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번째 회귀
지금 이 시기는 눈 감고도 외울 정도다. 두 번째 정규 앨범 준비 기간. 난 첫 번째 회귀 때 살면서 이 정도로 노력한 게 있나 싶을 정도로 노력했다. 그 과정은 내가 다시 한번 신앙론자가 되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들이었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알았거든. 물론 두 번째 회귀인 지금 와 보면 다른 것도 하나 배웠다. 세상이 얼마나 노력을 배신하는지도.
“야, 너 오늘 똑바로 안 하면 진짜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저 말도 벌써 세 번째다. 모든 게 세 번째인 지금 이 두 번째 회귀의 순간, 나는 다시 무신론자가 됐다. 신은 전부 죽었다.
밴에 올라탄 인원은 나까지 셋이었다. 이 상황도 외울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자주 연습을 빠졌고, 자연스레 안무 구멍이라는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안무 구멍이 구멍인 거 티라도 내고 싶다는 듯 연습에 안 나오기 일쑤니 가장 어린 둘이 늦게 일어나서 늦게 연습실에 오는 대신 날 끌고 오는 것을 조건으로 단 거다.
꿀 빠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게 예상외의 벌칙이다. 그건 내 성격이 만만찮았기 때문인데, 사실상 오늘부턴 꿀 빠는 일인 건 맞다. 벌써 회귀를 두 번이나 했는데 무슨.
“형, 어디 아프세요?”
무심한 물음이 뒤이었다. 내가 꾀병을 핑계로 빠져나갈까 불안한가. 하지만 마주한 시선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아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대꾸하기도 귀찮았다.
한 번 제 손으로 죽어서 그런가. 모든 게 무료하고 나른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내 손으로 관 뚜껑 열고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다 문득, 스쳐 간 장면 하나에 그런 생각을 하고 마는 것이다. 아, 저거 네가 좋아하던 건데.
“씨발, 진짜.”
창문에 머리를 박으며 중얼거리자 옆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운전하고 있던 매니저도 들었는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가 애꿎은 놈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야! 저거 최백이랑 네가 물들인 거지!”
“아니거든요! 쟤가 물들 애예요? 물들일 애지!”
“거짓말 치지 마, 자식아! 쟤가 어디 상스럽다고 욕할 애야?”
“진짜라고!”
“반말도 하지 마!”
“아, 진짜!”
투덕거리는 소리가 멍하니 들린다. 창문에 닿은 이마가 차갑다. 뚫어져라 밖을 노려보았다. 씨발. 간 곳도 많았다. 하나 지나 하나. 두 개 지나 하나. 없는 곳이 없네. 기억에 안 남은 곳이 없어. 그렇게 꽁꽁 싸매고 집에서만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내 눈에는 다 네 추억이 쌓인 곳들뿐인지.
“형.”
짧게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앞에 앉은 단정한 놈이, 제 얼굴에 걸맞은 무기질한 시선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
어제라면 이 말에 날 걱정해 준다 착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스치듯 지나간 생각을 무시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기운은 원래 저런 애다. 저렇게 물으면서도 직접적으로, 가깝게 다가오지는 않던.
“별로.”
무심히 대꾸한 말에 차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해는 한다. 첫 회귀 때도 이랬다. 그래서 잘될 줄 알았다. 큰 착각이었다.
“…….”
난 이제 안다. 내 변화가 남에게 큰 사건이 아닐 수도 있고, 한순간의 변덕으로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아무것도. 나는. 진실로, 아무것도.
우우웅. 우우웅.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냈다가 무시했다.
[누나]
어차피 변하는 건 없다.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세상이 흐릿하다가도 다시 색을 발한다. 퀴퀴한 추억들이 생생하게 살아남아 창밖 세상을 빛냈다.
“하…….”
웃음이 새 나왔다. 그렇게 죽어 놓고도 네가 좋은 게 웃겼다. 갔던 곳이나 말했던 장소가 눈에 띌 정도로. 난 그렇게 널 사랑했다.
* * *
난 미래를 안다. 어디서 말이라도 꺼내면 사이비냐고 몰매 맞을 이야기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많이는 몰라도 대충은 알고 있다. 한 번의 회귀를 하며 그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이렇게 빠른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두 번째 정규 앨범은 대박이 난다.
“야, 하대진! 너 표정 신경 안 써?”
“오글거려서 죽을 것 같은데 여기서 더 어떻게 하라고요!”
컨셉은 유치하지만. 세 번째로 보는 모습을 시큰둥하게 쳐다봤다. 전이라면. 그러니까, 내가 첫 번째 회귀를 했던 시점이라면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같이 연습했겠지만 그럴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매우 졸렸다. 마치 죽을 사람을 깨워 놓은 것처럼. 피곤하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연습을 시키든 시키지 않든 상관없었다.
분위기는 싸늘하다. 어디까지나 이건 저들의 헛짚은 생각 때문이다. 지난 두 번의 삶처럼 이번에도 그들은 내가 오자마자 안색을 싹 굳혔다. 다 그렇지는 않아도 영 떨떠름해 보이는 건 사실이리라. 적어도 최백은 표정을 굳히며 세 번째로 듣는 말을 반복했다.
‘넌 끼지 말고 저기에 처박혀 있어.’
첫 번째 회귀 때라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겠지만. 좋다. 난 나태했다. 무심히 끄덕이며 거울에 기대앉자 최백이 처음 보는 표정을 했다. 기가 찬다는 표정이었다. 두 번째 회귀 만에 본 얼굴이다.
