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소리 없는 신호로부터(1부 3권) (15/53)

14. 소리 없는 신호로부터

드라마 OST에는 난 참여하지 않는다. 내가 들어간 드라마긴 하지만, 전에 쳤던 사고도 있고 해서.

매니저의 강력한 추천으로 참여하게 된 신기운, 제작사 측의 추천으로 참여하게 된 공진하 그리고 엘앤엘의 메인보컬 최백. 이 셋이서 참여하게 된 OST의 음원 퀄리티는 상상 이상이었다. 얼핏 들은 데모 버전도 좋아서 그냥 이대로 낼 것 같아도 좋을 정도였다.

일정이 잡히고 연습이 이어진 지 며칠, 어느덧 OST 녹음 날이 다가왔다. 물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OST 노래 녹음한다고 드라마 출연진이 다 같이 와서 축하해 주고 응원해 주지는 않는다. 방해이기도 하고.

“아니! 넌 꼭 가야 한다니까!”

그리고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을 매니저 형의 고집으로 나는 덩달아 녹음실에 끌려 들어갔다.

“선율이 형 오늘 스케줄 없어요?”

녹음을 준비하던 신기운이 묻는 말에 매니저 형이 환한 얼굴로 전혀 없으니 걱정 말라고 대꾸했다. 순간 신기운과 시선이 마주쳤다.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아니나 다를까, 신기운이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고개를 젓는다. 매니저 형이 왜 저러는지 본인도 모르겠다는 표시다.

신기운이 부스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며, 나는 꽤 자주 있었던 매니저 형의 기행들을 차근차근 떠올려 보았다. 떠올리는 건 쉬웠다. 그 모든 기행의 중심에는 신기운하고 내가 있었으니까.

‘나는! 선율이가 나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난, 기운이가 했으면 좋겠다!’

“…….”

뭐가 되게 꺼림칙한데. 신기운 예능에는 내가 나가고, 내 드라마 OST에는 신기운이 나간다. 이상할 건 없는데, 추천한 사람이 전부 매니저 형이라면 이상해지지. 워낙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라, 딱히 문제 될 거 없다 싶은 정도로만 제재할 뿐 추천이나 출연에 제 고집을 넣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심지어 그 안 하는 짓을 하며 뿌듯한 표정까지 짓곤 했었다. 신기운을 보며 의미 모를 미소를 짓기도 하고…….

“선율아, 기운이 노래 되게 잘하지 않아?”

“……저도 노력할게요.”

“그, 그게 아니라! 너 타박한 거 아냐! 그냥! 기운이 잘하지 않냐고…….”

“…….”

매니저 형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내가 아는 형은 간단하다. 착하고, 성실하고, 거짓말을 못 한다. 그러고 보면 요즘 촬영장 갈 때마다 신기운이랑 단둘이서 가는 경우가 많았지. 물론 나나 쟤가 고정된 스케줄이 꽤 있고, 그게 겹쳐서 그렇긴 한데. ……잠깐. 그러고 보니까 그럴 때마다 틀지도 않던 노래 틀고 그러지 않았나?

‘흠! 흠흠! 아, 오늘 재즈가 듣고 싶네~’

심지어 잘 그러지도 않던 사람이 중간중간 자리 비우고 화장실도 갔었다.

‘나 잠깐 요 앞 화장실 갈 테니까, 둘이 잘 대화 나누고 있어! 나 늦어! 늦는다! 진짜!’

“……잠깐만.”

이거 씨발 이상하게 퍼즐이 맞춰지는데? 기가 막힌 얼굴로 매니저를 바라봤다. 나와 신기운을 번갈아 바라보던 매니저가 움찔하더니 어색한 미소를 흩뿌렸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다.

“설마,”

지금 신기운이랑 나랑 엮어 주는 거야? 기분이 거지 같아서 할 말마저 잃고 입을 벙긋거렸다. 정황상 그게 딱 맞아 떨어졌다.

자꾸 둘이 붙여 주려 하고, 서로 스케줄엔 반드시 추천하고, 시간 잘 보내라며 자리도 피하고, 당장 지금만 봐도 신기운 녹음 끝난 다음에는 최백이, 공진하가 차례로 해야 하는데 스케줄 있는 공진하는 그렇다 쳐도 최백은 부득불 두고 왔다. 컴백 준비나 하라면서. 아니, 그럼 나는?

