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덧그리며 (3/53)

2. 덧그리며

“와, 씨발.”

안무가가 결국 욕설을 내뱉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와중에 내뱉은 욕설은 일순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곧 다시 내 쪽으로 향해졌다. 그 욕설에 대한 무언의 긍정이 스튜디오를 가득 메웠다.

“한 번 더 가는 게 좋을까요?”

“아아니! 지금 딱 완벽해. 감독님, 이대로 이거 쓰죠?”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지?”

강이헌의 말에 안무가와 감독이 서로를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첫 번째 회귀 때도 없었던 일이었다. 군무 원 테이크 녹화. 아무래도 그 중심엔 내가 있는 것 같다. 두 번 세 번 해도 이 정도로는 나오지 않으리라 지레짐작한 두 사람이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게 뻔했다.

어쩐 일로 저렇게 해 주냐, 제대로 춤추는 거 처음 보는 것 같다,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말없이 테이블에 놓인 물을 마시기만 했다.

뒤에서 하대진이 슬그머니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놈은 저번부터 계속 나와 공진하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보곤 했었다. 진짜 악몽이라도 꿨나? 내 목을 조르던 공진하를 본 그 날이 꿈에라도 나온 모양이다. 내 목 언저리에서 머무는 시선만 봐도 속이 훤하다.

오히려 공진하는 그런 일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태연하게 굴었다. 언제나처럼 촬영장을 뛰어다니며 여러 멤버 속을 뒤집어 놓았고, 메이킹 카메라 앞에서 이번 노래며 오늘 날씨에 대해 주절거렸다.

“형, 진짜 암은 아닌 거죠?”

“…….”

신기운은 실수 한 번 없이 끝낸 내가 아직까지도 의심스러운지 날 빤히 보며 그렇게 물었다. 대체 그놈의 암에는 왜 저렇게 집착하는 거야. 걸렸으면 좋겠다는 건가. 그런 말을 하면서도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인 게 더 짜증이 났다. 진담인지 농담인지도 모르겠고, 둘 중 어느 쪽이든 대꾸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언제나 가장 문제였던 군무를 찍고 나자, 리더인 강이헌과 최백이 스태프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래, 오늘은 두 번째 정규 앨범의 타이틀곡 뮤직비디오 촬영 날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말하지만, 엘앤엘의 두 번째 정규 앨범은 대박이 난다.

음원 대박과 쪽박에 매번 타당한 근거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사실 엘앤엘의 대박에는 이유가 있었다. 돈. 뮤직비디오 하나에 돈을 엄청 썼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가 아니라 어디 뭐 영화라도 찍나 싶은 금액을.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가 하나 있다. 굉장히 뜬금없는 소리지만 어쨌거나 있다. 할리우드 최고의 그 제작 회사는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만화책 사업으로 뻗어 갔고, 종래엔 영화와 드라마 같은 콘텐츠마저 잠식했다. 그리고 엘앤엘의 두 번째 정규 앨범 타이틀곡엔 그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아니, 미친 거 아냐? 3분 30초짜리 영상에 왜 월드 디자인 애들이 게스트로 출연하는 건데?”

“계속 포헤븐만 밀어주다가 엘앤엘 훅 뜨니까 밀어주는 건가?”

“밀어줘도 정도가 있지. 이번 CG 전부 할리우드 영화 모델링 하는 곳에 외주 맡겼다던데.”

스태프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고 싶기도, 끄덕여 주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난 그들이 모르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뜸 거대한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컨셉으로 잡아 홍보를 대대적으로 하는 이유를.

“주선율! 전화 왔는데, 안 받을 거야?”

“네.”

“……누군지 묻지도 않고 안 받냐.”

매니저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는 안 봐도 뻔했다.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한 명 한 명 불려 가며 의상이며 화장을 다시 받고, 영상에 들어갈 장면을 찍었다. 평상시와는 다른 초록 배경 앞에 서서 그럴듯한 행동을 취하는 게 어색한지 첫 타자로 들어간 하대진이 갈피를 못 잡고 여러 번 마른세수를 했다.

물끄러미 하대진이 갖은 아양을 떠는 것을 지켜보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돌아가는 시선들이 많다. 하대진의 저 웃긴 꼴보다 내가 더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렇겠지.

그래도 나보단 저쪽이 더 재밌을 거 같은데. 어지간한 뮤직비디오에서는 보지 못할 꼴이다. CG 처리를 위해 전신 타이즈를 입은 스태프가 하대진에게 발길질을 하고 도망쳤다. 하대진은 진심으로 놀란 듯 눈을 껌뻑이며 도망치는 스태프를 멀거니 쳐다봤다.

꼴이 꽤 웃겼지만 나중에 저 스태프는 거대 토끼가 되고 하대진은 뮤직비디오 최대 명장면이라며 웹 사이트를 떠돌게 된다. 웹 서핑도 잘 안 하는 내가 알게 될 정도로.

“선율아!”

저 멀리서 강이헌이 손을 흔들며 날 불렀다. 최백과 몇 스태프와 함께 서 있던 강이헌이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을 했다. 그 험악한 마스크와는 다른 맑은 미소를 보니 불안감이 치밀어 올랐다.

원래 이때 날 불렀던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최백이 환하게 미소 짓는 것을 보곤 걸음을 옮겼다. 저러다 여기서 쌍욕하지.

가까이 다가가니 그들의 분위기가 굉장히 기묘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쁘지 않은 표정의 최백과 환하게 웃는 강이헌과는 달리, 스태프들의 표정이 거무죽죽한 게 어디 우환이라도 있는 표정이었다. ……더 불안한데.

“신을 하나 더 추가하려고 하는데, 네가 좋을 것 같아서. 사과를 소품으로 이용할 거고, 메이크업이나 의상은… 바꾸는 게 좋을까요?”

“아……. 하아……, 아뇨. 그냥, 뭐. 그대로… 가셔도 될 것 같아요.”

“그렇대!”

극과 극의 분위기였다. 스태프는 천재지변이라도 겪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에 반면, 강이헌은 한없이 행복하다는 듯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니, 잠깐. 사과? 퍼뜩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건 원래…….

“사과 받고 나서 좀 있다가 사과 한입 깨물면 되는 신이라, 어렵지 않을 거야. 네가 하면 딱일 것 같아서 계속 말씀드렸더니 된대.”

“…….”

……네가 하던 거였는데. 강이헌은 제 장면을 내게 뺏긴 줄도 모르고 싱글벙글 웃었다. 아니, 원래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그러고 보니 그때 강이헌이 답지 않게 영 하기 싫은 듯 미적거리며 찍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내 떨떠름한 시선을 어떻게 느꼈는지 강이헌이 최백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했다.

“백이 형도 너 괜찮을 것 같다고 추천해 줘서 일이 잘 풀렸어.”

“고맙단 말은 안 해도 되고.”

“…….”

덤 앤 더머도 아니고. 쓸데없는 짓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자 최백이 눈꼬리를 접으며 미소 지었다.

“진짜 안 해?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형!”

강이헌이 곧장 최백에게 눈치를 줬지만 최백은 뭐가 문제냐는 듯 웃는 얼굴로 강이헌을 돌아봤다. ……그렇게 욕할 거면 처음부터 고맙단 말을 하라고 하면 될 텐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허억!”

스태프들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잘 들렸지만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는 않았다. 시선이 마주치면 더 떨떠름할 것 같기도 하고.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최백이 코웃음 치는 소리를 냈다.

“보세요. 제 말이 맞죠?”

나른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시선을 맞추자, 최백이 생긋 미소 지었다. 잔뜩 휘는 눈꼬리에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일렁이는 눈물 점을 바라봤다. 촬영 때나 보여 주던 얼굴을. 평상시에도 저런 표정 짓기는 하는구나. 가끔 최백의 화보에서나 보던 얼굴이다. 야하게 웃는 얼굴.

“주선율, 재밌어졌다니까.”

저 표정은 재밌을 때 짓는 표정이었나. 회귀 2회 차 만에 알아챈 게 너무 쓰잘데기없어 떨떠름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 * *

백설 공주에게서 받은 사과는 어떤 향이 날까. 그녀에게 받은 사과를 두어 번 손안에서 굴려 본다. 무기질적인 시선은 붉은 사과 앞에서도 여전히 음울하기만 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도 모를 무표정의 끝, 시체 같은 남자가 사과를 입가로 가져다 댔다.

한입 깨물며 정면을 노려보는 시선이 꽤 섬뜩하다. 남자는 마치 누군가를 원망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관 뚜껑이라도 열려 강제로 일어난 시체처럼. 마치 죽음을 덧그리는 양 사과를 으득으득 씹어 먹은 남자가 그대로 쓰러졌다. 받은 사과가 마치 독사과인 양, 그렇게.

“어떻게 해!”

“누가 119에 신고 좀 해 봐!”

“주선율!”

촬영이 끝났다. 분주한 스태프들 사이에서 공진하가 멀거니 주선율을 바라보았다. 촬영을 하던 주선율이 그대로 넘어가자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의외로 하대진이었다.

형! 어린애라도 되는 양 달려들자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며 제 주변을 지나쳐 주선율에게 인파가 쏠렸다. 그때였다. 누워 있던 남자가 눈을 반짝 뜨며 고개를 들었다.

“왜요?”

멀끔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달려든 촬영 감독이 눈을 끔뻑였다. 왜 주선율이 방금 죽어 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더라? 공진하는 감독의 속내를 흉내 내 본다.

아마 뭐, 그런 생각을 했겠지. 아마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을 거다. 죽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온몸에서 드러난 체념. 애써 만들어 낸, 혹은 이젠 질려 버린 무심함. 새하얗게 질린 얼굴.

주선율이 원래부터 파리한 안색을 했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얼굴색은 물론이요, 언제나 그는 오만했고 독불장군이 따로 없었으며 같잖다는 표정을 잘 짓는, 좋게 말해서 생기발랄한 남자였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건 없었고, 안티나 욕설마저도 제 효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

남자는 빛났다. 반짝반짝이 아니라 번뜩이는 편이긴 했어도, 하여간에 빛나긴 했다. 아주 무섭게. 세상 아래 제 존재를 크게 장악하기라도 할 것처럼. 엘앤엘이 이 정도까지 크는 데 주선율의 그 존재감이 알게 모르게 얼마나 크게 작용했던가. 하지만, 어느 아침 눈을 뜬 이후부터 주선율은.

“지문대로 했어요.”

“어어, 그래…….”

빛이 모조리 사라진 채로. 공진하가 고개를 기울여 하얗게 질린 남자를 샅샅이 살폈다. 팔목이 가늘어졌다. 뼈대가 나오고 있다. 살이 점점 빠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주선율은 잠이 많아졌고, 식욕이 떨어졌다. 넋을 놓은 채 허공을 응시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안색은 날이 가면 갈수록 창백해지고, 점점 더 무채색인 양 온몸의 피부가 변해 가고 있었다. 공진하는 그렇게 변했던 사람을 알고 있다.

‘있지, 선율아. 자살했었니?’

그 여자는 결국 그렇게 자살했는데. 어느 날의 여자처럼 생기를 잃어 가는 주선율이 눈에 밟혔다. 그뿐이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다. 그 여자에겐 물어보지 못했는데, 한 번도 말리지도 못했는데.

넌 좀 달랐으면 좋겠어서. 이미 죽어 버린 그 여자 대신으로라도 살아 줬으면 좋겠어서. 주선율과 마주한 시선에 방긋 웃으며 공진하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살아, 주선율. 포기하지 말고.

