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조우 (13/53)

12. 조우

매니저 형이 너무 웃는다 싶었다.

“그, 허험, 크흠, 늦었지만 선, 크흠, 선물이야.”

혹시 물속에서 말을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숨이 막혀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떨떠름하게 그 손에 쥐어진 파스텔 톤 포장지를 응시했다. 남자의 뒤로 간만에 명패가 보였다. <더 콰르텟> 엔터테인먼트 사장 주상빈. 서로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셋째 형과의 피하고픈 만남이었다.

“선물이요?”

한 박자 느리게 되묻자 파르르 떨며 남자가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누가 보면 빨리 대꾸하라며 치기라도 한 줄 알겠다.

“저번에 희사랑 만날 때 희사한테 생일 선물 받은 것 같았는데 내가 그걸 봐 버려서, 그래서 늦었지만 생일 선물을 준비해 봤지 말이야!”

“…….”

뭔 소리야. 나는 표정을 구긴 채 들은 말을 재정리했다. 퍼뜩 그 거지 같은 순간에 나타났던 앞의 남자를 생각했다. 쥐구멍에 숨고 싶게 만들 만큼 끔찍한 타이밍에 나타난 남자가 화들짝 놀라던 것이 떠오르고 나서야 남자가 두서없이 내뱉은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아… 그때 갑자기 놀란 게… 내 앞에 놓인 선물을 보고 놀란 거였구나. 심약하기 짝이 없다. 그 여자 아들이라곤, 그 집안 식구라곤 전혀 매치되지 않는 사람이다. 하긴. 옛날에도 그랬다.

‘죄송… 제가, 잘… 게요.’

‘지금… 요?’

‘형, 진후 형!’

앳된 남자의 목소리들이 기억 어딘가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희미한 기억들이다. 괴상한 표정이 튀어나왔다.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는데. 이 남자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생각나다니. 진짜 뜬금없다.

남자에 대한 기억들은 희미했다. 크고 묵직했던 기억들에 짓눌려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것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숙인다.

“그… 너무 늦었지?”

어색하게 웃는 남자의 모습이… 꼴 보기 싫다. 짜증스레 그 손에서 선물을 뺏듯이 잡아챘다.

“늦긴 늦었죠. 감사합니다.”

“으응…….”

“…….”

“…….”

어색하다. 죽을 것 같다. 신경질적으로 굴긴 했는데 약간 찝찝했다. 매니저 형은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이 꼴이 웃길 거 같아서 좋아했나?

촬영이 끝나고 회사로 날 데려온 매니저는 형제간 오붓한 대화 되라며 날 가장 꼭대기 층으로 보내 놓고는 휑하니 먼저 가 버렸다. 비서들의 시선에 서 있기도 민망해 어색하게 안에 들어왔는데, 왔더니 나보다 더 어색해 보이는 남자가 몇 달이나 지난 생일 선물을 내밀었다.

“…….”

그냥 내 생일 같은 건 무시해 버려도 되는데……. 손톱으로 꾹 깔끔하게 포장된 상자를 눌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침묵 속을 올렸다.

“흠흠, 아. KCON 공연한 거 봤어. 잘하더라. 저번에 단역으로 들어간 달과 별 사이 소식도 들었고. 축하해.”

“네.”

“으응…….”

어색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의 남자가 시선을 내렸다. 저쪽도 어색하겠지만 이쪽도 만만찮다. 나도 죽을 것 같다. 아니 무슨, 선물을 준다고. 그냥 다른 사람 시키지, 굳이 뭘. 늦어도 한참 늦은 생일 선물을 직접.

무슨 선물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파스텔 톤의 깔끔하게 포장된 상자는 그다지 크지 않다. 뭘까. 이만한 사이즈의 상자에 들어갈 법한 것을 생각하다 점점 더 침묵하는 남자를 흘깃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가 볼게요.”

“그래. 음. 흠흠. 촬영 잘 하고.”

“네.”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남자를 응시하며 가까스로 말을 내뱉었다.

“선물, 감사합니다.”

“어…….”

맹한 남자는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킨 자세 그대로 굳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나는 가만히 날 지켜보고 있는 비서들의 시선을 외면한 채 태연한 척 선물을 들고 있었다. 신경은 모조리 왼쪽 손에 가 있는 상태였지만 말이다. 바스락거리는 파스텔 빛 포장지가 신경 쓰인다.

뭘까. 뭘 줬을까. 본인이 직접 사진 않았겠지. 뒤에 있는 사람들 중 하나가 사 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래도, 그냥 그렇게라도 생일 선물이란 것을 줬다는 게 신기하고 반가웠다. 정말 그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겠는, 아주 이상한 기분.

띵. 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슥 열렸다. 고개를 들어 타려던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선율아.”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 짓는다. 내 놀란 표정에 웃는 얼굴이 맑다. 깜빡이는 시선으로 다정히 바라보곤 해맑은 얼굴로 태연히 되묻는다.

“놀랐어?”

“너 왜 여깄어?”

질문은 동시에 툭 튀어나왔다. 내 당황한 얼굴에 언젠가처럼, 공진하는 웃는 얼굴로 몸을 가볍게 흔들며 손짓했다.

“너 데리러 왔지.”

짧게 소리 내 웃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 뒤에서 따갑게 닿는 시선에 정신을 차리곤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공진하는 내가 들어오자 슬쩍 자리를 피해 한 걸음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전처럼 마냥 붙지도, 그렇다고 전처럼 마냥 도망치지도 않은 그 애매한 거리에 퍼뜩 최백의 말이 떠올랐다.

‘……너 뭐 하냐? 그 이상한 거리감은 뭐야?’

내 떨떠름한 얼굴에도 공진하는 아무것도 아닌 척 시치미를 떼며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힌 이후, 뒤늦게 내 손에 쥐여 진 선물을 본 공진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손에 그건 뭐야? 선물이야?”

“어? 응. 뭐.”

어색하게 슬쩍 등 뒤로 가리자 공진하가 음흉하게 웃는다.

“뭐어야? 막 숨겨야 할 선물인 거야? 너, 사장님한테 뭘 사 달라고 한 거야~?”

“나도 내용물 모르거든. 그냥.”

우물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뒤늦은 생일 선물을 받았다는 말이 이상하게 간지러워 내뱉기가 버거웠다. 공진하는 버릇처럼 옆구리를 찌르려다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이쯤이면 의심스럽다. 나한테 냄새가 나나?

슬쩍 팔을 들어 아닌 척 냄새를 맡았지만 딱히 이상한 건 없었다. 하긴, 나한테서 나는 냄새를 내가 알 리가 없나. 그래도 냄새나면 냄새난다고 말이라도 하든가, 이건 뭐 그냥 나한테 닿는 걸 피하네. 기분이 나빠져 공진하를 슬쩍 흘겨봤다가 놈이 하려던 옆구리 찌르기를 내가 쿡쿡 찔렀다.

“으어! 뭐, 뭐, 뭐 하는 거야?”

“아니…….”

화들짝 놀란 공진하가 희롱이라도 당했단 양팔로 제 몸을 가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흠칫 손을 거뒀다.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나 뭔가 만지면 안 될 데라도 만졌나?

갑자기 싸하게 분위기가 굳은 가운데 띵,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1층에서 열린 문에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지하를 누르려는데 공진하가 대뜸 손을 잡아채선 엘리베이터에서 훌쩍 걸어 나왔다. 무의식적으로 따라 걸으며 입을 열었다.

“왜 여기서 내려? 매니저 형이 1층에서 기다리래?”

“아니. 나 매니저 형한테 전화 안 했는데.”

“너, 차 끌고 왔어?”

