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제물이 필요하던 참이다. - 5
< 1 >
▶ 정말 깔끔한 라이트 훅이었다.
▶ 곰냥이 저 덩치가 파고드는 장면 봐라. 예술이다.
▶ 처음 배트 휘두르는 거 슬쩍 피하고 다시 배트 치켜세우는 타이밍 잡아서 뛰어들지? 그리고 허리 돌아가는 거 봐.
▶ 그렇지. 펀치는 허리와 어깨에서 나오지.
▶ 방금 그건 타격이론 아니냐? 힙-턴?
▶ 같은 힙-턴으로 홈런도 때렸잖아.
▶ 곰냥이 저거 야구하기 전에 뭐했던 놈이야?
▶ 스탠포드 심리학과 졸업. 기록에는 Elementary부터 쭉 야구만 해왔다고 나온다. 다른 종목 해본 게 없어.
▶ UFC나 WBO 유망주였다고 해도 믿겠는데.
▶ 오늘 펀치만 보면 WBO 최고 유망주를 MLB가 도둑질해간 거야. 딱 한 방에 와일더 KO당하는 거 봐.
▶ 와일더 맞는 순간 기절 잼.
▶ 땅에 부딪히면 아플까봐 미리 기절.
▶ 내가 다이어트 목적으로 권투를 했어도 시합은 꽤 봤거든. 곰냥이가 때리는 순간 힘 뺐어. 어깨 뻗다가 멈추는 거 딱 보면 느낌 오지? 끝까지 돌렸으면 와일더 죽었다.
▶ 벤클에서 배트 들고 설쳤으면 죽어도 원망 못하지.
▶ 곰냥이 사람 죽일까봐 권투나 격투기 종목 대신 야구 하는 거 아닐까? 곰발에 원샷원킬 나올까봐.
▶ 큭큭큭! 그거 말 된다.
▶ 그럼 와일더가 더 대단한 거네.
▶ 왜?
▶ 곰한테 맞았는데 턱 내려앉고 끝났으면 선방한 거잖아.
▶ 하하! 어찌 됐든 브레이브스는 곰냥이한테 까불다가 주전선수 두 명이 시즌 아웃이니 와일드카드는 물 건너갔네?
▶ 두 명?
▶ 바르틴 팔꿈치 작살나 아웃. 와일더 턱 깨져 아웃.
▶ 아! 둘이구나. 그런데도 곰냥이 퇴장을 안 당했어?
▶ 브레이브스 감독이 주심한테 지랄을 하던데 영상만 봐도 하나는 자해공갈단. 하나는 먼저 배트 휘두른 병신. 무슨 이유를 대고 퇴장을 시켜?
▶ 오죽하면 애틀랜타 팬들이 더 욕을 하더라.
▶ 차라리 이기는 병신이었으면 한쪽 눈 질끈 감았겠지.
▶ 지난번엔 패티 7장짜리 빅 맥. 오늘은 딱 7장 쌓고 나니 배트 들고 나가서 KO. 내가 팬이라도 정 떨어지겠다.
▶ 어쨌든 8명이야? 곰냥이 신기록 세운 거네?
▶ 징계가 어떻게 나올지 의문이다.
▶ 곰냥이 이전에 최고의 펀치는 루그네드 오도어가 호세 바티스타 턱주가리 날려버린 건데 그때 7경기 출장금지였다.
▶ 이건 징계 주면 안 되지.
▶ 와일더 턱이 깨졌는데?
▶ 그럼 배트 휘두르는 놈을 어쩌라고? 샷건이라도 쏴?
▶ 아인버그 주님 곁으로 보낸 프린츠는?
▶ 그건 사연을 모르지.
오늘은 경기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하우어나 페르시가 찾아서 보여준 게 아니라 일부러 찾아봤다.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두 명의 선수가 시즌아웃.
경기 퇴장은 안 당했어도 충분히 논란이 될 테니까.
그런데 읽다보니 거의 일방적인 흐름으로 의견이 모였다.
“어때? 내가 걱정할 것 없다고 했지?”