숙소가 조용하다. 익숙한 모양새였다. 컴백 전후에는 더 바쁘긴 하지만 워낙 다들 스케줄이 많으니. 사실 숙소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스케줄 없다며 내가 알아서 연습을 할 사람도 아니었고.

예전에는 이럴 때 뭘 했더라. 어떤 기분이었더라. 한 번 아니, 두 번의 회귀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뭐가 남아 있는지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아련하니 몽롱한, 깊은 꿈에 잠들었다 깨어나기라도 한 듯. 그런 감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암암리에, 혹은 대놓고 폭탄 취급을 받고 있던 터라 나는 언제나 개인 스케줄이 없었다. 단체 스케줄이 아니면 예능은 무슨, 인터뷰도 나가지 않았고 어찌저찌 잡히면 적어도 다른 멤버 둘은 끼운 채로 보냈다.

그런 취급이 서운했냐고 물어보면 사실 할 말은 없다. 서운하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거물이 된 느낌이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게 얼마나 한심한 건지도 모르고.

까만 화면의 핸드폰을 느리게 켜 봤지만 오늘도 연락 온 것은 없었다. 매니저는 아직도 나와 단둘이 마주하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지금은 조용한 내가 굉장히 불안하거나.

자리에서 비척이며 나가려다 말고 멈칫했다. 며칠 전 공진하가 숙소에 남아 있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확연히 느린 걸음으로 나간 거실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모두 다 스케줄이 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나를 제외하고.

“…….”

말없이 거실을 내려다보았다. 나 진짜 여기서 뭐 했냐. 여기에 부득불 혼자 남아 대체 뭘 한 거야. 취미 생활 하나 갖고 있지 않은 나는 웹 서핑도 잘 안 했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내가 속한 그룹 엘앤엘을 쉽게 찾아냈기 때문이다. 엘앤엘의 멤버 누구, 혹은 엘앤엘, 혹은 나 자신.

가시 돋친 말들을 피하기 위해 나는 웹 서핑을 포기했다. 사실 그런 식으로 TV도 보지 않았었다. 과거의 나는 진실로 쓰레기 같은 새끼라, 스케줄이 잡히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으면서도 멤버 중 다른 누군가가 스케줄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털썩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TV 쇼 프로를 보려는 건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다. 네가 혹시 어딘가에서 나오고 있지는 않을까. 그럼에도 또다시 멈칫하는 것은 가까스로 멈추어진 감정이 지금 당장 쏟아져 내릴까 봐.

네 이름 석 자 쳐 보지 못한 것은 나에 대한 신뢰의 부족도 있었다. 너의 이름을 쳐서 알게 된 정보에 과연 내가 가만히 있을까. 널 찾으러 가지는 않을까.

그러다 미래가 비틀리면 어쩌지? 널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널 다시 만나서 상처받으면 어쩌지? 비약과 모순이 이어지다 결국 겁쟁이처럼 그 무엇 하나 쳐 보지도 못했다.

삑. 결국 머뭇거리다 TV를 틀었다. 무의식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곧장 위를 향해 움직였다. 저렇게 고민해 놓고도 원하는 게 고작 하나라는 게 웃겼다. 그러다가 문득.

“아.”

『그래요, 나 여기서 그만 못 둡니다.』

그 남자를 발견했다. 곧장 일그러진 표정은 무얼 의미할까. 너에 대한 분노? 아니면 널 쉽사리 빼앗겨 버린 나에 대한 분노? 아니면 내가 갖지 못한 걸 갖고 있는, 널 뺏은 저 남자에 대한 분노?

『왜냐고요? 나는, 난…….』

TV 속의 수려하게 생긴 남자가 애달픈 표정을 짓는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진심인 듯, 거짓인 듯, 마치 진짜처럼.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상대방을 마주한다.

실제론 마주하고 있을 수도, 마주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화면 속의 그는 상대를 완벽히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곤 결국 사랑에 빠진 남자를 완벽하게 구현해 낸 남자가 미소 짓는다.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물끄러미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의 남자는 앞에 선 여자를 끌어안았다. 품 안 가득 여자를 안고선 귓가에 속삭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곧장 구도가 바뀌며 남자의 얼굴이 가득 카메라에 담겼다. 그러고는 상냥하게 속삭이며.

『사랑해요.』

“…….”

말없이 그 얼굴을 바라봤다. 새까만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지런히 덮은 남자는 꽤 앳되어 보이는 스타일링에도 그 특유의 젠틀한 분위기가 풍겼다. 아마 다들 모르겠지. 실제로 보면 더 저렇다.

풍기는 아우라가 얼마나 엄청난지, 난 처음 저 남자와 실제로 마주했을 때 말까지 더듬었다. 그리고 남자는 그런 날 보면서 저 화면에서처럼 신사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었는데.

『내가 당신을 너무,』

그리고 그 옆엔 네가 있었잖아.

‘진짜 팬이에요. 같이 연기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선배님!’

『사랑해.』

너한테도 저렇게 말했어? 널 놓지 않겠다는 듯 끌어안으며, 세상에서 둘도 없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어?

툭. 리모컨 떨어지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어느새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바닥에 리모컨이 너부러졌지만 화면 속 남자는 머뭇거림도 없이 떠들고 웃음을 터뜨려 댔다. 그게 날 비웃는 것 같아서, 결국 무릎을 굽혀 고개를 파묻었다.

‘미안해. 미안해, 선율아. 나, 나 그 사람이 좋아졌어.’

울음이 가득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한데.

‘나, 그 사람이 좋아.’

넌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득해질 듯 멀어졌는데도, 그 떨림과 내용은 심장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다.

‘고우혁이, 날 인정해 준 그 사람이, 너무. 너무 좋아.’

내가 사랑한 사람이 사랑한 자가 여전히 화면 속에서 떠들고 있다. 그 대사들이 얼마나 현실감이 없는지. 마치 나는 죽음 끝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여기에 있는 것처럼.

이미 숨이 끊긴 것처럼.

* *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돌리니 하대진이 문을 반쯤 연 채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두드리기엔 늦지 않았냐. 이미 문도 열었으면서. 하대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애써 태연한 척을 하려는 것 같긴 한데 목울대가 너무 크게 움직여서 다 티가 났다.

“밥, 밥 먹어.”

심지어 삑사리까지 났다. 하대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변했다. 창피한 모양이지. 하긴, 원래 표정 변화가 잦은 애다. 그래서 매니저가 어지간하면 위험한 토크쇼 예능에는 내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전 삶에서 들었던 적이 있다.

“뭐, 뭘 쳐다봐! 나와서 밥이나 먹어!”

그러곤 문을 닫으려다 말고 크게 열어젖힌 뒤 씩씩대며 나간다.

“…….”

남들이 귀여워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나오지 않을까 봐 홧김에 문을 닫지도 못하고 열어젖힌 채 도망친 막내가 귀여웠다.

컴백을 얼마 남기지 않은 날인데도 숙소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스케줄이 있거나 그렇겠지. 거실엔 하대진이 분주하게 부엌과 식탁을 오가고 있었다. 보글거리는 소리가 나는 찌개와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이며, 고기며, 각종 나물……. 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

“거기에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어서 앉아서 먹어!”

“……그래.”

식탁으로 걸어가는 내내 멤버들의 생일을 헤아려 봤다. 아니, 그러려다 내가 멤버들의 생일을 전혀 모른다는 걸 알아차리곤 데뷔일이라도 생각해 봤다. 아닌데. 아무리 봐도 내 생일이나 데뷔일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멤버 생일이면 걔가 있었겠지. 그럼 뭐지?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많이 차렸네.”

“맨날 말라 가는 걸 다 아는데 그럼 많이 차리지 조금…….”

세상에. 나도 모르게 놈을 올려다보았다. 그사이 가라앉았던 얼굴이 다시 점점 붉어지는 걸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놈이 바싹 어깨를 올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말 시키지 말고 밥이나 먹어!”

어쩜 저렇게 다 티 날까. 신기하게 놈을 쳐다보다 저러다 얼굴이 터지겠다 싶어 숟가락을 들었다. 말랐던가? 손목 두께를 전과 비교하려 바라보다 수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 감시하듯 하대진이 쳐다보고 있었다.

밥을 먹기 시작하자 빤히 지켜보고 있던 하대진도 내 앞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이상한 기분이다. 얘랑 둘이서 밥 먹기는 거의 없다시피 했었는데.

말없이 밥을 먹길 몇 분, 젓가락질이 현저히 느려진 걸 나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최근 통 식욕이 없어서 자주 식사를 건너뛰었더니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밥은 반도 안 줄었는데. 깨작거리며 그릇에 붙은 밥풀을 하나하나 떼고 있는데 갑자기 밥 위로 잘 발라진 생선 살 하나가 올라왔다.

“밥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냐. 먹기나 해.”

“…….”

“왜 쳐다봐? 밥 먹으라니까??”

하대진이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됐다. 나는 어색하게 젓가락을 내려놓곤 숟가락을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생선 살이 놓인 밥을 퍼서 입 안 가득 넣는다.

“…….”

진짜 이상한 기분이다. 씨발, 진짜로. 정말.

“그건 좀 잘 먹네. 너 생선 좋아해?”

하대진이 무심결에 또 생선 살을 발라선 내 밥그릇에 가져다 놓는다. 나는 애써 울컥거리는 감정을 참았다. 두 번째 회귀 이후 이렇게까지 울컥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울지 마, 씨발. 제발. 제발…….

“하긴 넌 내가 차려 놔도 잘 안 먹… 뭐, 뭐야?!”

씨발, 언급하지 마. 하대진의 목소리에 고개를 곧장 숙였으나, 놈은 눈치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너, 울어? 왜?!”

앞자리가 곧장 분주해졌다. 하대진은 대체 왜 그러냐며 외쳐 대다 결국 부엌으로 사라졌다.

놈이 사라지자 곧장 한 손으로 눈을 감쌌다. 좆같다. 이 몰려드는 창피함의 이유는 막내 앞에서니 뭐니 그런 걸 떠나 그냥 다 사라진 줄 알았던 내 옛날 잔재 때문이다.

다 죽어 버린 줄만 알았던 내 기억들. 오만하고, 앞뒤 가리지 않던 내 옛날 모습들. 가시 돋친 채 오만함 아래에서 결핍들을 막아 내고 있던 머저리는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었다. 맞다. 난 아직도 주선율인 거다. 난 아직도 빌어먹을 주선율이다.

[아버지]

우우웅. 우우웅.

당신 아들인.

울리는 핸드폰에 시선을 줬다가 그대로 멈췄다. 왜? 어쩌다? 당신이 왜? 전화를 할 리가 없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본인이 전화를 하지? 무슨 일이 있나? 누나인 줄 알았는데, 왜.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져 간다. 당신이 언제 나한테. 언제.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왜! 그러다 결국 사라지지 않은 주선율이 튀어나와선.

쾅!

“끄억! 뭐, 뭐야! 뭔데?!”

그대로 핸드폰을 내던졌다. 대리석에 곧장 내던져진 핸드폰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전화가 꺼졌는지, 아니면 핸드폰이 망가졌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래,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다시 불편해진다. 하대진이 앞에 있었다.

“뭐…….”

