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Guy! - 3 (완결)
< 1 >
Bad Guy!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큼직한 보드지를 머리 위로 치켜든 게 아니라 얼굴을 가리고 섰으니 누군지 보일 턱이 없지.
그런데 정말 나도 모르게 발길이 멈췄다.
왜냐고?
[쉬운 남자는 싫은데 나쁜 남자는 좋더라고요.]
미네가 했던 말이다. Bad Guy는 좋더라는 말.
그 후에도 저 나쁜 남자란 단어는 우리 대화에 자주 등장했다.
[와! 또 나쁜 남자 향기를 마구 뿜는 거예요?]
“…… 그런 게 향기도 있어?”
[못된 짓 꾸밀 때 미누는 표정부터 달라지거든요.]
“그건 향기가 아니잖아.”
[뭘 따져요. 그럴 때 분위기가 향기지.]
“……”
[발상의 전환은 어때요?]
“발상의 전환?”
[한 번쯤 엉망인 제구?]
“…… 미네! 앞으로 나한테 사악하다고 하지 마.”
[나쁜 남자 옆에서 물들어 이래요.]
“……”
사실 이건 미친 생각이다.
긴 비행에 지쳐 잠에서 덜 깼는지도 모르고.
진짜 저 Bad Guy란 단어만으로 미네를 떠올리는 게 확실히 정상은 아냐.
우뚝 멈춰 서버린 내 곁으로 사람들이 빠져나가며 힐끗 쳐다본다. 일부러 후드티에 청바지. 모자는 깊게 눌러쓰고 선글라스까지 써서 사람들이 못 알아보게 한다는 작전 이러면 실팬데.
일단 덩치가 있어 눈에 더 잘 띈다고.
하지만 이대로 지나가면 평생 후회할 기분이 든다.
나와 비슷한 복장이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와 운동화.
정말 평범하다면 한없이 평범한, Bad Guy라고 쓴 보드지로 얼굴을 가린 이 앞으로 걸어갔다.
얼굴을 한 번 봤으면 싶은데 방어가 너무 탄탄하다.
그럼 확인할 방법은 하나뿐이지.
지난 5년 관성이 붙은 방법.
“미네.”
“…… 네.”
어떻게?
그딴 것 묻지 않았다.
매니지먼트 자체가 ‘어떻게?’란 질문에 대답이 가능한 거였어?
그저 이름을 부르면 항상 [네.]라고 대답하던 목소리가 홀로그램이 아닌 현실로 나타난 게 달라졌을 뿐이다.
“나 나쁜 남자라고 광고 그만하자. 그거 치워봐.”
“……”
손이 스르륵 내려가고.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포니테일 머리가 뒤로 질끈 묶인 얼굴이 드러난다.
5년 동안 봐왔던 그 얼굴이 맞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는 정도?
이 이른 새벽 시간에 혼자 한 잔 걸치느라 발개졌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여기서 괜히 혼자 샴페인 한 잔 걸치셨냐고 물어봤다간 옆구리에 묵직한 주먹이 꽂혀도 할 말 없다.
연애를 글로 배웠어도 그런 분위기 깨는 짓은 안 한다.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마주 잡는 손이 정말 내 손 절반 크기.
쓱 잡아당겨 내 항공잠바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 걷기 시작했다.
일단 걸었다.
그런데 내 원래 계획이 뭐였더라?
택시를 타고 제시가 예약해둔 호텔로 가는 거였는데.
미친!
머리를 흔들 때였다.
옆구리에서 소곤대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마초곰탱이! 이럴 줄 알았어요.”
“…… 뭘 이럴 줄 알아?”
“무계획. 어디로 가야 할 줄도 모르면서 그냥 손 붙잡고 끌고 가잖아요. 딱 미누다워요.”
“……”
“미누 가이드 신분으로 차 준비해뒀어요. 멋진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곳도 예약해뒀고요. 조용하고 좋아요.”
“…… 미네는 진짜 내 매니저네.”
정말 사실이다.
열정뿐이던 내게 기초공사를 다시 해준 미네다.
여러 종류의 훈련, 훈련과정에 맞춘 식단, 적절한 휴식.