“아니?”

뭔 소리야 이게? 기가 막혀 자리에 멈춰 서니 날 잡아끌던 공진하도 자리에서 슬쩍 멈췄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망설이지도 않고 잡았네. 내 손을 쥔 하얀 손을 내려다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자기도 모르게 잡은 거 같은데. 앞으론 정신없이 굴거나 하면 별생각도 없이 퍼뜩퍼뜩 손이고 뭐고 내밀 거 같네. 앞으로 계속 놈 앞에서 정신없이 굴어야겠다. 쓱 다가왔던 것과는 반대로 갑자기 쓱 멀어져 간 놈을 포획할 생각을 차근차근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놈이 해맑은 얼굴로 외쳤다.

“우리 걸어가자!”

“……어딜?”

설마 숙소를?

“숙소까지!”

진짜? 기가 막혀서 놈을 쳐다봤지만 공진하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물론 거리가 엄청 멀지는 않지만, 차로 오고 갈 정도의 거리긴 한데. 걸어서 가면 꽤 걸릴 거다. 나 체력도 별로고. 퍼뜩 저번에 촬영했던 예능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신기운. 걷고 뛰는 건 딱 질색이다.

“왜 차는 안 타고 왔어?”

“오늘 걸을 만해~ 별로 안 덥고! 모자도 챙겨 왔어.”

준비성도 철저하다. 걷고 싶지 않은 기분에 눈을 굴리며 변명하듯 웅얼거렸다. 워낙 해맑게 웃고 있으니 싫다고 대놓고 말하기도 미안했다.

“걸어가면 꽤 걸릴 텐데……. 매니저 형 부르지.”

“하지만.”

뚜렷하게 내뱉은 목소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놈은 어느새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고 있다. 축 기운이 처진 게 느껴졌다.

“차를 타면 너랑 더…….”

안 그래도 작게 내뱉은 소리는 점점 더 작아져 끝 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는다. 나는 눈을 끔뻑이며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라는 거야?

“…….”

“뭐라고? 한 번만 더 말해 봐.”

“됐어!”

“……?”

공진하가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는 고개를 돌렸다. 뭐야? 멍하니 내쳐진 손을 바라보다 놈을 올려봤다. 이 새끼 지금 뭐 하는 거야? 지금 삐진 거야? 갑자기?

“뭐야. 왜?”

“몰라. 형한테 전화할래.”

“……?”

말로는 틱틱거리면서도 주머니에 손 한 번 안 넣는다. 그냥 해 본 소리란 거다. 진짜 얘는 왜 이렇게 알기 쉬운 거지. 그런데도 그 속내 하나하나는 알기가 쉽지 않다.

왜 걷고 싶은 건지, 왜 매니저 형한테 전화하기 싫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거 하나만큼은 알 것 같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투정을 부려 나랑 걷고 싶다는 거. 한숨을 삼키며 팔짱을 낀 공진하의 손을 끌어 내렸다.

“알았으니까 모자나 써.”

“……걸어갈 거야?”

“그래.”

해맑게 웃는 얼굴에 한숨을 내쉬며 새빨갛게 달아오른 귓불을 툭 건드렸지만 놈은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모자를 꾹 눌러썼다. 바보 같다. 심술을 부리듯 모자챙을 꾹 누르고는 걸음을 옮긴다.

잡혀 있던 손을 꼼지락대던 놈이 슬그머니 손을 뺐다. 내가 노려보기도 전에 놈은 내게 끌려오듯 걷는 대신 옆에 나란히 붙어 걸음을 옮겼다.

“…….”

“헤헤.”

“……뭘 웃어.”

“그냥! 우리 어디 갈까?”

“숙소 간다며.”

“영화 볼까?”

“숙소는.”

“카페 가자!”

“…….”

결국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 * *

“사람 진짜 많다!”

“그러게. 저번에도 많았는데.”

“그치?”

슬쩍슬쩍 주변을 둘러보며 나란히 붙어서 걸어갔다. 이 한여름에 모자에 마스크까지 낀 우리가 꽤 수상쩍어 보이리라 생각했는데, 공진하의 말대로 마냥 덥지는 않아서 그런지 모자나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도 꽤 많았다.

두 개 모두 한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서 그렇지. 아니지, 정정한다. 나밖에 없었다. 공진하의 마스크는 거의 다 내려져 겨우 턱만 가리고 있었다. 답답하다며 내린 마스크가 어째 아슬아슬해 보여 한 소리를 내뱉었다.

“마스크 제대로 해. 그러다가 알아보면 어쩌려고?”

“어? 선율이, 우리 완전 대스타로 보는구나~? 막 이러고 다니면 다들 알아볼 것 같고 그래~?”

“…….”

확실히 지금 인지도가 그 정도로 높진 않지만……. 아마 알아본다 하더라도 수군거리며 사진만 찍을 뿐 인파가 몰리거나 하진 않을 거다.

생각해 보니 고우혁하고 돌아다닐 때도 사진은 꽤 찍혔는데 사람들이 안다는 시늉도 안 해서 나중에야 알았었지……? 잠시 입을 우물거리다 말았다. 자의식 과잉 같아 약간 창피해졌다. 그런 내 속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공진하가 소리 내 웃었다.

“헉, 저거 봐. 떡볶이!”

“음.”

그러게. 길가에서 파는 떡볶이가 공진하의 눈을 사로잡았다. 데뷔 전에도 딱히 주변을 걸어 다니거나 하지는 않아서 그냥 길가의 떡볶이나 식당의 떡볶이나 크게 차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많이 안 먹어 봐서 그런가. 낯선 음식을 바라보듯 보고 있으니 공진하가 장난스레 웃으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맞다. 선율이는 먹어 본 적 없겠구나! 느 집엔 떡볶이 없지~?”

“뭐 하는 거야.”

“……선율이 너, 공부도 안 했었구나.”

뭐가? 공진하가 아쉽다는 듯 날 바라보다 떡볶이를 파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야, 무슨 성대모사 같은 건가?

“뭔데? 누가 한 말이야?”

“점순이라고 있어. 아주머니, 저희 떡볶이 2인분 주세요~”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공진하가 곧장 주문을 하며 돈을 내밀었다. 포장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 멀뚱히 서 있는데, 대뜸 대충 비닐에 감싼 접시에 떡볶이가 나왔다.

……이거 지금 여기서 먹는 건가? 의자도 없는데? 내 속을 꿰뚫기라도 한 듯 놈이 “먹자!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지~” 하고는 먼저 떡볶이를 집어 먹었다.

먹는 건 순식간이었다. 양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우리가 그렇게까지 대화가 많은 편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며 하나둘 먹다 보니 금방 바닥이 보였다.

약간 아쉬울 정도였지만 공진하는 다 먹자마자 망설임도 없이 날 이끌고 다시 거리로 나갔다. 공진하의 맑은 작별 인사가 대꾸 없이 허공만 맴돌고 사라졌다.

“이번엔 노래방 갈까?!”

“……너 숙소 갈 생각은 있긴 한 거지?”

“하하.”

내 말에 공진하가 웃고 만다. 왜 대꾸가 없어. 안 갈 거야? 기가 막혀 쳐다보니 능청스레 시선을 돌리며 “어, 선율아. 저거 봐! 고우혁 씨다!” 하고 무언가를 가리켰다.

커다란 옷 가게였다. 브랜드를 단 건물의 투명한 벽 사이로 고우혁의 화보가 나란히 비춰지고 있다. 무표정한 고우혁의 모습이 어색했다. 놈처럼 자주 웃는 사람도 없을 텐데. 저러고 있으니 딴 사람 같네.