“으아! 더 이상 못 해! 쉬었다 하자, 쉬었다.”
아까부터 싫다 못 한다 하던 하대진보다도 먼저 백기를 든 건 공진하였다. 눈썹을 올리는 표정에 결국 빡세게 굴던 안무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한 듯 펴지는 하대진의 얼굴에 공진하가 부러 그를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애교 있는 얼굴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귀만 두 번째지만 공진하는 개중 가장 눈에 띄는 의뭉스러운 자다. 귀여운 마스크 때문에 그리고 과거 예능에서 대박이 난 애교로 강제로 팀의 애교를 맡고 있기는 하지만 진짜 성격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른다. 저 남자는 매번 제멋대로였다. 잔뜩 애교를 부렸다가, 신경질을 냈다가, 다시 환하게 웃는. 그러다가도.
“하루아침 사이에 사람이 달라진 것 같네, 주선율은?”
핵심을 강하게 찌른다. 직시하는 시선을 모른 척하며 손을 한 번 휘저었다. 말 걸지 마라. 말하기 귀찮다. 내 손의 휘적거림에 공진하가 눈을 깜빡였다. 아침부터 내 눈치를 보던 하대진이 날 힐끔대다 공진하에게 바싹 붙어 속삭였다.
“형, 쟤 완전 이상하죠. 아까는 욕도 했어요!”
속삭임이 커도 너무 컸다. 모르긴 몰라도 안무가랑 대화 나누는 강이헌만 못 들었을 거다. 대화에 끼지 않은 다른 둘마저도 날 쳐다보는 걸 보면 확실했다.
“……최백이랑 대진이 네가 물들인 거야?”
“아, 아니거든요! 왜 매니저 형도 그렇고 다들 나랑 백 형한테만 그래!”
떨떠름하게 튀어나온 목소리에 하대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소리를 지르냐며 공진하가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시선이 내게서 그쪽으로 옮겨졌다. 느리게 깜빡인 시야 사이로 공진하가 장난스레 윙크를 했다. 뭐야. 지금 나 도와주기라도 한 건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저놈도 회귀했을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놈은 언제나 의뭉스럽다. 아무도 못 알아차리던 내 이변을 금세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그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다. 뭐든 상관없나…….
“야.”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드니 최백이 서 있었다. 최백은 언제나처럼, 날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다 방긋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최백의 별명이 퍼뜩 떠올랐다. 누가 지었는지 기억은 안 나도, 진짜 잘 지은 별명이었다.
“누가 처박히라고 진짜 처박히래, 새끼야. 일어나서 연습이나 해.”
빙썅.
화려하게 생긴 놈이 평이하게 내뱉는 욕을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일어나지 않아서 개싸움을 한 게 몇 번이던가. 회귀 두 번이면 서당 개도 풍월을 읊다 못해 새로 창작할 거다.
하지만 내가 이 빌어먹을 상황을 세 번이나 겪은 줄 모르는 놈들은 내가 일어나자마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최백도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실제로 내가 일어날 줄은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
화려하게 생겼네. 하긴, 놈은 이 그룹에서 화보를 가장 많이 찍는 멤버였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꾸준히 그럴 거다.
“병신 새끼가 사람 말도 알아듣네.”
물론 저 입도 꾸준히 저따위다. 난 안다. 미래를 알아서. 최백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안다고 변하는 건 없다. 그것 또한 알고 있었다. 알아서.
춤 연습을 한 직후의 분위기가 기묘했다. 여기저기 물어보며 점점 늘어났던 첫 회귀와는 달리, 아마 그들 입장으로 봤을 땐 ‘하루아침 사이에 달라졌을’ 춤이 이 숨 막히는 침묵을 만들어 냈으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숨을 고르는 소리 한 번 나지 않고, 연습실이 침묵에 빠졌다. 아마 화를 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무심결에 들었다 사라진다. 아마 그들 입장에선 기가 막힐 거다. 제대로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았다고 보이기 충분하리라.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매일매일 연습실에 출근 도장을 찍던 그들과는 달리 난 숙소에서 농땡이를 치며 연락도 잘 되지 않았으니까. 결국은… 그래, 아마도. 일종의 방관이었다. 난 그들이 그런 배신감을 느끼리란 생각을 하면서도 배려하지 않았다.
“너…….”
최백보다도 먼저 눈을 번뜩인 건 하대진이었다. 무심히 쳐다보자 놈이 이를 악물고 날 노려봤다. 춤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보니 그 누구보다도 화나는 모양이었다.
하긴, 다음 곡부터는 얘가 안무를 만들기 시작한다. 녀석은 회귀 전에도, 첫 번째 회귀 때도 춤을 기가 막히게 췄고, 기가 막힌 안무만 만들어 팀을 성공으로 이끈 주역 중 하나였다.
아니……. 사실 무엇이든 상관없다. 무심히 시선을 비껴 거울을 쳐다보았다. 넋을 놓은 무표정한 남자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나였다. 아. 정말 여기에 겉가죽만 있는 것 같은 얼굴이다.
없는 말은 아니었다. 난 실력을 숨기고 싶지도, 변명하고 싶지도, 노력하고 싶지도 않았으니. 멍하니 꿈속 같은 몽롱한 의식이 끊길 듯 이어질 듯 그렇게.
“지금, 너…….”
“와, 선율이 춤 언제 그렇게 연습했어? 많이 늘었네.”