말도 못 한 채 날 멍하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자 하대진이 어깨를 움찔 떤다. 그 모습에 곧장 시선을 피해 버리자 말문이 막힌 듯 우두커니 날 바라보고만 있던 하대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게 다 빌어먹을 당신 때문이야. 점철되듯 뇌 속을 갉아먹는 생각에 몸을 흠칫 떨었다. 아. 씨발. 좆같다. 첫 번째 회귀 때. 공진하가 했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변한 거 알아. 다들 알 거야. 근데 선율아. 그게 전부는 아니야.’

놈은 맑게 웃으며 덧붙였다.

‘과거가 왜 무서운 줄 아니?’

그날의 공진하가 눈꼬리를 접으며 고개를 기울인다.

‘절대 변하지 않거든. 다 떨쳐 낸 줄 알았는데도 다시 달라붙어.’

귀신같은 새끼.

‘마치 기생충처럼.’

그때의 나는 그걸 더 노력하란 소리로 들었다. 조금 더 노력하라고. 그렇게 말한 줄 알았다. 그걸 조금 더 어렵게 말한 줄 알았지. 그런데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남들이 다 나가 죽어라 말하던 주선율이 아직도 내 안에 있다.

“일단, 앉아.”

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자리에 앉으라고.”

표정을 구긴 채 말하는 하대진의 목소리에 얼결에 자리에 앉았다. 놈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대뜸 내게 숟가락을 쥐여 줬다.

“……?”

“뭘 쳐다봐. 밥이나 먹고 있어.”

이 상황에? 놈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곤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들고 오더니 내가 내던진 핸드폰을 빗자루로 죽 밀어 쓰레받기에 담았다. 심지어 그 주변, 아니, 거의 청소하듯 쭉 훑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그렇게까지 유리 안 튀었을 텐데.”

“형이 깨진 유리에 손 베어 보긴 해 봤어? 액정 깨진 다음에 만져 본 적은 있고?”

“…….”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놈이 형이라고 했다. 속으로는 계속 형이라 부르는 게 확실해졌다.

뒷정리를 착실히 다 한 놈은 다시 자리에 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직도 밥 다 안 먹고 뭐 했냐고 신경질을 냈다. ……가만, 지금 와 보니 놈의 표정은 흔히들 말하는 ‘엄한’ 표정이었다. 얘 지금 나 혼내나?

“먹으면서 들어.”

반사적으로 입에 밥을 퍼 넣었다. 평상시 저답지도 않은 엄한 얼굴에 시선이 계속 그쪽으로 쏠렸다.

“화났다고 물건 던지지 마. 위험해.”

“…….”

혼나고 있다. 쟤 올해로 스물인데……. 나보다 어린데……. 그런데 어째 말하는 톤이며 말투가 사람을 기죽게 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됐어. 매니저 형한테 핸드폰 사 달라고 할 테니까 밥 먹어. 그거 다 먹어! 팍팍 좀 먹어라! 어? 그렇게 안 먹으니까 맨날 죽을 사람처럼 피골이 상접해 있지!”

“…….”

넌 다른 건 안 궁금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질 않았다. 목이 먹먹하게 막혔다. 배려일까? 단순히 관심 없는 걸까? 난 대체 얼마나 나밖에 몰랐던 걸까. 왜 지난 순간에는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을까.

‘기억은 이기적이야.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느끼고 생각한 대로 변질되거든.’

난 남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이가 좋아 보여서 참 좋아.”

“끄어으아악!”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나보다도 하대진이 더 먼저 놀라서 난 놀랄 타이밍도 놓친 채 멍하니 아연실색한 하대진을 쳐다봤다. 하대진은 말도 못 하고 혀, 혀, 형 하고 있는 게 아까의 모습과는 전혀 달라서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얜 뭐 하던 사람이었을까? 하대진의 가족 관계에 대해, 생활 패턴에 대해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역시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 순간 치밀어 오른 자괴감과 갈 곳 잃은 분노는 내 안을 떠돌다 그렇게 사라졌다. 대체 지난 삶에서 뭘 노력한 건데? 난 왜 날 바꾸려 노력했으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는 이리도 무심히 굴었는데? 그래 놓고 왜 날 봐 주지 않았냐고 한 거야? 씨발. 욕이 한 번 더 튀어나왔다. 감정에 차올라 내뱉은 욕설은 그대로 무너지듯 사라져 버린다.

“수, 숙소에 있었으면 인기척을 좀 내요!”

“에~이! 우리 대진이, 형아 방에는 들어오지도 않아 놓고!”

공진하가 애교 있게 말하며 꺄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그런데 그건 모조리 다 지금은 없는 ‘그날의 공진하’에게 묻고 싶은 말이라, 결국 내뱉고 싶은 말은 허공을 떠돌고 떠돌다 다시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위로하듯 귓가에 속삭이는 건 과거의 당신이야.

‘괜찮아, 선율아. 상처받지 않아도 괜찮아. 넌 언제나 노력하고 있잖아. 다들 알고 있을 거야. 다들 알고 있는데 아직 준비가 되지 못한 거야.’

당신은 이런 나를 알고 있었을까? 내 연인이었을지언정 나의 모든 것을, 그룹에서의 내 모습을 전혀 알지 못했을 당신도 내 이런 이기적인 노력을 알고 있었을까? 하지만 넌 상냥하니까 예쁘게 웃어 줬을 거야.

“선율아.”

일순 어깨를 흠칫, 떨었다. 네 목소리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날 부른 상대는 공진하로, 놈은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행동에도 방긋 미소 지을 뿐이었다. 오히려 눈치를 보는 건 앞에 앉아 있는 하대진이다. 하대진은 놈과 나를 번갈아 보며 공진하의 손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괜찮아?”

“…….”

뭐가? 괜찮지 않을 건 뭐야. 무엇에 대한 괜찮음인지 모르겠다.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공진하가 머리를 툭툭 쓰다듬는다.

“그래도 다행이다. 화도 내고.”

“……형, 본인이 무슨 말 하는지 인지는 했어요?”

“그러엄. 우리 막내는 모르는 어른들만의 이야기인데?”

“이제 성인이거든요!”

하대진의 투덜거림에 공진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한바탕 웃으면서도 머리 위에 있는 손이 느리게 움직인다. 하대진을 바라보고 웃던 놈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서 날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웃더니 고개를 숙인다.

“앞으로 화나면 내 방 두드려.”

“……왜?”

“내가 놀아 줄게.”

그렇게 말하곤 환하게 웃으며 내 양 볼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곤 미련 없이 떨어진다.

“대진이 너, 2시에 S 스튜디오 예능 있지 않아? 매니저 형, 나한테까지 전화 왔어.”

“아, 주선율 혼자 집에 있는 줄 알고 그랬죠. 밥도 안 챙겨 먹을 게 뻔하고.”

하대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남아 있는 밥을 입 안에 욱여넣으며 숍에서 메이크업 다 받고 잠깐 갔다 온다 하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레 내뱉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대진이 제가 만든 요리를 저 스스로도 만족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다 멍하니 입을 열었다.

“너, 나 때문에 왔어?”

“이제 좀 양심에 찔리냐? 그럼 맛있게 먹든가.”

얼굴이 붉어진 채 노려보는 모습이……. 미치겠네. 내가 왜 이 어린놈한테 부모의 정 따위를 느껴야 하는 거야. 이게 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아버지 탓을 하고 싶다가도 다른 이를 탓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워 그러지도 못하겠다. 침묵하며 아직도 반이나 남은 밥을 바라보다 한 숟가락 퍼서 입 안에 집어넣었다. 꽉꽉하게 목구멍을 뒤덮는 밥알들이 뜨끈하다.

“사이좋으니까 보기 좋네.”

“누, 누가 사이가 좋아! 그냥, 이건 그거거든요?! 사회, 사회 활동! 봉사!”

“아, 그래그래. 최백이 들으면 좋아하겠네.”

공진하가 손을 휘휘 저으며 적당히 대꾸하곤 제 방으로 들어갔다. 놈이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을 붉은 얼굴로 방문을 노려보던 하대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왜 저렇게 예상하기 쉬울까. 곧장 날 바라보는 얼굴에 놈이 어떤 장면을 떠올리는지 확실해졌다. 또 나와 저놈 단둘이 집에 있다간 무슨 일이 날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하대진이 내게 진지하게 속삭였다.

“그냥 나랑 같이 스케줄 가자.”

“…….”

어이가 없다.

“내가 왜. 네 스케줄이잖아.”

“아 그냥 방청객으로 가면 되지!”

“…….”

지금 저게 스케줄 두 시간도 안 남았는데 할 소리인가. 속내를 파악하려 표정을 살폈지만 놈은 그럴 시간도 주지 않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깨끗이 비우고 있으라며 신신당부한 놈이 제 방으로 뛰어가듯 들어간다. ……끝까지 잔소리네. 웃기게도 그게 또 듣기 나쁘지 않아서 내렸던 수저를 다시 들었다.

* * *

내가 하대진을 과소평가했다.

“그럼 오늘의 음식 평가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와아아아!”

“…….”

난 진짜 놈의 스케줄에 와 있었다. 내가 적당히 입은 시꺼먼 의상에 기겁한 놈이 대충 쥐여 준 옷을 입고, 놈이 해 준 밥을 먹고, 놈이 얌전히 앉아 있으라고 당부한 자리에 앉아서…….

예상외로 하대진은 빠릿빠릿했다. 순식간에 매니저며 담당 PD나 작가진에게 전화한 건 물론이요, 내가 가는 것은 물론 내가 앉을 방청석 자리 하나까지 맡아 두고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자연스레 공진하를 시켜 설거지까지 마무리했다. 심지어 내 코디까지 깐깐하게 보더니 날 챙겨선 금세 촬영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아, 대진이 왔어? 어… 음, 선율 씨도, 잘 왔어요. 이야기 들었으니 저기 가서 앉아 있으면 돼요.’

떨떠름한 반응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날 꺼리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이렇게 별로면 오지 말라고 하지. 그게 더 좋은데.

나는 매니저의 손에 이끌려 메이크업까지 받고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나쁘지 않은 자리였다. 방청객 사이에 앉아 적절히 조명도 받을 수 있고, 적절히 주변에 파묻혀 있는.

중간중간 내 얼굴을 보여 줄 예정인지 바로 앞에는 카메라가 세팅된 채 날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저 까맣게 날 바라보는 렌즈가 뭐 하나 걸리면 곧장 전국으로 송신할 거라는 PD의 의지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방송을 시작하자 하대진은 내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열심히 제 역할을 다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프로라서 몰랐는데, 하대진이 직접 요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앞치마에 괴상한 모자까지 쓰니 꽤 그럴듯한 요리사로 보인다. 요리 대결 프로그램인가?

위에 달린 커다란 화면으로 하대진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나왔다. 신중하게 채소를 일정하게 써는 모습을 보다 또 문득 쟤가 요리하는 걸 처음 본다는 생각에 음울함에 휩싸였다. 매번 숙소에서 요리를 도맡아 했는데 어떻게 칼질 한 번 하는 모습을 못 봤을까.

나는 사실, 아주 오래전에. 약간. 혹은 조금. 네가 부러웠다.

“오오오, 대진 씨! 오늘도 괜찮은 요리 하나 나오겠는걸요?”

“무슨 아이돌이 밀푀유나베를 저렇게 쉽게 만듭니까?! 예전에 요리했었어요, 대진 씨?”

“이쯤은 하죠!”

하대진이 넉살을 부리며 웃는다. 이렇게 일했구나. 숙소에서의 모습들은 온연하게 사라진 채로, 연예인 하대진이 화면 안에 있었다. 단 한 번도 부리지 못할 것 같던 능청을 부리며, 짓궂은 질문에도 능숙하게 대꾸하는.

