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동부 : 양키즈 - 3
< 1 >
그랜드 슬램을 맞고 나서 마음이 바뀌었을까?
스톤햄은 그동안 존 경계를 넘나들던 투구방식을 버렸다.
일단 좁아진 존을 인정하고 네 꼭짓점에 영점을 새로 잡아 전력투구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애쉬비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갈 땐 그를 내리나 했다.
하지만 주자도 없는 상황, 던지던 이닝의 마무리는 에이스의 자존심이고 자이언츠는 에이스의 자존심을 지켜줬다.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게 길었던 7회 말이 끝났다.
문제는 7회 초까지 3:1로 앞서던 스코어가 3:5로 뒤집어졌고 양키즈가 8회 필승계투조를 올렸다는 점이다.
어제도 연장 11회를 치렀지만 불펜의 연투도 감수하겠다는 뜻.
하긴. 2연패 뒤에 첫 승을 올릴 기회가 왔는데 불펜의 연투가 문제일 순 없겠지.
스톤햄이 덕아웃 뒤쪽에 걸터앉아 있다.
아이싱을 하지 않는데 8회에도 올라갈 생각인가?
모두 주변에서 비켜줬지만 난 슬쩍 곁에 다가가 엉덩이를 붙였다.
“8회 올라갈 거예요?”
“아니. 투구 수 100개가 넘었어.”
“…… 갑자기 존이 좁아진 느낌이던데요?”
“갑자기는 아냐. 경기 초반부터 양키즈 감독이 계속 존에 대해 이의제기를 했었잖아.”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다.
타자들이 꾸준히 어필을 했던 기억도 나고.
격렬한 항의는 아니고 신경전을 벌이는 정도지만 여기가 양키 스타디움이란 점까지 생각하면 주심에게 영향을 줬을 수 있다.
반면 조금씩 좁아지는 존에 스톤햄은 반응하지 않았다.
원래 스톤햄보단 포수가 나서줘야 하는데 오늘 마스크를 쓴 포수가 하필 케인이었다.
하우어가 1루로 갔고 새비지가 오늘 휴식을 취한다.
올해 스프링캠프부터 시작한 멀티 포지션 훈련의 성과다.
이런 백업멤버 활용이 팀의 연승에 도움은 줬어도 경험의 부족은 생각 못한 부분에서 꼭 표시가 난다.
케인이 프레이밍과 블로킹, 도루 저지, 타격 등에서 나무랄 데 없는 좋은 자원이지만 자잘한 심리전까진 아직 어렵지.
“타자들이 뒤집어주겠죠.”
“자기 공 던지고 결과엔 연연하지 않는다. 기억 안 나?”
“흐흐. 스톤햄한테 2년째 듣는 말인데 왜 기억이 안 나요.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이번 인터리그. 필사적인 상대들이랑 잘 싸웠어. 양키즈랑 4연전 시작하기 전에 났던 기사엔 신경 쓰지 마.”
헐!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야?
다 알고 있어?
“누가 조잘댔어요?”
“조잘대긴. 자이언츠가 AL동부에 진짜 실력을 테스트 받을 거라고 기사 났을 때부터 네 표정에 다 쓰여 있던데. 모조리 탈탈 털어서 엿을 먹여주겠다고. 매일 저녁 네 방에 선수들 모아서 쥐어짠다고 소문도 다 났고. ‘오션스 일레븐’ 그만 찍어.”
“‘이탈리안 잡’이었어요. 그런데 소문이 내가 저 멍청이들을 쥐어짜는 걸로 났다고요?”
“…… 아냐?”
“……”
하! 미치겠다.
내 방 강탈당하고 종종 맥주까지 대령하는데 소문은 내가 골목대장 놀이를 한다고 났단 말이지?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순간이 제일 억울한 법이다.
맹세코 이 엉뚱한 소문의 근원을 찾아 빈스의 오븐에 처넣고 말테다.
