가. 최백은 그렇게 생각하며 물끄러미 주선율의 얼굴을 살핀다. 첫 시작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냥. 그래, 솔직히 조금 많이. 주선율이 신경 쓰였다.

하얗게 부서질 듯 시들어 가는 주선율이. 미동도 없는 몸에서 생기가 사라지는 모습이. 최백에겐 이 모든 것이 낯설고 기묘했다. 또한, 그걸 지켜보기만 할 성정도 못 됐다.

그는 차라리 주선율이 전처럼 소리도 지르고 난리도 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진 않을 테니까.

아껴 주고 돌봐 주는 거라. 제 등 뒤를 따라 걷는 주선율을 힐끔 응시한 최백이 저도 모르게 난감한 얼굴을 한다. 저렇게 다 큰 새끼한텐 해 본 적 없는데.

최백의 속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주선율의 표정이 다시 무감각하게 돌아간다. 그 변화를 눈치챈 최백이 가까스로 한숨을 참아 낸다. 갈 길이 과하게 멀다.

* * *

“야, 화초.”

일종의 주문 같은 단어였다. 죽어 가던 주선율은 그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등 뒤를 홱 노려봤다. 최백은 그 얼굴이 퍽 마음에 들었다. 놈은 여기에 존재한다. 그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말이 기껍다.

말없이 꺼져 가던 불빛이 다시 화르르 타오르는 것처럼. 단어는 차분히 시간에 스며들었다. 툭 튀어나온 말에 반응하는 주선율과 그 변화를 위해 반복적으로 내뱉는 최백 사이에서. 짧은 관심을 담은 그 단어는 묵묵히 두 사람에게 스며든다.

그래서인가, 그런 순간이 있었다. 아주 별것 없는 순간. 평상시라면 하지 않았을 법한 표정과 행동을 보이게 되는 그 길지도 않은 시간이.

“…….”

소란스러운 대기실 안, 최백은 닿은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전이라면 전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무심코 주선율의 표정을 살피는 일도, 그 속내를 짐작하려 그 행동을 주의 깊게 살피는 일도.

빙글빙글 저를 두고 돌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멀찍이 앉아 있는 주선율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한다. 시야에 닿았다 사라지는 주선율은 어쩐지 깜빡거리는 것만 같다. 그리고 찬찬히, 아주 조용히. 그 틈 사이에서 주선율이 죽어 가는 게 느껴졌다.

죽어 간다. 그처럼 말도 안 되는 문장도 있을까. 그렇게 제 속내를 비웃으면서도 입이 열렸다.

“야, 하대진.”

“배, 백 형! 아니,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진하 형이…….”

“됐고, 저 화초 새끼 물이나 줘라.”

그 말에 주선율이 번쩍 얼굴을 든다. 놀란 얼굴로 잠시 정면을 응시하다 돌아보는 모습을 최백은 말없이 마주했다. 일방적으로 향하던 시선이 뒤섞였다.

대체 언제부터 저랬던 거지? 그 기묘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스쳐 지나간 생각은 답을 찾지 못한 채 떠돈다. 최백으로선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변한’ 주선율은 하루아침 사이에 색을 달리했다. 그건 딱 그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변화였고, 그 이유를 알아차리기엔. 그래. 최백은 주선율을 몰랐다.

“네가 언제 날 키웠어?”

“키우는 거지. 죽어 가면 신경 쓰여서 건드려 주잖아. 내가 화초 주인 새끼도 아니고.”

말없이 뾰족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생경하다. 주선율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치켜 올라가 있던 눈꼬리가 점점 내려가고, 다시금 주선율은 그가 파악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최백의 시선이 집요해진다. 그 얼굴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알아채려는 듯, 그 속내를 꿰뚫으려는 듯. 주선율은 변했고, 최백은 그게 신경 쓰였다.

그냥 아마도, 그게 전부였다.

* * *

언젠가 강이헌이 눈을 끔뻑이며 했던 말이 있었다.

‘형 요즘 선율이한테 신경 많이 쓰네.’

‘그러니까. 뭐어야, 진짜 숨겨 왔던 너의 마음이야?’

‘공진하, 전에도 지금도 네가 제일 이상하거든? 너 하대진이 왜 저러는지도 알지? 난 쟤가 주선율 보호자인 줄 알았어. 쟤 갑자기 왜 저렇게 변했어? 너 때문이지.’

‘음, 어떨 것 같아?’

환하게 웃는 공진하를 끝으로 대화는 이어지지 않는다. 최백은 눈을 가늘게 뜨긴 했지만 속내를 파 보는 것을 그만뒀고, 강이헌은 환하게 웃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진하 또한 계속해서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와, 인트로 장인 납시셨네요, 신기운 씨.”

“네.”

“토끼 너무 귀여운데요. 분명 찍을 때는 안 저랬던 거 같은데…….”

“여러분! 메이킹 필름도 꼭 봐 주세요! 진짜 재밌을 거예요.”

카메라가 돌아가고 화면이 계속된다. 최백은 평상시보다 자신이 훨씬 더 댓글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짜증 나네. 내가 왜 눈치를 보고 있어야 하는 거야.

화면 속의 주선율은 물끄러미 옆에 앉은 하대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옆으로 이어지는 댓글은 가지각색이다. 이모티콘도 있었고, 영어도 있었고. 그리고, 최백이 자꾸 신경 쓰게 만드는 몇몇 문장들도 있었다.

문장을 발견할 때마다 시선은 화면 속 주선율에게로 돌아간다. 쉼 없이 오가는 최백의 시선 속, 주선율은 단 한 번도 이쪽을 응시하지 않는다.

최백은 저게 아이돌이나 돼서 카메라 한 번 안 본다는 게 성질도 났지만 오늘만큼은 차라리 이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따위 글을 볼 바에야 화면을 아예 안 보는 게 훨씬 이롭다.

다시 화면을 통해 바라본 주선율은 여전히 댓글도 카메라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하대진과 무슨 손장난 같은 걸 치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왜 저 새끼를 다 큰 놈이라고 생각했을까. 저게 어딜 봐서 다 컸어? 주선율은 사람은커녕 식물로 쳐도 아직 새싹에 불과할 것만 같다.