하대진의 말을 잘라먹은 것은 강이헌이었다. 놈은 매번 다른 애들과 나 사이의 중재를 맡았다. 그가 착해서, 싸움을 싫어해서라는 이유보다는, 그저 그가 이 팀의 리더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열심이었고, 팀 사이의 갈등을 줄이려 노력했지만 그러기엔 다른 놈들 그릇이 커도 너무 컸다.
최백만 봐도 그렇다. 가장 나이가 많으면서 눈 돌아가면 위아래는 물론, 자기 몸으로 쳤다간 계란처럼 깨질지 모르는 곳까지 치고 올라갔다. 나도 그가 다 품어 안기엔 너무 큰 폭탄이었고.
그럼에도 놈은 매번 열심이었다. 최백의 신들린 욕설에 충고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나에게 말이라도 거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회귀 앞뒤로 강이헌을 쭉 봐 온 내가 생각하기엔 그냥 강이헌은 착했다. 본질이 선한 사람이었다.
“아.”
그래. 너처럼. 순식간에 치고 올라온 생각을 다시 눌러 담았다. 떠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떠올랐으면 좋겠다. 이건 사랑일까, 미련일까. 미련이라도 좋다고 말하면 그게 집착일까?
‘너랑 내가 있으면 넌 늘 주선율이네.’
웃는 소리가 귓가에 맺혔다가 사라진다. 마지막에 돌아설 거면서, 넌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내게 다가와 준. 하지만 난 죽었고,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 너와의 인연이 조금도 없는 그 과거로.
“너, 너, 너 왜 울어!”
하대진이 코앞으로 성큼 뛰어왔다. 우나? 내가? 무의식적으로 하대진 뒤의 거울을 보려 몸을 기울이자 화내는 것도 잊고 잔뜩 당황한 놈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파?! 형, 아파?”
“…….”
형……. 미묘한 표정으로 놈을 쳐다봤다. 하대진한테 형 소리를 듣는 건 회귀 전후를 통틀어서 처음이다. 그래도 마음속으론 형 소리는 하고 있었나? 놈은 제 입으로 무슨 소리를 한 줄도 모르는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 안색을 훑고 있었다.
그 옆으로 다가온 다른 막내 신기운이 그 단정한 얼굴로 가만히 날 들여다보다 입을 열었다. 답지 않게도 그건 몹시 조심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형, 혹시 암이래요?”
뭐? 반사적으로 신기운을 돌아봤다. 신기운은 미간마저 찌푸리곤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뭐? 암? 서, 선율아. 너 암이야?!”
뒤늦게 강이헌이 뛰어온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날 쳐다보는 게, 아니. 아니……. 순식간에 내 앞을 점령한 세 명의 모습에 떨떠름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평상시에 대체 어떤 취급을 받고 있었는지 감이 왔다. 이건 둘도 없는 폭탄 취급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수그러들지 않는. 그러니까, 암 같은 게 걸리지 않는 이상 변할 리가 없는 그런 사람. 그리고 얘네들은…….
“너네 단체로 쥐약 처먹었냐? 암 같은 소리 하네.”
최백이 냉랭한 어투로 짜증스레 말하더니 티슈 박스를 집어 던졌다. 무심결에 잡아채자 고개를 까딱인다. 사용하라는 말도 어떻게 저리 최백스럽게 하는 건지.
대충 휴지를 뽑아 얼굴을 닦자 하대진이 멀쩡한 거 맞느냐며 닦달했다. 고개를 끄덕여 주니 그제야 안심한 얼굴을 하다 뒤늦게 제 꼴을 알아차렸는지 어기적어기적 뒤로 물러난다.
신기운도 말없이 쳐다보다 떨어졌지만, 강이헌은 달랐다. 놈은 착한데 눈치까지 없었다. 진짜 멀쩡한 거 맞냐, 열 있는 건 아니냐 하다 내 일관적인 침묵에 아프면 꼭 말하라는 조언까지 늘어놓곤 떠났다. 그건 아주 기묘한 기분이었다.
“…….”
그러다 문득, 가만히 자리에 서서 날 쳐다보고 있는 공진하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 난리가 일어났을 때부터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고 서서 탐색하던 남자가 생긋 미소 지었다. 의뭉스러운 미소였다. 매번 그랬듯.
“너, 연애해?”
어디 뭐 신기라도 있는 거 아닐까. 놈은 말하는 족족 스트라이크를 때린다. 흘러가듯 한 말에 연습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최백의 표정이 점점 더러워졌다. 그 표정은 눈치 없는 강이헌마저 알아차릴 정도였다.
내가 맞는다고 고개만 끄덕이면 달려들어서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러곤 아마 그렇게 말할 거다. 팀을 매번 구석으로 몰아넣고 결국 네가 하는 건 연애 놀음이냐고.
그래. 한 번 들었던 말이다. 아마 처음으로 회귀하고 회개까지 한 내가, 그 말을 들을 줄 알았더라도. 아마 난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연애한다고. 요즘 좋아 죽겠다고.
그런데 지금은 연애가 아니잖아.
“아니.”
그럼 이게 짝사랑일까? 아니면 미련일까?
* * *
3년 차 아이돌 엘앤엘이 뒤늦게 세간의 이목을 끈 건 순전히 리더 강이헌의 힘이었다.
소속사 <더 콰르텟>이 유명 모 기업의 계열사라는 건 처음부터 잘 알려진 일이었다. 많은 소속사들의 우려와는 달리, 다행히 더 콰르텟은 처음부터 차근차근 밟고 올라가며 신생 회사의 시작을 그대로 따랐다.