저 이상한 행동의 시작이 대체 어디인지 깊게 고민하고 있을 때, 신기운의 쉬는 텀이 돌아왔다. 신기운이 돌아오자 음향 감독이나 다른 스태프들이 수고했다, 이 부분은 조금 보완이 필요한 것 같다 하며 깔끔하게 정리해 줬다. 오늘 아예 녹음을 끝낼 생각인지, 잠깐 쉬면서 목 관리 하다가 나머지 부분도 녹음하자며 기운을 북돋는다.

“자, 자, 감독님들! 우린 식사하러 가죠! 식! 사! 점! 심!”

“…….”

“매니저 형, 우리는요?”

“너네는 둘이 맛있게 먹어~ 아, 여기 카드 줄게. 좋은 데에서 먹고!”

매니저 형의 말에 결국 신기운마저 입을 다물었다. 카드를 강제로 쥐여 준 매니저 형이 뭔 놈의 점심을 벌써 먹냐는 스태프진의 아우성에도 부득불 끌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 신기운과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놈도 이 이상한 낌새를 대강 눈치챈 얼굴이다.

“형.”

“잠깐만요.”

나와 신기운 입에서 동시에 목소리가 나왔다. 우리가 매니저 형을 잡는 모습에 스태프들은 심상찮은 기운이라도 눈치챘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벌써 무슨 점심이냐 투덜거리던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밥 먹으러 가자며 자리를 피했다.

“…….”

“…….”

사람들이 다 나가자, 북적이던 녹음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렇게 많은 숫자가 있던 것도 아닌데 어쩐지 아까와는 공기마저 달라진 기분이다. 매니저 형은 눈을 굴리며 아무런 말도 안 하는 우리를 보며 왜 그러냐며 조심스레 물었다.

눈이 가늘어졌다. 왜 나랑 신기운을 밀어주려 한 거지?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모호하다. 언제부턴가 형은 은근슬쩍 나와 신기운을 붙여 놓곤 했으니까. 뭔가 미심쩍은 시선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침묵하며 생각을 고르는 동안, 신기운은 다짜고짜 폭탄을 터뜨렸다.

“형, 저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애인도 없고요.”

“……어, 어엉?”

대뜸 솔로 선언을 하더니,

“선율이 형이랑 잘될 생각 없어요.”

“어어?!”

전조도 없이 스트라이크를 날렸다. 그 급격한 주제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깜짝 놀란 표정의 매니저 형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랑 얘 아무 사이 아니에요.”

내가 덧붙이자 매니저 형의 흔들리던 시선이 점차 심각해진다.

“헤어… 졌어?”

“아뇨.”

“……사귄 적도 없거든?”

어이가 없어서 반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기가 막혔다. 어딜 봐서 사귀는 사람처럼 보였대?

“그럼 짝사랑… 도 아니야?”

신기운을 돌아보며 조심스레 묻는다. 네가 문제였어? 짜증스레 표정을 팍 구기고 신기운을 노려보자 어깨를 으쓱인 놈이 “아니에요” 하고 태연하게 대꾸한다. 저 괴상한 오해에 어이없거나 짜증 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내가 뭔 빌어먹을 놈의 거지 같은 오해를 한 거냐고 펄펄 뛰기도 이상해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는 것으로 불만을 끝냈다. 대신 매니저 형은 신기운을 노려보며 한 소리 했다.

“대체 너 뭘 했기에 형이 저런 오해를 해?”

“글쎄요. 별거 없었던 거 같은데.”

“별거 없기는! 너 저번에 선율이한테 뽀, 뽀뽀하려고!”

“……!”

뭐? 뽀뽀? 소스라치게 놀라며 놈에게서 멀어지자 신기운이 눈을 깜빡인다. 그러곤 날 봤다가 매니저 형을 돌아보며,

“제가요?”

“그래! 너 그때, 나 잠깐 차에 너네만 두고 화장실 갔다가 돌아왔더니!”

“……?”

신기운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라 매니저 형이 속 터진다는 얼굴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뭘 잘못 본 거 아냐? 딴 놈도 아니고 신기운이라니. 놈하고 나는 연관성이 크지도 않다.

“선율이 회식 직전에 있잖아! 그때!”

“아.”

드디어 무언가 떠올랐는지 신기운이 짧게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매니저를 바라보며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냥 머리 정리해 준 건데요.”