“선율아, 선율아. 저기 가서 서 봐.”

대뜸 공진하가 핸드폰을 꺼내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가리키는 곳은 고우혁의 화보가 잘 보이는 투명한 창문 앞이었다. ……뭐야? 저긴 왜? 핸드폰은 왜 들어?

“뭐 하려고?”

“기념사진 찍게!”

“야!”

내가 왜!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입을 다물었다. ……괜히 신경 쓰이네 이거. 밖이라 그런지 조심하게 된다. 공진하는 그런 내 모습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안 찍을 거야?” 하고 속 긁는 소리를 했다. 대꾸할 가치도 없어서 무시하고 걸어가니 우는 척 소리를 내며 곧장 등 뒤로 따라붙었다.

“흑흑, 우리 선율이가 이제 형도 버리고 막 가는구나.”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니까 그렇지. 너 나 놀리냐?”

“아니? 너 말고 백이 놀릴 건데?”

“……?”

금세 우는 척을 멈춘 공진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하고는 다시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 의아한 시선에도 말없이 걸어가던 놈이 이번엔 극장을 가리킨다. 안 돼.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손을 자연스레 잡아 내리자 움찔 어깨를 떨더니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손안에 쥐인 손가락이 꼼지락거린다.

나는 그런 공진하를 뒤로한 채 슬쩍 뒤를 돌아봤다가 말았다. 내가 고우혁 화보 앞에서 기념사진 찍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그게 왜 내가 아니라 최백 놀림감이지? 아무리 봐도 날 놀리는 거 같은데. 그렇다고 공진하가 상황을 피하려고 말했다기엔…….

놈이라면 대놓고 놀리는 거라고 말하며 속 긁는 타입이다. 슬쩍 흘겨봤지만 어째 수줍은 얼굴을 한 놈이 잠시 머뭇거리다 슬쩍 날 바라봤다.

“우리 카페도 갔다 갈래?”

“오늘 안에 숙소 도착은 해?”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공진하는 능청을 떠는 대신 아쉬운 얼굴로 눈꼬리를 내렸다.

“안 돼?”

“…….”

왜 쓸데없이 목소리마저 애절한가. 불쌍한 강아지 같다. 이러면 결국 내가 내뱉을 답은 하나밖에 없다.

“돼.”

하…….

‘한적한 카페’란 단어가 없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카페에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사람이 많아서 불편할 거 같아 나온 첫 번째 카페를 빼고는 자리마저 없어 근처의 카페를 서너 개 지나치며 우리는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온 터라 결국 이리저리 헤맨 끝에 약간 인적이 드문 주택가의 골목까지 걸어갔다. 진짜 숙소 어떻게 돌아가지…….

약간 걱정스러웠지만 계속 길을 헤매 피곤해진 터라 말도 없이 곧장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도 넓고 꽤 드문드문 자리가 빈 카페는 2층에 지하까지 총 세 개의 층이나 사용하고 있는 거대한 곳이었다. 이 정도면 카페 건물이네. 카운터에서 멀리 떨어져 공진하와 나란히 메뉴판을 훑어봤다.

“나는 따뜻한 한라봉차.”

“……너, 차 종류라면 다 좋은 거야?”

“응.”

홍차 종류만 죽어라 파는 줄 알았는데…….

먼저 앞서가는 놈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다 금세 따라갔다. 드립 커피는 없으니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공진하는 나보다도 나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처럼 내게 묻지도 않곤 곧장 주문했다.

“안녕하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 한라봉차 하나 주세요.”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따뜻한 한라봉차 한 잔 맞으신가요?”

음? 공진하의 뒤에 서서 놈이 주문하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윤하늘 목소리인데. 뭐지? 망상인가?

“네, 맞아요. 여기요.”

“네, 카드 결제 도와 드리겠습니다!”

웃는 얼굴. 올린 머리. 화장기 없는. 너. 맞다. 망상이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목소리가 맞았다. 나는 불에라도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윤하늘?”

“네? 어…….”

날 보고는 흠칫하는 모습에 곧장 마스크며 모자를 벗을 뻔했다. 아, 큰일 날 뻔했네. 슬쩍 주변을 둘러보며 마스크를 벗고는 살짝 모자를 올렸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하늘이가 눈을 맞추곤 깜빡이다 점점 입을 벌렸다.

“저예요, 하늘 씨.”

“어어, 선율, 헉!”

깜짝 놀라 인사하려던 하늘이가 내 이름을 말하려다 말고 양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미친. 귀엽다. 나한테 폐라도 끼칠까 조심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자 하늘이가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따라 웃는다.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는 거예요?”

“네. 아, 카드 여기요! 제가 살게요.”

사긴 뭘 사. 돌려주려는 카드를 다시 윤하늘 쪽으로 밀었다.

“그러지 마요. 월세도 내고 생활비 쓰기 힘들잖아요.”

“어어, 저 그런 말도 했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 말에 어깨를 흠칫할 뻔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생에선 자취한다고 말 안 했던가?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네. 뭐, 흘리듯이.”

“아아. 에이, 그래도 커피 정도는 살 수 있어요.”

“그럼 나중에 스터디 때 사 줘요. 지금은 일행도 있고.”

언제 뒤로 갔는지 공진하가 내 뒤에 서 있었다. 처음 주문할 때는 반대였던 거 같은데. 말없이 멀뚱히 서 있는 놈을 툭 치며 말하자 윤하늘이 잊고 있었다는 양 화들짝 놀라며 뒤늦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헉, 맞다! 안녕하세요! 윤하늘이라고 합니다.”

뭐. 굳이 인사할 필요는 없긴 할 거 같은데……. 아니지, 앞으로 연예계 진출하고 활동할 생각 하면 지금 안면을 트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공진하는 이래저래 재능도 많고…….

그런데 얘 왜 대꾸를 안 해? 어느새 두어 걸음 물러선 공진하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와 윤하늘을 바라보며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뜻 모를 시선을 하곤 관찰이라도 하듯 지켜보다 천천히 입을 가렸던 손을 내리며 의식적으로 지은 미소를 띠곤 윤하늘을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선율이랑 같은 그룹의 공진하라고 해요.”

“네! 저는 같이 스터디하고 있어요.”

“……스터디요? 고우혁 씨랑 하는?”

“네! 부족하지만 같이 하고 있어요.”

……왜 추궁하는 거 같지. 저 멀리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하늘이를 돌아봤다. 아직 결제도 안 하고 이러고 있다.

“하늘아, 아니. 하늘 씨, 결제요.”

아, 씨. 실수했다. 공진하의 시선이 따갑다. 윤하늘은 자길 ‘하늘아’ 하고 격식도 없이 불렀는데 신경은 쥐뿔도 안 쓰고 깜빡했다고 화들짝 놀라며 급히 결제에 들어갔다.

……진짜 남자는커녕 친구로도 안 보이는 모양이다. 친구 말고 그냥 아는 사람 대하듯 하는 게 약간 속상하다. 내가 속상하다고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자리 앉으셔서 기다리시면 돼요!”

“직접 가져다주게요? 여기 진동벨 없어요?”

“선율 씨 거는 제가 배달할 거예요!”

카드를 내밀며 호기롭게 외치는 모습이 귀여워 알았다며 웃자 손을 흔든다. 한 박자 느리게 공진하가 카운터에서 벗어나 나를 따라 빈자리로 걸음을 옮긴다. 나는 가장 구석에 위치한 자리로 갔다. 마침 다락 같은 장소가 있었다.

“자.”

자리에 앉아 카드를 내밀었다. 공진하는 그걸 받을 생각도 안 하고 묘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다가, 한참 뒤늦게 그 카드를 받으며 품속에 집어넣었다.