컴백 기념으로 하게 된 라이브 앱은 그래도 꽤 무난하게 흘러갔다. 최백은 주선율의 얼굴을 틈틈이 확인했지만 여전히 주선율은 그 어떤 것도 목격하지 않은 듯 심드렁해 보였다. 그리고 사건은 언제나 이렇게 천천히 긴장의 끈을 풀어 갈 때 일어난다.

“세상에, 선율아! 이거 봐 봐! 팬분이 너 사과 신 너무 좋았대!”

환하게 웃는 강이헌의 목소리에 최백은 언급한 댓글을 찾기보다는 주선율의 얼굴을 확인했다. 당혹스러운 놈의 표정 사이로 슬며시 드는 감정은 기대감이다.

‘팬? 최백, 넌 그딴 게 그렇게 중요해?’

“…….”

최백은 가까스로 한숨을 감췄다. 진짜 다른 사람 같네. 기억 속 사람과 실제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매번 놀랄 정도다. 이제 최백은 강이헌과 하대진의 번잡스러운 걱정에 공감까지 됐다. 차라리 지랄맞은 게 나았다. 이건 뭐 주선율이 잠잠해지니 내 속이 지랄맞다.

머뭇거리던 놈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최백은 고개를 돌려 화면 속 주선율이 아닌 화면 밖의 놈을 응시했다.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손이 하얗게 질려 있다. 그러다 탁, 손에 힘이 풀리는 모습에 말없이 시선을 올렸다. 잔뜩 박혀 있던 기대감은 쥐 죽은 듯 사라지고, 그 얼굴에 떠오른 건.

‘……아껴 주고 돌봐 주라고-…… 많이 슬픈 거니까요.’

짜증 나게.

생각보다 몸이 먼저 빨랐던 것 같다.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라이브 생방송 중 대뜸 자리에 홀로 서서 카메라를 보고 있다니, 내가 돌지 않고서야 이러고 있겠냐고.

정신이 너무 멀쩡했다. 쏟아지는 조명에 피부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은데도 머릿속만큼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모든 게 너무 생생하다. 하얗게 질린 사람들의 얼굴도, 의아하게 깜빡이는 시선도, 화들짝 놀라 자신의 손목을 잡아챈 강이헌까지.

그냥 최백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제 몸에 가려진 주선율은 더 이상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그거면 충분했다. 단지 원한 건 그뿐이었으므로.

“얘들아, 쉿.”

작게 속삭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린다. 퍽 상냥한 어조였다.

“우리 포유. 제가 참, 좋아하는 거 알죠?”

가만가만, 속살거림이 이어진다.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말들이 존재한 건 사실이었으나 이 존재들을 아끼는 것 또한 맞았다. 그들을 이해했다. 최백에게 있어 주선율이 모난 돌이었으니, 다른 사람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그럼에도.

“제가 계속. 좋아할 수 있게 해 줘요.”

그래도 내가 이러고 있네.

명확하게 정의하기 힘든 감정이었음에도 최백은 제 행동을 후회하진 않았다. 이건 그의 최선이었다. 그걸 알아차린 강이헌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최백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마치 모든 것을 리셋한 듯, 기현상에 순식간에 빠르게 올라간 채팅 창은 아까와는 색을 달리하고 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최백이 자연스레 자리에 앉았다. 갑작스레 일어났을 때처럼 그가 앉는 모습 하나에도 사람들의 시선과 신경이 몰렸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그래, 지금처럼.”

모든 건 평화로워졌고, 주선율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다. 최백은 태평하게 손을 흔들었다. 감정적이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화면이 얼마나 깨끗한지 모른다. 그 멀끔한 화면 속 주선율의 눈에 불길이 솟는다. 그거면 됐다. 그거로 충분했다.

‘네가 언제 날 키웠어?’

거봐, 주선율. 내가 너 키우는 거 맞잖아.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데 내가 네 보호자가 아니면 대체 뭐겠어. 하대진보고 주선율 엄마냐며 타박할 때가 아니었다. 이 그룹에 네 보호자만 몇 명인지 모르겠다.

* * *

“엥, 뭐야. 얘 어디 아파요?”

하대진의 목소리에 대기실 안의 시선이 모두 한곳으로 몰렸다. 어디서 뭐 떨어지는 소리가 울린다. 아직 변한 주선율에게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들의 흔적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매니저의 등에 업혀 있는 주선율은 과거의 그 미친놈과 동일 인물이라기엔 너무 얌전하고 연약해 보인다.

눈을 감고 잠든 얼굴이 얼마나 아파 보이는지, 강이헌이나 하대진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매니저에게 향했다. 심지어 메이크업을 다 끝내고 핸드폰을 하던 공진하와 자리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신기운까지 주선율을 빤히 쳐다볼 정도였다.

“선율이 아픈 거예요? 촬영은요?”

“아니, 그건 아니고. 잘 끝냈는데 좀 피곤했나 봐. 안 일어나서 그냥 업고 왔어.”

성큼성큼 의자로 다가간 매니저가 주선율을 내려놨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주선율의 안색이 허옇다. 시선만 떼면 얼굴이 반쪽이 되네. 최백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아픈 건 아니죠?”

“그건 아닌데……. 애가 너무 말랐더라. 선율이 밥 잘 안 먹어?”

“숙소에서 대진이가 챙겨 주긴 하는데. 그래도 많이 살 오르지 않았어요?”

“맞아요, 그래도 요즘은 잘 먹어요. 전에는 반 공기도 안 먹었는데!”

“얼굴은 그런데 업어 보니까 되게 가벼워서 그렇지.”

말만 들으면 무슨 학부모들 대화 같다. 자고 있어도 깨 있어도 주선율은 여전히 엘앤엘의 걱정거리였다. 이제는 얼굴만 살이 오른 것 같다는 둥, 보약이라도 해 먹여야 하는 거 아니냐는 둥 별별 소리가 다 나오고 있었다. 그 대화에 코웃음을 치며 최백은 곤히 잠든 주선율을 바라봤다.

스케줄이 꽤 빽빽하긴 했지. 첫 드라마를 이틀 연속 줄기차게 촬영하며 첫날에는 라이브 앱에 오늘은 컴백 스테이지까지. 약해 빠진 주선율의 체력이 견딜 리가 없었다. 스케줄 자체가 부담되어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도 모르고.

