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구단주가 미쳤어요! - 1
< 1 >
2036년 미국의 ESPN처럼 스포츠 전문방송을 내세우며 새로 개국한 한국의 SEN24(Sports and Entertainment for 24hours) 채널은 일찌감치 미누 조란 이름에 관심을 보였다.
야구와 축구, 농구, 배구 등 프로 경기 전 종목.
심지어 E-Sports로 분류되는 분야의 경기까지 채널에서 상영하고 있지만 누가 뭐래도 골수팬들은 EPL을 비롯한 해외축구와 메이저리그 쪽에 몰려있기 때문이었다.
2030년대 스포츠팬들의 취향이 수준 높은 해외축구와 미국 메이저리그로 향하는데 시청률을 생각해야할 것 아닌가.
직접 경기장을 찾아 함성을 지르고 응원하진 못해도 TV에선 국내와 해외경기를 시청하는 비중이 비슷해진지 오래였다.
그러니 내셔널리그를 뒤흔드는 한 2년차 신예의 활약이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큰 화제가 됐던 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계라는 속된 말로 국뽕을 들이붓지 않고 순수하게 실력 자체만 봐도 메이저 정상급 투수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는 투수.
또 실력뿐인가? 경기 외적인 부분의 활약상은?
같은 실력이라도 흥행성을 갖춘 선수는 아우라가 다르다.
한국명 조민우의 단독인터뷰를 따내고 나아가 SEN24 프로그램에 출연시킬 수 있다면 굉장한 이슈가 될 게 분명했다.
그것이 서진석 기자가 샌프란시스코로 파견된 까닭이었다.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든 조 선수의 인터뷰를 따내라고. 아니면 이역만리에서 그냥 뼈를 묻으라고.
그런데.
“젠장맞을! 하필이면 내가 오자마자 그런 일이 터져서.”
타이밍 한 번 적절했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들린 소식이 뭐?
자이언츠가 내셔널스에게 2연패를 당한 건 그럴 수 있다 치지만 미누 조 선수가 SNS로 기자들에게 독설을 퍼부었다고?
잽싸게 사연을 알아봤다.
그리고 알아본 결과 내용 참 간단했다.
디비전시리즈가 끝나고 마지막 5차전에 초대한 어린 환자들 상대로 가볍게 위문공연(?)이 이뤄졌다. 그 자리를 정신 나간 선수들의 일탈로 씹어댄,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연패가 그런 선수들의 해이한 정신상태 때문이라고 왜곡한 기사들이 있었다.
조 선수는 SNS를 통해 기사를 작성한 기자들을 쓰레기 취급했고.
결과는 한 마디로 난장판.
같이 엮인 다저스 선수들뿐만 아니라 로키스와 D백스 선수들까지 기자들 성토에 합류해 인터뷰 보이콧을 선언했다.
<해당언론들의 공식사과 없이는 인터뷰 협조도 없다.>
명분? 당연히 선수들에게 있었다.
조 선수의 SNS계정에 올라온 사진과 동영상은 물론, 다저스 선수들의 SNS에 올라온 영상도 모두 같은 내용을 전했으니까.
하지만 선수들은 언론의 속성을 잘 몰랐다.
논란이 크면 클수록 기사의 클릭 수는 높아지는데?
사과를 하면 논란은 금방 잠잠해지는데? 정보전달 따위가 목적이 아니라 이익이 목적인데 왜 논란을 잠재우겠는가.
그들은 특유의 전술을 이용했다.
‘논점을 흐리려면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공격하라.’
황색언론의 본질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감히 언론을 공격하는 선수들의 태도를 문제 삼고 과거 행적들을 추적해가며 신나는(?) 전쟁터를 만들었다.
덕분에 내셔널스의 첫 월드시리즈 우승에 관련된 기사보다 이 화려한 전쟁에 한발 얹은 기사가 더 많은 상황까지 왔다.
상관없었다.
불구경, 싸움구경이 원래 제일 재밌는 법이니까.
내가 그 진흙탕 싸움으로 피해만 보지 않는다면.
문제는 어떻게든 조 선수의 인터뷰를 따야 할 서진석의 입장에선 망했다는 점이었다.
고민 끝에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일단 시작은 조 선수의 에이전트 설득이었다.
< 2 >
“느닷없이 한국은 왜?”
- 한국에 네 팬들이 꽤 많다더라고.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 한국에서 온 한 방송국 기자를 만났거든.
제시가 기자에게 들은 내용을 전해줬다.
일단 지금 한국에서 내 인지도와 인기가 최고라고 했다.
한국에도 많은 팬이 있는 만큼 그 팬들을 위해 내가 인사를 전하면 어떻겠냐고 제시를 설득했단다.
한편으론 타당하고 한편으론 기자라면 누구나 하는 말이다.