“친해?”

주어도 없지만 누굴 말하는지는 뻔했다. 윤하늘도 잘 보이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아 대강 카운터 근처를 눈대중으로 잡다 고개를 끄덕였다. 윤하늘은 어떤지 몰라도, 나한테는.

“저번에 선연 씨한테 말했던 ‘지망생’분이 저분이구나?”

어딘가 떠보듯 하는 말에 눈썹을 올리며 공진하를 바라봤다. 뭘 묻고 싶은 거야? 퍼뜩 여자에게 스터디를 같이 하자고 했던 날의 대화가 떠올랐다.

‘시간 되시면 스터디하실 생각 없나 해서요.’

‘네에? 스터디요? 저랑 선율 씨랑요?’

‘아뇨. 고우혁 씨랑, 다른 한 분 더 있어요. 그분은 지망생이시고.’

지망생. 그렇게 표현했었구나. 맞는 말이긴 하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흐음, 하고 침음성을 낸다. 뭐야. 공진하가 턱을 괴곤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의미 모를 표정을 한 공진하는 제 생각 한 결 비추지 않는다.

뭐야. 어쩐지 불안해졌다. 저런 표정의 공진하는 언제나 불안하다. 과거, 놈이 툭툭 내뱉던 신기라도 있는 거 아닌가 의심했던 뼈 있는 말들이 떠올랐다. 언제나 그 말들은 저런 침묵 이후에 툭툭 내뱉어지곤 했었으니까. 슬쩍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 바닥을 내려다봤다.

“윤하늘. 이름 예쁘네.”

“……뭐. 그렇지.”

“너, 저 사람 좋아해?”

뭐? 대꾸도 못 하고 번쩍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어느새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공진하가 찰나의 무언가를 잡아채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날 쳐다봤다. 나는 마른침조차 쉽게 삼키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 놈을 바라봤다. 뭐, 라고 대꾸해야 하지? 뭘 알고 이러는 건가? 티가 나나? 내가 뭔가 달랐나?

“하늘아, 하고 부르길래.”

눈꼬리를 휘며 여상스럽게 내뱉는 소리에 한숨을 꾸역꾸역 삼켜 냈다. 어째 등골이 서늘하다. 뭐지 이 기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잖아. 내 전생 여친이라고 하면 공진하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그 꼴이 약간 궁금하긴 하지만…….

“잘못 부른 거야. 급해서. 바로 바꿔 불렀잖아.”

“흠~ 그렇구나. 윤하늘. 하늘 씨구나.”

“…….”

왜 이렇게 기분이 쎄하지? 공진하가 방긋 웃는데 어째 한겨울처럼 서늘하다. 에어컨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스터디에 굳이 선연 씨 넣으려고 한 이유가 있었네.”

“…….”

못 들은 척 슬그머니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저 새끼는 진짜 뭐지? 왜 이렇게 눈치가 빨라? 저 정도면 누가 말해 준 격 아닌가?

“즐거우려고 온 카페에서 최종 보스를 만났네~”

“……무슨 소리야?”

“쪼렙은 슬프다는 소리야.”

귀신같은 눈치와 알 수 없는 개소리가 합쳐지니 어째 모든 게 그럴듯하게 들렸다. 등골이 서늘하다. 무슨 말이지? 최종 보스? 하늘이가 최종 보스라는 건가? 왜? 그때였다. 슬그머니 최종 보스 윤하늘이 음료를 들고 나타났다.

“잠깐 실례할게요~ 한라봉차랑, 아메리카노!”

“감사합니다.”

친절하게 각자 테이블 앞까지 내려다 준 하늘이의 모습이 공진하가 아까까지 차게 웃던 사람이라곤 생각도 안 날 정도로 방긋 웃으며 감사 인사를 내뱉었다. 진짜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떨떠름하게 그 꼴을 바라보다 뒤늦게 윤하늘을 바라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하늘 씨.”

“뭘요. 그리고 이건 축하 선물이에요.”

“네?”

축하 선물이라며 내민 건 치즈케이크 한 조각이었다. 무슨 선물?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자 박수를 두어 번 치며 웃는다.

“오디션 합격 축하 선물이요! 너무 늦어서 이미 촬영도 들어갔겠지만요.”

“늦기는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약간 감동적이었다. 생각도 못 했는데. 함박웃음을 짓자 윤하늘이 따라서 맑게 웃는다. 선물이라고 줬지만 같이 먹으면 안 되려나? 아르바이트 중에는 카운터를 벗어나기도 힘들겠지? 나도 음료라도 사고 싶었지만 윤하늘이 일하는 카페에서 윤하늘이 만든 음료를 윤하늘에게 주기가 조금 괴상했다.

대신 다음을 기약하며 “다음 스터디 때는 제가 하늘 씨한테 음료 살게요” 하고 말하자 하늘이가 선물인데 무슨 말이냐며 손을 내저었다. 그냥 이럴 때는 모른 척 좋다고 해도 괜찮은데. 내가 사고 싶어서 그런다며 완강하게 굴자 잠시 난감하게 눈을 굴리던 하늘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선율 씨… 그거 대신에 다른 거 부탁해도 돼요?”

“네.”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 의아했다. 부탁? 윤하늘이? 잘 하지도 않았던 부탁을 하는 게 이상했지만 뭔가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입을 다물어 버릴까 싶어 아무렇지 않은 척 구니 윤하늘이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가 말을 꺼냈다.

“고민, 상담이요.”

고민 상담. 나는 그제야 윤하늘의 어두운 안색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랐다. 아까까지 밝은 얼굴이었는데, 무슨 깊은 고민이라도 있었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 말하자 윤하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날 빤히 바라보다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선율 씨. 나중에 따로 메신저 보낼게요. 아! 부담스러우실까요? 그럼 괜찮아요!”

“아뇨. 부담은요. 핸드폰 번호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네?”

씨발, 꼬시는 거로 보였나?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폈다가 공진하의 싸늘한 시선에 몸을 움찔 떨며 변명하듯 윤하늘을 돌아봤다.

“아뇨. 별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번호 알아 두면 편할 거 같아서요. 고민 상담인데 메신저로 하긴 좀 그렇고,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

공진하가 말없이 팔짱을 꼈다. 어디까지 말하나 보겠다는 행동 같아 입을 다물었다. 어째 말하면 말할수록 딴 맘 품은 거 같지? 나중에 이걸 공진하한테 어떻게 말하나 싶어 황망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나도 연애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물론 지금으로선 딱히 윤하늘한테 작업을 건다거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지금도 참 윤하늘은 좋은 사람이고,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지만. 나는, 그래. 두려웠다. 무서워.

결국 날 두고 돌아선 네가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너는 아닌 건 아닌 사람이고, 자기 자신한테도 냉정히 구는 사람이고. 나는 한 번 그렇게 네 안에서 끝났다.

이번엔 다를 거라며 시작했다가 또다시 그렇게 끝나면 나는 어떻게 해. 그래서 다가가기도, 정을 붙이기도 쉽지 않았다. 그 좋은 기억들의 끝자락에 내가 어떻게 주저앉았는지가 너무 생생해서.

그래도 난 아직 네가,

“뭔지도 안 묻고 괜찮아요?”

“괜찮아요.”

웅얼거리던 윤하늘이 맑게 웃는다.

“하하. 선율 씨 정말 좋은 사람이네요. 이렇게까지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아, 연락처는 따로 개인 메신저로 보낼게요! 헉, 손님! 선율 씨, 다음에 봐요!”

“……네.”