그럼 뭐,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면 낫겠네. 잠든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최백이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며 걱정 어린 소리들을 뒤로한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깜빡 잠이 들었나. 드문드문 들리던 목소리가 명확하게 귓속으로 들어오며 최백을 깨웠다.

“매니저 형이 선율이 연기 천재라고 하던데, 뭘 걱정해~!”

“그래도, 형. 처음으로 개인 활동하는 거잖아.”

아, 언제 잠이 들었더라. 눈도 뜨지 않고 생각하다 문득 조용해진 주변을 깨닫는다.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이었다.

“…….”

적막이 가득해진 대기실에 최백은 굳게 닫고 있던 두 눈을 떴다. 두어 번 깜빡이며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이 반사적으로 주선율을 찾아낸다. 언제나 엘앤엘을 뒤흔드는 사람에게로, 그 익숙하고 불편한 공기를 향해.

하. 짧게 최백이 숨을 내뱉었다. 쟨 또 왜 죽어 있어. 최백의 눈이 찌푸려졌다. 피곤해서 아파 보이는 게 아니라 촬영장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주선율의 안색이 어두웠다. 깨워 내고 깨워 내도 금방 찾아오는 텅 빈 눈동자가 재차 흐리게 빛나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다.

마치 주선율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최백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주선율을 잡아채 저 아래로 잡아당긴다.

매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 가는 주선율을 그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고,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최백은 놈을 저렇게 둘 수 없었다. 죽어 가는 주선율이, 싫었다.

안마기를 쥔 최백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선율아.”

크지 않게 들린 소리가 공기를 울린다. 최백은 저도 모르게 안마기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건 이상한 울림이었다. 단순히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매번 들었던 그 이름이 맞는데도.

최백은 무언가 다른 소리를 들은 양 호흡을 멈췄다. 저 앞에 서서 이름을 부르는 남자는 공진하가 아닌 것 같았다. 함께해 온 시간들이 무색해지고, 남은 건 낯섦뿐이다.

“놀아 줄까?”

그건 여태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그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주선율을 가린 공진하의 등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가려져 두 사람의 표정 하나 보이지 않는데도, 최백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공진하와 주선율 사이에 무언가 이어졌다고.

주선율의 변화가 알 수 없는 변화를 이끌어 간다.

* * *

사실 생각해 보면, 그 거센 변화에 동화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아닐까 싶다.

“너, 라이브 앱 할 때 나 때문에 일어났어?”

이 직접적인 변화를 눈앞에 두고 마주하는데, 어떻게 안 변해.

주선율은 이상하게 변했다. 적어도 최백이 보기엔 그랬다. 놈은 죽어 있었고, 무너져 있다가도 다시 생생하게 피어났다가, 종래엔 무너질 곳에서도 꼿꼿이 서 있었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에 무너지고 피어남을 반복하는 모습은 최백에겐 낯설기만 했다.

최백에게 있어 모든 것은 그다지 어렵지도, 그다지 쉽지도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최백은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 일이었으면 하고,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 한다.

그를 둘러싼 틀이 존재하는 이상 최백은 그 틀을 벗어나지도, 가만히 제자리에 멈춰 서 있지도 않았다. 그저 그는 착실히 해야 할 것들을 이어 간다.

그저 그뿐이었고, 거기에 힘듦이나 피곤함은 섞여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주선율은 그와 얼마나 다른가.

“그게 뭐. 그렇다고 해도 네가 무슨 상관인데? 네가 그걸 왜 나서서 화내는데?”

그 사소한 걸 얼마나 확인받고 싶어 하고,

“계속 신경 써.”

그 시선 하나를 얼마나 받고 싶어 하는지.

화초가 아니라고 여러 번 말해 놓고도 하는 짓은 그랬다. 주선율은 여전히 따뜻한 무언가가 그리운 것처럼 보였다. 부끄러움을 타는 양 목덜미며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주선율의 모습이. 이제는 신경 쓰이는 걸 넘어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넌 대체 뭘까.”

최백은 이제 주선율이 궁금해졌다. 대체 언제 실력이 늘어난 건지, 그럼 그동안 연습을 혼자 한 건지. 그렇게 실력이 늘 동안 자신은 어떻게 전혀 알지 못했는지.

왜 무심코 한 행동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고, 아니라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신경 쓰길 바라는지. 현재로썬 알 수 없는 물음만 한가득이었다.

그래도 최백은 느긋했다. 시간은 많았고, 변한, 혹은 변해 가는 주선율을 알아 갈 여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변화의 끝에 선 주선율이 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맞이한다.

“이번에는 자살 같은 거 안 해…….”

예상치도 못한 문장을 내뱉으며.

* * *

[우울증]

[자살]

[왜 자살하는가]

[자살을 말하는 이유]

[자살 의미]

[우울증 극복 사례]

[우울증 자살]

“에라, 씨발!”

기어코 욕설이 튀어나왔다. 날밤을 꼬박 새우도록 그를 괴롭힌 문장 하나가 낳은 결과였다. 검색창을 빼곡 채운 단어들을 노려보던 최백이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정신이 또렷하다. 잠은 조금도 오지 않았다. 결국 오늘은 낮잠마저도 그른 것 같았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놓고도 잠은커녕 생각만 가득하다.

‘내가 뒤져서 기분 좋았지, 너…….’

그게 말이 되는 문장인가. 최백이 제 머리를 거칠게 휘저으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밤새 거실 소파에 앉아 주선율이 내뱉고 간 말들을 곱씹고 곱씹었다. 틈틈이 주선율의 행동이나, ‘우울증’이라고 단언하던 아이들의 말까지 찬찬히.

떠가는 해를 미처 보지도 못한 채,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머릿속으로 답지 않은 시뮬레이션까지 돌려 봤다. 해가 뜨고 주선율이 깨어나면 뭐라 묻고, 어떤 식으로 소리를 낼 건지. 그 반응에 어떻게 대응할 건지. 하지만.

‘……너, 어제-’

하지만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게 사라져 버렸다. 최백은 ‘말문이 막힌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딱 그 말대로였다. 그는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어제 뭐?’

그 의아하게 깜빡이는 시선을 보면서, 최백은 준비한 말 중 그 어떤 것도 내뱉지 못했다. 결국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방에 들어왔으면서도 도통 아까 침묵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묻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예 신경도 끄지 못한 채 이러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다. 대체 왜 이렇게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한참 핸드폰을 노려보던 최백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자긴 글렀고, 운동이라도 해야지. 이러다 반복해서 같은 생각만 하겠다.