시어머니라고 툴툴거리긴 했어도 그 과정을 해냈기에 헬-벨이 내게 맞춰 고안해낸 구종도 바로 몸에 익힐 수 있었다.
미네는 그동안 항상 내 매니저였다.
앞으로도 내 매니저여야 하고.
“그래. 가자. 우리 할 이야기가 많아.”
그런데 미네가 단순히 매니저 역할만 했던 걸까?
오늘 우린 할 이야기가 정말 많다.
< 2 >
“내일 개막전 선발투수 집에 몰려와서 다들 뭐하는 거야?”
내일은 2038시즌의 개막일이다.
작년엔 디비전시리즈를 앞두고 갑자기 1선발의 위치를 떠맡게 됐다면 올해는 다저스와 개막전부터 내가 선발로 나선다.
아주 오랜만에 산체스와 맞대결. 뭐 캘리포니아 지역 아동기금 후원 때문에 종종 만나긴 해도 그건 상황이 다르지.
후원행사에서 만나 투쟁심을 불태우진 않으니까.
어쨌든 나 내일 선발투수라고!
그런데 동료란 인간들부터 내 위의 포식자 셋, 스테판네 새끼 곰 세 마리까지 모두 몰려와도 되는 거야?
아니. 내가 개막전에 초대했으니 가족들이 온 거야 당연하지만 프린츠 집에 놀러 왔던 저 인간들은 왜?
애초에 에드가 프린츠 집 근처로 이주하고 제시가 내 집도 가까운 곳에 구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숙소를 나오기 전 원정길에도 내 방을 차지하던 놈들.
그 자식들이 틈만 나면 프린츠 집에서 1차. 내 집으로 쳐들어와서 2차를 갖는 게 아주 관례가 됐으니 하는 말이다.
“너 보러 온 거 아냐. 저리 꺼져.”
“미네. 이 바비큐 폭립 더 있어요?”
“좀 전에 오븐에 넣었어요. 5분만 기다리세요.”
더구나 이 자식들은 이 집의 실세를 금방 알아차렸다.
처음 소개해줬을 땐 어쩌다 저런 폭군을 남자친구로 삼았냐며 울분을 터뜨리던 놈들이.
작년엔 페르시가. 올해는 리키가 결혼식을 올렸고 난 리키 결혼식에 가면서 미네를 에스코트해서 함께 갔거든.
-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새신랑 리키부터 입을 쩍 벌린 녀석들의 반응이었다.
리키 자식. 도대체 어디서 한국 속담은 배웠던 거야?
그래도 어깨가 으쓱한 기분이었고 녀석들 반응이 이해도 됐다. 누가 봐도 미네는 미인이고 여자에 관해선 스캔들 한 번 없던 나였으니까.
피로연이 끝나고 빈스네 짐으로 자리를 옮겨선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하라며 주접을 떨다가 내게 허리가 접힌 녀석들인데.
이 자식들 말리던 미네를 보고 그때 눈치를 챘다.
드디어 내가 천적을 만났다는 걸.
물론 그런 소개도 에드를 비롯한 가족들이 우선이었다.
가족들과는 에드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함께 했으니까.
에드와 프린츠가 이웃이 된 덕분에 위의 내 포식자들과 동료들도 서로 친해졌고 이제 이런 분위기를 모두 함께 즐긴다.
나만 빼고!
이래도 되는 거냐고!
또 왜 미네는 저런 자식들에게도 싹싹하냐고!
“이래야 미누 출전경기에 점수 못 내면 목을 졸라도 친구들이 할 말이 없죠.”
이런 설득에 넘어가긴 했는데 그래도 난 불만이 많다.
훈련하고 나면 알콩달콩할 시간도 부족하니까.
< 3 >
“Good to see you again! 모두 기다리셨던 MLB 2038시즌의 개막전입니다. 오늘도 AT&T파크엔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게 관중들로 가득 찼는데요. 꼭 여기 AT&T파크에서만 이런 모습이 보이는 건 아닙니다. 최근 2-3년에 걸쳐 메이저리그의 인기가 NFL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가 됐으니까요.”
“네. 보다 공격적이고 화끈한 모습도 있고 손에 땀을 쥐고 지켜봐야 할 경기가 그만큼 많이 늘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자이언츠의 선발인 미누 조 선수의 작년 월드시리즈 최종전을 기억하는 분들은 제 말을 이해하실 거예요.”