물론 다른 신생 회사들보다야 마케팅이며 홍보에 사정이 좋았지만,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대로 돈을 이용해 대놓고 압박하고 다른 이를 멋대로 움직이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더 콰르텟은 남그룹 엘앤엘의 데뷔 이후 곧장 4인조 여그룹 포헤븐을 데뷔시켰고, 소리 소문 없이 묻힌 엘앤엘과는 달리 포헤븐은 그대로 신예 스타가 되었다.
그 이후의 일은 뻔했다. 회사는 엘앤엘보다 포헤븐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매일 스케줄이 가득한 포헤븐과 달리 엘앤엘은 반년, 혹은 1년.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휴식기를 가졌다.
이러한 엘앤엘의 무기한 잠수에 팔을 걷어붙인 건 리더 강이헌이었다. 데뷔 전에는 언더에서 활동했던 강이헌은 아는 사람들이란 사람들은 모조리 다 만나며 발품을 팔고 다녔고, 결국 그는 케이블 TV에서 하는 래퍼 프로그램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험악한 마스크에 남들과는 척 봐도 다른 우뚝 솟은 키로 카리스마며 공포심을 안겨 준 첫인상과 달리 유들유들한 성격에 다정한 말투는 말 그대로 대박이 터졌고, 자연스레 그 관심은 그가 속한 아이돌 그룹 엘앤엘로 옮겨졌다.
그리고 정규 앨범, OST, 각종 프로그램……. 3년이 되어 엘앤엘은 이름만큼은 들어 봤을 법한, 멤버 이름 하나 정도는 알 법한 그룹이 되었다.
이건 철저히 회사와 멤버들의 힘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자면 노이즈 마케팅을 온몸으로 담당하고 있던 한 사람의 존재가 크기도 했다. 주선율. 엘앤엘의 노이즈 마케팅 담당 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차분히 누워서 제 그룹의 이력을 생각하다 보니, 그룹의 막내인 신기운은 문득 주선율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 주선율은 데뷔 확정 멤버가 아니었다. 데뷔 두 달, 혹은 세 달쯤 전에 대뜸 대표가 데려온 주선율은 솔직히 말해 팀의 폭탄이었다. 데려온 첫날의 암담함은 막내인 신기운마저 온몸으로 느꼈을 정도다.
춤도, 노래도, 언변도 좋지 않은 주선율은 심지어 성격도 안 좋았다. 저 잘난 맛에 살던 하대진의 행동들을 모조리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지게 만들 정도로, 끝을 모르는 콧대와 오만, 무슨 자신감인지 모를 자만은 무심한 신기운이 보기에도 대단할 정도였다.
심지어 주선율은 결정적인 게 없었다. 열의. 어지간한 사람에게는 꽤나 친절하게 대하는 최백이 초면부터 길길이 날뛰었던 이유가 따로 있던 게 아니다. 최백이 그렇게 좋아하는 사회 규범과 완전 동떨어진 사람이 바로 주선율이었다.
데뷔를 하고 나서도 변하는 건 없었다. 아슬아슬한 예능과 겨우겨우 막아 둔 안무 구멍을 넘어, 주선율은 사건 하나를 크게 터뜨렸다. 팬 사인회였다.
하긴, 티가 안 날 수가 없겠지. 신기운이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히 방문을 바라봤다.
그런데 하루아침 사이에 달라졌단 말이지. 공진하는 주선율이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에 흘리듯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 신기운은 말없이 속으로 동의했다. 최백은 코웃음을 치며 대체 어디가 바뀌었냐고 물었지만 아마 그 스스로도 얼핏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잠시 방문을 바라보던 신기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곧장 주선율의 방 앞으로 간 그는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말없이 문이 열렸다.
“…….”
말없이. 신기운은 가만히 주선율을 바라봤다. 약간 파리한 안색을 한 남자는 표정 변화 없이 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신기운은 문득 하루아침 사이에 사춘기를 맞이한 사촌 여동생을 보는 것 같은 막막함에 휩싸였다. 뻑하면 말로 사건을 만들더니 이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뭐.”
갈라진 목소리에 신기운은 말없이 상대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을 피하며 언성을 높이던 과거와는 달리, 앞의 남자는 그 시선을 말없이 마주하고만 있다. 아니. 그래. 신기운이 막막함을 느끼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하루아침 사이에 바뀐 주선율은 죽어 있었다.
“밖에 나와 계세요.”
“……왜.”
죽은 눈을 한 남자가 저를 올려다본다. 신기운은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대꾸했다.
“형이 방에서 자살할 것 같아서요.”
“…….”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주선율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그럼 나오세요, 그렇게 말하곤 신기운이 올 때처럼 망설임 없이 뒤돌아 걸어갔다. 뒤에서 따라붙는 시선에 등 한 번 돌리지 않는다.
난 저놈에게 한때 기대를 걸었던 적이 있었다. 물끄러미 뒤통수마저 단정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순진했지. 웃음이 새 나왔다.
주의 깊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들어 주던 저 단정한 놈, 신기운은 사실 그뿐인 놈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잘 들어 주기만 할 뿐인. 고개를 끄덕이고 깊게 생각하지 않을. 첫 번째 회귀 때 이미 크게 덴 전적이 있다. 나는 말없이 문을 닫았다.
‘형이 방에서 자살할 것 같아서요.’
말이 귀 끝에 맴돌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자살하더라도 딱히 두드러질 것 없는 무언가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놈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놈의 앞에서 한 번 죽은 적이 있었다. 저번 생에. 그리고 또다시 과거로 돌아왔지.
