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일이? - 4
< 1 >
따악!
“그래, 페드로! 두 번째 타석인데 해줘야지.”
“고든이 페드로였으면 홈에 들어왔다.”
“그 절반만 됐어도 여자부터 생겼겠지.”
후! 이 인간들은 잠시라도 조용할 수가 없다.
페드로의 안타에 고든이 3루에서 멈추자 또 놀릴 건수가 생겼는지 키득거리고 난리다. 좌익수 앞에 떨어진 공이라 홈 쇄도가 무리인 걸 뻔히 알면서.
어쨌든 1사에 주자 1루와 3루.
이러면 내 진루타가 빛을 발하는 거지.
비록 안타는 못 만들었어도 더블 플레이 면한 게 어디야.
투수가 숨겨뒀던 발톱을 꺼내 들었지만 나 한 명 아웃으로 끝낸 순간 내 승리가 된 거다.
따악!
“아웃!”
그 후 필리스 투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페드로의 안타에 이어 앰브로즈의 희생 플라이.
아웃카운트 하나가 더 올라갔어도 드디어 선취점을 얻었다.
그리고.
따악!
페르시가.
따악!
다시 바르가스가.
연속 2안타를 터뜨리며 1점을 추가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필리스의 우익수-2루수-포수로 이어지는 연계플레이에 페르시가 홈에서 아웃을 당했다는 정도?
다만 페르시의 홈으로 질주가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다.
원래 야구란 종목이 상대적이니까. 잘 던져도 맞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고 잘 때린 타구가 상대의 시프트에 걸리기도 하는, 그런 게 야구니까.
일단은 자이언츠가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일단은.
< 2 >
미국은 넓다.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포함하지 않은 48개 주.
즉 캐나다와 멕시코 사이의 영토만 생각해도 넓다.
그 넓은 국토에서 매일 15개의 메이저리그 경기가 열릴 때는 아무리 MLB에 열광하는 팬들도 모든 경기를 챙기진 못한다.
당연히 기자들 역시 담당구역 내의 경기만 취재하고 보도한다.
한 구장에 우르르 몰려드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자이언츠의 한 시즌 124승이 진짜 눈앞에 다가왔던 때 정도나 특종을 위해서 모이는 예외상황이다.
하지만 가을야구를 시작한 후엔 이야기가 달라진다.
팬들의 관심에 부응하기 위해선 움직여야 한다.
“걱정했는데 4회를 잘 막았어.”
그래서 오늘 경기엔 평소보다 서너 배는 많은 기자가 모였다.
친 자이언츠 쪽의 기자도, 반 자이언츠 쪽의 기자도.
“3회 실점하던 상황이 별로 안 좋았는데 다행이야.”
“3회에도 더블 플레이로 끊었어야 했어.”
“슬러브를 때린 타구 처리가 아까웠지.”
4회 말 자이언츠 공격이 득점 없이 끝나자 자이언츠에 적대감을 가진 기자들이 서로 아쉬움을 주고받았다.
3회 말 실점을 하고 흔들릴 거로 생각했던 필리스 투수가 생각보다 4회를 잘 막아냈기에 그 아쉬움이 더 컸다.
딱 2실점. 선취점을 줬어도 화끈하게 두들겨 맞은 건 아니다.
필리스 타선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추격할 수 있는 점수다.
다만 자이언츠 선발이 문제였다.
올해 정규시즌 평균자책점이 1.358에 불과한 투수.
이대로 더 실점이 없다 해도 2점을 쫓아간다는 보장을 못할 투수가 자이언츠 선발이다.
자신들과는 거리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선수고.
그런 투수가 필리스 2실점의 빌미가 되는 진루타까지 쳤으니 모인 기자들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렇게 자이언츠가, 아니 조가 고배를 마시는 걸 보고 싶어?”
기자석 후위에 앉았던 기자 한 명이 툭 끼어들었다.
묵묵히 경기를 관람하던 ESPN의 슈미트 기자였다.