뭐? 머리를 정리해 줘? 그것도 소름 끼치는데. 신기운이 원래 그런 애였나? 공진하나 강이헌이 했다고 하면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데, 전혀 스킨십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신기운이 했다니까 이상하다.

아니, 아니지. 뭐. 어쩌다 한 번쯤 그럴 수도 있긴 하다. 하긴 공진하나 강이헌도 가끔 머리 정리해 주고, 하대진은 옷까지 정리해 주는데 그럴 수도 있긴 하다. 애써 고개를 끄덕이는데 매니저 형이 기가 막힌 소리를 냈다.

“그, 그게 어떻게 정리해 준 거야! 분명 반쯤 선율이 쪽으로 몸이 틀어져 있었는데!”

“머리 정리해 주려면 거기까진 몸이 틀어져야 해요.”

맞는 말이다.

“그, 그래도! 너 내가 선율이 너네 예능에 추천하고, 너 OST에 막 넣어도 아무 말 안 했잖아!”

“좋은 기회잖아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 결국 매니저 형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얼마나 오해하고 있었던 거야? 회식 때부터면 진짜 몇 개월 됐을 텐데.

아니, 그 와중에 신기운이 날 좋아하는 줄 알고 밀어줬다니, 기가 막힌다. 이상함도 못 느꼈나? 밀어주려 한 것도 웃기네, 진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그걸 눈치채곤 슬쩍 날 흘겨본다. 뭐. 왜.

“그래서 선율이 형 오늘도 여기 끌고 온 거예요?”

“그래! 난 너 진짜 선율이 좋아하는 줄 알고 고민하고 고민하다 잘되라고 밀어주고 있었는데, 이게 다 뭐야!”

뭐긴 뭐야, 바보지.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매니저 형이 내 어깨를 꾹꾹 밀며 다 오해면 넌 빨리 가서 컴백 준비나 하라며 닦달했다. 아마 보기 뻘쭘해서 어서 내쫓으려는 것 같아 놀리기도 할 겸 버티고 있을까 고민하다 말았다.

“둘이 오해 잘 풀고.”

“야! 주선율 너 놀리지 마!”

별말 안 했는데 지레 찔려 하긴. 웃으며 문을 열었다가. 문득 시선이 닿았다.

내가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눈을 직시하는 새카만 시선은 어떤 감정을 표현하지도 않고 말없이 응시하기만 한다. 나는 나가는 것도 잊고 순간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자리에 멈춰 서 그 시선을 마주했다.

“…….”

“…….”

“선율아? 왜, 거기 누구 있어?”

“……아뇨. 가 볼게요.”

달칵.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여전히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는 남자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날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매번 하얗게 바스러질 것 같던 남자의 밝은 머리만 바라보다 그 새카만 머리를 보니 어째 기분이 이상했다. 새카만 머리카락 사이로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이며, 남자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인기가 많네.”

등을 떼곤 느릿느릿, 내 앞까지 걸음을 옮긴다. 새카만 눈동자에서 난 시선도 못 뗀 채 말없이 자리에 서서 다가오는 모습을 응시했다.

“주선율.”

최백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다. 침묵하며 직시하는 시선을 피할 이유도, 피할 마음도 생기지 않아 놈을 따라 나도 그 눈을 마주하고 자리에 서 있었다. 최백은 그런 내 모습에 뭐라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대뜸 손목을 잡아끌었다.

터벅터벅. 적막한 복도 속에 걸음 소리가 울렸다. 놈의 손에 잡힌 손목을 응시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자꾸 놈의 새카만 머리에 시선이 닿았다. 희미한 염색약 냄새가 난다. 그러다 문득 놈의 말을 되새겨 본다.

인기가 많네. 주선율. 인기. ……안의 대화가 들렸나? 왜 거기 서서 듣고만 있었지? 어쩐지 기분이 찝찝했다. 심술을 부리듯 손목을 내려다보며 “놔” 하고 짜증스레 내뱉었다.

“……?”

곧장 손이 떨어져 나갔다. 말하면서도 바로 놔 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나는 놈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걷는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뭐야? 놓으란다고 진짜 놔? 아니, 놓으라고 하긴 했고, 딱히 뭐 잡혀 있던 게 좋았던 건 아니긴 한데. 어쩐지 최백이 이상하다.

“…….”

“…….”