‘그래서 그렇게 느꼈나 봐요.’

‘…….’

‘형이 죽을 것 같다고.’

정말 생각은 쥐뿔도 멈추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는 내내 잡생각이 들었다. 한참 전에 신기운이 주선율을 보며 했던 말을 이제 와서 되새기며 그래서 이랬나, 주선율은 대체 뭔 생각을 한 건가 하는 생각을 또다시 반복했다. 이젠 나도 내가 질린다. 신경질적으로 겉옷을 집으며 밖으로 나선다.

문가에 다가가자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드문드문 들리는 목소리가 공진하와 주선율의 것이란 걸 알아차리자 최백의 표정이 구겨졌다. 씨발, 되게 즐거워 보이네? 나는 잠도 못 자게 만들고 주선율은 엄청 속 편하게 놀고 있네?

신경질적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 했을 때였다.

“나 사실 외동 아니다?”

들리는 소리에, 뻗으려던 손이 그대로 멈춘다. 최백은 말없이 문가에 서 있다 머리를 짚었다. 아. 두통.

그리고 이어지는 건 빌어먹도록 신경질 나게 만드는 애석한 대화들이다. 깊은 한숨을 삼킨 최백이 벽에 등을 기댔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소리들이 점점 다정하게 변하는데 어째선지 그는 자꾸 한숨을 내뱉고 싶어졌다.

이게 무슨, 씨발. 갑자기 내가 왜. 하필 지금. 영 알고 싶지 않은 비밀들을 당사자도 모르게 하나둘 강제로 챙기게 된 기분이다.

공진하와 주선율 사이에 위로 누나가 있고, 불편한 주제에는 속내를 영 가리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맞춰질 때쯤 최백은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 이러다 쌍방 협의도 없이 강제로 그 속들을 꿰뚫게 될 것 같다.

“야.”

인기척을 내며 툭하니 튀어나오자 침대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올려다본다. 씨발, 놀랐냐? 그럼 난 얼마나 놀랐겠냐? 밤새 잠도 못 잔 채 어쩌다 비밀을 하나 더 알게 된 최백의 표정에 신경질이 가득한 미소가 담겼다.

“너네 대화란 걸 할 예정이면 문은 좀 닫고 하지 그러냐?”

닮은 두 얼굴이 맹하니 저를 쳐다본다. 최백은 한숨을 삼켜 내며 대신 신경질을 부렸다. 씨발, 그딴 말은 좀 조심히 해. 다 들었잖아. 이런 새끼들이 무슨 거짓말을 하고 비밀을 지킨다고. 무슨, 그래서 무슨…….

애써 최백은 주선율에게 돌아가려는 시선을 바로 했다. 턱 끝까지 올라온 말들은 내뱉어지지도 않고, 내뱉을 생각도 못 한 채 가슴께만 맴돈다. 주선율을 뒤로한 채 걷는 발걸음 끝자락까지 그랬다. 이럴 바에야 묻고 싶었다. 그래서 주선율. 그게 무슨 소리였어?

‘이번에는 자살 같은 거 안 해…….’

너 죽으려고 했어? 하지만 동시에, 묻고 싶지 않다. 물을 수 없었다. 이게, 나는. 나한테는. 너무 무거워.

언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던 주선율은 한없이 무겁다. 최백은 쉬이 고개를 돌릴 수 없다. 하지만 그 신경을 뗄 수도 없었다. 점점 속 안의 주선율이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한다.

* * *

정말 그랬다. 언젠가 생각한 것처럼, 최백은 주선율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선율 씨, 생일 축하드려요~!”

생일마저도 몰랐다. 가만 생각해 보면 작년엔 대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의 생일을 다 같이 챙긴 적은 없어도 축하 인사 정도는 했던 것 같은데.

그야말로 최백은 그동안 주선율의 속도, 겉도 하나도 모른 셈이었다. 그 날 선 반응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참 그 집 바닥 기어 다니면서 애교 떨더니, 성공했네. 개새끼가 주인집도 들어가고.”

성질 더러운 주선율이야 많이 봤다지만 언어의 강도가 저 정도로 센 건 처음이었다. 최근의 주선율에게선 상상도 하기 힘든 어투였다.

게다가 상대는 친형. 최백은 자신의 동생이 제게 저런 말을 쓰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주선율에게 형이 둘 이상이라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그래서 최백은 그 사나운 형제의 대화에 가타부타 말하며 끼어드는 대신 팔짱을 끼고 가만히 상황을 관조했다.

“선율아, 말했잖아. 그런 식이니까 다들 너 싫어하는 거야. 노력 좀 해 봐.”

주선율의 친형이라는 남자가 안타깝다는 듯 말한다. 최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말에서 온 서늘한 예고가 맞아떨어진다. 짧게 웃음을 터뜨린 주선율의 얼굴에서 서서히 독기가 사라져 간다. 쏘아보던 시선에는 힘이 풀리다 못해 픽 꺾여 바닥을 향한다.

시야가 흐려지고, 잠시 들었던 고개가 다시 바닥에 처박아지고. 종래엔 웃음소리마저 사라진 주선율은 차근히 죽어 간다. 최백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가만히 생기가 돌며 아래보단 위를 향하던 주선율이 그대로 시들어 갔다.

최백은 문득 놈의 친형이라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 새낀 뭐 하는 새끼지?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지?

“…….”

저 죽어 가는 모습이 나한테만 보이는 것도 아닐 텐데. 당신은 너무 환하게 웃고, 내 화초는 너무 시들어 간다. 알게 된 지 5년도 안 된 나도 쟤가 죽어 가는 게 보이는데, 형이라는 새끼가 저러고 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야, 화초.”

주선율의 눈동자가 최백을 향해 올라왔다. 가만히 서서 말간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괴상해진다. 착잡한 것 같기도 하고, 짜증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나면 물어뜯으랬지, 누가 멍청이마냥 서 있으래?”

하나는 확실했다. 저러고 있는 게 속 터져서 성질이 났다. 말도 잘하는 새끼가 왜 저러고 있어. 왜 저렇게 죽은 듯이. 왜. 잔뜩 주눅 들어 시들시들한 모습에 빌어먹게 내 속이 상했다.