“아닌가보네. 그래도 팀의 구심점이 되는 건 나쁘지 않아.”
“스톤햄이나 새비지 모두 10년은 더 뛰어야죠. 구심점은 무슨.”
“하하! 10년이나 더 뛰면 좋지. 하지만 전에 새비지랑 내가 네 승리를 못 챙겨줘 아쉽다고 했잖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어. 충분히 팀의 구심점이 되기에 했던 말이지. 한 팀의 중심이 된다는 건 어깨도 무겁고 생각보다 쉬운 게 아냐. 당연히 주변에서 챙겨줘야 맞아.”
…… 팀 에이스 대접만이 아니었단 말이네.
그래도 벌써? 뭔가 내게 짐을 지우려는 꽤나 불순한 의도가 엿보이는데. 내가 자이언츠에 남길 바라서?
에이. 몰라.
내가 어떤 꿍꿍이인지 스톤햄도 모를 거고.
“어쨌든 기자들 엿도 먹일 겸 이겨야죠. 지난 블루제이스 전 결과 놓고 그 자식들이 뭐라 짖어댔는지 알아요?”
“하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
“……? 죄가 무슨 죄가 있어요?”
“……?”
“죄는 아무 잘못도 책임도 없어요. 그냥 관념이죠. 그 죄를 저지르는 개새끼들이 잘못했고 책임을 져야 정상이에요.”
“…… 어렵다. 난 마사지나 받으러 갈게.”
나 너무 흥분했나?
스톤햄이 도망가 버렸다.
< 2 >
따악!
“Boo!”
8회 초 자이언츠는 한 점을 따라갔다.
하지만.
따악!
“와아아아아!”
8회 말 양키즈가 다시 한 점을 도망갔고.
2점차가 유지되는 가운데 9회 초.
“존은 양쪽에 공평해.”
“당연히 그래야지. 다르면 주심이 무슨 욕을 먹게.”
“양키즈 자식들 계속 존을 좁히려고 주심한테 어필하는 게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뻔하지. 타격으로 승부를 보려는 의도야.”
“……”
“……”
덕아웃에 있던 사람들 시선이 모조리 리키에게 몰려갔다.
타격으로 승부를 본다?
“오늘 경기도 그렇지만 내일은 저 곰탱이가 선발이야. 선발 무게감이 다른데 투수전으론 답이 없어. 그럼 해답이 뭘까? 존을 좁혀놓고 서로 난타전을 가자는 의도 뻔히 안 보여?”
“…… 타격으로는 밀릴 게 없다고 생각한다?”
“순화하면 타격으론 충분히 해볼 만하다?”
“…… 또 꼭지 열리네.”
“아놔! 저 양키즈 촌놈들이.”
순간 뿜을 뻔 했다.
이 바닥 욕은 일단 촌놈 빠지면 시체라 브루어스 팬이 우리 선수들에게 ‘샌프 촌놈들 꺼져!’라고 욕하는 것도 들어봤지만.
그래도 뉴욕이 미국 최대도시인데 촌놈들이라니.
뭐 어쨌든 타자들 눈에 불이 들어갔다.
의욕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지만 9회 초 눈에 불이 켜진 자이언츠 선수들은 기어이 결과를 만들어냈다.
따악!
“Boo!”
따악!
“Boo!”
동점이 되는 상황에서 양키즈 팬들의 야유에 울음이 섞여 들렸던 건 내 착각이었겠지?
다만 내셔널리그 공공의 적 자이언츠다.
아메리칸리그와 인터리그라고 달라질 건 없지.
아무튼 그렇게 9회 초 동점을 허용했어도 양키즈는 양키즈였다.
추가실점을 막아내고 무려 연장 14회까지 경기를 끌고 갔으니까.
“양키즈 내일 올릴 투수나 있을까?”