지금도 봐. 걸음 소리가 나지 않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으면서 왜 안 오냐는 재촉 한 번 없다. 지금쯤 화초니 상전이니 소리가 한 번쯤은 나왔어야 했는데. 타박은커녕 말 한 번 붙이지 않고 물끄러미 보고만 있다. 뭐지? 무슨 일 있었나? 놈을 따라 걷기 시작하자 다시 고개를 돌려선 앞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다.

조용히. 침묵하며. 놈은 적막 속을 걸으며 두어 번 내 쪽을 돌아볼 뿐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걸음이 앞으로, 다시 또 앞으로. 결국 꺼림칙함을 참지 못한 내가 달려가 놈의 손을 잡아챘다.

“뭔데? 무슨 일인데?”

“…….”

최백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의외란 얼굴이다. 놈은 날 빤히 바라보다, 물끄러미 내가 잡은 제 손을 보더니.

“뭐야. 어디 가는 건데, 대체?”

“아마 연습실.”

손을 쥔 채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아마는 뭐야 아마는. 가면 가고 아니면 아닌 거지. 놈답지 않은 모호한 답에 기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점점 강하게 옥죄는 손에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진짜. 어디서 맞고 와서 나한테 화풀이라도 하는 거 아냐? 아니……. 잠깐만. 인기 많다 했지. 설마 내가 연습 안 하고 연애질이라도 할까 봐 연행이라도 하듯이, 아. 왜 이렇게 손을 세게 쥐어?

“아파.”

“…….”

“…….”

……아닌가? 강하게 쥐는 손에 아프다 말하자 곧장 손에 힘이 풀린다. 뭐야, 대체……. 이쯤 되니 무섭다. 최백이 아닌 것 같았다. 어째 놈이 낯설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생각이란 건 하는 건지.

놈의 흔들거리는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그 멀끔한 뒷모습에선 놈의 생각 한 톨조차 알 수 없다. 문득 그러다 걸음을 멈추곤.

“…….”

뒤를 돌아 날 바라본 최백의 눈이 동그랗다. 그 생경한 얼굴에 덩달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끔 처음 보는 사람 같다는 얼굴로 쳐다보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바라본 적은 없는데. 돌아봄과 동시에 힘이 빠진 손이 이상하다. 멍하니 날 바라보던 최백의 입술이 비틀려졌다.

“……?”

대체 뭐야. 평상시에도 딱히 알기 쉬운 놈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배로 그 속내를 알기가 어렵다. 꾹. 힘이 쫙 빠진 채 쥐는 둥 마는 둥 했던 최백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강하게 잡는 손에 시선을 내려 손을 바라봤다. 진짜 괴상한 모습이었다. 최백하고 내가 정답게 손이나 잡고 있다니. 누가 보면 웃기겠는데.

“야.”

드디어 그 무거운 입이 열렸나. 나온 말이 투박해 퉁명스레 대꾸하며 손을 흔들었다.

“뭐.”

빼려고 흔든 건데 빠지진 않는다. 이 새끼 뭐야. 지금 이러고 손잡고 있자고?

“주선율.”

“……? 뭐.”

뭘 두 번이나 불러.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최백이 미묘한 표정으로 날 응시하고 있다. 입술을 짓씹곤, 웃는지 마는지 모를 표정으로.

“주선율 멍청아.”

“…….”

뭐지. 새로운 짜증 난 얼굴인 건가? 대뜸 욕을 들어 먹은 내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문이 막히자 최백이 탄식이라도 내뱉는 음성으로 연달아 욕을 뱉었다.

“주선율 머저리 같은 놈.”

“…….”

침착하게 생각해 봤다. 일단… 내가 뭘 잘못했더라. 설마 매니저 형 나 빼내 오면서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내가 자의적으로 컴백 준비 빠졌다고 생각하고 화내는 건가?

“제일 멍청한 내 화초 새끼.”

아니지… 그냥 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의아함은 사그라지고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내가 표정을 구기는데 어째 최백의 표정은 풀린다. 아까보다는 훨씬 부드러워진 얼굴로, 가만히 날 내려다본다.

“나한텐 편애 한 번 안 하는 내 상전 새끼…….”

“……너 시비 거는 거냐?”

“화초야.”

놈은 대꾸 대신 애칭인지 별명인지 모를 것을 내뱉는다. 나는 어째 그 미묘하게 다정한 어감에 입술을 비틀었다. 이상한 기분이다. 분명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일 거다.