최백은 깨달았다. 이젠 주선율이 저러고 있는 게 싫었다. 주선율이 기가 죽는 것도, 상처받는 것도 전부 싫었다. 그러니까, 아무도 못 건드려.

“그리고 댁은 누구신데 자꾸 내 화초 새끼 죽이고 지랄이세요?”

친형이든 뭐든, 아무도.

분노로 눈이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시선이 쏠리고 안 쏠리고 그따위 건 전부 상관이 없어졌다. 그 뜨겁게 달아오르는 분노 속에서 희미하게 깨닫는다. 최백은 주선율이 평범해지길 바랐다.

신기운처럼 할 말 다 하고, 강이헌처럼 사람들과 함께하고, 공진하처럼 요령껏 행동하고, 하대진처럼 표정을 드러내면서.

그냥 그렇게, 놈이 행복해지길 바랐다.

* * *

깬 지는 한참이지만 오늘따라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버거웠다. 몸이 피곤해서가 아니라,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이 너무 버겁다.

‘개뿔. 아니긴 뭐가 아냐? 연이 씨, 연이 씨거리는 게 존나 다정해서 내 화초 새끼 아닌 줄 알았는데.’

‘야 형. 최백 형. 됐냐? 지도 무슨 화초나 상전이라고 부르면서.’

‘하. 어쭈? 이거 봐라? 그게 어떻게 그거랑 같아?’

‘다를 건 뭔데?’

‘이건 애칭이잖아.’

돌았네. 내가 돌았네. 최백이 제 상태에 대해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강이헌 병에 걸려 강이헌화된 게 분명했다. 애칭? 별칭도 아니고 호칭도 아니고 애칭이라고? 그건 강이헌이나 내뱉을 법한 단어가 아닌가?

생각은 하루 종일 이어진다. 거지 같던 그 날의 대화는 연습 도중에도 튀어나온다. 미쳤지. 애칭이라니, 내가 미쳤지.

깊게 한숨을 내쉰 최백이 물을 마시며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온 연락은 없었다. 오늘 주선율 드라마 오디션 있댔는데. 아직 안 끝났나? 시간상으론 끝나고도 남았을 시간이긴 한데 답은 없다.

최근 주선율에게 따로 연락을 넣는 일이 잦았다. 솔직히 반은 주선율 탓이고, 반은 최백의 잔걱정 탓이다. 기가 막힌 단어다. 걱정? 본인이 떠올려 놓고도 참 저와 안 어울리는 단어다 싶다.

주선율은 전자 기기에 능숙하지 못했다. 핸드폰 자판을 치는 데도 한세월이 걸린다. 노트북 하는 건 아직 못 봤는데, 그거라고 잘할 것 같지는 않았다.

스스로도 그걸 충분히 알고 있어서 그런지 단체 메신저에서도 주선율의 대꾸는 극히 적었다. 제 할 말만 하고 가거나 확인만 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가끔 보면 읽씹이 아주 습관이다. 성질나게.

그래서 가끔 주선율한테 뭐라 한 소리 하려고, 혹은 살아 있나 확인하려 한두 번 했던 연락이 이어져 이제는 아예 하루에 한 번쯤은 따로 메신저를 보내게 됐다. 별 내용은 없고, 오가는 연락 횟수도 극히 드물었지만.

이 새낀 뭐 하느라 대꾸가 없어. 그때였다. 연습실 문을 열고 한참을 욕하고 있던 상대가 등장했다. 잔뜩 기가 죽은 주선율이다.

“뭐야. 얘 표정이 왜 이래. 오디션 망했냐?”

“합격했어.”

“그래?”

하지만 시들어 왔다. 그 모습이 의심스러워 물어봐도 딱히 제대로 된 대꾸는 하지 않는다. 최백은 주선율을 독촉하는 대신 물을 내밀었다. KCON도 얼마 안 남았고, 연습실에서 할 건 연습밖에 없다. 아예 이런 거에 정신 빼놓고 있는 게 정신 건강에 더 나을 수도 있고.

하지만 어째 주선율은 내민 페트병을 의아하게 바라보다 최백을 올려다본다. 뭐야. 설마 연습할 생각이 없어? 그럼 연습실엔 왜 와?

진짜 연습할 생각이 없었는지 잠시 최백을 노려보던 주선율이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문득 떠올랐다는 듯.

“다른 애들은? 공진하 오늘 스케줄 없는데.”

“…….”

연습을 위해 자리로 향하던 최백이 걸음을 멈추곤 주선율을 노려봤다.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됐는지 모를 주선율과 공진하는 뻑하면 서로를 챙기기 바빴다. 뻑하면 붙어 있고, 뻑하면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고.

주선율은 공진하를 챙기고, 공진하는 주선율을 챙긴다. 그게 묘하게 짜증이 났다. 이놈의 그룹에 주선율 보호자가 대체 몇인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저 자식은 왜 사람 차별을 하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나도 챙겨 주는데. 매번 하대진이나 공진하만 찾고.

심지어 주선율은 신기운까지 챙기기 시작했다. 놈의 프로그램에 별다른 말도 없이 곧장 하겠다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예능 프로에, 무슨 기획인지도 모르면서 바로.

“하, 이제 그 편애에 신기운까지 끼우시겠다?”

성질을 부려도 모르는 척하기 일쑤다. 다 티 나는 외면에 짜증을 내도 요지부동이다. 내가 지를 얼마나 챙기는데. 답지 않을 정도로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주선율은 어째 심드렁하게만 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차근차근. 그렇게 속에 내려앉은 건 여느 날의 기억들이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천천히 떨어진 감정들은 그렇게 주변을 메웠다.

당시에는 그 무게도 느껴지지 않아서 전혀 몰랐다. 이 기억들이 그렇게 쌓이다 보면 어떻게 되는지. 그 기억들이, 날 어떻게 이끄는지.

* * *

“백아. 네가 뭘 몰라서 그래. 고우혁은 쨉도 안 되더라.”

공진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 말에 최백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뭔 개소리야?”

공진하가 맞았다. 고우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리가 그걸 증명한다. 기묘하게 굽어진 길의 구석,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룸의 사각지대에서 최백은 눈을 깜빡였다. 속살거리는 것 같은 작은 소리가 예민한 귀에 흘러들어 온다.