내게 인사한 하늘이가 방긋 웃는 얼굴로 공진하에게도 고개를 꾸벅이더니 급히 카운터로 되돌아갔다. 뒤돌아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네 뒷모습을 본 적이 많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참 가녀리고, 얇고, 연약해 보여서. 그러다 아까 어두운 기색의 얼굴이 떠올라서. 나는 그러다 문득 과거의 네가 떠오른다.

‘그러지 마, 선율아.’

힘든 걸 티도 잘 내지 않던 너에게, 내가 어떤 걸 내던진 걸까.

‘미안해.’

그 속삭이던 말의 시작조차 내가 서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늘아. 내가 널 힘들게 했어? 그래서 도망친 거야?

속이 뒤엉켰다. 나는 말없이 새카만 음료를 내려다봤다. 이제 전부 모를 일이다. 이제 전부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이 되었다. 한 번쯤 물어볼걸. 한 번쯤 듬직하게 굴어 볼걸. 한 번쯤은, 깊게 생각해 볼걸. 매번 다 내던지고 나서야 깨닫는구나.

“와, 이거 진짜 짜증 나는구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공진하는 그 뜨거운 차를 벌컥벌컥 마셔 대다 반쯤 내뱉었다. ……바보야? 입 안을 다 덴 공진하가 신경질을 내며 허락도 없이 내 음료를 마셨다. 이해는 한다. 왜 이 더운 날에 따뜻한 음료를 시켜선 원 샷을 하려고 해?

“너 저 사람이랑 둘이서만 볼 생각 절대 하지 마!”

“뭐? 왜. 네가 뭔 상관이야?”

기가 막혀서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내며 툭 내뱉었다. 내뱉고 나서 약간 후회하는데, 공진하는 상처받은 걸 숨기는 대신 고개를 번쩍 들어 날 바라보며 기함했다.

“뭐? 뭐라고? 나 울어도 돼?”

“……?”

아니, 뭐 그런 걸 물어봐. 울어도 된다고 하면 울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뭐라 대꾸하는 대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거 봐, 이거 봐. 절대 안 돼. 절대!”

“이미 약속했는데 뭐 어쩌라고.”

“나도 데려가!”

코웃음을 쳤다. 널 왜 데려가. 요즘 최백이랑 잘 놀더니 최백 신경질이라도 옮겨 온 건가. 공진하는 땡깡인지 승질인지 모를 것을 피며 팔을 뻗어 내 팔을 잡아당겼다.

“어? 응? 알았지? 나 꼭 데려가야 해?”

“너 연이 씨 볼 때는 안 이러지 않았어?”

“무슨 헛소리야! 내가 백이인 줄 알아? 척 봐도 이쪽이 보스몹인데!”

아까부터 헛소리는 네가 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나는 뭐라 답하는 대신 “입 안은 괜찮아?” 하고 뒤늦은 소리를 했다. 공진하는 내가 말을 돌리는 모습에 기가 막혀 하며 입을 쩍 벌리더니 “남이사 괜찮든 말든!” 하고 짜증을 부렸다. 아까 내가 네가 뭔 상관이냐며 쏘아붙인 것에 대한 보복이 틀림없었다.

화도 안 나서 평온한 얼굴로 “한 모금 더 마실래?” 하고 얼음이 동동 띄워진 아메리카노를 주자 정색하며 내 팔을 잡아당기던 손을 거두고는 필요 없다며 신경질을 부렸다. 됐음 말고. 손을 갈무리하는데 문득 공진하가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속삭였다.

“민수랑 연이는 이뤄지면 안 된다고…….”

민수. 연이. 나도 모르게 설핏 웃음이 나왔다. 내 첫 드라마 단역의 작중 이름이 민수였다. 민수 역은 동급생인 연이 역을 너무 좋아해서, 연이의 시체를 숨기고 경찰에게 거짓된 진술을 하고 만다.

나는 표정을 감추려 잔을 들어 음료를 마셨다. 눈치도 빠르지. 당시의 감정 신이 누구를 그리며 했는지 다 알아차린 말 아닌가. 공진하의 웅얼거림은 사라졌지만 그 단어 하나하나는 허공을 맴돌다 귓속을 파고들었다. 민수랑 연이는 이뤄지면 안 돼.

맞아. 안 그럴 거야. 남자애를 위해서라도. 여자애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날 위해서.

“진~짜 싫네, 이 기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공진하가 투덜거리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과거는 다 과거에 두고 왔다. 눈치 빠른 공진하는 바보같이 쓸데없는 걱정을 이어 간다. 그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아 아무런 말도 없이 그 투덜거림을 들어 줬다.

* * *

지금 들어간 드라마에서 OST 이야기가 나온 건 리딩 날부터였다. 따로 매니저를 부른 스태프진이 홍보도 할 겸 해서 엘앤엘 멤버 중 일부가 OST를 불러 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밝은 분위기의 곡으로 내가 나올 때나 즐거운 분위기에서 나올 예정이라고 했는데, 흠. 내 작중 역할과 꽤 어울리는 곡을 이것저것 생각한 모양이었다. 워낙 해맑은 캐릭터니 나올 때마다 분위기 전환도 되는 편이니까.

“그래서 난, 기운이가 했으면 좋겠다!”

“제가요?”

“쟤가요?”

신기운과 하대진의 입에서 동시에 말이 튀어나왔다. 발음이 비슷해서 서로를 바라본 둘의 표정이 극적이다. 무덤덤한 신기운과 달리 하대진은 경악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너 대체 매니저 형에게 무슨 짓을 했냐며 하대진이 닦달했지만 신기운은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속 터지는 소리를 했다. 오히려 신기운보다도 매니저 형이 안절부절못하며 내가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라며 소란을 피웠다.

“아니, 이건 솔직히 백이 형이 해야죠.”

그 개판을 지켜보던 강이헌이 손을 내저으며 반론했다. 최백이? 강이헌의 맑은 얼굴에 나는 뭐라 하는 대신 최백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아니나 다를까 최백은 입을 꾹 다문 채 강이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쟤가 할 리 없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매니저 형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백이가 할 리가 없잖아.”

“……내가 뭐?”

그 뻔뻔한 대꾸에 매니저가 뒷목을 잡으며 버럭 외쳤다. 목에 핏대가 선 게 선명하게 보였다.

“너 저번 그 듀엣도 결국 진하가 대신했잖아!”

“아~ 최백 어린이 때문에 내가 고생했었지~! 근데 형, 이번엔 내가 하고 싶은데!”

최백의 성질을 돋우기라도 할 것처럼 어깨며 목을 돌리던 공진하가 눈을 반짝이며 매니저를 바라봤다. 며칠 전 우연히 하늘이를 만나고 짜증을 있는 대로 내던 놈과는 차이가 크다. 결국 그날 단단히 삐친 공진하를 풀어 주기 위해 노래방까지 갔어야 했다. 나중에 하대진이 어떻게 날 두고 노냐며 난입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 좁은 방 안에 갇혀 있었는지 모른다.

“너는 필수 참여야. 제작사 측에서 넌 꼭 끼워 달랬어. 우리 진하 인기 많다?”

“헉, 진짜?”

흐뭇하게 웃는 매니저와 깜짝 놀라는 공진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해가 갔다. 워낙 목소리가 미성이라 놈의 목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엘앤엘의 고음은 대개 최백이었지만 엘앤엘을 대표하는 목소리는 공진하였다.