기자들 몇이 뒤를 돌아봤다.
“…… 그 녀석이랑 사이좋은 자네야 다르겠지.”
“내게 빈정거려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얼마든지 빈정거려도 괜찮은데 자네들 입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우리 입지?”
“올 시즌 두 번의 퍼펙트게임과 23K 등의 기록은 별개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투수야. 설령 포스트시즌 기록이 좋지 않아도 사이영 상과 리그 MVP가 확실한 투수. 조가 수상거부 선언을 철회하지 않기로 한 뒤에 맥카시가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알아보기는 했나?”
앞쪽 기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슈미트의 말대로다. 조가 포스트시즌에서라도 난타당하고 무너지길 바란다. 하지만 눈이 유리구슬이 아니라면 포스트시즌 성적과는 상관없이 조가 올해 NL의 최고 투수였다.
사실은 메이저리그 전체의.
수상거부에 대해 팬들의 반응도 조에게 호의적이다.
일개 선수가 오랫동안 이어온 상의 권위를 훼손시킨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긴 있다. 하지만 소수다.
대부분은 상의 권위를 투표권을 쥔 기자와 그 기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또 다른 기자들이 훼손 중이라고 믿는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뻔뻔하게 자기주장을 펼치지만, 진실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저 외면할 뿐이지.
막상 선수와 팬이 기자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순 없으니까.
항상 권력에 가까운 영향력을 행사해온 건 자신들이니까.
다만 MLB의 커미셔너 맥카시가 나선다?
그땐 이야기가 달라진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20년 전부터 점점 NFL과 NBA에 뒤처지는 MLB의 인기를 되살리기 위해 많은 파격을 단행해왔다.
맥카시라고 다를 게 없다. 흥행만이 목적이다.
관행? 권위?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다.
“…… 왜? 맥카시가 사이영 상 폐지라도 추진하겠대?”
“충분히 할 수 있단 생각 못 했어? 이미 진행 중이야.”
“……”
“……”
날벼락 같은 소리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컸다.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투수는 거부한 상을 대신 받는다?
수상이 영광이 아니라 치욕이 되고, 상을 받는 순간 박수보단 비난을 받게 되는데 얼굴에 철판을 깔 선수가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그런 상황이 1-2년 계속되고 말 것도 아니다.
어깨에 빈볼을 맞고 부상을 우려할 때 다음 경기에서 퍼펙트게임을 만들어낸 괴물이면 앞으로 10년은 독주할 투수다.
10년씩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 상의 존재 가치는?
마찬가지로 없다.
맥카시라면 폐지를 추진하고도 남는다.
기자단이 투표권을 갖는 상이 사라지면 결과야 뻔하지 않을까?
“자네들 스스로 입지를 좁혔어. 취재대상인 선수들에게 배척당하고 팬들이 외면하고. 같은 기자 동료들조차 자네들에게 향하는 시선이 어떤지 생각해봐.”
“……”
“……”
억지로 외면하던 사실을 지적당하면?
보통 사람의 반응은 부정하고 화를 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반 자이언츠 진영의 기자들은 화도 내지 못했다. 슈미트의 말처럼 주변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시선이 그 원인이었고.
< 3 >
이름이 피터 에커트?
필리스 투수는 잘 던졌다.
내가 예상했던 5이닝을 다 채우지 못했지만 3회 실점에도 흔들리지 않고 4회를 삼자범퇴로 막아냈다.
따악!
오히려 내가 5회 초에 첫 안타를 맞았다.
빗맞은 안타? 행운의 안타? 전부 말장난이다.
잘 맞았든 못 맞았든 안타가 되게 때렸기에 안타다.
실투도 아니었고 침착하게 베어-팜만 노린 게스히팅에 당했다.
4번 타자로 나온 베나블에게 삼진을 하나 더 먹여주고 신났던 탓에 좀 더 깊이 생각을 못 했던 죄지 뭐.