“저, 연기 어떻게 하는지 모르잖아요…….”

“아뇨. 잘 알아요.”

그건 낯선 목소리다. 그가 본 주선율에게서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상상도 못 해 봤던 목소리.

“잘해요. 하늘 씨. 당신 잘해.”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

“난 당신 팬인데. 믿어 봐요.”

달콤하기 짝이 없는 다정한 목소리에 최백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안으로 향했다. 기막힌 광경이다. 넌 그 목소리만큼이나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네. 공진하가 간만에 맞는 말 했네.”

올려다보는 시선들에 입술이 비틀어졌다. 가득 신경질이 퍼진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선율을 이딴 장소에 불러낸 여자도, 좋다고 나온 주선율도. 저를 보자마자 꿈인 양 사라진 그 다정한 표정도.

자리에 앉아 불청객인지 일행인지 모를 느낌으로 두 사람을 관조하며 그가 알아챈 건 단 하나였다. 놈이 이 여자를 좋아했던 거다. 주선율이 내뱉는 소리, 표정. 그건 어떻게 해도 숨겨지지 않는다. 최백에겐 그 잔재들이 충분히 보였다.

“어떻게 잘돼서 오디션을 보러 가도, 매번 같은 결과만 나요.”

이 여자는 쥐뿔도 관심 없어 보이는데. 어쩐지 최백은 착잡해졌다. 말 그대로 딱 ‘고민 상담’ 정도만 하고 있는 여자 앞에 앉은 주선율이 과하게 반짝였다. 저렇게 표정이 다채로웠나 싶을 정도다.

한없이 다정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절로 탐탁잖은 표정이 나왔다. 최백은 저에게도 드문드문 눈을 맞추며 말을 이어 가는 여자를 노려보듯 쳐다봤다. 한 번쯤은 혹시 기분 나쁜 거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여자는 그런 말도 없다.

여자는 착한 것 같긴 했지만 도드라지게 눈에 띄는 구석은 없었다. 그러니까. 최백은 대체 주선율이 이 여자의 어디에 꽂혀서 사랑에 빠졌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연신 여자의 단점을 찾아냈다. 심지어는 장점마저도 단점으로 승화시키기까지 하며 속으로 꼬투리를 잡아 댔다.

그래, 제길. 그게 맞다. 그냥 이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엿이라도 먹여 줄 요량이었다.

“거기 있는 사람한테 전부 욕하고 와요.”

주선율이 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이 여자가 주선율을 좋아하긴커녕, 놈의 감정도 깨닫지 못하는 것까지 모조리 다 마음에 안 들었다. 네 감정이 이젠 과거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늘 씨. 저 새, 큼. 사람 말은 그냥 무시해요. 자기 PR로는 차라리 역할에 맞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주선율은 다정하게 굴었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상으로 뭘 할 마음은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래도, 제기랄. 그래도 영 불편하다. 알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알게 된 기분이었다.

여자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그 끝을 지키는 주선율의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많이 좋아했냐?”

지워지지 않은 감정을 가진 주선율도 보고 싶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둘이서 보지 마.”

내가 뭐라고 이딴 말을 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에서 튀어나온 건 고작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기가 막힌 주선율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최백은 가만히 내뱉은 말을 되새긴다.

“그래도 보지 마. 둘이서는.”

“…….”

주선율은 답하지 않는다. 답을 들으려 한 말은 아니라 최백은 물끄러미 얼굴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비친 주선율이 뒤늦게 시선을 피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인지하지 못한 생각들을 흘려보낸다. 만나지 마. 신경 쓰지 마. 걔 때문에 고민하지도, 아파하지도 말고. 그냥 너는.

생각은 가라앉는다. 깨닫지 못한 속살거림은 제대로 끝맺어지지 못하고 어딘가로 떠밀려 내려갔다. 찬찬히 사라져 갈 것 같던 모든 것들. 아주 조그만 관심과 짧은 이야기들. 

그렇게 생각은 남아서 어딘가에 도착한다.

최백은 오랫동안 지하철 창에 비친 주선율을 응시했다. 주선율은 말없이 시선을 내리고 있다. 깊게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놈은 표정 하나 보여 주질 않는데도, 최백은 그저 그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내가 더 잘 알아요. 하늘 씨 잘하는 거.’

단어가 남았다. 이상한 일이다. 최백은 뒤늦게 주선율이 속삭인 이야기가 남는 이유를 깨달았다. 난 저 말이 아팠던 거다. 왜?

무언가 쉬이 결론 내려지지 않고 빙글빙글 주변을 맴돈다. 최백은 그 답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고작 손 한 뼘 정도 거리를 둔 네 얼굴이 궁금하다.

“…….”

주선율, 무슨 표정 하고 있어?

꽁꽁 얼굴을 감싼 네가 또다시 시들고 있지는 않을지, 그 여자를 생각하며 웃고 있지는 않을지. 고작 그런 게 궁금했다.

최백은 주선율을 따라 고개를 푹 숙이며 바닥을 노려봤다. 이건 이상한 감정이었다. 아주 낯설고, 아주 이상한…….

‘많이 좋아했냐?’

아직은 이름이 없는 감정.

감정이, 상념이 조용히 손끝부터 적셔 들며 그를 눈치채지 못한 감정으로 이끌었다. 당사자조차 모르게 젖어 든 감정의 이름을 알게 된 건 갑작스럽고 짧았던, 예상치 못했던 어느 순간이었다.

최근 매니저 형의 동태가 굉장히 수상했다. 대뜸 주선율에게 예능을 권유하고, 자기주장을 강력하게 펼치고.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 뭔가 되게 수상하긴 한데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이번에 주선율이 들어가게 된 드라마의 OST 건도 그랬다.

‘그래서 난, 기운이가 했으면 좋겠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우렁찬 외침이다. 다시 그날의 일을 새삼스레 떠올린 건 아침부터 신기운의 녹음실에 강제로 끌려간 주선율 때문이다. 대체 뭐야. 같은 건물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데 왜 녹음실로 애를 끌고 가. 수상하게.

녹음을 앞둔 최백이 아침의 일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 별게 있겠어. 첫 주조연이라고 힘 좀 쓰는 거겠지. 그래도 가면 주선율 있겠네.