‘야 형. 최백 형. 됐냐? 지도 무슨 화초나 상전이라고 부르면서.’

‘하. 어쭈? 이거 봐라? 그게 어떻게 그거랑 같아?’

‘다를 건 뭔데?’

‘이건 애칭이잖아.’

“상전 새끼야.”

상념에 젖기가 무섭게 와장창 깨뜨린다. 이 새끼, 곱게 보려고 해도 진짜.

“넌 욕을 안 하면 사람을 못 부르냐?”

“…….”

잡고 있던 손이 놓아졌다. 반사적으로 떨어지는 최백의 손을 응시했다. 내게서 떨어진 최백의 손이 제자리를 찾고는, 느리게 주먹을 말아 쥔다.

“선율아.”

순간. 나는 내가 무언가 잘못 듣기라도 했나 싶었다. 깜짝 놀라 경직된 몸으로 최백의 손을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최백의 눈가가 발갛다. 그건, 이건, 이 모든 건. 정말 이상한. 아주.

“씨발… 좆됐네.”

최백이 설핏 웃음을 흘렸다. 싫다는 듯 말했으면서도 영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연신 마른 웃음을 터뜨린다. 날 말간 눈으로 바라보던 최백이 꽉 주먹을 말아 쥐었던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린다.

“선율아.”

대꾸는 바라지도 않는지,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재차 내 이름을 부른다. 맨날 화초, 상전. 그런 식으로 불리다 들린 내 이름은, 그렇게 놈이 내뱉은 내 이름은 이상할 정도로 따뜻하다. 강하거나 거친 발음 없이도 그 짧은 단어는 긴 파문을 남긴다.

나는 가만히. 가만히 눈을 가린 최백을 응시했다. 아주 오랜만에 새카만 머리카락을 했고, 손에 가려진 눈은 매번 뜻 모를 새카만 색을 한. 대충 입고도 훤칠한 모습을 한 최백이. 눈가를 발갛게 한 놈이.

……이상했다. 공기가 뜨끈하다. 최백도, 그 행동도, 내 이름마저도 낯설다.

그리고 이건. 무언가가…….

“왜.”

한참이나 뒤늦은 대꾸였다. 최백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뭐야. 왜 말이 없어?”

나는 팔짱을 끼며 태연한 척 놈을 쳐다봤다. 고개를 숙인 채 눈가를 가리고 있던 최백이 손을 내린다. 그늘진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까만 시선에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보란 듯 표정을 구겼다.

“계속 부르기만 하더니. 시비 거냐?”

“…….”

천천히 최백의 손이 내려간다. 숙였던 고개도 다시 제자리를 찾고, 발갛게 변했던 눈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끔하기 그지없다. 평상시처럼. 혹은 다른 날처럼. 최백은 가만히 날 쳐다보다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재밌네.”

무언가를 예감한 듯, 혹은 알아챈 듯. 놈이 웃으며 눈꼬리를 휘자 눈물 점이 두드러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대체 뭐가,

“말도 안 되는데, 참 좋아.”

“…….”

말문이 막혔다. 예상치 못한 대꾸였다. 최백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최백은 내 어벙한 얼굴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환하게 웃은 놈이 스치듯 볼을 만지곤 그대로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에 시선이 내려갔다가 올라간다. 꾹 힘주어 잡은 손과, 웃는 얼굴이 비현실적이다.

“가자.”

다정한 네 음색 또한.

“선율아!”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걸음이 뚝 멈췄다. 매니저 형과 신기운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매니저 형의 얼굴이 어째 허옇게 질렸다.

“사, 사장님, 사장님이,”

아. 알겠네. 주상빈. 그 남자가 올라오라고 시키기라도 한 모양이다. 알았다고 하자 지금 올라와서 점심 같이하자고 했다고 대꾸한다. 점심……? 퍼뜩 그 허연 안색의 낯가리는 남자를 떠올리곤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나랑 점심을 먹겠다고? 나보다도 그쪽이 더 체할 거 같은데. 어째 굉장히 쎄하다. 기분이 영 꺼림칙해 표정을 구기다가 문득 신기운에게 시선이 닿았다.

“…….”

“……?”

신기운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흥미롭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뭐야? 그 이상한 표정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다, 그 시선 끝에 나와 최백이 맞잡은 손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떨쳐 냈다.

“뭐야.”