흠. 맞다. 저번 생에 윤하늘과 사귈 때 걔한테서 들었던 말이다. 윤하늘은 나와 사귀면서 많은 것들을 조심했지만 그만큼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보곤 했다. 나 대신 먼저 엘앤엘 기사를 알아보고, 팬들의 반응을 알아차리곤 했다. 내가 윤하늘을 따라 딱히 좋아하지도 않던 영화를 나란히 보던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공진하는 신난 얼굴로 날 돌아보며 방긋방긋 미소 지었다. 그 기분 좋다는 얼굴에 하대진이 “나도! 나도!” 했지만 매니저 형은 흐뭇하게 웃던 얼굴을 싹 지우고는 정색하며 하대진을 바라봤다.

“안 돼.”

“아, 왜요!”

“너 서브 랩퍼거든? 네가 무슨 3분 30초짜리 발라드 노래를 해!”

웃음을 꾸역꾸역 참았다. 매니저 형은 하대진을 막냇동생 대하듯 하곤 했다. 어째 가족 시트콤이라도 보는 기분이다. 매니저 형의 타박에 하대진이 우물쭈물거리면서도 반박하자 매니저 형이 눈을 서늘하게 빛냈다.

“아, 그래도,”

“너 요즘 바쁘지 않냐? 왜 바쁜지 내가 여기서 한번 입이라도 털어 봐?”

“…….”

뭐야? 그 말 하나에 하대진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하대진은 아쉽다는 듯 날 힐끔힐끔 보곤 신기운을 노려보긴 했지만, 더 이상 그 건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는 않았다. 요즘 바쁘다고? 퍼뜩 달력을 바라봤다. 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온다. 아직 날은 덥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훅 겨울이 다가와 있을 터였다.

아. 나는 입술을 툭 내민 하대진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그렇구나. 벌써 그 시기가 왔어. 첫 번째 생의 어느 날, 하대진의 첫 공식 안무가 탄생됐다. 댄서 팀과 교류하며 조금씩 제가 만든 춤을 넣곤 했지만 어느 날 중대 발표라도 하듯 긴장한 하대진이 다음 컴백 때 할 신곡 안무를 보여 줬다.

몇 달이나 걸렸다는 안무는 노래와 기가 막히게 어울렸고, 그건 눈에 띄는 신인이었던 엘앤엘이 점점 가속하며 수많은 대중에게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엘앤엘은 스타가 되어 갔다. 당시의 나는 엘앤엘이 빛나면 빛날수록 새카만 구멍으로 눈에 띄었지만, 지금은 어떨까? 이번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할 거야.”

최백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가 놈에게로 돌아갔다. 최백은 시큰둥한 얼굴로 핸드폰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그 태연한 모습에 나는 문득 내가 뭘 잘못 들었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강이헌이 고개를 기울여 최백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뭐라고?”

떨떠름한 얼굴의 매니저 형이 되물었다. 최백은 툭, 툭 일정한 소리를 내던 것을 멈추더니 시선만 매니저에게 옮겨 대꾸했다.

“그 OST 한다고.”

“……? 나 더위 먹었냐?”

매니저 형이 심각한 얼굴로 최백에게 물었다. 최백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형 더위 먹은 걸 왜 나한테 물어?” 하고 반문했지만 이럴 때 금방금방 맞받아치는 공진하마저 말없이 침묵하며 최백을 살폈다.

“백 형, 아파요?”

“형, 더위 먹은 거 아니야?”

“응급실 갈래?”

“…….”

하대진의 말에 뭐라 신경질을 내려던 최백이 연달아 이어진 강이헌과 공진하의 말에 조용히 침묵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 모양이다. 정답인지, 말없이 주변을 둘러본 최백이 대뜸 공진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했다.”

“……뭐, 뭐야? 왜 이래? 너 미쳤어?”

공진하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쳐 내자 자연스레 손을 매니저 형에게로 옮긴다.

“미안.”

“……너 미안한 건 알아? 이 새끼야,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촬영을,”

최백이 환하게 웃었다. 매니저 형의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멈췄다. 너무 오랜 시간 최백과 함께한 탓이다.

“왜 그래? 계속해.”

“흠, 흠! 아니 뭐, 미안하다면 그걸로 됐고…….”

“계속하라니까.”

“…….”

다정한 최백은 언제나 소름 돋는다. 매니저 형은 매번 짜증이 가득 차면 환하게 웃는 최백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양, 깔끔하게 놈을 등지고 서선 나를 돌아봤다.

“그럼 선율아, 이렇게 셋이 해서 OST 하는 걸로 말할게.”

“……신기운 의사는요?”

왜 쟤는 안 물어봐. 매니저 형은 별걸 다 물어본다는 양 손을 휘저으며 “기운이는 당연히 좋다고 대꾸할 거니까 그렇지” 하고 말했다. 왜 이렇게 뉘앙스가 묘하지? 신기운은 말없이 매니저를 바라보다 한 박자 늦게 날 보고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거봐!”

“…….”

뭔가 이상하긴 한데, 도통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네.

* * *

OST에 참여하지 못한 하대진은 꽤 오랫동안 그에 대해 투덜거렸다. 자기도 한두 소절 정도는 잘할 수 있다며 매니저 다 들으란 식으로 투덜거렸지만 매니저 형은 그에 대해 일관된 행동을 취했다.

개무시. 그냥 무시도 아니고 말 그대로 개무시하며 놈이 없기라도 한 양 다른 것에 대해 말하거나 보란 듯이 OST에 대해 말하곤 했다. 하대진은 처음엔 펄펄 뛰기만 하더니 나중 가서는 뭔가를 깊게 생각하기라도 하는 눈치였다. 그게 이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우리 선율이 형 잘 부탁드려요! 오늘은 선율 타임>

“주선율! ……형!”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한 박자 느리게 형 소리를 붙인 하대진의 뒤로 보이는 천막에 할 말을 잃었다. 하대진의 등 뒤로 웬 거대한 밥차가 서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빛이 얼마나 환한지 난 처음에 보고 일순 하대진 등 뒤에서 후광이라도 비추는 줄 알았다.

“이야~ 멤버들끼리 사이 되게 좋네! 선율 씨, 잘 먹을게~”

“아…, 네.”

“잘 먹을게요, 선율 씨~”

“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인사를 받으며 내 쪽으로 뛰어오는 하대진을 바라봤다. 뭘 생각한단 건 알긴 했는데. 그게, 저거였어? 밥차? 하대진이 오늘 드라마 촬영장에 밥차를 끌고 나타났다.

“야! 하대진! 너! ……너 이런 걸 나한테 말도 안 해 주면 어떻게 해? 너, 서포터 전문 업체는 어떻게 알았어?”

심지어 매니저 형도 몰랐던 일인가 보다. 하대진은 으스대는 표정을 지으며 지인들한테 물어보면 다 알 수 있다고 대꾸했다. 기가 막힌 얼굴의 매니저는 하대진에게 뭐라 한 소리를 하려다 다가오는 스태프들의 모습에 얼굴을 싹 바꾸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의 매니저가 저희 막내가 사람을 잘 챙긴다며 어서 식사하시라는 말과 함께 친절히 그들을 안내했다.

“나 잘했지.”

그 기분 좋게 웃는 모습에 잠시 말을 잃었다. 밥차 위에 떡하니 붙은 문구가 어색했다. 두 번째 삶에서 드라마를 몇 번 하긴 했지만 이렇게 서포터를 받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 건 이것저것 봤었지만…….

“……밥차 할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내가 노래는 못 해도 뒷바라지 하나는 자신 있거든! 내가 우리 동생들 다~ 업어 키웠어. 야, 이러고 있지 말고 너도 가서 먹어.”

하대진이 날 밥차 쪽으로 밀며 요즘 밥은 챙겨 먹냐는 둥, 잘 안 먹다간 큰일 난다는 둥 하며 잔소리를 이어 갔다. 노래? 그 단어에 나는 정황을 대강 알아차리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OST에 그렇게 참여하고 싶어 하더니, 그걸 못 해서 밥차를 끌고 나타난 건가?