“내일 경기 후엔 양키즈도 휴식일이야. 오늘까지 지면 레드삭스에 한 게임차로 따라잡히고 내일도 지면 레드삭스 경기결과에 따라서 동률. 절대 못 물러나지.”
“양키즈만 걱정할 때가 아닌데. 우린 지금 불펜에 누구 남았나?”
“오도시아.”
“그럼 오도시아로 끝내자.”
“내일은?”
“우린 가진 게 힘뿐인 곰 한 마리 있잖아.”
14회까지 달려온 놈들 패고 싶진 않아 참았다.
그리고 내 관대함에 감복했는지 오늘은 대타로 들어갔던 홀이 안타를 만들어냈다.
따악!
“Boo!”
이젠 진짜 울음기 섞인 야유다.
그렇다고 자비와 감화가 있으면 제대로 된 악당이 아니지.
몰아 붙여!
딱!
내 말을 들었을까?
다음 타자 고든이 배트를 낸 순간 작전이 걸렸다.
타구가 좋진 않았어도 시프트 때문에 빈 공간이 있었고, 유격수가 슈퍼 플레이를 펼쳐 몸으로 막았지만 타자와 주자 모두 세이프.
2사 주자 1루와 2루 기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뭐지?
1루 주루 코치가 2루의 홀에게 달려간다.
< 3 >
“홀 상태는?”
“괜찮습니다. 살짝 접질렸어요.”
“대주자로 보낼 선수가 남았나?”
“이 작전 성공하면 대타로 쓰려던 새비지뿐이죠.”
“…… 뭐 이런.”
14회까지 치러지는 연장에선 가끔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확장로스터가 아닌 이상 팀 내에 야수 백업자원은 3-4명이 전부고 대타를 미리 운용했다 결과를 못 낸 경우엔?
정작 필요한 상황에 대타자원이 없다.
“투수들 중에 대주자를…… 마땅한 선수가 없네요.”
“…… 그럼 세데아를 그대로 가야 하나?”
“문제는 좌완 상대로 세데아 타율이……”
백업이 괜히 백업일까.
선전하고 있어도 분명한 약점이 있어 백업이다.
일단 2루의 홀이 밖으로 나오고 새비지가 대주자로 들어가는 상황에 타격코치 루이스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조를 대타로 써보면 어떨까요?”
“…… 그게 무슨? 조 내일 선발인 거 몰라?”
애쉬비 코치가 목소리를 높였어도 루이스 코치는 물러서지 않았다.
“3차전 여기서 끝낼 기회야. 그냥 딱 한 타석이고. 투수들 가운덴 스톤햄이랑 조가 타격은 제일 괜찮은 거 자네도 알잖아.”
“한 경기 내주고 말지. 몸도 안 풀린……”
“조가 몸 안 풀어두는 거 본 적 없으니 할 말 없지?”
“……”
“싸우지들 마. 조에게 한 번 물어보자고.”
< 4 >
“기꺼이 나가겠습니다.”
나도 생각했던 참이다.
홀이 살짝 발을 절며 미안한 기색으로 들어왔고 새비지가 2루 대주자로 나갔다. 이제 적시타 한 방이면 되는데 상대투수가 좌완이라 세데아 타석에 누가 서나 했다고.
오늘 백업자원이고 불펜이고 거의 총동원이었으니까.
“내일 경기 생각해 자넬 맞혀버릴지도 몰라.”
“하하. 설마요.”
“욕심은 부리지 말고 스윙해. 수비는 바레이타가 내야로 내려오고 파간이 외야로 갈 거야.”
“파간이 외야 수비도 볼 줄 알아요?”
“라인업이 개판 된 게 우리만은 아니라 괜찮아.”
하긴.
어제도 11회 연장.
오늘은 14회 연장.
자이언츠고 양키즈고 피투성이다.
이 정도면 투수가 마스크 쓰고 포수석에 앉아도 이상할 게 없다.