“딱히 걱정한 건 아냐. 걱정한다는 건 후회한다는 뜻인데 적어도 오늘은 후회할 짓 안 했어.”
“다음에도 오늘 같은 일이 생기면?”
“난 악당이 돼도 악어의 눈물은 안 흘려.”
프리앙카와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할리우드 배우 중 기억에 남는 역할 이야기할 때였을 걸.
“난 한니발 렉터나 조커 같은 진짜 악당이 좋아.”
“작년 조 별명이네?”
“그래서 자이언츠 팬이랑 내가 잘 맞아. 나는 아무래도 마이웨이 스타일 악당이 좋거든. 악당은 악당다워야 해.”
“와! 또 좋아하는 다른 스타일은?”
프리앙카는 내 독특한 악당론을 꽤 좋아했다.
고뇌하는 악당이나 어쭙잖은 개똥철학 풀어놓는 전형적인 미국식 악당은 그녀도 별로였다고.
“글쎄. 프라이멀 피어의 아론 스탬플러?”
“…… 에드워드 노튼이 연기했던?”
“맞아. 마지막 5분은 전율이었어.”
“또!”
“음, 어벤저스의 로키?”
“큭큭! 아무튼 조 너는 진짜 특이해.”
내가 특이한가?
실제의 나는 딱히 악당 짓은 하지 않고 살았던 것 같은데.
아무튼 지금 하우어의 질문은 그때 프리앙카와 대화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댓글을 보고야 알았는데 막 집어던진 게 7명.
또 한 방에 턱을 부숴놓은 녀석까지 더하면 8명.
신기록도 맞고 브레이브스에 최고 악당인 것도 맞다.
하지만 역시 악당은 악당답게. 뒷일을 걱정하지도 후회하지도 않고 다음에 이런 경우 또 생기면? 뭘 물어봐.
“그래서 사과나 유감표시는 하지 않을 거라고?”
“잘못한 게 없고 유감스럽지도 않은데?”
책임소재 따질 것 없이 시즌아웃을 당한 선수가 두 명.
오늘 사건에 대해 뭐라고 입장표명을 원하는 인터뷰 요청이 많았지만 난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항상 뻗대는 태도인 나를 싫어하는 기자들이 많은 것도 안다.
이런 때마저 노코멘트? 악의적인 기사가 나갈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라고? No, Thanks!
< 2 >
브레이브스와 3차전이 열리는 선트러스트 파크.
나는 어제 8이닝을 던졌다고 러닝과 스트레칭 이외엔 타격훈련도 금지당해 태블릿만 들고 노는 중이었다.
어제 경기에 대한 기사는 더 찾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보는 내용은 신시내티 레즈의 경기 기사다.
역시 레즈가 바닥을 치고 반등을 시작했다.
레즈와 경기를 치렀던 것도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었다.
그 사이 34경기를 치른 레즈의 성적은 18승16패. 올스타 브레이크 전까지 승률 4할을 못 채웠던 팀이 레즈였는데 정말이지 눈부신 변화다.
작년 자이언츠의 모습과 딱 판박이 아닐까?
올해는 이미 늦었지만 내년엔 더 무서워질 테고.
개리 월터.
재활 트레이닝에 타격이론까지 접목시킨 젊은 천재 한 명이 레즈란 팀 색깔을 바꿔버린 대사건이다.
벌써 기자들도 상당히 주목하는지 관련내용이 꽤 된다.
아마 다른 구단에서도 접촉하는 사람들이 생겼을 건데 내년엔 더 많은 타자들이 괴수로 변신해서 나타나지 않을까?
이런 게 변화고 발전인데 막을 순 없다.
청동기시대에 철제무기를 들고 나왔다며 반칙이라고 칭얼거려 봐야 공허할 뿐이다. 나도 올해 근사한 성적을 거두고 있지만 여기서 만족하면 내년엔 다시 주저앉을지 모른다.
“조, 프리앙카 사진이라도 훔쳐보는 거야?”
“내가 프리 사진을 왜 훔쳐봐요? 보려면 대놓고 보지.”