내가 미친 걸까? 처음엔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고 행복했지만, 두 번째인 지금 와 보니 이젠 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됐다.
망상인가? 그러기엔 앞일이 너무 생생하고 이미 일어난 일도 있는데. 아니면 꿈을 꾸었나? 총알이 파고들어 이내 암전하던 정신이 생생한데 그게 꿈이었나?
난 자살했다. 대가리에 총을 박고.
‘제가 이러길 바라셨죠?’
“-야. 이제 씹기까지 해?”
내뱉었던 말 위로 가시 돋친 목소리가 겹쳐 들었다. 퍼뜩 고개를 돌리자 그사이 열린 문밖에 최백이 서 있었다. 빙긋이 웃는 얼굴이 얼핏 보면 상냥해 보이기까지 하다. 실상은 전혀 아니지만.
“너, 저번 주에 사생한테 더럽다고 지랄한 파일 떠돌아다니더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생각하다 뒤늦게 떠오른 기억의 잔상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 이 새끼가 입 털어서 음성 유출시켜 놓고 뭐? 아? 팬 사인회에서 그 지랄을 쳐 놓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파일이 돌아다니게 해? 넌 자제라는 걸 모르냐?”
최백의 표정이 화려하게 변했다. 놈의 특징은 그랬다. 환하게 웃으면 웃을수록, 예쁘게 웃으면 웃을수록 자신의 빡친 상태를 보여 줬다. 내가 보기엔 최백은 사회화된 사이코패스다.
사실 두 번째 회귀라고 해도 모든 사건을 하나하나 기억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특히 첫 번째 생에서 쉴 새 없이 터뜨린 폭탄을 하나하나 기억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랬다. 나에게 있어 모든 것이 시간이 흘러 과거가 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이에게는 흐르지 않고 멈춰져 있는 현재의 무언가일 수 있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장문의 사과 손 편지라도 쓸까요?”
첫 번째 회귀 때 썼던 방법이다. 그때의 난 진실로 반성하고, 과거에 대해 참회하고 있었다. 지금은. 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내 진심과 영혼은 전부 다 그날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여기에 있는 나는 빈껍데기다. 겉가죽만 지니고 있는. 사실 그 무엇도 아닌.
사실 손 편지의 반응은 최악이었다. 이제 별 꼴값질을 떤다며 욕이란 욕은 전부 다 들었었다. 아마 내 생각에는 실시간 앱을 켜서 무릎 꿇고 사죄해도 비슷한 꼴이 났을 것 같다. 난 이미 그들 눈 밖에 나 있는 존재였고, 내가 무얼 하든 변하는 건 없었다. 적어도 내가 회개하고 용서를 바라던 순간엔 그랬다.
“하하, 진짜.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빌겠다고? 뚫린 입이라고 말을 막하네. 틀어막고 싶게.”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익숙한 말이었다. 아무래도 놈은 저번 생에도 비슷하게 대꾸한 것 같다. 그때는 저 말에 어떤 기분이 들었더라. 이해했나, 상처받았나.
“그럼 형 마음대로 하세요.”
“뭐?”
최백이 답지 않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날 멀뚱히 바라보는 표정이 낯설다.
“원하는 대로 할게요.”
그가 생각하는 게 궁금하지 않았다. 말없이 시선을 내려 최백의 셔츠 자락을 바라봤다. 감색 셔츠가 구김 하나 없이 깔끔하다.
“꿇으라면 꿇고, 빌라면 빌게요.”
“너…….”
상대의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나는 빌 수도, 꿇을 수도 있었다. 날 가지고 어떻게 하든 상관없었다. 포기와 체념이야말로 진정한 평온이었다. 이젠 그 무엇도 아무렇지 않다. 내게 있어 나의 행동과 상대방의 말 모두 그 어떤 의미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
최백은 한참 동안 침묵하며 날 바라보더니, 결국 말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꽉 닫힌 문을 바라보며, 나는 그게 내 지난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이 닫고 나간, 다신 열리지 않는 문. 분명 쉽게 열릴 수 있을 텐데도, 단 한 번도 문고리가 돌아가지 않는 그 멀쩡한 문. 그럼에도 한 번쯤, 과거에는 어느 한 번쯤 열렸다가 닫혔던 문.
‘제발, 제발 한 번만. 제발!’
난 그게 참 무서웠는데.
* * *
두 번째 회귀를 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여전히 넋을 빼놓은 듯 세상만사에 무심한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달라진 건 몇 가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건 그거였다. 나는 더 이상 갑작스레 떠오른 네 모습에 욕하지 않게 되었다.
‘선율아!’
보고 싶다. 떠오른 목소리와 이어진 생각에도 아무렇지가 않다. 처음에는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박던 모습과는 꽤나 다른 모습이다.
시간은 언제나처럼 내게 체념을 안겨다 줬다. 이제는 네가 밉지도, 싫지도 않았다. 그저 보고 싶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그 꼴을 당해 놓고도, 내가. 내가 널 아직도.
“너, 뭐 하는 새끼야?”
그건 나도 좀 궁금한 주제다. 시선을 옮기자 최백이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일주일 전의 내가 하대진의 신경 줄을 건드렸다면 오늘은 최백의 신경 줄을 건드렸다. 음, 그래. 노래 문제였다.
“너 씨발, 여태까지 나 갖고 놀았냐?”
