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 1
< 1 >
개리 월터.
신시내티 레즈의 루키들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그를 만나고 나도 나름대로 연구를 많이 했다.
한 경기 100개의 투구가 모두 완벽할 수 없듯 타자의 모든 스윙이 기계처럼 정교하기란 불가능하다. 또한 스탠스와 무게중심 이동, 컨택트 순간에 힘의 집중까지 무결(無缺)한 스윙이 있을까?
자니 버스터의 타격 영상만 수백 번은 돌려봤다.
변화가 심한 브레이킹 볼의 궤적을 쫓는 게 아니라 빠른 구속, 상대적으로 변화는 적은 포심을 노리는 스윙이 맞았다. 또한 구위를 무작정 힘으로 이기려하지 않는, 확실히 좋은 스윙. 타이밍을 잡는 정확한 컨택과 반발력을 이용하는 스윙.
어제 스톤햄에게도 끈질긴 승부 끝에 마지막 타석에선 안타를 뺏어냈지. 고작 안타 하나라고? 3타수 1안타는 타자의 승리다.
버스터란 타자의 가치를 폄하할 생각은 절대 없다.
하지만 기본으로 돌아가니 답이 보였다.
Hitting is timing. Pitching is upsetting timing.
(타격은 타이밍이다. 피칭은 그 타이밍을 뺏는 것이다.)
버스터와 레즈 루키들의 타격은 간결하다.
‘Simple is the best.’란 격언에 가장 어울리는 타격.
상대할 투수를 분석하며 엄청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는 증거긴 한데 무게중심 이동의 딜레이까지 없애진 못했어.
내셔널스의 바르가스나 다저스의 클로위처럼 어떤 구종의 공이든 같은 중심이동을 하는 수준까진 못 된다는 뜻이다.
바르가스나 클로위는 패스트볼을 생각해 배트가 나가다 브레이킹 볼을 만나면 아예 손목으로만 스윙을 늦출 정도로 타격기술 자체가 사기거든.
간단히 말해 타이밍을 뺏을 방법을 찾아냈다.
그 결과 오늘도 리드오프로 나온 버스터를 삼구삼진으로 잡았고.
처음 만났을 땐 저 녀석에게 리드오프 홈런을 맞아 꽤 충격을 먹었었는데.
다음 타자에게 뭐라고 귓속말 하는 거야?
오늘은 포심이라고 맘껏 휘두를 순 없어.
머리 맞대고 의논해도 소용없고. 몸이 기억하는 타격자세를 내 투구에 맞춰 바로 변화시키긴 힘들 걸.
“버스터, 마지막 공이 포심 아니었어?”
“포심 맞아. 그런데 타이밍을 뺏겼어. 투구 딜리버리는 같은데 각 단계를 구성하는 흐름이 지난 투구와 미묘하게 달라.”
“그게 무슨 말이야?”
“타석에 서봐야 알아.”
레즈의 2번 타자로 테이블세터 자리를 굳힌 데니스 파바노는 잔뜩 얼굴을 굳힌 채 타석에 들어섰다.
던진 게 분명히 포심인데 타이밍을 뺏는다고?
퍼엉!
“스트라이크!”
퍼엉!
“볼!”
원 볼 원 스트라이크.
불리한 볼카운트는 아니지만 두 개의 포심을 보고 버스터가 말한 타이밍을 뺏는다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100마일이 넘는 강속구라도 메이저리그에 선 타자라면 최소한 배트가 나가야할 타이밍은 알아야 한다. 안타를 만들어내는 건 다음 문제고 배트타이밍을 잡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방금 두 개의 공은 모두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스윙을 가져가려다 멈칫. 무게중심의 이동과 엇박자를 만들어내는 투구 때문이었다.
스윙이 나가봐야 타이밍이 늦거나 빠르다는 느낌?
차라리 브레이킹 볼이라면 반 박자 늦게 스윙을 가져가서 배트에 붙여놓고 밀어낼 것 같은데. 아니 어떻게 타이밍을 뺏는지 아직은 모른다. 스핀-커터 같은 공이 횡 변화에 타이밍까지 뺏는다면 그게 진짜 악몽이지.
어쨌든 일단 스윙을 해봐야 한다.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 2 >
“무슨 수를 쓴 거야?”
“수를 쓰긴요. 평소처럼 던진 거죠.”
“레즈 타자들 몸이 굉장히 뻣뻣하던데.”
스톤햄의 질문에 ‘Eagle Eye를 썼어요.’라고 대답할 순 없다.
‘스탠스와 무게중심의 이동을 읽어 타이밍을 뺏었어요.’라고 말하는 건 더더욱 안 되고.
그냥 편하게 던질 수 있어 좋은데요? 하고 말았다.
원래 Eagle Eye는 타자의 취약 코스를 찾는 용도다.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상대가 뭘 내려는지 미리 알면 유리한 거야 당연하지 않나? 다만 NL이든 AL이든 각 리그 타격 20위 안에 이름을 올릴 수준이면 하나의 코스나 구종만 노리고 타석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반쯤 봉인했던 특성.