“뭐야? 이젠 아예 애칭으로 불러?”
날 놀리러왔던 프린츠의 눈이 동그래졌다.
프리앙카랑 나이키 화보촬영을 하고 그 사진들이 여러 매체에 실리면서 놀림도 참 많이 당했다.
B&B가 원래 알던 미녀와 야수(Beauty and Beast)가 아니라 미녀와 곰(Beauty and Bear)이었냐며 나 놀리다 척추 접힌 인간 많다.
그런데 진짜 애칭으로 부르는 사인가 싶었을 거다.
오해하지 말라고 재빨리 알려줬다.
“채팅 룸에서 다 그렇게 불러서요.”
“단체 채팅? 누구랑?”
“케이튼이랑 로웬은 알 거고 한두 명 더 있어요. 리키, 하우어, 앰브로즈까지 가끔 모여서 수다 떠는데 몰랐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계속 모르고 지내요.”
이런 게 반대로 놀려먹는 재미……
재미는 재민데 옆에 늑대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네.
“이 건방진 루키들이 할리우드 미녀들을 모아놓고 하렘을 차렸다 이거지?”
“하렘은 무슨. 모여서 수다 떤다고요!”
“시끄러!”
“닥쳐!”
“안 돼!”
“꺼져!”
“확! 씨!”
와! 나 순간 공포에 질렸다.
스톤햄이나 새비지 같은 유부남들 외에는 다 몰려왔어.
도대체 내가 뭘 했기에 뭐가 안 되고 곧 경기는 시작인데 어디로 꺼지라는 거야?
어제 봉인한 주먹 한 번 날렸다가 그대로 한 명 병원에 보냈는데 오늘은 콱 자이언츠 선수 없어 경기 못하게 만들어?
막상 그 미녀들이 모여서 떠는 수다를 듣다보면 할리우드 여배우에 대한 환상이 깨진다는 걸 알긴 하려나.
이럴 때 필요한 게 본보기다. 어제 개소리를 입에 담은 녀석에게 나 대신 멋진 펀치를 날려줘 고맙지만.
프린츠, 오늘은 희생합시다.
잽싸게 프린츠를 붙잡아 베어-허그 자세를 잡았을 때였다.
“조! 조!”
< 3 >
시애틀에서 많이 듣고 온 혀 짧은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나가보니 딱 그 세쌍둥이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아직 할로윈은 한참 남았건만 복장들이……
그 복장이면 손에 글러브 대신 칼을 들어야 해.
“로마 병정들! 나 부른 거 맞아?”
“맞아요. 캐치볼!”
의외다.
뒤엔 아이들 코스프레의 범인이 분명한 아빠들이 앉아있었다.
여기가 자이언츠 쪽 덕아웃이긴 해도 아이들이 로마 병정 복장의 안에 입은 건 브레이브스 유니폼. 아빠들이 입은 유니폼 역시 네이비블루와 빨강, 흰색으로 각각 색은 다르지만 브레이브스 유니폼이 맞다.
어제 내가 그 난리를 쳤는데 브레이브스 팬이 날 찾아?
뭐 애들이야 팀을 가릴 것도 없겠지만 저 아빠들은 내가 못마땅하지 않을까?
머리수대로 사인볼을 만들어 나눠주고 캐치볼을 몇 번씩 해준 후 물어봤다. 난 또 궁금한 건 못 참거든.
“모두 브레이브스 팬 맞죠?”
“아버지 때부터.”
“난 할아버지.”
“난 컵스 팬인데 강제로 끌려온 거야.”
역시 어디가나 컵스 팬은 안 빠지지.
열혈 컵스 팬에게도 브레이브스 유니폼을 입혀온 친구들이 더 대단한 건가?
“나라면 자이언츠에 이를 갈 것 같은데.”
“하하! 어제 일 때문이면 신경 쓸 거 없어. 조나 자이언츠 선수들이 잘못한 게 없으니까.”
“브레이브스가 비열한 짓을 한 거야.”