“하대진, 너…….”

우웅, 우웅!

그때였다. 갑자기 핸드폰 진동이 연이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인가?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상대를 확인하자 나보다도 하대진이 먼저 펄쩍 뛰었다.

“고, 고, 고!”

“뭐야?”

고우혁이었다. 웬 전화야? 떨떠름하게 화면을 바라보던 도중 전화가 뚝 끊겼다. 부재중이 떠오르는 화면에 하대진이 기겁하며 내 팔을 쳐 댔다.

“아, 안 받으면 어떻게 해!”

“끊긴 거야.”

“일부러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

“…….”

얜 대체 고우혁 어디가 좋아서 저렇게 팬이지? 역시 얼굴인가? 고우혁의 그 훤칠한 얼굴을 떠올리며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대뜸 놈이 내 상상 속에서 튀어나온 양 환한 얼굴을 하고 내게로 다가왔다.

아니, 가만… 이게 뭐야? 하대진의 새하얗게 질린 안색 뒤로 고우혁이 웃는 얼굴을 한 채 성큼성큼 다가온다. 뭐야, 전화한 게 근처에 놀러 와서 전화했던 건가? 제 뒤에서 본인이 오고 있음은 꿈에도 모르는 하대진이 연달아 닦달했다.

“어? 다시 한번 전화해 봐!”

“안녕하세요.”

“으아아아!”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하대진이 괴성을 지르며 순식간에 내 등 뒤로 달라붙었다. 문득 저번에 참여했던 예능이 떠올랐다. 그 공포 특집, 하대진이 했어야 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거 방영됐겠네. 평이 어땠으려나. 기사라도 찾아볼까 생각하다 고우혁의 웃는 얼굴에 뒤늦게 입을 열었다.

“왜 여기에 있어요?”

“근처에서 촬영이 있어서요.”

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한 특별 기획이 아닌 이상 촬영장은 비슷비슷했다. 소음이나 각종 문제로 아예 근처에선 하진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구경 올 정도의 거리는 됐으니까. 고우혁의 멀끔한 옷차림을 보며 나는 그 촬영이 광고일지 영화일지 고심하다 말았다.

어째 등 뒤가 조용하다.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내 뒤로 숨었던 하대진이 멍하니 고우혁을 바라보다 뒤늦게 “안녕하세요!” 하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아… 시선이 느껴진다……. 고우혁의 등장에 하대진의 괴성까지. 시선이 안 모일 이유가 없을 정도다.

고우혁은 다정하게 웃으며 재차 인사를 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고우혁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연예계 종사자가 있을지는 의문인데. 하대진이 버벅거리며 제 소개도 못 하는 모습에 옆구리를 찔렀다.

“아, 알아요. 하대진 씨, 맞으시죠?”

“허억! 저, 절 아세요?”

기가 막힌 대꾸다. 어이가 없어 미간을 찌푸리며 면박을 주듯 하대진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전에 우리 안무 구경하러 왔었잖아. 그새 잊었어?”

“나 말고 저쪽이 잊었을 줄 알았지!”

하대진이 작게 소곤거리면서 고우혁의 눈치를 힐끔힐끔 봤다. 다 들렸을 거 같은데. 너무 가까워서. 고우혁은 뭐라 대꾸하는 대신 매너 좋게 못 들은 척하며 제 등 뒤를 바라보았다.

천막 아래서 밥을 먹다 말고 이쪽을 넋 놓고 보고 있던 사람들이 기침을 해 대며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고우혁 팬이 많구나.

“밥차네요. 대진 씨가 준비하신 거예요?”

“예? 예, 예! 혀, 형이 밥 못 먹고 일할까 봐…….”

너 이 새끼, 언제부터 날 형이라고 불렀어. 고우혁 앞이라고 내숭 떠는 하대진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퍼뜩 주희민이 떠올랐다. 아버지 앞에만 서면 우물쭈물거리며 내숭을 떨었는데, 하대진은 저 멀끔하게 생긴 모태 솔로를 존경하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하대진이 연기를 할 것도 아니고. 딱히 존경할 만한 건 없는데. 그냥 평범한 연기 변태였다. 코웃음을 애써 누르며 고우혁을 평가하는데, 놈이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양 웃는 얼굴로 내 쪽을 돌아봤다.

“좋은 동생이네요.”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좋은 동생. 새빨간 얼굴로 시선을 내린 하대진을 힐끔 바라봤다. 동생. 그건 그냥 단어일 뿐인데.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눈이 마주친 하대진이 얼른 대답하라며 입을 벙긋거리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얘 착한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동생 말고 엄마일걸요. 형이라고도 안 부르는데.”

“야! 헉!”

“하하하.”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의외였다. 한 번도 고우혁과 하대진, 셋이서 만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꽤나 괜찮았다. 종종 이렇게 보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고우혁이랑 봐서 뭘 하려고? 쓸데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우혁하고 예상치 못하게 부딪히는 건 이런 것으로 족하다. 연기 선배. 대배우. 그 정도로 충분하다. 그 이상은.

“이야,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

“아.”

그때였다. 저 멀리서 익숙한 남자 하나가 고우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왔다. 지금 들어간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우주강이었다. 매번 쉬는 시간마다 우주강을 보호하듯 주변을 맴돌고 있던 그의 여러 스태프들이 창백한 안색으로 어쩔 줄 몰라 하다 우주강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뭐지? 다들 안색이 영 좋지 않다. 가지 말라고 잡고 잡았지만 우주강이 다 뿌리치고 온 것처럼. 아는 사이인가 싶어 고우혁을 보니 고우혁은 언제나처럼 깔끔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강이구나. 정말 오랜만이네. 이번 드라마 같이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같이’ 한다고? 재밌는 말이네. 근데 너 누구 뒤 쫓아다니는 인상은 아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니 기분 이상하다.”

우주강이 웃는 얼굴을 마주하며 대꾸했지만 어째 기분이 싸했다. 영 떨떠름한 기분이 이어진다. 뭐지, 이 기분? 둘 다 웃고 있는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이상하지? 그때였다. 하대진이 뒤에서 “레, 레전,” 하고 웅얼거렸다. 얘는 이 상황에 뭔 소리야?

“쫓아다닐 거면 번지수 틀리지 않았어?”

“하하.”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고우혁은 익숙하다는 듯 웃었다. 진짜 웃겨서 웃는다기보다는 그냥 관례처럼 웃는 것 같았다.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스태프 중 하나가 창백한 안색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스태프가 놈을 채 낚아채기도 전에 우주강이 생긋 맑게 웃었다.

“나 정도쯤 돼야 말이 돼, 읍!”

“안녕하세요, 고우혁 씨.”

우주강의 입을 틀어막은 놈의 매니저가 깊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고우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인사했다. 우주강의 매니저는 나와 하대진에게도 밥 잘 먹겠다는 말과 함께 우주강을 끌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질질 끌려가는 우주강을 주변 사람들이 순식간에 에워쌌다.

“…….”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하질 않지…….”

이게 무슨 일인지에 대해 판단하고 있을 때, 고우혁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보다. 역시. 어째 우주강이 익숙하다 싶었는데, 하늘이와 봤던 각종 영화에서 나오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묘하게 익숙했었다. 고우혁쯤 되는 스타들은 내가 알고 싶지 않더라도 사방에서 떠들어 대니 그 이름을 잊기가 힘겨울 정도니까. 내 시선을 눈치챈 듯, 답지 않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고우혁이 날 보며 빙긋 웃었다.