예전의 나는 네가 부러웠다. 그냥 아주 조금쯤 네가 나와 닮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뻐기듯 말하고 윽박지른 큰 소리 아래 숨겨진 네가. 네가 실제로 어떻든 간에, 내가 본 너는 그랬다. 그냥 난 아주 조금쯤, 네가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넌 남들에게 모난 돌로 보이지 않아서 그게 참 싫었지.

쟨 뭐 하던 애일까? 뒤늦은 의문이 이제야 들었다. 춤을 좋아하고, 잘 춘다는 것 정도, 요리를 잘한다는 것 정도만 알겠는데. 너는 또 어떤 사람일까. 회귀까지 치면 꽤 오랜 시간 함께했는데도 어떻게 고작 아는 게 그 정도일까.

그때였다. 자괴감에 침몰하기 직전, 요리에 한창 집중하던 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급하게 무언가를 찾나 싶을 정도로 고개를 휘휘 젓는다. 아. 날 찾는 것 같은데. 역시 날 찾는 거였는지 마주친 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머뭇거리다 방긋 웃는다.

“대진 씨, 요리하다 말고 뭐 해요?”

“아, 오늘 같은 멤버인 엘앤엘의 주선율 씨가 방청객으로 와 계시거든요. 선율 씨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주선율이라고? 앞의 여자들이 부산스레 뒤를 돌아 내 얼굴을 확인했다. 그들뿐만 아니었다. 화면에 크게 내가 보이자 방청객들이 소란스레 날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양옆으로 돌려 가볍게 인사하며 스태프가 가져다준 마이크를 집었다.

“…….”

잠깐……. 멍하니 마이크를 쳐다봤다. 이걸 가지고 뭐 어쩌라고.

“별거 아닌데…….”

하대진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이리저리 시선을 옮긴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며 다시 표정 관리를 한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매니저가 표정 관리하라며 손짓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진짜. 일하는 거구나. 새삼스러웠다. 그저 예쁘게만 보이려 표정 관리를 하며 방긋 웃는 모습이 갑갑해 보였다.

“그냥……. 이거 형도 좋아하나 싶어서요. 오늘 가서 해 줄까 해서.”

“아, 엘앤엘에서 대진 씨가 요리를 자주 하나 봐요?”

“네에, 그렇죠. 언제나 열심히! 멤버들을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하하!”

애교 있게 윙크하며 장난스럽게 한 말에 방청객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하대진이 낯설었다. 몇 번 같이 방송에 나간 적은 있어도 전부 팀 전체가 나갔던 것뿐이었고, 그마저도 말은 강이헌이나 공진하, 혹은 신기운 정도만 말해서 전혀 몰랐다. 나는…….

‘야. 너 웃기지 마. 너만 노력하는 거 같아?’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날의 최백이 코웃음을 친다. 이제는 내 기억 속에만 남은 잔재다. 내뱉은 당사자도 사라져 버린.

‘남들 다 해, 씨발. 원래 남들 다 그렇게 산다고. 근데 남들 다 하던 노력, 이제 와서 하는 널 내가 왜 좋게 봐 줘야 해?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최백이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날 쳐다봤다.

‘웃기지 마, 주선율. 넌 옛날과 똑같은 애새끼야.’

“-선율 씨, 대진 씨 요리 평상시에 어떤가요? 입맛에 맞아요?”

퍼뜩 정신이 깨어났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저 멀리에 서 있는 하대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적막한 주변, 건조한 공기. 시선 끝에 선 하대진이 난감하게 시선을 굴리다 결국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걱정되겠지. 혹시 날 데려온 걸 후회할까? 과거의 나였으면 사고를 쳤어도 분명 쳤을 테니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기에 서 있으면 뭐가 변하지?

“맛있어요. 오늘도 대진이가 점심 해 줬어요.”

그러곤 아주 오랜 기억을 덧그리며 웃어 보였다. 빙긋 미소 짓자 고개를 번쩍 든 하대진이 맹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녀석뿐만 아니었다. 스태프들 쪽에서 소란스러움이 감도는 게 느껴졌다.

“아, 정말요? 대진 씨 기분 좋나 봐요! 완전 넋을 놨네!”

내게 말을 걸던 여자가 하대진의 넋을 놓은 표정을 봤는지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자, 곧 기묘하게 조용하던 스튜디오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바, 바, 밥도 남겼으면서…….”

아. 슬쩍 매니저 쪽을 바라봤다. 매니저는 넋이 나간 것 같았다. 하대진이 나오는 예능을 본 적이 없으니 얘가 원래 어디까지 사회생활을 하고 다닌 건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더듬는 모습을 매니저가 허용할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하대진에게 몰렸던 시선이 내게로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하대진의 안색은 다시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자리에 바싹 굳어 선 하대진이 귀여웠다. 나는 말을 고르듯 가만히 놈을 쳐다보다 다시 웃으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밥이 많았거든요.”

“아하하하!”

“하하하! 생각보다 선율 씨 재치가 있네요!”

화면이 내게서 다른 이들에게로 옮겨졌다. 나는 그사이를 틈타 볼을 매만졌다. 파들거리는 거 같은데. 원래 잘 웃는 성격은 아니다. 심지어 회귀를 하기 전에는 웃기지도 않은데 웃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도 못했다.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며 비웃었다. 물론 회개를 한 첫 번째 회귀에선 열정적으로 노력했지만.

“그럼 선율 씨, 대진 씨가 요리해 준 밥을 먹을 때 어떤 느낌이 들어요?”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내게로 질문이 돌아왔다. 어떤 느낌이 드냐고? 사실 잘 먹질 않아서 모르겠다.

나는 점심의 기억을 되새겨 봤다. 문을 열고 나왔더니 무슨 날이라도 되는 양 가득 채워져 있던 식탁이나, 보글보글 끓던 찌개 소리나, 양이 많아도 너무 많던 밥이나. 또 그 위에 얹어진 하얀 생선 살까지.

그래. 미묘하게 이어지던 그 분위기. 평화롭고, 가벼운 잔소리를 하며, 그렇게 뚜렷하게 이어지던 분위기. 거기까지 생각하자 어떤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떠오른 것을 곧장 내뱉었다.

“엄마가,”

있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그런 말이 나올 뻔했다. 나는 말을 삼키며 웃어 보였다.

“해 준 밥 같아요.”

곧 잠시 멈춰졌던 요리가 계속되었다. 다시 시선은 내게서 스튜디오로 옮겨졌고, 다시 내게 질문이 오는 일 없이 평탄한 녹화가 계속되었다.

그 소란스러움 사이에 앉아, 나는 약간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고, 과거와 미래가 되지 못할 기억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가 도망치듯 흩어져 버린다.

우우웅. 우우웅.

들릴 리가 없는 진동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미 그 잔해마저 봉해진 채 매니저에게로 갔는데 말이다.

‘아버지.’

우우웅. 우우웅.

……무슨 전화였을까. 그럼에도 궁금하다는 게 비참했다.

* * *

‘여기 꼭 얌전히 있어야 해!’

매니저보다도 극성스레 당부한 하대진이 그렇게 말하곤 자리를 뜬 지 10분. 나는 방송사 1층에 있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놈이 안겨 준 초코라떼를 휘휘 젓고 있었다. 이거 쟤 입맛일까.

한 입 마신 초코라떼는 그 이름에 걸맞게 매우 달았다. 난 도저히 먹지 못할 정도로. 두어 번 도전하다 만 이후로 이건 내 유일한 장난감이 되었다. 핸드폰도, 무엇도 없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거였다. 음료 휘젓기.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진짜 왜 전화했지. 번뜩 떠오른 생각을 애써 억눌렀다. 신경 쓰지 않는 게 답이다. 관심 두지 말자. 그럼에도 이젠 존재조차 사라진 핸드폰이 아른거리는 것 같다. 그냥 통화 버튼 눌러서 소리라도 들을 걸 그랬나. 쉽게 오는 기회도 아닌데.

첫 번째 회귀 때. 나는 그런 고심을 했었다. 어쩌다 내가 이 정도까지 욕을 먹게 됐을까. 얼마나 욕을 먹었냐면, 엘앤엘은 몰라도 주선율은 알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었다.

회개를 다짐한 이후 한참을 고민했다. 왜 그렇게 됐을까. 내가 너무 싸가지 없어서? 오만해서? 팬 사인회에서 그 난리를 쳐서? 모든 게 이유 같았고 모든 게 문제 같았다. 그리고 나는 최종적인 문제의 끝에 도달했다. 그 문제들을 돈으로 막아서.

예전에 본 영상에 그런 게 있었다. 줄줄 물이 새는 곳에 접착테이프나 고무 같은 걸 붙여서 누수를 막는 그런 영상. 두 가지의 색이 온전히 같지 않은 이상, 물은 막을 수 있을지언정 새는 곳을 막은 그 흔적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그 아주 이질적이고 눈에 띄는 흔적은 마치 누군가에게 한때 여기에 어떠한 문제가 있었음을 남몰래 속삭이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랬다. 나는 문제 덩어리였다. 그 누구도 제어 못 할 망아지였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뛰어다녔다. 당연히 트러블은 많았고 구설수도 많았으며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하는 일도 많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실시간 검색에서 내 이름이 사라졌다. 내 연관 검색어에 줄줄이 달려 있던 건 전부 다 사라지고, 나와 관련된 글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처음에는 티가 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적어도 난 알았지만. 그땐 데뷔 초였고, 뭣도 몰랐고, 멍청했으니까. 원래 다 그러는 줄 알았다. 그렇게 자연스레 사라지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잦아지니까 하나하나 티가 났다. 시작은 약간 이질적인 테이프 끝이었겠지만, 그걸 잡아 뜯고 나니 모두가 물이 새 나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이명이 붙었다. 「빽만 믿고 설치는」 그런 웃기는 타이틀. 그걸 알아차린 건 한참 후였다. 회귀를 하고도 한참 후에야 알아차렸다. 그런 타이틀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나는 곧장 그게, 당신이 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대체 왜 그랬을까? 차라리 그냥 내버려 뒀으면 티라도 안 났을 텐데. 아니, 내버려 뒀다가 뒤가 파여 자신이 들통날까 봐 그랬나? 세간에 망나니 아들로 공식 선언 받을까 봐? 씨발. 그게 두려웠어, 당신은?

아니, 아니. 그만해. 치밀어 올랐던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테이블에 바싹 붙어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탓이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몸이 다 뻐근하다.

애써 생각을 그쪽으로 돌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기지개를 켰다. 아직도 안 왔네. 금방 오겠다던 하대진과 매니저는 어디에서 잡히기라도 했는지 통 올 생각을 안 한다. 그사이 방송국 안은 적막해졌다. 바깥은 몰라도, 적어도 여긴.

카페에는 방송국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 잘 모르겠는 사람들이 몇. 듬성듬성 사람이 찬 카페 안을 이어 방송국까지 훑어보았다. 얼마 없는 사람들이 침묵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다들 바쁜지 저마다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긴다. 그 무기질적인 얼굴과 사라진 표정들을 살피다, 문득 시선이 닿은 곳은 조금 빠른 속도로 걸어가는 여자였다.

여자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잰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시선이 닿은 이유는 모르겠다. 연한 빛의 긴 치마 때문일까? 아니면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시선이 갔나?

무심히 생각하며 여자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침묵을 울렸다. 선명한 소리에도 기이함을 느끼지 못하고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연한 치맛자락이 걸을 때마다 나풀거리는 게,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게 코앞에 있는 사람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이렇게나 먼데도 저리 눈에 띄다니.