어쩐지 오늘따라 복도가 한산하다. 과하게 조용한 기분이었다. 먼 훗날 생각하길, 그날은 마치 모든 걸 예견한 것 같은 날이었다.

텅 빈 복도를 걸으면서도 최백은 녹음실 사람들이 다 이른 점심을 먹으러 강제로 자리를 피하게 됐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핸드폰을 툭툭 두드리며 녹음실로 향했다.

평소와는 달리 매니저 형이 데리러 오지도, 오라고 연락하지도 않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람이 뭐, 가끔은 잊을 수도 있지.

이미 한참 전 예정되어 있던 녹음 일정을 떠올리며 녹음실 앞에 도착한 최백이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뭔가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녹음 끝났나?

“선율이 형이랑 잘될 생각 없어요.”

“어어?!”

막 문을 열려던 최백의 손이 뚝 멈췄다. 뭐? 신기운의 목소리였다. 신기운이. 지금 그렇게 말했다. 잘될 생각 없다고. 별생각 없이 바닥을 향하고 있던 최백의 시선이 곧장 정면으로 쏘아졌다. 지금 이상하게 들리는데, 그 말.

다 열리지 않은 문틈으로 이쪽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주선율이 말을 덧붙인다.

“나랑 얘 아무 사이 아니에요.”

이상한 문장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이게, 무슨. 문득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신기운의 예능에 패널로 보내던 모습. 강제로 OST에 참여시키던 모습. 자꾸 스케줄 날이 겹치던 신기운과 주선율.

“…….”

지금, 굉장히. 이상한 생각이 드는데.

“헤어… 졌어?”

저도 모르게 꾹 문고리를 강하게 움켜쥔다. 헤어져? 씨발, 지금 뭐랬어. 헤어져? 그러면 둘이 사귀기라도 했다는 소리야?

이상한 일이다. 매니저의 말이 한없이 느리게 들리고, 최백의 속이 들끓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쳐들어가고 싶은데 어째선지 두 발이 바닥에 딱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아뇨.”

“……사귄 적도 없거든?”

하. 최백의 손에 힘이 빠진다. 그래. 사귀기는 무슨. 안도의 숨과 함께 머리를 흩트리던 최백의 손이 뚝 멈춘다. ……안도했다고? 스스로의 기행을 최백이 알아차리기가 무섭게 매니저의 다음 질문이 도달한다.

“그럼 짝사랑… 도 아니야?”

짝사랑.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신기운이 곧장 부정의 대꾸를 내뱉었지만 어째선지 그 단어는 당사자도 아닌 최백에게 들어와 꽂혔다.

짝사랑. 최백이 속으로 그 말을 따라 했다. 폐에 가득 숨이 들어간 기분이다. 귓가가 멍멍했다. 들어도 수백 번은 들었을 것 같은 낡아 빠진 단어에 숨이 막혔다.

“별거 없기는! 너 저번에 선율이한테 뽀, 뽀뽀하려고!”

뭘 해? 최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신기운은 머리를 정리해 준 거라 대꾸했지만 어째선지 반대로 최백의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잠시 숨을 멈춘 채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최백이 더 이상의 말을 듣지 않고 문을 닫는다.

굳게 닫힌 문에선 대화 소리가 울리긴 했지만 뚜렷한 의미를 알 정도로 명확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홀로 남은 최백은 적막해진 복도에서 닫힌 문을 응시했다. 느리게 떨어진 발걸음이 뒤로 향한다.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 쳐 반대편 벽에 등을 기댔다.

짝사랑. 연애. 잘될 생각. 들었던 단어들이 짧게 이어지다 문득 고우혁이 떠올랐다. 사실 주선율을 떠올리다 이어진 이름이었다.

고우혁과 꽤 친밀한 주선율은 종종 어떤 순간 자리를 비우고 놈에게 가곤 했다. 가끔 그 이름을 내뱉었으며, 가끔은 그 이름이 모든 것을 해결할 때도 있었다.

최백은 그게 싫었고, 고우혁이 짜증 났다. 제가 한 메신저에 답 하나 주는 건 그렇게 느린 주선율이 고우혁에게 내뱉는 답 하나가 그렇게 싫었다. 그리고, 신기운까지.

‘나랑 얘 아무 사이 아니에요.’

아. 그래. 그렇게 말했지. 누가 봐도 오해를 푸는 장면이었다. 뒤늦게 최백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 그럼 그렇지. 무슨 주선율을, 신기운이.

순간 깨달았다. 여태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그 말을 들었던 거다. 단어 하나에 일희일비하다 이제는 안심까지 하고 있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왜? 내가 왜 둘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 말하는 것에, 안도하는 건데. 그건 이상하잖아. 그건 마치, 내가.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걔가 나왔다.

웃음기 섞인 얼굴로 측면을 바라보며 안에서 튀어나온 주선율이 비현실적이다. 그 비현실이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정면을 응시한다.

어떻게 이 순간이 이렇게 길었는지. 최백은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웃는 주선율을, 정면을 돌아보며 저를 알아차린 주선율을. 깜짝 놀라 만연했던 미소가 사라지는 그 장면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문득 최백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저 멀리 사라진 기분이었다. 공기가 무겁다. 귓가에 가득 부피를 채운 공기가 꾹꾹 들어간 것 같다. 현실감이 사라지고, 알 수 있는 건 없다. 이게 무슨 기분인지, 생각을 하긴 했는지.

여기에 존재하면서도 모든 게 흐릿해질 정도로, 네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동그랗게 뜨여진 눈을 마주하면서 툭 튀어나온 말은.

“인기가 많네. 주선율.”

정신을 차리니 네 앞에 서 있다. 네 등 뒤의 문은 굳게 닫혔고, 그 앞에 서서 내뱉은 말에는 여태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감정이 그득하다. 그건 화를 내는 것 같기도, 뭔가를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최백은 스스로의 감정을 명확히 정의 내리지도 못한 채 입을 다물고 있는 주선율을 응시했다. 닿은 시선을 누구 하나 피하지 않고 마주한다. 눈길이 허공에서 뒤섞였다.

예상치 못한 사람을 본 양 동그랗던 눈은 어느새 평상시로 돌아와선. 나는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았다. 그 가만히 보는 시선에 온몸이 뜨거워지는 걸 보니.