최백의 미간이 좁아진다. 그럼 뭐, 계속 잡고 있으라고? 짜증 섞인 목소리를 무시하며 매니저 형을 바라보자 의아한 표정을 한 형이 놈을 끔뻑끔뻑 쳐다봤다.

“뭐야? 백이 너 왜 여기 있어? 연습은!”

“녹음 제 차례라면서요. 11시.”

“아……. 맞다. 그랬지.”

최백 녹음 있는데 다 내보낸 거야? 뭘 나랑 쟬 어디까지 도와주려 했던 건지. 난감한 표정의 매니저가 최백과 신기운의 눈치를 보더니 일단 나부터 처리할 요량으로 날 끌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순순히 그에 맞춰 주며 애써 꺼림칙한 느낌을 가라앉혔다. 별게 있겠어? 아마 서로 어색해서 밥이고 뭐고 커피 한 잔도 안 하고 깨질 확률이 더 컸다.

씨발.

“와~ 선율이다! 화면에서만 보다가 실제로 보니까 진짜 이상하네~”

주희민의 해맑은 얼굴에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주상빈. 주희민이랑 엄청 친하긴 했었지. 하기야 놈이나 나 같은 눈엣가시랑 그나마 잘 지내는 게 그 집 셋째 역할이긴 했었으니까.

맨 처음 이 회사 차리고, 엘앤엘 꾸릴 때도 주희민한테 먼저 아이돌 할 생각은 없냐며 묻기도 했었고. 둘이 친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나도 충분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그게…….

“하, 하하하. 하하.”

남자를 바라봤다가 그 토할 것 같은 얼굴에 한마디 쏘아 내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일단 여기서 탈출하고 싶은 건 나뿐만이 아니란 건 알겠네.

“너 뭐야?”

“뭐긴~ 점심 다 같이 먹자고 왔지!”

하. 어이가 없다. 이 새끼랑 나랑 언제부터 밥 먹는 사이가 됐던 거지?

“미쳤냐?”

“와, 저번이랑은 진짜 다르네. 그때 나 엄청 놀랬던 거 알아?”

저번. 누구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곧장 눈을 부릅떴다. 윤하늘 이야기였다. 힐끔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여전히 허옇게 질린 채 토할 것 같은 얼굴을 한 남자는 다행히 주희민의 말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맞다. 저게 현명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의 허연 얼굴이 그대로 날 따라 올라왔다.

“저 가요.”

“어? 어어, 그래도 밥은 같이 먹고 가지……. 저기 앞에 초밥집 맛있는 데 예약해 놨는데…….”

“……요? 가요? 형, 지금 형한테 선율이가 존댓말 써 준 거야?”

주희민이 깜짝 놀라며 환하게 웃는다. 자기한테는 왜 안 하냐며 빙글빙글 웃는 그 얼굴에 침을 뱉고 싶어졌다. 딱 뱉기 좋은 각도긴 한데. 여기서 침 뱉으면 놈의 얼굴에 정확하게 떨어질 것 같다.

“선율아, 그러지 말고 같이 먹자~!”

“꺼져라.”

“으흥흥, 내숭은~”

“…….”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이 새끼 왜 이러지? 진짜 뭘 잘못 먹었나? 놈은 원래 이런 식으로 구는 놈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한텐. 잘도 웃으며 치대긴 하지만, 나한테는 꼴에 형이랍시고 각종 참견이며 같잖은 잔소리를 했다. 언제나 그 빌어먹을 ‘옳은 말’들을 하며 날 구석으로, 저 멀리로 떨어뜨리곤 했다.

난 놈의 그 특별난 ‘옳은 것’들에 진저리 쳤다. 그건 언제나 놈의 밝은 면을 나타냈다. 그 말이 맞는다는 게 더 끔찍했다. 맞다. 놈과 나는 다르다. 그게 언제나 최악이자 최선의 감정을 끌어냈다.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사회성을 길러야지, 선율아. 다들 그런 거 듣는데도 티 안 내면서 살아가는 거야.’

뭐. 그따위 말들. 적어도 너한테는 전혀 듣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들. 좆같은 주희민. 거지 같은 주희민.

주희민이 해맑으면 해맑을수록 난 언제나 음울해졌다. 놈의 주변에는 곳곳들이 스며드는 햇살이 나한테는 모른 척 저 멀리 도망쳐 버린 것 같아서. 놈과 나 모두 눈엣가시인데 나는 여기에, 놈은 저 위에 있는 것 같아서.