서늘한 어조에 눈을 깜빡였다. 주변이 긴장으로 팽팽해진 게 느껴졌다. 매번 이런 상황을 중재하는 리더 강이헌도 오늘만큼은 최백의 분노에 끼어들지 못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또 참.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사실 최백이 성격 더럽고 말을 막하긴 하지만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최백은 의외일 정도로 감정이 일정했다. 놈은 날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열을 내지도 않았다. 날 매번 비웃고 불신했어도 놈은 언성 한 번 높인 적이 없었다.
단순했다. 놈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화낼 정도로 관심이 있지도 않았던 탓이다. 나는 그 분노조차도 받을 수 없을 만큼, 최백에게 그 무엇도 아니었다.
“너 이 정도로 할 줄 알았는데 매번 그렇게 노래 안 한다고 지랄한 거였냐고.”
최백은 화내는 것마저 저답게 냈다.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은 채, 놈은 말을 뚝뚝 끊었다. 그럼에도 분노로 돌아간 눈이 번뜩이는 건 감출 겨를이 없어서, 가장 담이 작은 하대진은 아까부터 숨넘어갈 듯 헉헉대고 있었다.
“대꾸도 안 한다 이거지.”
짧게 비웃는 소리를 낸 최백이 서늘하게 날 쳐다봤다. 할 말이 딱히 없었다.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마 얼마 전까지의 진짜 나는 진실로 노래를 못했고, 지금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 모든 건 모조리 다 첫 번째 회귀 때 죽어라 노력해서 얻어 낸 것이었다.
그래, 처음으로 회귀를 하고 신앙자가 된 나는, 그렇게 매번 노력했었다.
“이 새끼 진짜 씨발 새끼네.”
그리고 넌 그걸 매번 그렇게 짓밟았지. 화가 나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이해할 수 있었다. 팀이 망해 갈 때 가장 손 놓고 지켜보고 있었던 건 나였고, 팀이 떠오를 때 가장 팀의 이미지에 먹칠을 한 것도 나였으니까. 놈과 수십 번 대립각을 이루고 다툰 것도 나였다.
과거의 난 남 말할 거 없는, 진짜 쓰레기 새끼였다. 그래도 그렇게 내 노력마저 무시해야 했어? 버젓이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낸 본심이 떠올랐다가 다시 침잠한다.
지난 삶의 최백은 그랬다. 내가 남들 보란 듯이 노력을 드러내도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널 믿지 않는다 말하며 그 그럴듯한 겉가죽이 어디까지 가나 보겠다고 말했다. 그건. 그 순간엔 분명한 상처였다.
“그러게요.”
짧게 내뱉은 대꾸에 주변인들이 전부 어깨를 움찔거렸다. 아. 나는 그 모습에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만다. 부질없게도, 또다시 되돌아오는 노선인데도. 사실 그건. 그 상처의 시작은 내가 쥐고 있었다.
“주선율, 이제 존댓말도 써?”
스태프가 짧게 속삭인 말이 침묵을 울렸다. 그래. 저게 가장 끔찍한 부분이었다. 내 노력은 내 과거에 의해 수십 번 짓밟혔다. 내 노력들이 짓밟힌 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혹 누구의 탓이 있더라도 가장 큰 부분은 모조리 다 내가 차지하고 있었다. 과거의 모든 것이 내 발목을 잡아챘다. 그래, 맞아.
“내가 진짜 씨발 새끼지.”
내뱉은 말에 정적이 찾아왔다. 최백은 드물게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주름이 졌는데도 그 화려한 얼굴은 미모를 감추지 못한다. 그 모습을 감상하듯 바라보다 문득 미래에 부를 노래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아무도 너의 아픔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모든 게 들어맞는 말이었다.
우우웅, 우우웅. 울리는 핸드폰을 꾹 쥐어 잡으며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이젠 나에게 있어 떠나간 사람들이다. 사실 나는 지금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나는 왜 아직도 살아 있는지. 모든 것에 미련이 없는데 왜 내가 아직도 여기에 있는지.
‘그러지 마, 선율아. 넌 나의 선율이잖아. 나와 있으면 늘 너는 주선율이잖아.’
그건 너 때문일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놈의 말대로, 지금도 씨발 새끼일 거다. 팀에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을 지금은 일어나지도 않은 어느 날의 미래에 쑤셔 넣기 위해 쥐고 놓지 않는 거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어느 순간. 널 만날 수 있다면.
“그럼 이제 다시 녹음하러 들어가도 돼요?”
“하.”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흘러, 널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날 모르는 너라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난 몇 번이고. 수백 번이고.
최백이 날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봤다. 따갑게 내려앉는 시선이 아프지 않았다. 가시밭길이라도 걸어갈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또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 * *
간만에 연습이 없는 날이었다. 특별한 날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철저히 다른 멤버들의 스케줄이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평상시라면 소수라도 연습하러 가자며 연락했을 매니저가 요즘 며칠은 통 조용하다.
아마 그건 나 때문이겠지. 매니저는 요즘 잠잠한 내가 불안한지 단체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면 날 숙소에서 빼내 오고 싶지 않아 했다. 아니, 나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리더 강이헌의 헌신적인 발품 팔이 이후 급부상한 엘앤엘은 사실 멤버 하나하나의 여유 시간이 크지 않은 편이었다. 래퍼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끈 강이헌은 각종 모임에 들어가 있었고, 자신과 친한 사람이 부르면 라디오, 방송, 인터넷 방송 등 가리지 않고 나가는 편이라 가장 바쁜 멤버였다.
