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달려온 대가 - 2
< 1 >
“아직 경기가 시작하려면 시간이 꽤 남았는데 AT&T파크엔 벌써 빈 자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많은 팬들, 모두 오늘이 역사적인 순간이 될 거라고 확신했으니 이렇게 이른 시간에 모였겠죠?”
“네. 자이언츠 선발이 다름 아닌 미누 조 선수니까요. 자이언츠가 올해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데 사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도 가능성을 높게 보진 않았잖습니까? 하지만 자이언츠 내부에서 나온 이야기에 의하면 조 선수가 계속 투지를 불태웠다고 합니다. 열정이란 전염되기 마련이고 실제 후반기엔 ND는 있어도 패배가 없는 페이스로 팀을 이끌었어요.”
“무시무시한 페이스였죠. 오늘 경기와 무관하게 다승과 탈삼진 타이틀은 이미 거머쥐었고 평균자책점도 사실은 확정이죠. 모르겠네요. 오늘 3이닝 20실점쯤 하면…… 그래도 1점대 ERA가 나오면 아예 할 말 없고요.”
“시즌 초중반엔 실험적인 투구가 많았어요. 구속의 완급조절부터 시작해서 각종 브레이킹 볼의 변화조절까지. 그러다 보니 실점과 패배도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작년보다 올해 성적이 더 좋았지만 내년 모습이 더욱 기대되게 만드는 선수죠. 일단 매 경기 강한 임팩트를 주고 개인적으로 수립한 기록만 몇 개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일단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퍼펙트게임 2회가 있고. 한 경기 21K 기록을 자신이 세웠다가 23K로 갈아치우기도 했습니다. 12타자 연속 탈삼진. 43이닝 연속 탈삼진. 9경기 연속 두 자릿수 탈삼진 등은 그저 덤이죠.”
“조 선수가 슈퍼2 조항에 따라 내년 시즌부터 연봉조정신청 자격은 얻지만 그래 봐야 이제 데뷔 3년 차 투수거든요. 그런데도 개인 성적은 물론이고 팀 전체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생각해 이미 에이스 대접을 받는 겁니다. 자이언츠 젊은 선수들의 중심이기도 하지만 30대 선수들 사이에서도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고 하거든요. 놀라운 선수죠.”
“연봉조정신청 자격을 얻으면 FA까지 3년입니다. 자이언츠에게도 시간이 많지 않죠. 장기계약을 못할 경우엔 샌프란시스코 팬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어요. 양키즈와 다저스가 자이언츠에서 거절하기 힘든 카드를 뽑아 들 거란 소문도 있고 팬들이 불안하게 생각하는 게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올해 스토브리그는 어느 때보다 뜨거울 전망입니다. 하지만 우선은 오늘 경기부터 집중해야죠. 디비전시리즈 1차전 선발이 조 선수가 될 거란 말이 있던데 그럼 정규시즌처럼 4일 휴식 후 출전이거든요. 포스트시즌 첫 경기의 부담이 있는데도 오늘 조 선수가 출격하는 겁니다. 자이언츠의 새 기록수립에 대한 강력한 의지.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되면 지켜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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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란 양면성이 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는 뭐 그런 거지.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고? 기록의 제물을 생각해봐.
퍼펙트게임을 했다면 누구를 상대로, 한 경기 23K를 찍었다면 역시 어느 팀을 상대로.
이런 기록은 평생 따라다닌다고.
기록을 수립하는 입장이야 영광이지만 희생양은?
컵스가 가진 해묵은 기록은 자그마치 1906년 산(産)이다.
정확히 131년 된 기록인데 2016년 컵스가 108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을 때 염소의 저주는 71년째였거든.
이건 어떤 저주를 들이밀어도 비벼볼 수준이 안돼.
그렇다면 앞으로 또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이 기록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를 할 거란 말이지. 말린스라고 새로 세워지는 기록의 희생양이 되고 싶을까?