“아. 아역 배우 때부터 같이 일하던 친구예요.”

친구. 키가 불쑥 튀어나온 멀대 같은 우주강이 제 스태프진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바라보다 날 보며 웃고 있는 고우혁을 재차 돌아봤다. 누가 봐도 친구 같진 않았다.

게다가 방금 정신없어서 넘겼는데, 이상한 말 하지 않았어? 고우혁이 쫓아다닐 정도면 자기 급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는데. 어디서 최백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연예계 새끼들 다 또라이뿐이야.’

구구절절 맞는 소리다. 나는 말없이 침묵하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역 배우 출신이었어요?”

“헉, 야!”

하대진이 내숭을 떨던 것도 잊고 급하게 내 어깨를 잡았다. 뭐. 하대진이 힐끔힐끔 고우혁의 눈치를 보는데도 고우혁은 멀끔하게 웃으며 그렇다고 대꾸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하대진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간도 참 작다. 고우혁은 쉽게 화를 내지도,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애가 넘쳐나지도 않았다. 이런 말에는 시큰둥하게 넘길 게 뻔했다. 실제로 놈이 아역 배우 출신인 줄은 쥐뿔도 몰랐었고.

“꽤 유명했는데. 몰랐어요? 주강이도 처음 봐요?”

“아마도요.”

이름이나 얼굴이 굉장히 익숙하긴 하지만 딱히 작품은 떠오르지 않아서 대충 대꾸했다. 무슨 작품으로 알게 됐냐 물으면 말하기도 애매했다.

그나저나 아역 배우 출신이라면 고우혁의 경력은 몇 년이나 되는 거지? 언제 대박이 났는지는 몰라도 어지간한 배우들은 그냥 넘을 만한 경력을 갖고 있을 게 뻔했다.

윤하늘이 처음에 보고 그렇게 대경하며 팬이라고 말했던 이유가 마냥 놈이 인기 많은 스타이기 이전에 그 길고 긴 경력 탓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우혁은 빤히 날 바라보다 웃는 얼굴로 그러냐며 대강 넘겼다. 대수롭지 않게 넘긴 놈은 곧장 다른 주제의 말을 꺼냈다.

“선율 씨, 사극 좋아해요?”

뜬금없다.

“그냥 그래요.”

“그래요? 대진 씨는요?”

“조, 좋아합니다!”

얜 왜 이렇게 각이 잡혔지? 군대인 줄 알았다. 예전에 하대진이 군대 프로그램이라도 한 적이 있었나 머리를 굴릴 때 고우혁이 “아, 잘됐네요. 그럼 영화 보러 올래요?” 하고 다정한 소리를 냈다. 하대진이 눈을 끔뻑이며 되묻자 고우혁이 날 돌아보며 눈꼬리를 접었다.

“이번에 새로 영화 개봉하거든요. 곧 시사회인데, 시간 괜찮으면 초대하고 싶어서요.”

“흐억! 시간 넘쳐요! 가고 싶습니다!”

“……대체 하루에 몇 시간이나 촬영하는 거예요?”

최근에 찍던 거 사극 아니었던 거 같은데. 대체 언제 찍은 거야? 하루 종일 촬영하고, 영상 보고, 공부하고. 인간인가? 내 기가 막힌 얼굴에 고우혁이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었다.

“한참 전에 찍었던 거예요. 계속 편집하고 다듬다가 타이밍 안 맞아서 재고 있었는데, 이번에 나오기로 해서요. 영화 예고편도 다 떴는데, 몰라주니 약간 섭섭하네요. 전 선율 씨 방송 거의 다 아는데.”

“…….”

눈을 굴렸다. 맞는 말이다. 놈은 나보다도 내 영상을 지극정성으로 찾아봤다. 내 ‘팬’이라던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KCON도 나보다도 먼저 찾아서 링크를 보내 주던 게 고우혁이었다.

시선을 내리자 고우혁이 웃는 소리를 낸다. 나보다도 하대진이 나서 아니라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애가 약간 무뚝뚝해서 그렇지 다 찾아보고 신경 쓴다는 하대진의 말이 어째 TV 속 가족의 비호같아서 기분이 묘해졌다. 얘는 진짜 날 몇 살로 보는 거지.

“알아요, 대진 씨. 장난이에요. 시간 되시면 두 분이서 꼭 같이 오세요. 매니저분 통해서 따로 연락도 드릴게요.”

“네, 네, 네! 꼭 가겠습니다!”

환한 얼굴의 하대진이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옆구리를 찔러 댔다. 난 모른 척 저 멀리로 시선을 돌렸다가 우주강의 이글거리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아닌 고우혁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얼굴에 여러 가지 단어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역 배우. 오랜만. 친구. 스타. 인기. 드문드문 이어지던 생각은 최백의 시큰둥한 목소리로 막을 내린다.

‘연예계 새끼들 다 또라이뿐이야.’

생각을 멈췄다. 그래, 강이헌이 이상한 거다. 강이헌 같은 사람이 두어 명만 더 많았어도 여기도 꽤 괜찮았을 텐데.

신난 얼굴의 하대진이 약간 긴장이 풀린 얼굴로 고우혁과 몇 번 대화를 나누다 매니저 형의 부름에 자리를 비켰다. 가기 전에 날 보며 엄한 표정으로 고우혁을 곁눈질하며 너무 막 대하지 말라는 양 말 없는 잔소리를 했지만 그냥 모른 체했다. 고우혁도 신경 안 쓰는데 뭐.

사실 놈이 몰라서 그렇지 여태까지의 내가 더 진상 같았다. 닦달하듯 재능에 대해 말하기도 했고, 놈의 빈말인지 뭔지 모를 확신들을 받으려 제 발로 찾아가기도 했었다.

하대진이 자리를 떠나자 고우혁이 약간 어두운 안색으로 말을 꺼냈다.

“저, 선율 씨. 사실 오늘 온 건 초대도 있고, 부탁할 것도 있어서요.”

“부탁이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나? 의아한 얼굴을 하자 고우혁이 정말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내렸다. 그리고 고우혁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긴 한데, 어쩌면 한 번쯤은 나올 법한 말이었다.

고우혁의 작은 목소리가 멀리 퍼지지 않고 이어졌다. 고우혁의 불쌍한 표정과, 그 말들과, 뒤에 이어질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하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늘 씨는 괜찮대요?”

“아. 음. 아직 안 물어봤어요. 선율 씨한테 묻고 나서 하늘 씨한테도 따로 연락하려고요.”

일순 눈썹이 꿈틀거렸다. 따로 연락한다고. 번호 아는 사이인가 싶어 눈을 좁히려다 말았다. 어쩐지 내가 구질구질한 것 같다. 지금은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닌데. 실제로 이젠 나도 번호 아는 사이는 되지 않던가.

아직 윤하늘과 고우혁 사이에는 특별한 접점이 없는 건 나도 알았다. 아니…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촬영하느라 바쁜 고우혁이나, 먹고살기 급급한 윤하늘이 내가 모르는 사이 따로 만나고 관계를 이어 갔다고 하기엔 약간 빡빡한 감이 있었다.

심지어 단체 메신저 방은 꾸준히 연락이 지속되고 있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마저 툭툭 튀어나오는 걸 보면 딱히 서로에게 연락을 하는 거 같지는 않기도 하고. 나도 고우혁이나 윤하늘하고 일대일로는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없긴 하지만.

“지금 연락해 볼까요?”

말 없는 내 모습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고우혁이 조심스레 묻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편하실 때 하세요. 전 하늘 씨 괜찮다고 하면 괜찮으니까.”

“…….”

고우혁은 오랫동안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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