아니. 진짜로 그랬어. 내가 머저리처럼 기어 다니고 두 손으로 빌고 있을 때도, 넌 뭣도 모른 채로. 왜? 씨발, 왜였을까? 왜 하필 나였을까?

‘나도 진후 형이랑 연석이 형이랑 놀고 싶은데. 왜 나는 안 돼요, 연석이 형?’

‘넌 안 돼.’

‘왜요?’

‘재미없으니까. 그치, 주선율?’

나와는 전혀 다른 어감과 생각으로 말하고, 표현하고, 살아가고. 그게 누구 덕이라고 생각해?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너한테는 뭐가 그렇게 쉬울까.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그렇게 쉬울까.

‘선율아, 넌 왜 진후 형만 보면 떨어? 아버지! 선율이 이상해요!’

매번 아무것도 모르는 그 해맑은 얼굴로.

‘주진후.’

아버지.

……아버지.

우웅, 우우웅!

[아버지]

다 당신 탓이야.

“초밥 싫어해? 그럼 취소하고 다른 거 먹을까……. 아! 약간 시간 남았으니까 너네 연습하는 거 구경해도 돼?”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바라봤다. 환청이었나. 핸드폰이 울린 것 같았다. 어느 날, 당신한테 전화가 왔었던 것처럼.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가 어떤 기분인지 전혀 모르는 주희민이 맑은 눈동자로 웃는다. 그 티끌 한 점 없는 맑음에 속이 비틀어진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

수십 번 했던 같은 생각을 하며, 여느 때처럼 대꾸 없이 서늘하게 놈을 바라보다 입을 틀어막고 있는 남자를 돌아봤다. 나보다도, 주희민보다도 나이가 많은 남자는 어째 셋 중 가장 담이 작은 것 같다. 내 시선에 긴장한 얼굴로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린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가 볼게요.”

“선율,”

“점심. 맛있게 드시고.”

경고하듯 노려보자 날 부르려던 소리가 뚝 멈춘다. 날 응시하는 눈동자를 지그시 노려보다 몸을 돌려 빠져나온다. 쾅.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고 나서도 한참 동안.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 앞에 서 있었다.

‘나도 진후 형이랑 연석이 형이랑 놀고 싶은데. 왜 나는 안 돼요, 연석이 형?’

‘네가, 네 따위가 뭔데-’

‘넌 안 돼.’

‘왜 너한테만, 아버지는.’

‘재미없으니까. 그치, 주선율?’

‘어디서 감히, 어디서 감히 이 집에 들어와!’

‘선율아, 넌 왜 진후 형만 보면 떨어? 아버지! 선율이 이상해요!’

소리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말은 잔잔한 물 위에 떨어진 파문이다. 잔물결이 모이고 모여서, 결국 그건 거친 파도가 된다. 사방에서 울리는 과거의 물결들이 커다란 재해가 되어 나를 뒤덮었다.

나는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처럼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소리 없는 말들의 무게가 날 짓눌렀다. 깊게, 더 깊게. 바닥으로, 더 아래로. 최악으로. 밑을 향하여.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처럼. 짓눌린 채 가까스로 숨을 뻐끔거리다 느리게 자리에 일어섰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사장실의 비서가 아연한 안색을 하고 날 바라봤다.

뻐끔뻐끔. 소리가 희미하다. 물속에 파묻힌 사람처럼 그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채 그 입 모양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저으며 비서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아무도 용서 못 해. 모든 죄악이 내게 있었다 하더라도, 다 내 탓이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집 식구들을 용서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른 주희민도, 알고 있었던 주희사도, 맹하니 그 집에서 가장 사람 같던 주상빈. 엘앤엘을 만들어 준 당신마저도.

나는 아무도 용서하지 못해.

‘엄마, 엄마…….’

희미하게, 어린 주선율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띵. 소리와 함께 열린 엘리베이터 문 사이의 눈동자가 붉게 달아올라 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자리에 올라탔다.

사실, 그렇게 평상시처럼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기보다는,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나온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웅!

어깨를 움찔 떨었다. 진동. 머뭇거리다 켠 핸드폰에는 새로운 메신저가 와 있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나. 잠긴 화면 사이로 윤하늘의 새 연락이 떠오른다.


윤하늘 : 서뉼ㅆ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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