레즈 전을 앞두고 발상을 바꿔 이 특성을 다시 꺼냈다.
레즈 루키들이 어차피 노리는 게 포심이라면 무게중심 이동에 맞춰 타이밍만 딱 뺏을 목적으로.
일단 1회 초 수비에선 그 의도가 잘 먹혀 들어갔다.
그래야지. 0.5초의 타이밍을 뺏기 위해 얼마나 연습을 했는데.
따악!
“유후! 터너, 웬일이야?”
“그래. 터너가 올스타를 글러브로만 먹은 건 아니지.”
노닥거리던 우리 시선이 그라운드로 돌아갔다.
생각보단 손쉽게 1회 레즈 공격을 막아낸 보답인가?
터너가 노아웃 주자 2루의 기회를 만들어내고 활짝 웃는 모습이 오늘 경기는 쉽게 풀릴 듯 보였다.
따악!
역시. 앰브로즈가 바로 상대투수 초구를 때려 적시타.
자이언츠 타선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카디널스 쪽 상황 알려드릴까요?”
“알면 뭐가 달라지나? 7연승 할 테면 하라고 해.”
카디널스가 이겨도 한 경기 차이는 유지된다.
내일 경기마저 카디널스가 이기고 자이언츠가 패하면 타이브레이크 게임을 치러야하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그건 자이언츠가 못한 게 아니다. 그저 카디널스를 칭찬해야 하는 거지.
베이커 감독은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시즌 막판 7할 대 승률을 이루고도 와일드카드에서 멀어진다? 그건 자이언츠에 운이 따라주지 않는 것뿐이다.
이사회와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의 출전을 밀어붙였고 어쩌면 재계약이 무산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후회가 없다.
자이언츠 역대 최저 페이롤 팀을 이끌고 여기까지 달려온 정도면 선수들과 자신 모두 만족할 수 있다.
올해보다 내년이, 내년보단 그 다음 해가 더 기대되는 선수들.
한없이 장난만 치는 것 같아도 집중과 휴식, 긴장과 이완 사이 줄타기를 팀의 문화로 만든 좋은 선수들이다.
아마 아쉬움이 남는다면 루키들에게 가을야구의 경험을 전해주지 못하고 시즌을 끝내는 정도겠지.
그리고 플레이오프를 치른대도 이기면 그만 아닌가.
야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런. 저는 기쁜 소식이라 감독님께 먼저 달려온 건데요.”
“…… 컵스가 기운을 내는 모양이지?”
베이커 감독이 페릴에게 시선을 돌렸다.
단장 요한슨이 중용하는 전력분석관 출신의 젊은 단장보좌가 자신을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4:1로 방금 7회가 끝났습니다.”
“2이닝이면 3점이 아니라 13점도 가능한 걸 몰라?”
“어네트와 맨슨이 불펜에서 어깨를 풀고 있었는데요?”
“……”
어네트와 맨슨?
컵스의 철벽 불펜과 클로저.
후반기 피로누적으로 확장로스터 적용과 동시에 출전을 줄였는데 그들이 어깨를 푼다면?
“컵스도 팬을 의식해야죠.”
“이기던 경기 탱킹을 하면 리글리필드가 뒤집히겠지.”
“컵스 팬들 알잖아요. 마음먹으면 화력이 필리건에게 밀리지 않아요. 최근 컵스의 느슨한 경기운영에 불만도 많았고요.”
< 3 >
“진짜요?”
AT&T파크가 뒤집어질 것처럼 함성에 휩싸였다.
난 내 투구에 함성을 보내는 줄 알고 덕아웃에 들어오며 잔뜩 우쭐한 마음이었는데.
“진짜야. 방금 경기 끝났어. 스코어 5:2로.”
“…… 자이언츠가 가을야구에 가는 거네요?”
“체이스필드부터 시작이지.”
카디널스의 승천하던 기세가 꺾였단다.
가을좀비들을 푹 쉬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컵스.
작년보단 확실히 파괴력이 떨어져 내셔널리그 세 개 지구 우승팀 중에 가장 승률도 낮았지만 호랑이는 역시 호랑이였다.
그런 거 있잖아.
곰이 이빨이 없다고 곰이 아닐까?
호랑이가 이빨, 발톱 다 빠져도 맹수가 아닐까?
결론은 간단하다. 내일 경기결과를 기다릴 것 없이 자이언츠가 와일드카드 결정전에 나가게 된 것이다.
“와우!”
뭔가 크게 실감은 안 나는데 입에선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미국에서만 야구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전부 몇인가.
그 안에 꿈을 이뤄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사람은?
하지만 메이저리거 중에서도 가을야구 경험자는?
조금 욕심을 부려 월드시리즈에서 뛰어본 이는?
아예 월드시리즈 반지를 가진 사람은?