화려하게 생긴 최백은 각종 화보를 찍느라 바빴는데, 그 와중에도 꼬박꼬박 봉사 활동을 하러 다니곤 했다. 지난 삶에도 그 전의 삶에도 느낀 기시감이지만 최백과 봉사 활동이란 단어는 안 어울려도 끔찍하게 안 어울리는 단어다. 봉사 활동이라면 가리지 않고 하는 것 같던데. 대체 그 성격을 숨기고 어떻게 다니나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의외로 요리를 꽤 잘하고 미식가 축에 속하는 하대진은 요리 프로의 고정 패널로 나간 지 꽤 됐고, 신기운은 의외로 예능에서 많이 활동했다. 특히 일정도 빡빡하고 분위기도 험악한 예능에서. 그리고 공진하는.
“우리 둘뿐이네?”
숙소에 있었다.
날 제외한 모든 멤버들은 여기저기서 패널이나 게스트로 부름이 많은 편이지만, 적어도 오늘의 공진하는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오자마자 소파에 너부러져 있는 놈과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으니까.
TV도 켜지 않은 채 누워서 날 쳐다보는 공진하의 시선이 꽤 매섭다. 애써 무시하며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꺼냈다. 놈에게 휘말려선 안 됐다.
“주선율.”
부르는 목소리에 흘깃 시선을 주자 공진하가 소파에서 스르륵 일어나더니 옆의 빈자리를 툭툭 치며 웃는다. 약간의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이리 와 봐.”
“…….”
왜?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며 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매번 저리 알 수 없게 군다. 귀엽게 웃는 맑은 미소에 눈을 가늘게 떴다.
‘변한 거 알아.’
첫 회귀 때도 그랬다.
‘다들 알 거야. 근데 선율아.’
매번 놈은.
‘그게 전부는 아니야.’
놈은…….
“어서.”
“…….”
재촉하는 목소리에 머뭇거리다 가까이 다가가자 공진하가 눈꼬리까지 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제 옆자리를 재차 툭툭 친다. 얼굴은 귀여운데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돈이라도 내놓으라 할 것 같은 숨 막히는 분위기다. 알 수 없는 압박 속에서 미적거리며 자리에 앉자, 대뜸. 놈이. 대뜸.
“……?”
“아~ 편하다.”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
아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지? 이건 또 무슨 미친 짓이야. 말문이 막힌 채 내가 놈을 내려다보고 있자 공진하가 방긋 미소 짓더니 손으로 제 양 볼을 감쌌다.
“진하 목이 너~무 아야해쏘요. 그래서 주선율 무릎이 피료해쏘요.”
“…….”
씨발, 진짜……. 표정을 험악하게 구기자 한껏 귀여운 척을 하던 놈이 파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매번 이러지. 또 사람을 갖고 논다. 고개를 돌려 켜지지 않은 TV를 바라보았다. 뭉그러진 나와 공진하의 모습이 검은 화면에 비춰지고 있다.
공진하가 내게 친근함을 느끼거나 애정을 느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는 건 이놈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모른다는 거다.
친근함이나 애정은 분명 아닌데, 그렇다면 어떤 생각으로 저러는지. 두 번이나 회귀를 해 놓고도 아직도 모르겠다. 매번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공진하는.
“선율아.”
뜻밖의 목소리에 곧장 시선을 내렸다. 어느새 웃음을 멈춘 공진하가 날 응시하고 있었다. 그 다정한 목소리가 낯설면서 익숙했다. 회귀 전에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지만, 첫 번째 회귀 때는 종종 듣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진하가 내게 다정했다거나 내 변화를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녀석은 거울처럼 굴었다. 시끄럽게 굴며 나돌아 다니긴 해도, 직접적으로 마주할 때면 상대방의 태도에 맞추곤 했다.
그래서 그랬다. 내가 착하게 굴려 하자 공진하는 화답이라도 하듯 다정한 어조를 흉내 내곤 했다. 하지만 절대로. 놈이 다정하거나 착한 건 아니었다. 그건 공진하의 몫이 아니었으니까.
“너, 죽을 거니?”
“……하.”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넌 그랬지. 내가 방송 중에 품에서 총을 꺼내 들었는데도 담담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지도, 말리지도 않고. 대가리에 총 아가리를 댄 채 훑어본 표정들 가운데 가장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넌 뭘 그렇게 다 아는 건데. 그때의 공진하와 지금의 공진하가 거의 다른 사람이란 것을 알면서도 묻고 싶었다.
왜 그때 그렇게 아무렇지 않아 했어? 너 설마 내가 죽을 거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런데 왜 너. 너 왜 나 안 말렸어.
“이상하네. 원망이라도 하는 것 같은 시선이야.”
공진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새끼였다. 최백도 이 상황에서 웃지 않을 거다. 아니지, 웃으려나. 뭐가 됐든, 최백도 공진하도 미친놈들이 따로 없었다.
침잠된 분위기에도, 죽음을 논한 이후에도 웃음을 가볍게 터뜨리고 마는. 이 미친놈은 맑은 얼굴로 날 응시했다.
“있지, 선율아.”
보조개가 폭 파이도록 귀엽게 웃으며 놈이 손을 뻗었다. 새하얀 손이다. 생각보다 작고. 하얀. 앞을 향해 곧게 뻗은 손의 종착점이 의미심장하다.
공진하가 내 목을 쥐었다. 하지만 그 손에 그리 강한 힘은 없어서, 나는 그저 멀거니 놈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목울대를 틀어쥔 손에 악력이 가해지면 나는 어떻게 할까.