최백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왜 이러지. 여태까지 어떻게 몰랐나 싶을 정도로 그 시선이 간지러웠다.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선율의 손이 보이자 바로 제 손이 마중을 나가는 게 보였다.

저도 모르게 그 손목을 꾹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이끄는 손길에 순순히 따라온 발걸음 소리마저 마음을 수런거리게 만든다.

꾹 잡은 손에, 걸음 소리에, 신경이. 과하게 간다. 최백은 어쩐지 몽롱한 기분이었다. 바닥을 걷는 기분이 아니었다. 감각은 모조리 손안에 쥐여진 팔목에 가 있다. 뼈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앙상한 팔에 속 어딘가가 덜컹거린다. 가슴께가 꺼림칙하다.

“놔.”

짧은 말에 곧장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여전히 손에는 감촉이 생생하다. 애써 손을 움직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걷다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발걸음 소리에 멈춰 섰다.

침묵이 심장을 조인다. 이게 무슨 감정이지? 사라진 온기가, 적막한 공기가 최백을 뒤흔든다. 그는 등을 돌려 주선율의 존재를 확인했다.

가만히 서서 생경하게 저를 쳐다보는 얼굴을 마주하며, 최백은 제 감정에 대해 생각한다. 이걸 뭐라 부르는 걸까. 걱정? 집착?

‘이번에는 자살 같은 거 안 해…….’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그날을 신경 써서? 말도 안 돼. 문 사이로 들었던 이야기를, 내가 왜, 그게 왜 신경이 쓰여.

걸음은 다시 옮겨졌지만 최백의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했다. 이상하다. 무언가 잘못됐다. 이건 그의 안에 없던 존재였다. 이렇게 뒤가 신경 쓰이면 안 되는 거였다. 엇박자로 이어지는 그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스스로가 괴상했다.

언제부터. 뒤섞인 생각 속 말 하나가 모든 걸 끊고 튀어나온다. 상념을 멈추게 한 단어가 속삭인다. 대체 언제부터 내가 이랬던 거야?

“뭔데? 무슨 일인데?”

움켜쥐는 손에 걸음을 멈췄다. 주선율이 먼저 손을 잡은 것도, 그 얼굴에 내려앉은 걱정도 의외였다. 맨날 걱정하는 건 나였는데.

다시 걸음을 옮기며 최백은 툭 튀어나온 무의식에 공감한다. 맞다. 걱정됐다. 잔뜩 취한 주선율이 내뱉은 말도 걱정됐고, 눈만 떼면 시들어 가는 화초 같은 놈이 신경 쓰였다.

눈에 안 보이면 어디서 죽어 가는 건 아닌가 싶고, 눈에 보여도 저 속엔 뭐가 들었나 싶고.

그렇게 어느 날인가 튀어나온 걱정이 언제 이렇게 겉가죽을 바꾸었는지.

“아파.”

그 말이 마법이라도 된 양 손에서 힘이 풀린다.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주선율을 뒤로한 채, 최백이 성큼성큼 걸어간다.

바르작거리는 손이, 놈이 작게 중얼거린 소리가 그에게 흘러들어 온다. 귀를 축축이 적시고 들어간 소리는 그렇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온몸을 적셨다. 짧은 소리 하나가 전신을 훑고 나서야, 손끝부터 적시고 있던 감정들을 깨닫는다.

‘그럼 짝사랑… 도 아니야?’

사랑. 그 툭 튀어나온 감정이.

“…….”

아. 그 단어가. 사랑. 그 순간 뒤를 돌아 확인하고 말았다. 네가 무엇인지. 이게 뭔지.

동그랗게 뜨인 눈과 마주하자, 강하게 최백 스스로를 움켜쥐고 있던 긴장의 끈이 탁 풀렸다. 입술이 비틀어진다. 깜빡이는 시선이 느리게 지나간다. 떨리는 숨결 속에 끝맺지도 못한 단어들이 뚝뚝 이어졌다.

너를. 내가. 이게, 이 감정이.

의아한 시선에 손을 꾹 잡자 눈이 내려간다. 그 움직임에 따라 가만히 아래로 쭉 뻗은 속눈썹을 응시한다. 처연하기 짝이 없는 속눈썹. 희게 질린 얼굴. 꾹 잡은 온기.

“야.”

말도 안 돼.

“주선율.”

이건 미친 짓이다. 내가 미친 거다.

“주선율 멍청아.”

이 멍청아.

“주선율 머저리 같은 놈.”

머저리 같은 놈.

“제일 멍청한 내 화초 새끼.”

얘를 왜 좋아해. 그걸 왜 이제야 깨달아. 하필 왜. 어쩌다가.

“나한텐 편애 한 번 안 하는 내 상전 새끼…….”

얜 날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데…….

“넌 욕을 안 하면 사람을 못 부르냐?”

투덜거리는 소리에 힘이 빠진다. 떨어지는 손길에 주선율의 시선이 닿는다. 최백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난생처음 널 보는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불러 보는 기분이었다. 여태 수십, 혹은 수백 번 내뱉었던 이름은 전부 다 거짓이었다는 양.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여태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널 부를 수 있었을까. 믿을 수 없을 만큼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네 이름이.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가장 어렵고, 가장 귀해서. 세상이 쿵쿵거리고, 깊게 들이마신 숨 끝에 속삭임이 달린다.

“선율아.”

그건 울컥 내뱉어진 감정이다. 이상한 일이지. 그냥 네 이름일 뿐인데.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최백은 자신 속에서 무언가 아주 중요한 걸 내뱉은 사람처럼 초조함을 느꼈다. 동그랗게 올려다보는 시선에 꾹 조여 오는 속이 낯설다.

“씨발… 좆됐네.”

설핏 웃음이 튀어나왔다. 진짜였다. 정말 그런 감정이었다. 

사랑이었다. 

최백은 고개를 숙여 눈가를 가린다. 아, 정말로.

“선율아.”

그 단어 하나가 사람을 뒤흔든다.

뒤늦게 돌아보니 최백은 꽃잎 속에 뒤덮여 잠겨 가고 있었다. 손끝을 적시며 가만가만 떨어졌던 감정이 온몸을 뒤덮는다.

그리하여, 흘려보낸 생각은 말없이 쌓여 그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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