“오! 칸세코! 앞으론 베나블 뚱땡이 대신 네가 4번에 서.”
“곰탱이 너 이 자식! 인간적으로 1점은 줘라.”
덕분에 필리건들의 눈에 열기가 피어올랐다.
큰 거 한 방이면 당장 동점. 좋은 코스 2루타만 나와도 추격의 발판은 마련되니까.
하지만 더 맞아줄 생각 없어요.
필리 치즈스테이크로 산을 쌓아도 안 돼요.
6번 타자가 굳은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왔다.
미첼 페르디난드. 작년에 꽉 안아줬던 녀석이다.
반가워서 첫 타석에선 그때와 같은 코스 공으로 삼진을 먹여줬다. 분해서 파들파들 떠는 것 같던데 다시 덤비진 못하겠지.
딱!
“파울!”
이번엔 몸쪽 공에 바로 스윙이 나오네.
좋아하는 코스는 바깥쪽 높은 공. 레벨 스윙을 주로 하는 녀석이 몸쪽 낮게 떨어지는 공에 컨택을 해냈다.
순간적인 무게중심 이동이 뛰어난 녀석이다.
1-2년만 숙성기를 거치면 3할도 거뜬히 쳐낼 재능.
퍼엉!
“볼!”
공 하나도 빠지지 않았는데 걸러내는 선구안까지?
좋다. 이런 선수들이 많아져야 메이저리그가 화끈해지지.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그래도 아직은 약점이 있어.
좋아하는 바깥쪽 높은 공이라 선뜻 배트가 나왔지만, 그 공이 뚝 떨어지면 몸쪽과 달리 배트 컨트롤이 힘들거든.
자식, 또 노려보네.
더 좋아.
고작 선수 둘. 그 두 명의 투수와 타자 사이에 오고 가는 투기가 4만 관중을 숨소리도 크게 못 내게 지배하는 이런 게 야구지.
딱!
“파울!”
딱!
“파울!”
공을 두 개나 더 커트해내고.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아우!”
“젠장! 아까워.”
이렇게 관중들이 막힌 숨을 토해낼 때.
그 긴장감을 한 번 맛본 팬들은 충성도가 높아지거든.
팬들이 제일 잘 아는 거야. 뭐가 등줄기를 짜릿하게 만드는지.
“그래. 잘했어. 멍청하게 서서 삼진은 안 먹었어.”
“그래도 다음엔 저 곰탱이에게 안타를 쳐.”
원했던 건 땅볼로 유도해 더블 플레이를 잡고 이닝을 끝내는 거였는데 뭐 삼진도 나쁠 건 없다.
녀석은 또 삼진을 먹고도 필리건에게 응원을 받았고.
몸에 쇠사슬 칭칭 감고 맥코비 만에 뛰어들라고 안 한 게 어디야.
딱!
“아웃!”
이제 조금씩 초조해지는 필리스 타자들.
투구 패턴을 살짝 바꿨다. 초반엔 좋아하는 코스를 피했다면 이젠 반대로 좋아하는 코스로 준다. 계속 게스히팅을 하는 느낌인데 노릴 만한 코스에 예상 못 했을 구종으로 낚는 거지.
5회 초 필리스 공격 잔루 1루.
< 4 >
따악!
“오늘은 고든이 도핑테스트 하는 날이야?”
“3회랑 똑같은 분위기면 또 점수 나오나?”
“조, 이번엔 그 배트 베나블한테 돌려주는 거냐?”
진짜다. 오늘 고든이 타격감이 좋다.
나도 이번엔 안타 하나 치면 좋겠는데.
여기서 추가득점이 나오는 순간 필리스 전의가 꺾일 테니까.
휘파람까지 불어대는 덕아웃 덤앤더머들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서 을러댄 후 타석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필리스 벤치에서 투수교체를 외쳤다.
공이 이젠 확실히 눈에 익는다 싶었더니.
하지만 좋은 타이밍이다.
타자기 이전 투수인 내게 휴식도 뺏어가는 타이밍.