오히려 자이언츠의 원대한 야심이 턱밑에서 꺾였고 그 꿈을 꺾은 주인공이 말린스였다는 말을 듣고 싶을 것 같은데.
1회 초 타석에 들어서는 말린스 타자를 보며 난 짐작이 맞았다는 걸 느꼈다.
왜 하필 말린스냐는 거겠지.
‘투수 로테이션 조정도 안 하고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라고 항의하는 것 같아.
리드오프 눈에 독기가 아주 가득 찼다.
그런데 날 원망하는 건 의미가 없어. 사무국에 테러를 해.
“플레이 볼!”
손에 든 로진백을 내려놓자 주심의 콜이 울렸다.
뭐 말린스 타자들이 독기를 품는다고 나쁠 것도 없다.
나도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그동안 다듬어온 투구에 대해 마무리 점검이 필요하거든.
독하게 달라붙는 상대여야 점검도 의미가 있지.
퍼엉!
“…… 스트라이크!”
잠깐 딜레이가 섞인 스트라이크 콜이었다.
존 경계에 살짝 걸쳤는데. 주심의 바깥쪽 존이 좁다는 뜻이다.
아마 내게 제법 제구가 괜찮단 이미지가 없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볼을 선언했을 걸.
타자도 주심을 한 번 힐끗 봄으로써 불만을 표시했다.
다만 다시 타격자세를 잡으며 스탠스를 뒤로 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살짝 당긴다.
뭐지?
컨택에 비중을 두는 게 아니라 한 방을 노려?
어디 확인이나 해보자.
딱!
“파울!”
흠. 컨택은 원래 좋은 타자네.
같은 코스였지만 존에서 빠져나가던 스핀-커터였는데.
어쩌면 예전 메츠부터 오픈 스탠스로 날 공략하던 팀들이 망하는 걸 봐서 아예 적극적인 타격을 하는 건가?
단타를 여러 개 묶어낼 자신이 없어서?
딱!
“아웃!”
그렇다면 나도 방법이 있지.
Eagle Eye로 파악되는 노리는 공을 주는 거다.
원하는 코스나 구종. 하나만 일치해도 그 떡밥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거든. 적극적으로 배트를 휘두를 타자들이면 원하는 대로 공을 준다. 아주 조금씩만 틀어서.
딱!
“파울!”
딱!
“아웃!”
다음 타자도 공 2개에 아웃.
퍼엉!
“볼!”
딱!
“파울!”
딱!
“아웃!”
결국 1회를 공 8개로 끝냈다.
삼진이 적어지지 않냐고? 절대 아니야.
타순이 이대로 한 바퀴쯤 돌면 타자들도 느낀다고.
적극적인 타격을 하다 오히려 말려들었다는 걸 모를 타자면 메이저리그에 서지도 못했으니까.
그럼 다시 지켜볼 거고.
그때부터 삼진은 잡아도 충분해.
< 2 >
가끔 생각나는 말이 있다.
“내가 야구를 통해서 배운 것은 나의 투구 이외에 경기의 나머지 부분들은 내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렉 매덕스라는 메이저의 전설이 남긴 말이다.
야구를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했던 이후로 여러 번 곱씹어봤지만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문장의 의미 그대로 투수가 잘 던져도 타자가 잘 때려내면 어쩔 수 없다는 뜻일까? 대학 때까지 내 성적이 야구를 직업으로 삼기엔 형편 없었다는 말은 여러 번 했다.
최선을 다해 던져도 난타를 당하며 난 정신승리를 했다.
‘녀석들이 잘 치는 걸 내가 어쩌라고?’ 하면서.
그런데 요즘은?
내 투구가 점점 다듬어져 가는 중이다.
한 경기 출전해 웬만하면 1-2실점 내에서 상대 타선을 틀어막고 있는 게 그 증거고.
지난 경기까지 내 성적은 26승2패.
249과 1/3이닝을 던지며 39실점으로 ERA는 1.408.