항상 팬을 내세워가며 인터뷰를 강요하고 팬을 자신의 방패로 쓰는 게 기자들이니까.
내가 팬들에게 소홀한 구석이 있었던가 생각해봤다.
일단 매 경기 최선을 다해 뛰었다. 그게 비싼 티켓을 구매하고 또 TV 앞에서라도 시간을 할애해 내 경기를 봐주는 팬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큰 보답이니까.
구장에서든 하다못해 빈스네 짐(Gym)에서든 사인이나 사진촬영을 거부해본 적도 없다. 뭐 SNS에 올라오는 멘션에 모두 답은 못해주지만 그거야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고.
과연 이런 걸 제시가 모르고 저런 말을 전하는 걸까?
“제시가 겨우 팬을 내세운 공세에 넘어가진 않았을 것 같은데.”
- …… 넌 곰이냐? 여우냐?
“무슨 미끼를 문 건지 빨리 말해봐.”
- 개인인터뷰랑 방송출연 조건이 좋아. CF 건도 있고.
“CF? 곧 나이키 화보촬영 또 있잖아.”
올스타전 이후 프리앙카랑 재촬영을 했던 화보는 꽤 인기를 끌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선지 다음 화보도 프리앙카랑 찍는다고 들었는데.
솔직한 말로 처음엔 욕먹는 게 아닌지 걱정도 했었다.
나도 이젠 이름이 조금 알려졌지만 프리앙카랑 비교할 건 아니었으니까. 미국에서 20대 여배우 10명을 꼽는다면 그 안에 꼭 들어가는 프리앙카다.
팬들이 항의라도 하면 나이키가 또 재촬영을 하자고 덤비지 않았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한국에서 CF를 찍는 거지.
“메이저리그 팬 아니면 누가 날 알아서 날 모델로 써?”
- 스포츠팬 기반으로 인터뷰랑 방송출연하면 인지도 더 오르지.
“나 돈 싫어하진 않아. 나중에 프린츠처럼 1500평 대지에 저택도 갖고 싶고. 그래도 한국은 안 갈래. 대신 여기서 인터뷰는 괜찮아. 이제 시간도 좀 있으니까.”
프린츠처럼 근사한 저택을 갖고 싶단 생각은 오랫동안 했다.
그 남자들의 로망 있잖아. 멋진 서재에 개인 바도 갖추고 홈시어터 설치해 친구들이랑 야구 보면서 피자&맥주 파티.
차고엔 세단이랑 SUV가 따로 있고 실내엔 개인 훈련장까지 갖춘 멋진 집.
당연히 돈 많이 벌어야겠지만 한국까지 날아가고 싶진 않다.
태어나기만 했을 뿐 내게는 사람도 문화도 낯선 땅이다.
- 혹시 친척들과 만나게 될까봐?
“그런 건 상관없어. 내가 애초에 핏줄은 서로 당기는 법이란 말을 믿는 사람도 아니고. 나이키 화보랑 페르시 결혼 때문에라도 멀리 움직이는 건 귀찮아. 한국 CF도 여기서 찍을 방법 있으면 괜찮으니까 에이전트께서 추진하세요.”
- 알았다. 그럼 한국 가자고 안 할 테니 좀 움직여.
뜬금없는 한국행 권유의 이유가 이거였나?
기자들과 전쟁에 내가 마음의 상처라도 입어서 바깥 외출마저 자제하는 걸로 알았던 거야?
그래서 미국을 떠나 한국에서 좀 머물다 오자고?
내 멘탈을 무시한 건지 제시도 여자라고 여자감성인 건지 모르겠네. 내가 지금 얼마나 편안하게 쉬는데. 살짝 지겨워지긴 하던 참이지만 내 평생에 이렇게 빈둥거리기도 처음이라고.
< 3 >
월드시리즈도 끝나고 이젠 볼 것도 없던 참이긴 했다.
제시에게 바깥 외출도 좀 하라는 잔소리를 들은 김에 움직여볼까 생각을 했는데 막상 갈만한 곳이…… 하나 있다.
“하우어!”
- 왜?
“지금도 혼자 빈둥거리고 있냐?”
- 그게 TV나 같이 보자니까 쫓아낸 자식이 할 말이냐?
“닥치고 나와라. 갈 곳이 생겼다.”
- 어디?
“산호세.”
혼자 가면 아무래도 어색하고 하우어를 불러낸 김에 갈만한 동료들이 또 있을까 싶어 전화를 마구 넣었다.
페르시는 결혼준비로 바쁘고 앰브로즈는 고향 갔고.
가족과 함께인 사람들은 곤란하고 프린츠가 당첨됐다.
오케이. 이러면 택시 부를 필요가 없어졌으니 더 땡큐지.
“산호세엔 왜? 애플이나 이베이 둘러보고 투자라도 하게?”