“기억하는 분들? 제이슨.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그 경기를 봤는데 기억을 못 한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월드시리즈에서 나온 두 번째 퍼펙트게임이었단 그런 이유만은 아니에요. ‘숨도 허락을 받고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이거 양키즈 팬들에게서 나온 반응이었어요.”
“하하! 그렇죠. 우린 그만큼 대단한 투구를 봤고요. 오늘 자이언츠는 그 미누 조 선수를 1선발로 출전시킵니다. 해가 바뀌면 새롭게 진화하는 조 선수가 또 어떤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기에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관중이 가득 찼을 거예요.”
“이미 시범경기에서 예고편은 있었죠? 4이닝을 공 39개로 삭제시켜버린 모습은 경외감까지 느껴졌으니까요.”
“들리는 말로는 자이언츠의 몽크라고 불리던 조 선수에게 약혼녀가 생겼다고 하던데요. 여자를 사귀기 시작했으면 일시적인 기량 하락이라도 보여줘야 좀 인간적인 거 아닌가요?”
“그 소문 끝까지 안 들으셨군요. 조 선수 약혼녀가 트레이너 출신이라는 것 같아요. 눈 떠서 잠들 때까지 함께 훈련하는 게 데이트니 성적이 나빠질 이유가 없죠.”
“오우! 지저스! 야생곰을 훈련시키는 테이머였어요? 다른 29개 구단이 불쌍해서 어떡합니까?”
.
.
퍼엉!
퍼엉!
연습 투구 몇 개.
어깨야 잘 풀어뒀지만, 선발투수에게 이건 하나의 의식이다.
작년 월드시리즈 4차전 이후 마운드에 오르면 항상 그날의 몰입을 되살리려 노력해보는데 아직은 쉽지 않다.
“승리에 대한 간절함. 뭐 제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쬐끔 섞여서 좋은 결과가 나왔던 거겠죠?”
이건 미네의 해석이었고.
계속 그 장면을 떠올리며 노력은 할 거다.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진짜 27K 퍼펙트게임이 목표가 될 테니까. 그게 투수가 온전히 경기를 지배하는 방법이니까.
일단 오늘 2038시즌의 첫 경기부터 잘 던져야지.
타자가 타석에 들어온다.
“플레이 볼!”
로진을 내려놓자 주심의 경기 시작 콜이 울렸고.
퍼엉!
“스트라이크!”
106마일의 하이 패스트볼이 하우어의 미트를 꿰뚫었다.
4-(에필로그)
- 자이언츠가 조와 함께 얻은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가 몇 개인지나 알아요? 그 친구 개인적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쌓은 승리가 몇 회인 줄은 알고요? 그가 자이언츠의 대주주가 되는 걸 팬과 선수 누구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자이언츠 애쉬비 신임감독.
- 난 녀석을 경쟁상대로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사람은 곰과 경쟁하지도 않고요. 아! 물론 투수에겐 끔찍한 혹사의 시대였던 데드볼 시대에도 22년 동안 수많은 기록을 쌓은 사이영도 있고, 그런 전설들이 전부 곰이라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조가 인간처럼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건 동의하시죠? 게다가 녀석은 지금도 진행형이에요. 아니, 자이언츠와 두 번째 장기계약에 사인하고 구위가 더 좋아지는 중인데 녀석과 경쟁을 하라고요?
자이언츠에 끝까지 남겠다는 좌완 데니스 리키.
- 조요? 완벽하죠. 녀석의 투구도 완벽하고 녀석의 가족들, 특히 미네의 바비큐 폭립은 최고예요. 그 자식이 자기 아들의 타격훈련을 도우라고만 하지 않으면 매주 그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싶을 정도니까요. 사이영의 511승? 장담해요. 몇 년 안에 깨져요. 내가 왜 자이언츠에 계속 남았는지 모르는군요?
두 번째 FA계약도 자이언츠와 맺은 바르가스.
- 그 자식과 또 리턴 매치? 리턴 매치 한 번 했다가 허리 부러지는 줄 알았는데 또? Nope! 난 은퇴하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서 그 자식 아들에게 복수를 할 거야. 그게 남는 거야.