탈삼진만 337K로 컨디션이 나빠도 이닝 당 삼진 하나쯤은 거뜬히 잡아냈다.
하지만 오늘은 3회 초가 끝났는데 삼진 딸랑 1개.
최근 페이스와 비교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수준인데 막상 출루를 허용한 타자는 한 명도 없다.
삼진을 못 잡은 타자들? 당연히 야수들이 처리했다.
나 항상 내가 모든 걸 해결하려 했던 걸까?
삼진이 투수가 타자의 기를 누르는 최고의 결과물이긴 한데 사실 9이닝 내내 구위로 타자를 압도하긴 어렵잖아.
투수들이 긁히는 날이 있듯 타자들도 타격감이 하늘을 찌를 때가 종종 있거든. 통산 성적 따위완 무관하게.
아무튼 오늘 타자 9명을 상대하며 매덕스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삼진을 노리는 것도 맞춰 잡는 것도 똑같은 피칭.
절대 도망가는 피칭이 아니고 그저 스타일일 뿐이다.
삼진이 아닌 경우엔 야수를 믿으면 되고, 야수가 처리 못할 타구였으면 그땐 타자를 칭찬하면 그만이다.
야구에 절대란 단어는 없다.
FIP(Fielding Independent Pitching)는 결과론일 뿐 투수가 의식해선 안 되는 영역이다. 내가 만난 적은 없지만 매덕스 영감님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말했을 거라 믿는다.
또 그 양반이 삼진이 적은 투수도 아니잖아.
커리어에 3000K를 찍은 투수 중 쿠퍼스 타운에 못 간 투수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인데. 3000K? 어마어마한 숫자다.
“왜 궁상을 떨어?”
멍하고 생각에 빠져있는데 등을 팡팡 쳐대는 인간, 누구야?
바르가스. 이 자식이!
“지금 내 등에 파리채가 왔다 간 것 같은데.”
“…… 파리채?”
“응. 충격은 없는데 신경을 몹시 건드렸어.”
“젠장! 역시 넌 한 번 껍질을 벗겨봐야 해.”
“닥치고 왜?”
“4회 초 준비하라고.”
음, 뭐지?
함성도 들리고 했는데 점수는 또 못 뽑았어?
1-2회에 이어 계속 주자는 나가는데 득점은 없는, 말린스 입장에선 흔히 말하는 좀비 모드로 막고 있단 뜻이다.
어쩐지 내가 타석에 섰을 때 투수가 전력투구를 한단 느낌이 왔었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으니 투수력을 아낄 것도 없고 물량공세로 나오려나?
< 3 >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 6회 초 투아웃!
▶ 진짜 Untouchable이란 말은 저럴 때 쓰는구나.
▶ 후! 저런 경기에 직관을 갔어야 하는데.
▶ 이-베이 암표 가격 봤냐? 미쳤어. 못 가.
▶ 130년짜리 기록을 갈아치우는 경긴데 오죽하겠냐.
▶ 말린스도 대기록 제물이 안 되려고 노력은 하는데……
▶ 3회까진 말린스 타자들이 안타는 없어도 계속 공은 때려냈거든? 그런데 4회부턴 아예 얼어붙었어.
▶ 때려냈다고 보기도 어렵다. 곰탱이 투구 수를 봐.
▶ 투구 수? 어디 보자. 1회 8개. 2회 6개. 3회 5개? 무슨…… 3이닝 동안 공을 20개도 안 던졌네.
▶ 삼구삼진을 잡아도 타자 9명이면 공이 27개야.
▶ 곰탱이답지 않게 맞춰 잡았단 말인데.
▶ 타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오니 쉽게 간 거지.
▶ 미친. 이제 아주 농락을 하는 수준에 올랐네.
▶ 기본적인 구속이 낮춰도 98마일 전후로 형성되거든. 무브먼트가 나쁘냐면 그것도 아니고. 그렇게 구위에서 압도하니까 때려도 정타가 잘 안 나와.