“미운 정이라고 응원은 계속하겠지만 어젠 분명히 브레이브스 선수들이 잘못했어.”
웃으며 말하는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래도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 자책감 같은 건 갖지 말라는 뜻인가요?”
“아이들을 데리고 야구장에 오는 아빠가 벤클에서 배트를 휘두르는 선수 편을 들 수 있을까? 애가 보고 뭘 배우라고.”
“벤클마저 화끈한 열띤 경기를 보고 싶은 거지 양아치 짓을 보러 비싼 티켓을 끊진 않아.”
“그래도 난 컵스를 응원해. 나중에 가능하면 컵스로 이적해.”
더 물어볼 것도 없다.
마음이 굉장히 편해진다고 할까.
아무리 덤덤한 척을 해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는데 이들의 응원이 굉장히 큰 힘이 된다.
< 4 >
3차전 경기도 치열했다.
난 로마 병정들 앞에 자리 잡고 앉아 사인볼을 만들어주며 경기를 지켜봤는데 내 사인볼 원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토마호크 촙을 열렬하게 흔들며 자이언츠 선수의 사인볼을 받고 고마워하는 모습은 뭔가 아이러니했다.
“오늘까지 지면 스윕 패배를 당하는 브레이브스의 반격이 무섭습니다. 7회 말 다시 2점을 뽑아내며 자이언츠의 턱밑까지 따라 붙었어요. 스코어 7:6이죠? 아직은 이 경기 누가 가져갈지 모르겠습니다.”
“네. 지난 1-2차전 경기 때문에 애틀랜타 팬들마저 브레이브스에 비난을 보내고 있잖습니까. 물론 승패와는 무관한 일로 쏟아지는 비난이지만 오늘도 무기력한 패배를 당하면 비난의 수위가 더 높아질 건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이 와중에 자이언츠 쪽 관중석에선 재미있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미누 조 선수가 덕아웃 밖에 나와 브레이브스 유니폼을 입은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어요. 여기가 선트러스트 파크인지 AT&T파크인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저는 보기 좋은데요. 메이저리그를 사랑하는 야구팬들이 꼭 연고지 팀만을 응원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야구선수도 마찬가지인 게 자신이 속한 팀의 팬만 야구팬은 아니죠. 어제는 벤클에서 주먹까지 휘두른 조 선수지만 여기 애틀랜타 시민들도 자신의 팬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렇죠. 사실 종목을 불문하고 프로 스포츠는 팬의 사랑에 힘입어 존재하니까요. 다만 조금 아이러니하죠? 어제 조 선수의 모습은 분명히 흉포한 코디악 베어였는데 지금은……”
“하하! 벌써 할로윈 코스프레를 하고 나온 아이들과 웃으며 사진을 찍는 지금은 그냥 덩치만 큰 곰냥이죠.”
나야 브레이브스 팬들과 뜻하지 않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양 팀은 서로 독기만 남아 처절하게 싸웠다.
초반엔 선취점을 뽑은 자이언츠가 수월하게 이길 것 같더니 이닝을 거듭할수록 브레이브스가 간격을 좁혔고 끝내 역전, 재역전.
9회 초 11:10으로 재역전을 만들었는데.
9회 말 기어이 동점을 뽑아낸 브레이브스.
경기는 12회에 가서야 상처뿐인 승리자가 가려졌다.
“제기랄! 놀라, 미안해.”
“괜찮아. 언제부터 네가 그런 걸로 미안해했어?”
어이가 좀 없긴 했다.
우중간으로 날아간 큰 타구였다.
고든이 악착같이 따라가 펜스를 향해 뛰어올랐는데 고든의 글러브에 맞고 펜스를 넘어가버린 타구.
이걸 고든의 잘못으로 봐야 할까? 아니다.
최선을 다했고, 최선을 다했어도 질 수 있는 것.
이게 야구다.
우린 그런 야구에 혼을 태우는 중인 거다.
그래도 위닝 시리즈. 브레이브스를 제물 삼아 훨씬 단단해진 모습으로 가을야구를 향해 간다.