어쩌면 이 순간 알아챘어야 했을지도 몰랐는데. 그리고 꺾어지며 주변을 흘깃 보는 얼굴에,

덜컹!

“아.”

멈춰 선 여자가 잠시 핸드폰을 확인한다. 길게 어깨선을 가린 머리카락. 단정하게 내리뻗은 색 옅은 머리. 하얀 얼굴. 가만히. 잠시, 아. 세상에. 너…….

‘선율아!’

세계가 겹쳐 들었다. 네가 날 돌아보았다. 놀란 표정도, 슬픈 표정도,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까만 시선은 날 지나쳐 다시 정면을 보고, 다시 걸음을 내딛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게 상처가 됐다. 날 몰라봤다. 아니, 당연하다. 넌 날 모르니까. 그 시간들은 전부 오지도 않은 과거에서 왔으니까.

그래도 네가 날, 몰라봐서. 아니, 잠시, 잠시만. 나는 멍청히 그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네가 또 내게서 떠나간다.

“윤하늘!”

이름을 부르며 내달렸다. 머리카락 한 줌만 남기고 사라진 여자는 돌아보지 않는다. 코너에서 사라진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거기까지 달려가는 수밖에 없지.

쿵. 쿵. 세상이 울렸다. 호흡이 차올라 터지듯 내뿜어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널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라도 된 것 같았다.

뛰어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너는 그대로 그렇게 신기루인 양 사라질 것 같아서. 날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 응시한 네가 미워서, 세상을 빤히 응시하는 그 시선이 참 그리웠어서. 그래서 날 모르는 너라도 그저 너무 좋아서.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제발, 하늘아, 제발.”

네 이름을 속삭이며 코너를 꺾었다. 빌어먹을! 엘리베이터 승강장이었다. 여섯 개나 되는 승강기를 쭉 둘러보다 닫혀 가는 문 하나를 발견한다. 급하게 달려들어 올라가는 버튼을 꾹 눌렀지만, 씨발! 내려가는 승강기다.

안에 탄 사람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곧장 문이 닫혔다. 여기에 있었을까. 있었겠지? 나는 멀거니 꽉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몽롱한 의식이 점점 선명해져 갔다.

그리고 이어진 허탈함을 넘어, 다시금 날 잠식한 건 뭘까. 이 기분은 뭐라고 표현하는 걸까. 정의할 수 없는 감정과 단어들이 온몸을 꿰뚫듯 지나갔다. 그 감정의 결 하나 잡지 못했지만 모든 것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문장 하나였다.

널 만날 수 있어. 당연한 이야기였다. 우린 이미 한 번 만났던 인연이잖아. 그대로만 따라가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에 와서, 이렇게 널 보고 나니, 그건 다른 의미가 되었다.

“윤하늘.”

내뱉은 단어가 다시 입 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간다. 아가리를 벌리고 혀를 타고 목구멍으로 들어가, 내 속에서 다시 단어는 깊은 탐험을 했다. 속 하나하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네 이름이 돌아다닌다.

‘선율아!’

‘너랑 내가 있으면 넌 늘 주선율이네.’

‘괜찮아, 선율아. 상처받지 않아도 괜찮아. 넌 언제나 노력하고 있잖아. 다들 알고 있을 거야. 다들 알고 있는데 아직 준비가 되지 못한 거야.’

‘그러지 마, 선율아. 넌 나의 선율이잖아. 나와 있으면 늘 너는 주선율이잖아.’

‘미안해. 미안해, 선율아. 나, 나 그 사람이 좋아졌어.’

‘나, 그 사람이 좋아.’

‘고우혁이, 날 인정해 준 그 사람이, 너무. 너무 좋아.’

과거의, 혹은 미래의, 혹은 신기루의 네가 귓가에 속삭였다. 닫힌 문이 끔찍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건 하나의 동아줄같이 보였다. 네가 했던 말들이 귓가를 속삭여 댄다. 달콤하기도, 아주 쓰기도 했던 말들은 지금 와 보면 그저 하나의 추억이다. 하나의 기대감이다.

그리고 그 순간, 다음 할 일이 생각났다. 너를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만나고 싶지 않아 하던 모든 망설임들은 그 하늘거리는 뒷모습 하나에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온전히 내 속에 남은 건 희망. 아니 그리움. 아니 애틋함. 아니 어쩌면 그 행복한 모든 것들.

몸을 돌렸다. 벌떡 일어나며 가득 차 있던 초코라떼를 쏟은 것 같기도 했다. 돌아가서 사과해야지. 아니, 매니저 형한테 전화해야지, 아니. 아니지, 나 핸드폰 없잖아. 짧게 웃음이 새 나왔다. 오늘 막 있었던 일조차도 잊을 정도의 감정이었나.

보고 싶어. 만나게 해 줘.

“하늘아.”

내딛는 걸음도, 내뱉은 목소리도 과거로 돌아간 듯. 차오른 감정은 삶의 이유와 잃어버린 생기가 되어. 되새기고 속삭인 목소리들은 하나의 거대한 기대감이 된다. 아니, 하나의 큰 믿음이 된다. 그건 날 걸어갈 수 있게 했다.

가시밭길이라도 걸어갈 수 있었는데, 내가 틀렸다. 널 만나러 가는 길이 어떻게 가시밭길이야. 네가 내 전부인데.

“주선율!”

“야, 너 어디 있었어! 핸드폰도 없는 게 어딜 싸돌아다니고 진짜!”

매니저 형과 대진이가 급하게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헉헉거리며 숨차하는 매니저 형의 팔을 붙잡았다. 그가 의아하게 날 바라본다.

“형. 부탁이 있어요.”

“혀, 형? 너 지금 나한테 형이라고 했니?”

그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하대진을 급하게 돌아보았다. 나는 그 시선이 돌아가기 전에 팔을 흔들며 꽉 움켜쥐었다.

“나, 여기서 하는 드라마 오디션 볼 수 있게 해 줘요.”

“뭐, 뭐?”

“너, 너, 너 미쳤어?? 네가 연기를 하겠다고?!”

기가 막혀 하는 매니저 형보다 대진이가 먼저 버럭 외치며 내 어깨를 붙들었다. 진심으로 내 정신 건강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둘 다 그랬다. 아, 나 처음에 연기하겠다고 했을 때도 저런 표정을 지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모든 게 우스워져서 웃음을 터뜨렸다. 맹한 표정을 짓는 대진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걱정 마. 할 수 있어.”

네가 모를 미래에서 몇 번 해 봤거든.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았다. 널 만나니 그랬다. 그냥 모든 게 다 좋을 것만 같아. 두 사람 뒤로 쏟아지는 노을빛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하늘아, 난 다시 널 만날 거야.

* * *

“솔직히 말해 봐. 너 미쳤냐?”

“…….”

최백이 답지 않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쳐다보는 모습이 퍽 진중해 보였지만, 글쎄. 미친 사람이 제 입으로 미쳤다 말하는 경우도 있으려나 모르겠다. 대꾸 없이 어깨를 으쓱이자 최백이 허, 하고 소리를 냈다.

“뭔 놈의 빌어먹을 연기야. 게다가 뭐? 오디션? 네가 살면서 오디션을 봐 보긴 해 봤어?”

“…….”

그건 또 할 말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오디션이란 존재하지 않긴 했다. 첫 번째 회귀 때도 엘앤엘의 인기가 필요했던 드라마 쪽에서 오디션 없이 조연 한 명 섭외하길 원했던 거라 바로 들어갔었고. 엘앤엘이 될 때도 없었고. 나는 눈을 굴리다 대꾸했다.

“걱정 마세요.”

“…….”

최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심중을 캐기가 어렵다는 얼굴 같다. 잠시 날 쳐다보던 놈이 짜증스레 몸을 풀다 노래를 재생했다. 이번 컴백 곡이다. 자리에서 가볍게 스트레칭하며 연습실 바닥을 두어 번 뛰기도 한다. 노래는 자연스레 2절 후반부에서 시작되었다.

30초 후, 혹은 그보다 조금 짧거나 긴 그 사이의 텀이 지나면 다시 노래는 처음부터 재생되겠지. 최백은 그사이 몸을 이리저리 풀고 있었다. 그게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것을 깨닫자, 놈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만 노력하는 거 같아? 남들 다 해, 씨발. 원래 남들 다 그렇게 산다고.’

“자주 연습하러 와요?”

“욕 듣고 싶어서 묻는 말이야? 대체 네 직업이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놈이 스트레칭을 하다 말고 뒤를 돌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여기에 있을 줄 몰랐으니까 하는 소리 아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을 다문 건 얼마 전까지의 나는 여기에 올 생각은 쥐뿔도 안 했기 때문이다.

내가 대꾸를 하지 않자 최백은 코웃음을 치더니 팔을 위로 쭉 뻗으며 목을 좌우로 움직였다. 그러고는 대수롭지 않게 툭.

“다들 매일 와.”

“…….”

그 단조로운 목소리에 흠칫, 짧게 몸을 떨었다. 최백은 눈을 감고 고개를 기울였다. 딱 마침 노래가 끝나 가고 있었다.

“너만 안 오지.”

원망일까? 그 목소리에 담긴 게 뭔지 파악이 되질 않아 눈을 끔뻑이는 사이 노래가 시작됐다. 최백은 내가 있다는 걸 잊은 사람처럼 곧장 몸을 틀어 연습을 시작했다.

하대진이 질겁하는 귀여운 포즈도 망설이지 않고 하는 모습을 멀거니 쳐다봤다. 시선은 정면으로.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마치 지금 카메라가 돌아가는 것처럼. 무대 위에서처럼.

이상한 일이다. 아주 오랫동안 함께 연습해서, 처음 보는 장면은 아닐 텐데. 최백이 춤추는 것을 처음 보는 느낌이었다.

연습에 완전히 몰두했는지, 최백은 한참을 춤추다 1절이 끝나 내 쪽으로 오는 동선을 따라 몸을 튼 후에야 내가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만 있다는 것을 보고는 춤을 뚝 멈췄다.

느릿하게 땀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이 꽤 색스럽다. 촬영 팀이 있었으면 촬영하려 애 좀 썼을 것 같은 모습이다. 나른하게 날 쳐다보던 최백이 방긋 미소 짓는다.

“안 할 거면 꺼져.”

“제가 형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뭔 개소리야. 네가 날 어떻게 알아. 나도 널 모르는데.”

최백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짜증스레 대꾸했다. 이번 기회는 날아갔다 싶은지 춤을 더 이상 추지 않고 멀리 치워 둔 물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퍼뜩 무언가 생각났는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근데 너 씨발, 이딴 식으로 몰래 연습하러 다녔어? 네가 무슨 연습실판 우렁각시야?”

우렁각시를 어떻게 여기에 비교하나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아니다. 첫 번째 회귀 때도 아니었다. 난 티란 티는 다 내면서 다녔다. 그땐 몰랐지만.

“그럼 왜 갑자기 그렇게 실력이 는 건데. 너 진짜 사람 갖고 놀았냐?”

“아뇨.”

“아니면, 뭐 하루아침 사이에 춤추는 능력이라도 생겼어? 그렇게 말하고 싶냐?”

최백의 표정이 화려하게 변했다. 진짜 빡친 모양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짧게 고민하다 솔직하게 대꾸하기로 했다. 적당히 둘러댈 말을 못 찾겠다.

“미래에서 했거든요.”