▶ 쉽게 배트 내다가 투구 수도 못 줄이니까 지켜보는데 또 지켜보면 투 스트라이크는 그냥 먹고. 볼카운트 불리해지니 다음 공엔 일단 휘두르다 삼진 먹고.
▶ 또 저러다 수틀리면 105마일로 찍어 눌러요.
▶ 문제는 지금 자이언츠도 득점이 없다는 건데.
▶ 5회까지 말린스 투수만 3명 올라왔어.
▶ 지금 투수 타석에 대타 들어온 거 보면 6회 말엔 또 바꾸겠단 뜻이다.
▶ 그래도 자이언츠잖아.
▶ 맞아. 누가 한 명 때리겠지.
▶ 곰탱이도 가끔 답답해서 내가 친다며 때리고.
.
.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방금 대타는 제법 끈질겼다.
애매한 공을 커트는 하되 공을 끝까지 바라보는 타자들이 투수들 입장에선 꽤 귀찮거든.
말린스 40인 로스터로 올라온 선수인데 확실히 메이저리그는 언제든 무서운 신예들이 튀어나온단 말이지.
어쨌든 3회까지 삼진 한 개.
4회부턴 패턴을 확 바꿔서 3이닝 삼진 일곱 개.
계속 범타인데 이거 또 엉뚱한 일 벌이는 거 아닌가.
“조, 굿 피칭.”
오늘 나와 배터리를 이룬 포수는 케인이다.
원래 포수란 위치가 시즌 전 경기에 출장을 한다는 게 무리라 후반엔 하우어가 쉬는 날이 좀 많아졌다.
문제는 오늘 낌새가 이상하니 케인이 얼어붙었단 점이지.
굿 피칭을 했다고 주먹 내밀면서 왜 떨어?
“원하는 쪽에 미트만 가져다 대. 다 넣어줄게.”
지금은 해줄 말이 이것뿐이다.
기록 따위 의식하지 말자고 해도 케인이 의식이 안 되겠어?
< 4 >
“점수를 내겠단 생각은 버려야 할 것 같군.”“……”
타격코치가 자괴감이 드는 순간은 이럴 때다.
물론 타격은 타자의 몫이다. 코치들이 조언을 하고 방향을 잡아줄 수는 있지만 결국 투수를 상대하는 건 타자.
재능과 투수와의 상성, 심리전의 대처 등이 타자의 활약을 결정하니까.
하지만 코치들의 영향력을 0%라고 할 수 있을까?
조언과 방향설정이 필요 없으면 팀이 코치를 둘 이유가 뭔데?
저 괴물 같은 투수를 상대하기 위해 말린스 타격코치는 역량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많은 점수를 내는 작전은 불가능하단 걸 인정하며 딱 2점만 내보자고 타자들을 불러놓고 머리를 맞댔다.
자이언츠는 타선도 물론 막강하지만 포스트시즌이 없는 말린스는 정말 모든 걸 쏟아부을 수도 있으니까. 한두 경기 1-2점으로 막는 건 가능하니까.
그런데 2점? 저 투수를 보니 불가능한 생각이었다.
무지막지한 마운드의 폭군이다. 메이저리그란 생태계에 포식자들이 없던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맞수는 있었다.
하지만 저런 투구를 하는데 맞수가 생길까?
며칠 전까지의 데이터도 소용 없게 만드는데?
“자이언츠는 최다승률 기록만 생각할 때가 아닐세. 저 투수를 디비전시리즈에 올리려면 무한정 던지게 둘 수가 없어. 작전을 바꿔서 투구 수를 늘려보지. 점수는 못 내도 개인기록이라 할 수 있는 게 깨지면 자이언츠가 투수를 바꿀 거야. 그러면 다음 투수 상대로 득점은 노리자고.”
“알겠습니다.”
미묘한 때긴 하다.
개인의 영광이 될 기록.
팀에게 영광이 될 기록.
그게 하필 포스트시즌을 앞둔 경기에 맞물렸다.
이 상황을 제대로 이용하자는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