자이언츠에 막혀 월드시리즈 진출이 좌절된 필리스 베나블.
(챔피언십시리즈 벤클에서 또 조에게 털린 후의 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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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주심이 27번째 아웃카운트를 외침과 동시에 AT&T파크 하늘 위로 화려한 불꽃이 쏘아 올려졌다.
“MLB의 한 위대한 기록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미누 조 선수 자신의 커리어를 통산 512승으로 올려놓는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아냈어요. 데뷔 후 19년째인가요?”
“네. 맞습니다. 데뷔 첫해 9승. 다음 해에 24승. 3년 차엔 27승으로 딱 60승을 맞췄던 조 선수거든요. 그 뒤로 꾸준히 29승, 30승을 달성해오길 16년째입니다. 물론 올해는 아직 17승인데 설마하니 여기서 조 선수 페이스가 떨어질 거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하하! 여전히 벤클이 벌어지면 피해야 할 선수로 압도적 1위인데 체력에 문제도 없을 테고요. 은퇴라도 생각할 요량이면 팬들이 깐다죠? 구단을 생각 안 하는 구단주라고요.”
“그 까는 팬이 대부분 자이언츠에서 은퇴한 조 선수 동료들이에요. 조금씩이나마 구단 지분에 투자도 했다니 충분히 깔 수 있습니다. 문제는 조 선수 집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깐다는 거죠.”
“그들이 잘 선택했네요. 악의 제국 양키즈를 넘어서는 최고의 제국을 건설하고 명예로운 은퇴. 노후가 보장될 최고의 구단에 투자도 성공적이잖아요?”
“음, 그런데 적어도 조의 부인이 해준다는 바비큐 폭립은 없겠어요. 조 선수가 왜 관중석으로 달려가나 했는데 언제 왔는지 그의 부인이 관전 중이었으니까요. 아! 올해의 키스에 오를 만한 멋진 키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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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장기계약 10년짜리를 두 번.
모두 20년을 뛰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16년 차에 사이영의 최다승 기록을 넘어설 것 같고 조기 은퇴를 고려했는데 그때 밀려든 수많은 태클.
여전히 잘 던질 자신은 있다.
2038시즌에 <올마이티 핸드!>와 <버터플라이!> 특성까지 구매해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 게 벌써 16년.
아이언 맨 특전으로 체력에도 문제는 없거든.
아, 무려 만 코인 짜리 특성들은 어떻게 샀는지 궁금해?
10만 코인 모아가던 중이었잖아. 퍼펙트게임을 해도 천 코인 주는데 10만 코인이나 하던 그 상품 필요 없어졌어.
화신(化身).
뭐 아바타(Avatar)하고 비슷한 개념.
복잡한 뜻엔 관심 없고 미네의 형상이 홀로그램이 아닌 실체로써 곁에 머문다면 좋겠단 생각에 코인을 모았었다.
굳이 특성에 의존해 던지지 않아도 꽤 좋은 성적으로 순항 중이었으니 엉뚱한 욕심을 부린 거였지.
그런데 미네가 덜컥 내 앞에 뛰어나왔으니 뭐.
만 코인 짜리 펑펑 질러대자 구위 더 좋아진 건 당연한 거고.
“아! 원정이라도 빠진다면 팀에서 난리 치겠지?”
“미누! 미누 구단이거든요. 학교 선생님이 나 학교 가기 싫다면서 투정부리는 것 같아요.”
“젠장!”
“큭큭! 이번 원정은 따라가 줄까요?”
“…… 진짜? 마이크는 어쩌고?”
“제시가 봐주기로 했어요.”
유후! 제시도 결혼을 했다.
에이전시 사장이던 제러드가 그걸 노려 제시를 영입한 거지만.
한데 캘리포니아를 주력 거점으로 삼은 덕분에 샌프란시스코 에드 곁에 자택을 마련해 이럴 때 도움이 된다.
마이크도 벌써 열두 살.
남자는 무릇 혼자 있는 시간도 필요한 법이지. 흐흐.
“좋아. 매니저가 당연히 선수 가면 따라와야지.”
“쳇! 나도 매니저 은퇴하면 안 돼요?”
“Absolutely n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