“미친 새끼.”

“…….”

그래 뭐……. 예상은 했다. 최백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물을 마시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거울을 돌아봤다. 거울 안의 내가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회귀 직후에 봤던 모습과는 다른 표정이다. 나는 그 얼굴을 쳐다보다 최백이 한 것처럼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나아지지 않아도 괜찮다. 예전에는 나아지기만을 바랐는데, 이젠 그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냥……. 떳떳하고 싶었다. 네 앞에서. 저번에는 너무 비참한 순간에 마주했으니까, 이번만큼은 나 스스로한테라도 떳떳해지고 싶었다. 그날과는 다르게, 그 마지막과는 다르게. 완벽한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동화책처럼.

최백이 말없이 자리에 가서 서는 게 얼핏 보였다. 곧이어 노래가 다시 시작되었다. 운동화가 마찰되어 삐걱거리는 소리가 뭉쳐 허공을 울렸다.

* * *

씨발. 잊고 있었다. 신은 죽었지.

“아, 감독님께 들었습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갯짓을 하는 모습을 멀거니 쳐다봤다. 옆에서 매니저가 작게 대박,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감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도 처음에 봤을 때 그랬으니까. 그런 식으로 그 좋은 관계가 끝날 줄은 몰랐어도, 어쨌거나 처음엔 웬 조각상이 말을 하는 줄 알았다.

재회를 하는 순간을 떠올려 본 적은 없다. 아니, 얼핏 하긴 했었다. 오디션 보겠다고 했을 때. 연기를 하게 되면 언젠가 보게 될 거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미래에 마주쳤던 그 순간이 오면 그 얼굴을 보게 되리라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럼 그때 표정 관리를 잘해야겠다고 결심까지 했는데.

“배우 고우혁이라고 합니다.”

재회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 내밀어진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각같이 생긴 놈은 손마저도 잘생겼다. 멍하니 그 빌어먹도록 잘생긴 손을 보고 있자니 굳이 표정 관리를 걱정하지 않았어도 충분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놈을 빨리, 대뜸 만나게 됐으니 말이다.

넋이 나간 얼굴이 절로 만들어졌다. 놈이 잘생겨서 다행이다. 너무 잘생겨서 넋 놓은 것처럼 보일 테니까.

“주선율!”

옆구리를 찌르는 손에 매니저를 멍하니 돌아보았다. 매니저는 내 얼굴을 보곤 흠칫하더니 헛기침을 하며 고우혁 쪽으로 눈치를 줬다.

그래, 고우혁. 고우혁.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틀어 고우혁을 쳐다봤다. 놈은 내가 한참을 내민 손을 구경만 했는데도 여전히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씨발, 왜 사람까지 좋고 난리야. 나는 무표정을 가장하며 그 손을 잡아 두어 번 흔들었다.

“주선율입니다.”

매니저가 옆에서 깊은 한숨을 쉬는 게 느껴졌다. 아니, 이게 내 한계였다. 대뜸 전 여친의 남친. 아니지, 씨발 이건 뭐라고 말해야 해? 미래의 어느 순간 있었지만 나중에 헤어질 여친이 훗날에 사귈 애인이라고 해야 해?

매니저가 가져온 대본은 어마어마했다. 최근 고우혁이 한창 나오고 있는 드라마에 특별 출연이라니. 내가 멍청했다. 저번에 TV에서 하던 방송이 S 스튜디오에서 하는 드라마인 줄 몰랐다니. 걘 그럼 거기에 왜 왔지? 다른 오디션을 보러 왔었나?

윤하늘의 옅은 머리카락이 퍼뜩 떠올랐다. 예쁘게 차려입고 온 걸로 봐선 특별한 자리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넌 치마보다 바지가 훨씬 편하다고 투덜거리곤 했으니까. 아마, 그러니까 분명 중요한 자리였을 텐데.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작가님께서 오디션 인상 깊게 보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오디션, 30분도 안 돼서 쫓겨나 왔는데. 매니저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날 힐끔힐끔 보며 고우혁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어색한 모습에도 나와 매니저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한 고우혁이 다음에는 촬영장에서 뵙자고 하곤 그대로 떠나갔다. 아. 여전했다, 저 남자는.

‘안녕하세요, 고우혁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주선율 씨. 하늘 씨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어느 날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우혁이 멀어지자 매니저가 옆에서 답지 않게 나를 툭툭 치며 고우혁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지만 그중 어떠한 말도 내게 와닿지는 않았다. 현실감이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아니, 현실감이 아니라 기분이 바닥으로 추락한 걸까.

고우혁이 돌아섬과 동시에 기분 좋던 나날이 다시 이질적으로 멀어져 간다. 저 멀리 사라지는 뒷모습에 놀람 또한 사라지고 다 사라져 버린 줄만 알았던 감정들이 다시 날 타고 기어올랐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감정의 추락은 끝없는 반복이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날아오를 듯 기뻤다가 추락한 건 첫 번째 회귀에서도 똑같이 느낀 파동이다.

‘나, 그 사람이 좋아.’

울먹이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 목소리에 반응하며 온몸에 달라붙어 꾸역꾸역 파고드는 감정들은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분노? 아니면 공포?

손끝이 차가워졌다. 예전에도 나와 고우혁의 직접적인 접점은 없었다. 연인의 직장 동료와 직장 동료의 연인쯤 됐지.

하늘이가 최초로 잡은 동아줄이 바로 저 남자와 한 작품이었다. 나는 그저 곁에서 응원했었다. 잘될 거라고. 넌 여태까지 빛을 못 본 거니까, 분명 이번에는 빛을 볼 거라고. 그 고우혁이 나오니까 보는 사람도 많을 거라고.

나는 널 그렇게 믿었다. 변하지 않을 거라고. 날 계속 사랑해 줄 거라고. 아무것도 모른 채. 그리고 시간이 이겼다. 멀리 떨어졌던 시간만큼, 그 마음은 고우혁에게로 옮겨졌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만났네.”

“뭐?”

되묻는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린다. 시선은 이미 사라져 버린 그 흔적 끝에 있다. 하늘아. 내가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쟬 너한테서 떼어 놓을 수 있어?

* * *

어제 고우혁을 만난 이후로 정신이 몽롱했다. 어떤 특별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뚜렷한 생각 없이도 거의 넋을 빼놓은 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네가 입고 있었던 연한 빛의 긴 치맛자락이 떠오르고, 네가 떠오르고, 과거 같은 미래가 떠올랐다가, 빌어먹을 고우혁으로 끝나는 뻔한 생각을 드문드문 할 뿐이었다.

윤하늘과 고우혁이 만나려면 사실 한참이나 더 남았다. 하늘이는 지금으로선 제대로 된 역할 한 번 해 본 적 없는 신인 중의 신인일 테니 당연했다.

지금은 매번 떨어지는 오디션에 하루하루 기가 죽어 가고 있을 거다. 하지만 아니다. 너는 점점 하늘을 날아오르다, 곧 신예 스타가 될 거다. 당연했다. 윤하늘은 연기를 엄청 잘했으니까.

두 사람이 친해진 게 바로 그거였다. 연기. 나는 낄 수 없는 분야. 같은 드라마가 확정되어 친해졌다가, 아무도 모른 채 깊숙이 잠들어 있던 그 재능을 고우혁이 알아챘다. 그리고 그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내가 아는 건 이 정도다. 두 사람 사이의 제대로 된 이야기도 알지 못했다. 수많은 이유와 사족들이 달리지만 짧게 정리하자면 그랬다. 바빠서. 그런 이유로 우린 그렇게 자연스레 멀어진 걸지도 모른다. 나만 모른 채로 그렇게.

아른거리는 날들의 기억을 끝으로, 상념이 뚝 끊겼다. 소파에 누워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햇살이 눈을 찌른다. 옆으로 누웠는데도 곧장 파고드는 볕이 날 속속들이 들여다볼 듯 따갑게 내리쬈다.

눈부신 걸 막기도 싫어 멍하니 바닥을 훑었다. 아니, 내가 보고 있는 건 바닥도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초점이 흐릿한 세상은 뚜렷한 무언가 하나 없이 몽롱하기만 하다.

“이제 보니.”

짧게 내뱉는 목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검은 바지가 보였다. 고개를 틀자 상대방의 모습이 보였다. 최백이었다.

“너, 화초 같네.”

뭐라는 거야. 생각을 잇기도 귀찮아서 눈을 깜빡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원상태로 돌아왔다.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나태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고우혁의 타격이 그만큼 컸다. 그 새낀 여전히 멋있었다. 좆같게. 저걸 어떻게 이겨.

앞에 그림자가 졌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최백이 불쑥 코앞으로 다가왔다. 무릎을 굽혀 앉아선 나와 시선을 마주한다. 최백이 날 찬찬히 훑어보며 생경한 표정을 지었다.

날 처음 본 사람처럼 뚫어져라 관찰하며 내 너부러진 모습을 훑어본다. 최백의 빤히 쳐다보는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아니, 최백을 보고 있나? 모르겠다. 난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한눈판 사이 컸다가.”

“…….”

“한눈판 사이 죽어 버리네.”

그제야 초점이 맞았다. 나는 곧장 눈을 굴려 최백을 쳐다봤다. 아니, 노려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네가 뭔 상관인데. 그런 생각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가 만다. 내 속을 알기라도 하는 듯 최백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웃는 타이밍도 기가 막힌다. 언제나 그랬듯, 놈은 내 속을 잘 긁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과거의 잔재일 수도 있겠지. 회귀 전엔 개싸움을 하던 사이였고, 회귀 후엔 일방적인 사이였다. 그리고 지금은……. 모르겠네.

“주선율.”

짧게 부르곤, 고개를 기울이며 눈꼬리를 휜다.

“왜 넋 나간 놈처럼 그러고 있냐?”

넋이 나갔으니까 그렇겠지. 입을 움직이기 싫어 속으로만 대꾸하고 말았다. 최백은 듣기라도 한 것처럼 웃는 얼굴을 멈추곤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새낀 왜 뻑하면 웃었다 말았다 하는 걸까. 기분 나쁘라고 하는 건가. 버릇인가. 아니. 뭐든 상관없나.

잠깐 수면 위로 떠올랐던 정신이 점점 다시 아래로 침잠했다. 한참을 잔 것 같은데 또 졸렸다. 이 순간만큼은 고우혁도, 하늘이 너도 상념에 빠지도록 만들지 못한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훅. 그러면서 포근한 곳처럼 훅. 그렇게,

“야.”

찰싹. 촉각보다 청각이 큰 행위에 눈이 번쩍 떠졌다. 아, 눈을 감고 있었나?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최백은 내 이마를 손끝으로 쳐 놓고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어쩐지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놈은 내게 질려했고, 아니, 그 이전에 다른 누구한테 닿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니……. 아니,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놈과 친한 편은 아니었다. 애초에 내게 친한 사람이라는 분류 자체가 없긴 했지만. 어쨌건 그냥. 꽤 이상한 기분이었다. 최백이 아프지도 않게, 마치 정신 차리라는 듯 툭 머리를 치는 게.

최백은 내 혼란스러움은 관심에도 없다는 양,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그 행동을 따라 고개가 돌아갔다.

“가자.”

“…….”

나는 결국 입을 벌리고 놈을 쳐다봤다. 최백, 미쳤나? 그 생각이 퍼뜩 든 건 당연했다. 최백이 나보고 어딜 가자고 한 것도 놀랍지만 그 장난스러운 미소가 더 놀라웠다.