“딱 프린츠다운 말이네요. 전에 AT&T파크에 초대했던 제프랑 아이들에게 가보자고요.”
“…… 기자들은 또 그걸 쇼라고 할 텐데?”
“얼마든지 개처럼 짖으라고 해요. 신경 안 쓰니까.”
하우어와 난 가볍게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프린츠가 몰고 온 차는 신형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나는 물론이고 뒤에 앉은 하우어도 이리저리 눈을 굴려가며 차안을 살피느라 정신없었다.
“가다 아처에게도 들려야 해요. 그런데 이 모델 10만 달러는 하지 않아요?”
“좀 넘을 텐데 정확힌 모르겠다. 차 사게?”
“올해 택시만 타고 다녔던 터라 차 생각도 있어요.”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 첫 차는 보통 스포츠카를 사던데.”
“스포츠카는 별로. 태우고 다닐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포츠카가 있어야 여자가 생기지.”
쓸데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달렸다.
중간에 아처도 픽업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호세까진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네비게이션에 성 토마스 병원을 입력하고 달리는데 오랜만에 자동차를 타고 멀리 움직이는 게 꽤 괜찮다.
마이너리그에 있을 땐 버스로 이동이 그렇게 지겨웠는데.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과거를 잊기도 쉬운 걸까?
언젠가 더 이상 공을 던지지 못하는 날이 오면 야구에 목을 매고 사는 지금 이 순간도 잊혀지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절대 그러진 못할 것 같은데.
< 4 >
“제프!”
“…… 조!”
저 녀석 불편한 다리로.
놀라서 후다닥 달려가 녀석을 안아 들었다.
“벌써 뛸 정도가 된 거야?”
“헤헤. 전에 조가 말한 대로 재활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래도 무리하는 건 안 좋아. 파티에서 터너랑 앰브로즈가 불러줬던 노래 기억나?”
제프가 머리를 긁적였다.
“데…… 잘 기억 안 나요.”
“데스파시토(Despacito). 무슨 뜻이게?”
“그거 스페인어잖아요. 스페인어 몰라요.”
“‘천천히’란 뜻이야. 뭐 스페인어 가르칠 건 아니고 왜 데스파시토 뜻을 알려주는지 알겠지?”
“네.”
똑똑하고 야무진 아이다.
지금은 걷는 것도 불안하지만 재활에 성공하고 꾸준히 운동 계속하면 언젠가 제프도 메이저리거가 되지 말란 법 없다.
제프에게 내 스트레칭이나 하나씩 가르쳐볼까?
뒤를 돌아보니 프린츠랑 하우어, 아처도 잔뜩 몰려온 아이들 틈에 둘러싸여 있다.
AT&T파크에 왔던 아이들은 그냥 일부였단 생각이 든다.
각자 아픈 부위는 다르겠지만 한창 뛰어놀고 활기차야 할 시기에 병원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
산체스가 말했던 기금 서둘러야겠네.
내가 세상 모든 아이들이 아프지 않고 상처받지 않게 도울 순 없겠지만 직접 보게 된 이 아이들이라도 도와야지.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기자나 안티들에게 소모할 힘이 있다면 이 아이들에게 쏟는 게 낫겠다.
제프의 형인 벨포트가 장기휴가를 냈다더니 병원에 있어 다행이다.
“언제까지 휴가예요?”
“전역신청을 할 생각이에요.”
“아, 제프 때문에?”
“제프 재활도 도울 생각이지만 여기 아이들을 위해 제가 해볼 만한 일이 있을지 찾는 중이죠.”
벨포트가 활짝 웃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런 우연도 있을까? 딱 좋네.
프랭클린 리소스에 기금운용을 맡기고 로건에게 감사를 맡긴다고 해도 아이들 가까이에서 지켜볼 이가 있어야 좋을 것 아닌가.
산체스 등과 의논도 해야겠지만 반대할 리가 없다.
“잘 됐네요.”
“잘 돼요?”
“그때 함께 봤던 선수들끼리 아이들 후원기금을 조성하잔 논의를 했었거든요. 장기입원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 선정하고 경과 지켜보는데 도움 줄 인력이 필요해요.”
“…… 이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이런. 캡틴. 그렇게 눈시울까지 붉어질 일은 아니거든요.
“내년 시즌 시작 전에 몇 명 일단 선정해보죠.”
“하하! 자이언츠 다음 시즌 전망이 밝다고 벌써 아이들에게 선물부터 생각하실 줄은 몰랐어요.”
“다음 시즌 전망이 밝아요?”
“…… 못 듣고 오신 거예요? 바르가스 선수가 FA로 풀리잖아요. 자이언츠가 영입 추진 중이라고 뉴스에 나오던데.”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자이언츠가 바르가스 영입을 추진해?
메이저리그 최고연봉 기록을 갈아치울 텐데 자이언츠가 그런 거금을 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