하다못해 우리 영감님도 월드시리즈 반지가 없고, 메이저리그에서 무려 27시즌을 뛴 놀란 라이언도 어메이징 메츠에 있던 초창기의 반지 하나가 전부다.
아예 그 뒤론 월드시리즈에서 던져보지도 못했다.
27시즌을 메이저리그에서 그 많은 기록을 세우면서도.
오늘 경기야 이겼지만 내일 경기는 그냥 운에 맡기겠다고 생각했는데. 동료들이 잘 던지고 잘 때리겠지만 레즈가 더 잘 던지고 더 잘 때리면 하는 수 없는 거니까.
하하! 내가 진짜로 가을야구에 간단 말이지?
대학까진 쟤가 나가는 경기면 버리는 경기라는 소리까지 듣던 내가 어디까지 올라가게 될까?
가을야구에서 만나는 팀은 투구 하나, 타격 하나에 대한 집중력이 정규시즌과는 다를 거다.
아예 정규시즌과는 완전히 다른 경기를 한다.
정규시즌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어도 큰 경기에 약한 징크스를 드러내는 선수도 있고. 일종의 새가슴?
나 그런 새가슴은 아닐까?
“조, 정신 차려. 그렇게 좋아?”
“실감도 잘 안 나는데 오만 생각이 다 드네요.”
“큭큭큭!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 이해는 된다만 좀 심해.”
“심해요? 어떻게?”
“저 녀석들 표정과 비슷해.”
스톤햄이 턱짓으로 가리킨 저 녀석들이란?
하우어 일당들이다.
단언컨대 저런 넋 빠진 모습은 영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본 적이 없다. 잘 하면 침도 한 바가지 흘리겠는데?
뭐 그래서 싫다고? 아니.
잭 니콜슨의 영화제목이 기억난다.
As Good As It Gets!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최고다!
< 4 >
“내셔널리그 한정이지만 2011년 메이저리그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와일드카드 경쟁이 단 한 경기를 남기고 막을 내렸습니다.”
“2011년이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역대 와일드카드 레이스 중 가장 극적이었죠. AL과 NL 양대 리그에서 동시에 와일드카드를 건 단판승부가 열렸어요. 전무후무한 포스트시즌 결정전이 펼쳐졌는데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룻밤 사이에 서스펜스와 스릴러, 드라마가 뒤섞인 영화 한 편이 나왔어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자료를 한 번 봐야겠는데요.”
“그냥 제가 간단하게 정리해 드리죠. 2011시즌 시작 전에 보스턴 레드삭스는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의 최강자가 될 거라 예상되는 전력이었어요. 실제 올스타 브레이크 직후 성적이 51승37패. 지구우승은 거의 확정이라고 봤을 정도였어요. 반면 탬파베이 레이스는 전년도 개막로스터 중 10명을 트레이드와 FA로 내보내 전력이 급감한 상태였는데 팜의 잠재력이 터져 49승41패로 오히려 놀랍다는 평가를 받았죠.”
“큰 차이가 났던 건 아닌데요?”
“8월에는 더 벌어졌으니까요. 레드삭스가 지구 1위를 양키즈에 내주긴 했어도 와일드카드 순위에선 9월 3일까지 레이스에 9경기를 앞섰어요. 문제는 남은 27경기에서 거둔 승리가 단 7승. 레이스는 같은 기간 16승11패.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두 팀이 동률이 됐던 거죠.”
“하하! 진짜 영환데요. 내셔널리그는요?”
“정말 똑같았어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NL 와일드카드 레이스에서 카디널스에 8월 24일까지 10.5경기차로 앞서고 있었죠. 하지만 그 후로 카디널스는 22승9패로 폭주를 시작했고 브레이브스는 11승19패. 동률이 돼버린 겁니다.”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요?”
“네. 9월28일 162번째 경기를 앞두고요.”
“양대 리그 동시에요?”
“네. 동시에요.”
“Unbelievable! 진짜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했군요.”
“운명을 가를 마지막 경기. AL의 보스턴 레드삭스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원정경기를, 탬파베이 레이스는 뉴욕 양키즈와 홈경기를 치렀습니다. NL에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홈경기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원정경기를 가졌고요.”
“정말 영화였는데요.”
“각 경기도 한 번 찾아보세요. 다른 구장의 경기까지 지켜보며 팬들의 환호와 탄식이 수십 차례 겹치는 경기였으니까요.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던 그 4경기가 웬만한 포스트시즌보다 훨씬 재밌었습니다. 제가 장담하죠.”
“그런데 잠깐만요. 2011년이면 혹시 카디널스가……”
“Stop! 팬들에게 찾아보는 재미를 빼앗지 마세요. 물론 이미 자세한 내용을 아는 분도 많으시겠지만 말입니다.”
“하하! 그래야겠군요. 오늘 중계는 여기서 마칩니다. 내셔널리그의 마지막 와일드카드 도전자가 자이언츠로 결정됐다는 사실만 다시 확인해드리고 말이죠. AT&T파크를 찾은 자이언츠 팬들은 모두 즐거운 밤이 되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