술 마셨나? 알코올 냄새 안 나는 술도 있나? 생각이 길어지며 빤히 쳐다보는 시간 또한 길어지자, 최백의 얼굴이 점점 환해졌다. 아, 이런.

“가자고, 새끼야.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라.”

최백이 날 데려간 곳은 당연하지만. 아니, 씨발, 이게 당연한 건가? 아니, 당연한 것 같기도 한데 어이가 없네. 날 데려간 곳은 연습실이었다.

“지금 너, 반 박자 느려.”

노래가 끝나자마자 최백이 말했다. 나는 거울 너머의 눈과 시선을 마주하며 대꾸했다.

“스케줄 없어요?”

“지금 하고 있잖아. 연습.”

“…….”

더 이상 뭐라 말하기도 귀찮다. 최백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내게서 시선을 떼고선 하이라이트 군무 부분을 한 번 더 연습해 본다. 그 깔끔한 실력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무슨 메인 보컬이 메인 댄서처럼 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이제 알 일이지.

놈은 놀랍게도 노력파였다.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랬다.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스케줄을 뛰고 나서도 여기 와서 몇 시간이고 연습하는 저 체력이 경이로울 지경이다.

“야, 화초.”

씨발. 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놈을 노려봤지만 최백은 그 모습이 기꺼운지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든다. 마치 ‘그래, 내가 너 기분 나쁘라고 그렇게 불러 봤어’ 하는 얼굴이다.

최백은 여기 오는 내내 나를 화초라고 지칭했다. 예전부터 느꼈는데, 난 저놈하곤 상성이 맞지를 않는다. 아니면 여태까지 수백 번 했던 개싸움의 여파든가.

“화초라고 하지 말라고요.”

놈에게 이미 여러 번 했던 말을 또 하자 최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도 그 소리야? 너 끈질기네.”

“…….”

내가 할 소릴 왜 네가 하는데.

“왜, 기분 나빠?”

그러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성격 나빠 보인다. 저러고도 놈은 회사 내의 직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얼굴 잘생긴 게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려 주는 예시 같다. 속으로 신경질을 부리는 게 티가 났는지 거울 사이로 시선을 마주하던 최백이 뒤를 돌아 날 직접적으로 쳐다봤다.

“걱정 말라며.”

“……?”

최백이 대뜸 의미 모를 소리를 했다. 그러더니 픽 코웃음을 친다.

“걱정은 무슨. 너도 그냥 적당히 지껄인 말이겠지만, 내가 씨발 미쳤다고 네 걱정을 하겠냐? 강이헌 꼴 나게.”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무심하게 말한다. 그건 참 최백답지 않았다. 최백은 웃지도, 신경질적이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오히려 담담한 어조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어들의 나열에 가만히 시선을 피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뭔 놈의 빌어먹을 연기야. 게다가 뭐? 오디션? 네가 살면서 오디션을 해 보긴 해 봤어?’

‘……걱정 마세요.’

그건 얼마 전 연습실에서 만난 최백과 했던 말이었다. 널 만나고, 걜 만나기 전에. 목적 없는 희망이 솟아올라, 그저 널 다시 만나기 위해. 조금 더 좋은 평으로 만나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 기분이 침잠했다.

결국. 모든 게 쓸모없어진 기분이었다. 망설임의 시간은 다시 찾아오고, 사라졌던 모든 감정들이 다시 온몸을 갉아먹는다. 희망, 혹은 그리움, 혹은 애틋함, 혹은 그 행복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선. 불안과 불행. 분노. 슬픔. 안 좋은 예감만이 날 가득 채웠다.

윤하늘은 그런 존재였다. 처음으로 내가 온몸으로 행복하다 말할 수 있게 만든 사람. 희망적인 모든 것들을 쥘 수 있도록 했던 사람. 윤하늘과 함께했던 과거에는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았다. 힘들고,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았다. 네가 있었으니까. 넌 날 알아줬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고우혁은 그런 존재여서. 모든 감정들을 내던지게 만드는 그런 존재여서. 너를 잃게 만든 남자라서. 그래서 나는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에 불안해졌다.

그러자 다시금 나는 며칠 전으로 돌아왔다. 무엇이든 상관없는. 죽어 버린, 포기한, 체념한. 그 모든 것의 시작은 회피였다. 부정적인 감정에게서 시선을 돌리기 위하여.

“야.”

이마가 툭 밀어졌다. 물끄러미 최백을 올려다봤다. 손바닥으로 내 이마를 친, 아니. 밀어냈던 최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날 쳐다봤다. 그러더니 대뜸.

“아! 이 미친 새끼야! 놔!”

“너, 욕도 하냐?”

내 코를 잡아 비틀었다. 대체 손에 얼마나 힘을 주는 건지 코가 나가떨어질 것 같아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아 뜯으려 노력하며 고성을 지르자 최백 새끼가 웃음기를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놓으라고! 두어 번 더 고함을 지르자 최백이 꽉 잡아 비틀었던 코를 놓아줬다. 미친 새끼. 이 새끼랑 상종하기가 싫다.

“난 네 걱정은 안 해.”

그건 강이헌이 할 거니까. 그 이어진 말에 기가 막혀 놈을 쳐다봤다.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네가 내 걱정 안 할 건 엘앤엘은 물론이고 이 회사 사람 모두가 다 알 거다. 신경질적으로 놈을 노려보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백이 대뜸 그런 말을 했다.

“차라리 그렇게 굴어.”

무던한 어조였다.

“당장 나가 죽을 놈처럼 굴면 신경 쓰이니까 차라리 그렇게 굴라고.”

그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놈을 쳐다봤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최백이 등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바닥에서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던 최백의 핸드폰이 뚝 끊겼다. 몸을 숙인 최백이 노래를 끊은 탓이다.

“신경 쓰이게 하지 마. 짜증 나니까.”

핸드폰을 두드리며 최백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노래가 꺼진 적막한 공간에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거울에는 최백이 무심한 얼굴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 거울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그런 생각이 들자 기묘한 기분을 감출 길이 없었다. 최백이 내뱉고 행한 모든 것들이 수많은 상념들을 그대로 날아가게 만들었다. 놈은 감정 속에 가라앉던 날 강제로 끌어냈다. 그 모든 것은 극히도 최백스러웠고, 그랬기에 최백답지 않았다. 결국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나왔다.

“너…….”

덜컹! 문 열리는 소리에 뒷말이 묻혔다. 나는 입을 다물고 몸을 돌리는 최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몸을 돌려 마주한 시선이 길다. 그럼에도 그 눈에서 잡아낼 수 있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어서, 나는 주먹을 꾹 내리 쥐었다. 윤하늘도, 고우혁도 더 이상 날 뒤흔들지 않았다. 그게 싫어서, 혹은 낯설어서 시선을 먼저 내렸다.

너 뭐야? 최백. 너 대체 뭔데?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내가 죽은 뒤에 최백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게 참. 궁금하네.

걸음 소리가 들렸다. 곧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몸이 돌아갔다.

“세상에, 선율아!”

감격스러운 목소리다. 강이헌이었다. 정말 간만에 보는 얼굴이라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위아래로 그를 훑었다. 오늘도 스케줄이 있었는지 얼굴이 화려하다. 강이헌은 엘앤엘에서, 아니 이젠 소속사 더 콰르텟에서도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였다. 스케줄 끝나고 바로 온 건가?

“너 또 안 씻고 바로 왔냐?”

최백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또? 원래 자주 그러나? 그러고 보니 지난 회귀 때도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한 기억과 이후 이어지는 감정을 애써 누르려 신경을 강이헌에게 돌렸다.

또 도돌이표처럼 뻔한 생각을 하려 하지. 매번 그랬듯. 이쯤이면 버릇이다. 생각하고, 후회하고, 결국 밑으로 내려가는 절망 어린 기분. 이건 뭔 놈의 버릇인지 모르겠네.

강이헌은 대체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에 기쁜 기색이 만연했다. 제게 말을 건 최백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날 바라보며 감격에 차 있던 강이헌이 내 어깨를 강하게 토닥였다.

“그래, 선율아. 너 이렇게 연습 올 줄 알았어. 잘 왔어! 정말.”

강이헌이 목멘 소리를 냈다. 눈가가 붉다. 감동이라도 한 얼굴이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스스로 온 거 아닌데. 슬쩍 시선을 피하자 최백이 웃는 소리를 낸다. 조용히 해라, 최백을 힐끔 노려봤지만 그 시선에도 최백이 방긋 미소 지었다.

“이 새끼 숙소에 너부러져 있던 거 내가 주워 온 건데.”

“…….”

말을 해도. 표정을 구기며 고개를 돌리자 최백이 소리 내 웃는다. 저 새끼는 내가 짜증 내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가, 잠시. 저 멀리 굽이치며 사라졌던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최백의 덤덤한 목소리 하나가 떠오른 탓이다.

‘신경 쓰이게 하지 마. 짜증 나니까.’

넌…….

“이럴 게 아니지! 우리 그럼 좀 맞춰 볼까? 군무 부분 어때? 거기 박자 어렵지 않아?”

강이헌이 겉옷을 벗으며 연습실 구석으로 걸어갔다. 대충 구석에 옷이며 가방을 내려놓더니 운동화 한 켤레를 꺼내 들었다. 뒤를 돌아 최백을 확인하니 그도 어느새 연습실 중앙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자주 이렇게 연습했나. 난 왜 몰랐지?

“안 그래도 쟤 반 박자 느리더라.”

“뭐? 반 박자만 느려? 세상에! 우리 선율이 천재인가 봐!”

강이헌이 신발을 신다 말고 감격한 얼굴로 날 돌아봤다. 미친……. 강이헌은 회귀 전이나 후나 어쩜 저렇게 똑같을까.

첫 번째 회귀 때도 그랬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강이헌은 날 믿어 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아니, 아니 어쩌면 아닐 수 있어도. 적어도 강이헌은 언제나 날 많이 배려해 준 사람이었다.

리더라서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천성 같기도 하고. 아니, 천성이 착하다고도 생각했나? 분명히 언젠가 했던 생각일 텐데도 가물가물했다.

하긴, 사실 제정신이 든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두 번째 회귀 직전과 직후의 나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도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고.

“천재보다는 우렁각시 아니냐? 저 새끼, 우리 잘 때마다 와서 연습한 거 같던데.”

“뭐? 진짜? 이럴 줄 알았어! 선율이 역시 엘앤엘에 아예 마음 없었던 건 아니었구나. 진짜… 너무 다행이다.”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목소리가 웅웅 주변을 울린다. 눈을 감으니 그건 마치 꿈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소리들이 울리고, 아득하고, 그와 동시에 이어진 시커먼 세상은 현실감을 떨어뜨린다. 혹시…….

“넌 어디 모자라냐? 너 그렇게 세상 좋게 보다 뒤통수 거하게 맞는다. 요즘 나가는 개인 방송인가 나발인가, 그거 출연료도 안 받고 나가지? 미친 새끼.”

“형들이 얼마나 좋은 형들인데. 어떻게 돈을 받아?”

“…….”

혹시, 나 이미 죽은 걸까?

이거 혹시… 죽기 전의 짧은 꿈같은 걸까. 나 이런 걸 바라 왔던 걸까. 아니면 죽기 전에 이어지는 참회의 순간일까. 자살하고 지옥 들어갈 순서를 기다리며 이어지는 마지막 신기루 같은 건가.

생각을 이어 가니 목소리들이 점점 아득해졌다. 종래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알겠다. 역시 나 머리 쏘고 그대로 죽었지?