특히 자이언츠는 범가너라는 희대의 투수 타격머신(?)이 있던 팀이라 투수 대타가 대단하지도 않다.
어찌 됐든 보호구를 차고 헬멧을 쓴 후 배트를 챙겨들었다.
장내엔 이미 대타로 내 이름이 울려 퍼졌고.
나가자마자 환영인사가……
“Boo!”
“마리화나를 너무 피워 자이언츠 벤치가 미친 거 아냐?”
“저 자식들 뇌까지 대마에 찌들었을 거야.”
참 가슴이 따뜻해진다.
캘리포니아 전체에 기호용 대마가 합법이 된지 20년이다.
아무리 그래도 벤치나 선수들이 대마를 피워가며 경기를 할까.
가볍게 배트를 두어 번 휘둘러보고 타석에 들어갔다.
요즘도 타격훈련은 꾸준히 하지만 예전 자이언츠의 범가너 급 타격은 아니다. 마구 욕심을 부리는 편도 아니고.
올해 내 타율이 얼마더라?
0.267? 홈런은 2개. 다른 타격지표는 본 적도 없다.
반면 범가너는? 타자로 커리어 하이를 보면 타율 0.275이고 장타율이 무려 0.550이다. 그랜드 슬램을 두 개나 때려냈고 투수가 개막전 연타석 홈런도 때렸던 많이 무서운 타자(?)다.
동시대 잘 나가던 커쇼, 그레인키에게도 홈런이 2개씩이던가?
랜디 존슨의 재래(再來)라 불리는 포스트시즌의 사나이가 그런 타격까지 하는 건 반칙이었지.
그 정도는 바라지도 않고 이 타석에 적시타 하나만 때려내면 양키 스타디움을 비통에 젖게 만들 텐데.
“널 타석에서 먼저 볼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선물 하나 줘.”
마스크 너머로 어이없단 눈빛을 보내는 포수에게 난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그의 말이 맞으니까.
여긴 양키 스타디움.
인터리그라도 아메리칸리그 룰을 따르니 사실 내일도 나를 타석에서 만날 일은 없었을 건데 웃기는 일인 거지.
“선물? 헬멧 튼튼해?”
“헬멧은 튼튼한데 안에 든 게 연약해.”
“…… 연약해서 네 이름으로 동영상 검색하면 팬케이크, 패티만 검색결과로 뜨냐?”
“연약해서 안 맞으려고 날뛴 거야.”
“둘! 퇴근 안 할 거야?”
주심에게 혼났다.
자기가 갑자기 존 좁혀서 이 모양인데.
퍼엉!
“스트라이크!”
자비 없이 던지네.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바로 초구에 스트라이크를 먹었다.
퍼엉!
“볼!”
하나쯤 빼봤나?
아님 너무 존이 좁아 얻어걸린 볼인가?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공 두 개가 연속 포심이 들어오더니 이번엔 슬라이더였어?
속았네.
다음은 뭘까?
포심 둘, 슬라이더 하나. 결정구는?
저 투수의 써드 피치가…… 어? 이게 지금 써드 피치면 실투를 했나? 아니면 내 스윙이 워낙 개판이라 대충 던지나?
오른 발을 살짝 들었다 놓았다.
팔꿈치는 옆구리에 잘 붙어있고 힙-턴은 부드럽다.
이제 팔로우 스윙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쭉 이어가면.
따악!
“Boo!”
“망할!”
“저 곰탱이는 뭐하는 놈이야?”
관중석에서 뭐라고 악을 쓰는 소리가 들리는데 타구를 확인도 못하고 달렸다. 어차피 2사였고 때렸으면 무조건 달릴 일만 남았으니까. 그리고 1루에 와서야 알았다.
“조! 천천히 달려도 돼.”
“네?”
“홈런이라고!”
하! 하하!
이런 상황은 생각을 못했는데.
[고마워해요. 제가 힘 좀 썼어요.]
베이스를 도는데 미네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