문득 그런 상념이 떠돌았다. 두 번이나 죽었음에도 살아남으려 발버둥을 치며 놈을 바닥으로 패대기칠까. 아니면 가만히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릴까.
정답은 없었다. 정답이 없는 물음이라 해도 내가 쉽사리 내뱉는 답 또한 없었다. 다만, 그저. 공진하의,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꽃이라도 핀 듯 어여뻤다.
“자살했었니?”
쿵! 심장이 내려앉을 듯 뛰는 걸 느꼈다. 불안하다. 눈을 깜빡이며 머리를 휘감았던 생각들에 부정의 답을 내놓았다. 아니, 아니다. 얜 아무것도 몰라. 내 지난 삶을 아무것도 몰라.
그렇게 생각해도 이게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지. 공진하도, 저번에 내가 자살할 것 같다던 신기운도. 마치 과거, 혹은 미래의 어느 날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마른침을 삼키며 목울대가 울렁이자, 공진하가 눈꼬리를 곱게 휜다. 남의 목을 틀어쥐고 저렇게 웃을 이유는 없지 않나.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아는 게 없을 텐데. 내가 대가리에 총 쏘고 자살한 걸 놈이 알 턱이 없는데, 그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놈은 전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전부 다 알고 묻는 사람 같았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찬찬히 두 번째 회귀의 첫날부터 지금까지를 훑어보았다. 여전했다. 놈 또한 다시 돌아왔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지금 이 상황만 아니었어도 아예 없다시피 했다. 그렇다면 공진하는 왜, 이런 행동을.
툭, 그 순간.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 무슨…….”
“아.”
하대진이었다. 넋을 놓은 얼굴로 가방을 떨어뜨린 모습에 짧게 소리를 낸 공진하가 방긋 미소 지었다. 아, 이거 하대진 오늘 꿈에 나오겠는걸. 안색이 지금도 시퍼런데, 공진하의 미소가 아마 더 분위기를 끔찍하게 만들었으리라.
“왔어, 우리 막내?”
“뭐, 뭐, 뭐 하는 거예요, 지금!”
하대진이 곧장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공진하를 밀어 버린 하대진이 내 손을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이건 또. 처음 있는 일인데. 물끄러미 잡힌 손목을 응시했다. 하대진이 날 제게로 잡아끄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어깨는 가끔 시비 걸듯 잡기는 했어도, 팔목을. 마치 보호라도 하는 것처럼.
이어진 생각에 나도 모르게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하대진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아야야. 대진이 지금 형 민 거야? 형아 아프잖아!”
“형 미, 미, 미쳤어요?! 지, 지금 뭐 한 거예요?”
바닥에 너부러진 공진하가 징징거렸다. 평상시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하대진의 뇌리에는 아직 내 목을 움켜쥔 놈이 남아 있는지 연신 말을 더듬고 있었다.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명백히 목에 가 있어서 기분이 떨떠름했다.
“우리 막내, 놀랐구나!”
“목 조르는 걸 봤는데 당연하잖아요!”
하대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공진하가 느긋하게 자리에 일어서며 대꾸했다.
“그거 별거 아니야~”
“어떻게 그게 별거가 아니에요!”
진짠데, 그렇게 말한 공진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까르르거리며 웃는 게 어린아이 같다. 이건 진짜 꿈에 나오겠는데. 공포 스릴러 영화의 흔한 소재 아닌가. 잘 웃고 잘 놀던 지인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 목을 쥐고선 별거 아니라며 웃는다니. 약간의 연출과 각색만 있으면 영화 한 편은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전에. 진짜 이상한데 이거. 아직도 하대진에게 잡힌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딘가 기묘한 기분에 두어 번 손을 쥐었다 펴 본다.
“진짜 별거 아니야. 그냥 알려 준 거야.”
약간 낮아진 목소리에 공진하를 돌아보았다. 아까 엄살을 부릴 때보다는 낮아진 템포로, 공진하가 잔잔히 미소 지었다. ……아까까지는 방방 뛰던 놈이.
“그런 거 부질없다고.”
공진하의 갈색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가 다시 눈을 맞춘다. 놈이 잡힌 팔목을 응시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표정이 구겨졌다.
씨발 새끼. 욕설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명백히 그건 내게 하는 말이었다. 자살. 그거 참 부질없다고. 그렇게 누군가 잡아 줄 수 있지 않냐고.
신경질적으로 잡힌 손을 떨쳐 냈다. 하대진이 의아하게 뒤를 돌아봤다가 기겁해서 물러났다. 저도 반사적으로 잡았던 모양이다. 그 모습에 공진하가 깔깔거리며 소리 높여 웃는다. 난 그 모습이 얄미워 놈을 노려보았다.
개새끼. 미친 새끼. 또라이. 나쁜 새끼야. 그럼 그때는 왜 안 말렸는데. 왜 그때 나 안 잡아 줬는데.
일그러진 물음은 닿을 이 없이 떠돌기만 한다. 속에서 들끓듯 움직이면서도 감히 입 밖으로 내뱉을 생각조차 못 한다.
그건 전부 과거였기 때문이다. 아니, 혹은 미래였기 때문이다. 결국 놈은 그날의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모든 건 나 혼자만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또한 곧 사라져 버리겠지.
결국 끝을 맺은 건 이미 닳고 닳도록 익숙해진 체념이다. 타오르듯 공진하를 노려보던 것을 멈추고 시선을 내렸다. 몇 번 앉지도 않은 소파의 바닥 어딘가에 실밥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한참 그걸 노려보기만 했다. 여전히 속 편한 웃음소리는 숙소 안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