“미친 새끼야.”

퍽!

“아!”

뒤통수에서 오는 알싸한 고통과 함께 목이 그대로 숙여졌다. 얼마나 세게 갈겼는지 반사적으로 주저앉으며 뒤통수를 감쌀 정도였다.

“내가, 말했지. 뒤질 새끼처럼 굴지 말라고.”

“이 씨발…….”

정신이 확 들었다. 최백이었다. 미친 새끼가 얼마나 힘을 줬는지 앞으로 꺾인 목도 뻐근하다.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자 최백이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웃음기도 싹 지운 얼굴이었다. 대뜸 뒤통수를 갈겨 놓고 내가 지을 표정을 지가 왜 짓는지 모르겠다.

“내가 죽을 새끼처럼 구는지 안 구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걸 네가 왜 판단하고 사람 머리를 때리는데!”

“오.”

내가 버럭 외치자 최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오?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리자 최백이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움찔 떨었다가 그게 또 짜증 나 표정을 구기자 최백이 눈을 부라리며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고는 제가 때린 뒤통수를 쓱 쓸어내렸다. ……뭐? 이 새끼 뭐야? 기가 막혀 허, 하고 소리를 내자 최백이 한 번 더 머리를 쓸어내렸다.

“이제 멀쩡하네.”

“너 뭐야?”

놈을 알 수가 없다. 놈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너 화초 같네. 짧게 내뱉은 목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그럼 이제 연습해.”

“너 뭐냐고, 새끼야!”

차라리 그렇게 굴어. 당장 나가 죽을 놈처럼 굴면 신경 쓰이니까 차라리 그렇게 굴라고. 최백이 떠들었던 말을 속으로 뇌었다.

한 번 더. 다시 한번 더. 스스로에게 최면이라도 걸듯, 혹은 그 말에서 무슨 의미를 찾으려는 듯. 그렇게 몇 번 더 되뇌다 이를 악물었다. 씨발, 좆같았다. 난 이 기분을 안다.

‘신경 쓰이게 하지 마.’

이건 놈에 대한 기대감이다. 할 놈이 없어서, 이딴 놈한테.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웃기지 마, 주선율. 넌 옛날과 똑같은 애새끼야.’

난 아직도 놈에게 인정받고 싶은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아직도 첫 번째 회귀 때인 것처럼, 나는 아직도 놈에게 인정받고 싶은 거다. 상관없다고, 체념했다고 되뇌었지만 결국 아니었다. 좆같다. 진짜 좆같았다. 씨발, 진짜 거지 같다. 머저리 같아. 나 스스로가 등신 같다. 그래 놓고도. 그렇게 겪어 놓고도.

“…….”

살고 싶나 봐. 나 살고 싶나 봐.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면서, 이제 와서 살고 싶나 봐.

다 지난 일이었다. 전부 다. 날 못 믿겠다 말한 최백도 지금은 없고, 날 사랑한다 말했던 윤하늘도 없고, 미안하다 말했던 윤하늘도 없고, 윤하늘이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며 웃던 고우혁도 없었다. 전부 다 없었다.

‘기억은 이기적이야.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느끼고 생각한 대로 변질되거든.’

심지어 그날의 당신도 이젠 없어.

‘지금은 참 좋지, 선율아? 근데 아냐. 주선율. 정신 차려. 윤하늘은 뭐 다를 거 같아?’

누나.

‘조금만 있으면 너도 다 깨닫게 될 거야. 걔가 널 얼마나 만만히 여겼는지. 걔가 널 얼마나 사랑하지 않았는지.’

왜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세상에 널 사랑해 줄 사람이 어디에 있어.’

씨발, 나한테 왜 그딴 말 했냐고. 왜!

「-걱정하지 마, 여긴 그런 세계야.」

퍼뜩, 고개를 들었다. 최백이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느리게 시선을 내려 최백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쳐다봤다. 놈의 폰에선 익숙한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여긴 충분해, 만족해, 둘 하나 제로 혹은 희망의 세계」

질리도록 많이 들은 노래였다. 진짜 질리도록. 생으로만 따지면 벌써 세 번째 생에서 듣는데, 얼마나 많이 들었겠어.

그런데 참 이상했다. 부르면서도, 들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가사들이 하나하나 귓속을 파고들었다.

「사랑하기도 벅찬 세계……」

위그드라실. 엘앤엘의 두 번째 정규 앨범 타이틀곡.

“…….”

가만히 눈을 마주 보았다. 놈은 언제나와 같이, 같은 부분에서 노래를 틀었다. 브릿지. 노래가 거의 끝나 가지만 몸을 풀기엔 딱 적당한 시점. ……미친놈. 웃음이 새 나왔다.

최백이 말없이 몸을 돌렸다. 연습실 바닥에 핸드폰을 놓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는데 어느새 다가온 강이헌이 내 등을 토닥였다.

“선율아.”

강이헌이 날 바라보았다. 그 다정한 시선에 은근슬쩍 눈을 돌리자 재차 등을 두어 번 두드린다.

“연습하자.”

“…….”

“그리고 밥도 먹고, 술도, 아니. 곧 컴백하니까 그건 좀 그렇다. 술은 나중에 하고. 우리…….”

강이헌이 짧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어느새 몸을 풀고 있는 최백의 뒤로 걸어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많이 이야기하자.”

“…….”

웃겨. 씨발. 눈치만 빨라서.

“형이 신경 못 써 줘서 미안해.”

미친놈……. 그게 왜, 대체 왜 네가 그런 말을 해.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자 한 번 더 등을 토닥인다. 등에서 오는 강이헌의 온기가 빌어먹도록 따뜻했다.

곧 노래가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소리는 그저 핸드폰에서만 울릴 뿐이다. 두어 번 더 노래가 반복된 후에야 연습이 재개되었다.

“선율이 너, 드라마 들어갔다며? 리딩은 했어?”

“이미 진행 중인 드라마라. 다들 바쁘셔서 감독님이랑 작가님이랑 짧게 했어요.”

“얘 완전 조연이래. 거의 엑스트라급.”

“…….”

아니다. 출연 횟수가 짧아서 그렇지 중요 인물이다. 뭐라 반박하고 싶어서 최백을 노려보는데 강이헌이 환한 목소리로 먼저 대꾸했다.

“첫 연기인데 그게 당연하지! 괜찮아, 선율아. 원래 처음엔 다 작은 역할부터 시작하는 거잖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구내식당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다들 나가서 먹나. 그래서 그런지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사람도 많이 없어서 그런지 분위기는 평탄하게 이어졌다.

“요즘 하대진이 얘 존나 챙겨. 막내가 무슨 형을 챙긴다.”

최백이 코웃음을 치며 날 가리켰다. 내가 쳐다보는 건 신경도 안 쓰이는 모양이다.

“정말? 대진이랑 많이 친해졌구나!”

“야. 얘 꼬라지 봐라. 안 챙기게 생겼나. 툭 치면 나가 죽을 것처럼 변해 가는데.”

“…….”

신경질이 확 올랐지만 강이헌의 내려간 눈썹에 입을 다물었다. 강이헌이 내 팔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렇게 많이 말랐나?

“아까 안 그래도 어깨 잡고 놀랐잖아. 뼈만 있어서……. 근데 뒤돌아 세웠는데 얼굴도 창백해서 더 놀랐어.”

얼굴도 창백한가……? 사실 난 잘 모르겠다. 거울을 보는 일도 많이 없었다. 연습할 때나 제대로 보니. 둘은 곧 시답잖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요즘 들어 부쩍 더워진 날씨나, 그럼에도 큰 일교차나, 군무 부분이 과하게 화려하지 않냐, 노래 제목이 너무 거창한 거 아니냐는 짧은 투덜거림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뭐라도 물어볼 줄 알았는데. 그래서 별거 아닌 대화에 내심 안도하고, 내심 놀랐다. 아까는 마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굴어서.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다 같이 회귀한 것도 아니고 첫 번째 회귀했을 시절을 알 리가 없었다.

어쩌면 이게 피해 의식이란 걸지도 모른다. 과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일지도 모르고. 그래, 어떤 이름을 붙이든 상관없으려나. 혹은 상관있으려나. 지금은 그저 하나를 깨달았을 뿐이다. 그리고 혹시 모를 가정 하나에 신뢰도를 올리고 있을 뿐이고.

어쩌면 난. 죽을 생각을 하며 방송에 나가던 그 순간에도. 살고 싶으면서도, 죽고 싶었나. 누군가 말려 주길 바랐나. 다른 이가 슬퍼해 주길 바랐나. 그리하여 결국… 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 새낀 뻑하면 죽어 버리네. 야, 정신 차려.”

최백이 발로 툭툭 내 발을 치면서 말하는 것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짜증 나서. 아니 이 새끼는 왜 많고 많은 방법 중에 가장 기분 나쁜 방법을 쓰는지 모를 일이다.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보다 뭘 보냐는 그 뻔뻔한 얼굴에 멈췄던 식사를 계속했다. 최백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니. 왜 계속 내가 할 말을 지가 하고 내가 할 표정을 지가 짓는지 모를 일이다.

“근데 신기운도 요즘 안 보이던데, 일 많아요?”

“으응? 기운이?”

강이헌이 눈을 끔뻑이며 날 쳐다봤다.

“걔 지금 정글의 생존 찍느라 해외 나갔잖아. 몰랐어, 선율아?”

“…….”

아……. 한동안 안 보이긴 한다 싶었다. 그나저나 정글의 생존이라니, 참 버라이어티한 거 찍는다 싶었다. 언제 나갔대. 관련된 생각이 전혀 나질 않았다. 가만. 그러다 문득 최백이 한 말을 떠올리곤 놈을 노려봤다.

“전부 매일 온다며.”

‘자주 연습하러 와요?’

‘다들 매일 와.’

분명 너 그렇게 말했다.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는 시선에도 꿈쩍하지 않고 최백은 시큰둥한 얼굴로 반찬을 집어 먹는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날 쳐다보며 당연하지 않냐는 듯.

“정글에 있는 새끼를 그럼 연습하라고 불러? 양아치네, 이거.”

“하…….”

이 새끼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 아니, 상성이 안 맞는다. 짜증 난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쳐다보는데 강이헌이 대뜸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백이 형이랑 선율이 진짜 많이 친해졌구나!”

“…….”

감격을 온몸으로 외치는 커다란 남자를 보니 짜증이 금세 사라졌다. 길 가다 마주치면 자연스레 돌아서 갈 것만큼 무섭게 생긴 남자가 잔뜩 풀어진 채 감동을 외치는 게 조금 웃겼다.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꽤 훈훈한 분위기에 부러 아니라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데 최백이 찬물을 끼얹었다.

“난 사람하고만 친구 한다.”

“응?”

최백의 시큰둥한 대꾸에 강이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최백이 음식을 씹다 말고 턱짓으로 날 가리키며 말했다.

“저 새낀 화초잖아.”

“…….”

탁. 신경질적으로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최백을 노려보았다. 뭐라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강이헌이 더 빨랐다.

“세상에!! 애칭이야? 애칭까지 지어 준 거야?!”

“…….”

“둘이 엄청 친해졌네!”

“…….”

눈치 없이 기뻐하는 강이헌을 바라보다 말없이 젓가락을 다시 들었다. 할 말이 없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그냥 내버려 둘까 싶다. 최백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침묵이 이어진다. 그저 강이헌이 기분 좋게 노래를 흥얼거리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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