얄밉긴 해도 디비전시리즈의 방향을 결정할 1차전이다. 이보다 더한 작전을 써도 뭐라 할 수 없다.
재빨리 바뀐 투수의 데이터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순간 미네가 조금 더 빨랐다.
[테리 션오프. 포심과 준수한 포크볼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투수예요. 무사 1루. 3회와 상황이 비슷하니 더블 플레이를 노린다면 던질 공은 정해졌네요.]
‘포크볼로 땅볼을 유도하겠지.’
[베나블 쪽으로 보내려면 좀 당겨쳐야죠.]
‘…… 우리 미네, 악당 다 됐네.’
연습 투구가 끝나고 타석에 들어갔다.
헛스윙보다 땅볼을 노린다면 내 무릎 높이에서 떨어질 포크볼을 예상해야 한다. 그게 몇 번째 공일까?
간을 보다 맞긴 싫겠지?
역시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리는 게 정답이다.
투수가 먼저 고든에게 견제구를 던진다.
발이 느린 고든. 리드 폭도 크지 않은데 던지는 저 견제구가 다음 공에 대해 확신을 준다.
그래도 세트 포지션의 투구. 릴리스.
예상이 맞았다.
따악!
내가 어퍼 스윙까지 자유자재인 타자의 재능은 아니다.
그래도 중간은 가능하지.
힘껏 잡아당긴 타구가 베나블의 키를 넘었다.
페어.
주자인 고든도 타자인 나도 발이 빠른 선수들은 아니지만, 펜스까지 굴러가는 저 공은 2루타다.
1루를 도는 순간 베나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어이없단 표정을 짓는 녀석을 외면하고 달려 2루 입성.
“세이프!”
이번에도 홈으로 중계가 나쁘진 않았지만, 몸을 내던진 고든의 슬라이딩이 홈플레이트에 먼저 도착했다.
당연히 AT&T파크에 탄식과 환호가 가득 찼다.
“곰탱이! 하나만 해라. 하나만!”
“조! 너는 내일 당장 샌프란시스코 시장 선거에 나와도 당선이 확실하다. 내 딸이 네게 반한대도 용서한다.”
유후! 세상 모든 아버지가 딸의 남자친구에게 샷건을 들이미는 건 아닌가 보죠?
어쨌든 이 득점이 쐐기를 박았다.
자이언츠는 바르가스의 적시타로 나까지 홈에 불러들였고 필리스는 추격의 의지를 잃었다.
내가 안타를 하나 더 맞긴 했지만 실점은 없었고 또 7회와 8회에 1득점씩 더 올려 디비전시리즈를 산뜻하게 출발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6:0 필라델피아 필리스]
< 5 >
▷ 그 배트 내 거였지?
▷ 흐흐. 뭔가 익숙한 배트였냐?
▷ …… 망할 놈!
▷ 어허! 내 팬들도 지켜보는 공개 멘션이야.
▷ 그럼 내 배트를 훔쳐가서 필리스에 쐐기 타를 날린 자식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 친구가 선전했으면 경기장 밖에선 박수를 보내야지. 안에선 머리 터지게 싸우고 가끔은 진하게 몸의 대화까지 나눠도 밖에서까지 으르렁댈 거야?
▷ 친구? 우리가?
▷ 우리 친구 아니었나? 헬-벨 야구캠프 알지?
▷ 모르면 메이저리그는 단 한 경기도 안 본 사람이겠지.
▷ 그 야구캠프의 네 영감님은 현역시절에 한 번도 같은 팀에서 뛰어본 적이 없어. 그래도 좋은 친구던데.
▷ ……
▷ 먼 나중 일이겠지만 나도 그런 야구캠프를 여는 게 꿈이고 그땐 너도 부를 생각이거든.
▷ ……
▷ 그리고 모르는 사람보단 친구를 도발해서 놀려먹는 게 재밌다는 걸 넌 모르네. 남자끼리는 그게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